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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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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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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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1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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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44

DUMMY

"맙소사. 접포라니?"

"그럼 아까 사공이 말한 나비가..."


다섯내들의 얼굴이 귀신을 마주한 듯 핼쓱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을 맞닥뜨렸다. 나비가 출몰한다더니. 이 녹나무에 하필이면 접포 표식을 달고 앉아 있는 청상과부라니.


"처음 접포를 만나는 자는 무조건 첩실로 데려가야 한다는데."


지남이 이민철, 최석정, 홍만종, 김석하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이미 그들의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난 상중이라 아니되네."

"난 산증이 도져서 아니되네"

"난 어질병이 심해서 아니되이."

"전 귀엽鬼魘(가위눌림)이라 안됩니다."


모두들 손을 내저으며, 각자 해괴한 핑계를 대었다. 헌데 나중으로 갈 수록 점점 가관이었다. 산증에, 어질병에, 귀엽은 또 뭐란 말인지. 특히나 오늘 석하를 처음 본 지남은 더더욱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귀엽?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귀신귀鬼, 가위눌릴엽魘...입니다."

"가위에 눌린다?"

"좀..."

"그런병은 여자랑 자면 씻은 듯이 낫는 병이오. 허니..."

"아니, 나는 오히려...그 반대로..."


석하가 말끝을 흐리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다문다고 지킬 수 있는 비밀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이 자리엔 그를 너무도 잘 아는 또 한사람이 있었다.


"아까 그놈일세."


홍만종이 지남에게 김석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남은 어리둥절하여 두눈을 깜빡였다.


"그놈?"

"어."

"혹시 아까 그 귀신 들렸다는...그...겉으로는 멀쩡하고, 아니 무섭게 똑똑하다는..."

"어."

"진짜 귀엽?"

"어쩐지..."


기가 막힌 얼굴로 김석하를 돌아보는 지남과 달리 그간 석하를 겪을 만큼 겪은 최석정과 이민철은 너무도 쉽게 수긍해버렸다. 그들은 지남의 의문을 풀어줄 만큼 친절하게 설명하는 성품도 아니어서, 그냥 서로 눈짓만 교환하고 끝냈다.


뭐지?


지남이 더욱 답답해진 기분으로 그들을 쳐다보는데, 홍만종이 지남에게 씨익 웃어보이고선 계속해서 폭로했다.


"어려서 포천 돌무덤가에서 먹고 자고 하다 보니 기가 허해져서, 이놈이 밤에 잠도 못하고 고생을 하지. 이놈 가위눌린 걸 깨웠다가 나도 그날밤 가위에 눌려서 다신 안 깨운다네.."

"말도 안돼..."

"그 말도 안되는 걸 진짜로 겪은 난 어떻겠나."

"..."

"그리고 근화가지..."


여태 홍만종의 폭로를 묵묵히 참던 석하가 안색이 변해서 홍만종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그만 좀..."

"스읍..."


홍만종은 옆구리의 충격으로 새우처럼 등허리와 옆구리를 뒤틀면서도 할 말 못할 말을 이어나갔다.


"이놈이 준 근화가지에서 꽃이 피는 규수는..."

"아 좀...!"


석하가 만종의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한발 늦어버렸다.


"이놈의 배필이 된다는 천옥대사의 저주가...읍!"

"그만 좀 그만! 저도 확 말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너무도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얘기였다. 최석정이 두눈을 찌푸리고 김석하를 보고 눈을 부랴렸다. 이민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그런 말도 안되는..."

"허면 나한테 근화가지를 준 게..."

"나도 받았으이."

"딸 있는 집은 하나씩 다 받았지요. 저도 받았습니다."


홍만종이 기어이 석하의 손을 떨쳐내고 마저 입을 놀렸다.


"아니 그럼...이제 보니 우리 이소를 넘보고..."


눈밑을 실룩이며 따지려 들던 최석정의 눈에 녹나무 아래의 청상과부가 들어왔다. 어린 소녀는 잠에서 깨려는지 손가락끝이 꿈틀거렸다. 최석정은 한순간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아아..."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이보게 꺽정이!"


김석하와 이민철이 허겁지겁 최석정에게 달려들었다. 김석하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최석정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럴수록 최석정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나뒹굴었다.


"아! 아아!"

"조금만 참으시지요."

"어디 제가 한번..."


예전에 존경각에서 최석정이 쓰러졌을 때도 홍만종이 의술을 발휘해서 보살펴 주었었다. 하지만 그들은 홍만종이 최석정을 살필 틈도 주지 않았다.


"자넨 손을 다쳤잖은가."

"아..."

"우리 먼저 내려갈테니 천천히 오게나."

"의원 걱정은 마시지요."


그렇게 그들은 서둘러 산자락을 내려가버렸다. 헌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서야 나직한 웃음소리와 뒤섞여 젊은 사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석하가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홍만종이 흠칫하여 산줄기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어리버리하게 말려든 느낌이었다.


"저, 저...누구 놀리나..."

"이 노래는 몇년전에 물고物故하신 동명선생의..."


지남도 아는 시였다. 워낙 짧고 함축적이어서 외우기도 쉬웠다. 헌데 어쩐지 석하가 노래로 자신에게 뭔가를 넌지시 암시해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뒤따라오라고 슬쩍 눈짓을 던진 것도 같았다. 그제야 지남도 살금살금 내빼려 하였다.


하지만 홍만종은 김지남마저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박에 팔을 뻗어 지남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어딜 내빼는가?"

"아니..."

"치사하게 나만 혼자..."


그때 녹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들어있던 청상과부가 스르르 눈을 떴다. 마침 버려진 홍만종이 지남을 붙들고 노려보다가 지남의 팔 아래로 보이는 청상과부의 두눈과 마주쳤다. 그는 어린 청상과부보다도 더 질겁해버렸다.


"어으으!"

"..."


하필이면 두눈을 마주쳤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홍만종은 느려터진 자신의 몸을 원망했다. 조금만 더 동작이 재빨랐더라면.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보았자, 이미 소용이 없었다.


산자락에서 벌목을 하던 최석정 등이 저 어린 청상과부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어쩐지 저 어린 과부를 떠맡기가 싫어서 서로 떠넘기다가 자신에게 덮어씌운 느낌이었다.


하필 자신의 머리 위로 느릅나무를 넘어뜨린 것도, 자신이 붓을 꺼내어 거정세를 펼칠 거라 미리 예측한 김석하의 수작이었다. 최석정이 산증이 도진 척 먼저 산을 내려간 것도. 먼저 어린 과부를 발견하고 자신에게 떠넘긴 것이 분명했다.


"이 배신자들!"


홍만종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떠는 순간,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어린 청상과부의 눈길을 의식했다.


그녀는 몇달 전에 오라비가 자신을 보며 두눈을 께름칙하게 번들거리던 순간을 떠올리는 참이었다. 뭐라고 말했을까. 오라비가 무어라 하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오라비는 그저 동아줄이라도 만난 것처럼 자신에게 매달렸다.


- 살려다오. 이 오라비 좀 살려다오. 이 오라비가 전하께 죽을죄를 지었다. 난 이제 죽었어...네가 날 좀 살려다오.


노상 자신만 보면, 자신이 존재 자체로 눈을 후벼파고 창자를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나 눈동자가 가라앉고, 들끓고...그런 오라비가 모처럼 자신에게 무릎꿇고 간절히 애원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윤이는 두눈을 똑바로 뜨고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라비가 설명하던 외모의 사내는 없었다.


서른셋, 그리고 준수한 귀남자...


그나마 다소 한두살은 많아보이는 사내는 있었다. 외모도 그렇게 흉할 정도는 아니었다. 좀 허여멀건 타락죽처럼 생긴 얼굴이긴 한데...


평소에 그다지 호감은 없었는지 준수하다는 표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오라비는 안면근육이 뒤틀렸다. 이제 보니 다소 과장 섞인 거짓말을 하려니 켕긴 걸까. 아니, 계속 보니 준수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잠결에 살짝 눈을 떴을 때 하필이면 고작 붓대로 나무기둥을 받아내려 들던 그 무모한 사내 얼굴인 것 같았다. 엉뚱하게도, 정말 엉뚱하게도 겨우 붓으로 저리 굵은 나무기둥을 받아낼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걸까. 손목을 부여잡은 얼굴치곤 너무도 평온했다.


"난 아닙니다.""


사태를 파악한 지남이 재빠르게 만종의 등뒤로 숨으면서 발뺌했다. 아예 만종을 소녀의 앞으로 떠밀기까지 했다.


"여기, 여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분이 양반! 난 중인! 그러니까 내 말은...양첩은 높으신 양반이..."

"이거 왜 이래? 중첩질은 돈많은 중인이 해야지. 저런 미인을 마다하면 천벌 받으이."

"어? 미인? 방금 미인이라 하셨지요? 들었지요?"

"..."

"아니 난 그저 사실대로..."

"낙점! 낙점, 낙점, 낙점!"

"아니 이 친구가..."


윤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저 지남과 만종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만종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맞는가?


- 네가 거기서 그놈을 따라가는 게 우리 가문을 살리는 길이다.

- 누군데요? 누구기에...

- 천심天心.

- 천심이라뇨?

- 더는 알려 들지 마라. 천기누설이다.


윤이는 가슴이 후들거려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다보니, 오라비가 말하는 인물이 누군지 도무지 짚이지도 않았다. 하늘의 마음이라...


"이보시오 소저. 소저는 유부남인 내가 좋소, 아니면 홀아비인 이분이 좋소?"


마침내 지남이 묻는 말에 윤이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분이 더 좋다고?"

"아니 보자보자 하니까..."


만종이 버럭 화를 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어린 청상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만종은 맥이 탁 풀렸다. 지남이 쿡 웃음을 머금고, 만종에게 혀를 낼름거리면서 바로 자신의 봇짐을 고쳐쥐었다.


"허면 저도 이만...홀아비 신세 면하신 거 감축드리옵니다."


그동안 최석정, 이민철과 어울리며 시달린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 지남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부산 산자락을 내려가버렸다. 아까 김석하가 부른 동명선생의 시를 똑같이 흥얼거리면서, 만종과 어린 청상과부만 단둘이 남겨두고.


"..."

"..."


안 그래도 어색한데 한순간에 더 어색해진 기분으로 홍만종은 어린 청상과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선..."


선택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이건 너무 삐딱한 반어법이었다. 솔직한 속내로는 지금 당장 이 여인을 버려두고 도망치고 싶었다. 홍만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 어색한 침묵에서 도망치기 위해 궁색한 인사라도 꺼내야만 했다.


"나는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고 어쩌다..."


여길 왜 왔을까. 이렇게 친인들이 자신을 등쳐먹을 줄을 모르고. 후회막심이지만 한번 꺼낸 말을 도로 넣을 수도 없고, 그는 할 말을 잊고 구리관자만 긁적였다.


"그 어린 나이에 어쩌다..."

"..."

"아니 난..."


당혹과 의혹, 연민이 교차하는 홍만종의 눈빛에 윤이는 그저 처량한 눈빛으로 마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이복오라비의 신신당부를 떠올렸다.


- 넌 무조건, 무조건 납폐 직후 정혼자가 어이 없게 죽어버린 청상과부다. 그래야 의심을 안 살 게다. 명심해라. 너의 손에 가문의 명운이 달렸다. 그자를 기필코 아버지의 사위로 만들어야 내가 살고 아버지가 살고, 네가 산다. 알았느냐?



김지남이 홀로 산자락을 내려가려는데, 노란 은행잎과 빨간 가랑잎이 발밑에 미끌거렸다. 도토리도 밟혔다. 그나마 비탈이 두렵다 보니 나뭇가지를 잡고 걷는 덕분에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진 않았다. 조심조심 걷다보니 짚과 잔가지로 엮은 여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여막으로 들어서자, 이민철, 최석정, 김석하가 모여서 수차를 만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민철은 손에서 도리께를 놓고 발바닥과 종아리를 주무르는 참이었다.


"어이, 결국 자네가 살아남은 거야?"


다 죽어간다던 최석정이 등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팔팔하게 김지남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지남은 괘씸해서 이가 갈렸다.


"또, 또...매번 이런 식이지. 내 이럴 줄 알았어..."


지남의 도끼눈에 최석정은 머쓱하게 웃었다.


"좀 봐 주게나. 문외출송죄인이 첩질까지 할 수는 없잖나."

"형조판서의 고제자씩이나 되시는 양반이..."


지남이 거듭 치를 떨자, 이민철과 김석하가 힐끔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방금 지남이 언급한 신임 형조판서의 고제자란 말이 남다르게 들린 탓이었다.


"뭐? 형조판서의...고제자?"

"지금 형판대감은 백곡 이정영 나으린데...허면 신임...?"

"누가? 스승님이?"


모두 어리둥절하여 최석정을 돌아볼 뿐이었다.


"뭡니까 다들? 바뀐 지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다들 깜깜하시네요?"


지남은 품에서 조보를 꺼내어 최석정 앞에 툭 던져놓았다. 마침 대나무를 갈래갈래 나누던 최석정과 이민철이 조보를 펼쳐들었다.


- 康熙十七年十月二十四日(辛卯) 辛卯/

以睦天成爲獻納, 金聲久爲正言, 特除南九萬爲刑曹判書。

목천성을 헌납으로, 김성구를 정언으로, 남구만을 형조판서로 삼았다.


"남구만을 형조판서로..."


이민철이 멍하니 중얼거리며 최석정을 쳐다보았다. 형조판서 남구만이라니...얼떨떨하기는 최석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승이 형조판서가 되다니...


"벌써 사은례도 마치고 정식으로 취임을 하셨을텐데요"


지남이 쐐기를 박았다. 이 자리의 이민철도, 김석하도 서인에 가까운 탓에, 그들은 기쁜 낯으로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오오, 형조판서...형판대감의 제자이셔?"

"비빌 언덕이 생겼는데 이 참에 소나무도 한그루 베어올까요?"

"거 좋은 생각이다. 이왕이면 열그루 베어와봐라."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작당하는 모습에 최석정은 이를 갈았다.


"그걸 말이라고. 수거에 쓰지도 않을 소나무는 뭐하러."

"쓸 데야 많지요."

"소나무 벌목은 한그루면 장 1백대, 열그루면 전가사변全家徙邊(전가족이 변방으로 유배되는 형벌)에 해당하는 중죄라네."


최석정이 석하에게 핀잔을 주고는 눈밑에 경련을 일으켰다.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설레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 양반...바로 사고를 치실텐데..."

"뭐? 사고라니?"

"그분 성격에 가만 있지 않을 거라 이 말입니다."

"그게 무슨..."

"저 어릴 적에도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펄펄 뛰던 분입니다. 허적, 윤휴...이자들과 사생결단을 내시고도 남지요."

"설마 그렇게 무모할 리가...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엄연히 남인세상이었다. 하지만 최석정은 스승이 손에 칼자루만 쥐어지면 칼집에 넣기 전에 먼저 휘둘러보는 성품이란 것을 잘 알았다. 물불 안가리는 스승 성격에다, 게다가 남용익, 이정영, 남구만으로 굳이 사슬을 엮어놓는 어심을 짐작했다면, 스승에겐 해볼 만한 싸움이 될 터였다.


"참, 오늘이 애동지인데 설마 빈손으로 오진 않았을테고.."


이민철이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지남의 봇짐을 내려다보았다. 지남은 이민철을 노려보며 봇짐에서 역서들을 꺼내보였다.


"자그마치 30건에 두냥어치..."

"서, 설마...우리한테도 장사를 하려고?"

"싫음 하나씩만 가지시든가...관상감제라 귀한 겁니다."

"..."

"에이 치사하고 드러워서. 전직 관상감원한테 뭐하자는 건지."

"투덜거려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나마 싸게 드리는 것이니."


지남이 이민철과 최석정에게 똥배짱을 부렸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달력을 만드는 일에 관여했을 그들이라 더욱 배알이 뒤틀렸다. 구겨지고 해진 갓을 쓰는 놈한테 무려 두냥씩이나 선심을 바라는 것이 애초에 말이 되질 않았다. 당상관의 한달 녹봉 값이니 더더욱.


그들은 지남이 펼쳐놓은 달력을 쓴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강희 십팔년, 기미년의 달력. 또 한 해가 온다. 물론 달력에 적힌 온갖 명절들은 그들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딱 서른건만 주게나. 세건은 덤으로..."

"그러지요."

"치사한놈."

"헌데 수차는 왜 만드십니까?"

"할 일이 없어서."

"좀 진지해져 보십시오!"

"우리야 항상 진지하지. 정말로 한가해져서 만드는 것일세. 이왕 백강에 온 김에 홍수도 막고 가뭄도 해결할 수거를 만들어야지."


이민철은 계속해서 죽편을 엮어 물수레의 바퀴를 만들어갔다. 지남은 물끄러미 수레바퀴를 내려다보며 달력도 내려다보았다.


"애동지에 윷놀이도 못하시고."

"그 대신 수륜을 만들잖나."


이민철이 침울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수차, 수차 하던데...이왕이면 수거로 불러주게. 손을 써야 되는 놈이거든."

"아예...어? 손으로요?"


지남이 놀란 얼굴을 하자 이민철이 품에서 주섬주섬 성종실록 필사본과 설계도를 꺼내어 지남 앞에 툭 밀어놓았다.


"보게나. 여기 운이양수運以兩手 보이지? 손수手."

"어 진짜..."


지남은 성종실록 필사본을 집어들고 훑어보았다. 명明 홍치弘治 1년의 연호를 쓰는 성종조의 기사였다.


戊申 弘治一年八月四日第四

무신년 홍치1년 8월 4일 네번째 기별


前司直崔溥造水車以進。

전 사직 최부가 나와서 수거를 만들었다.

其制用以治田,

밭을 다스릴 때에 쓸 때는

上水則一人當輪頭,

물을 올리려면 한사람이 수레머리를 맡아서

運以兩手,

두손으로 운전하고,

用以置船;

배에 설치해서 쓸 때는

刮水則一人坐輪傍,

한사람이 바퀴 옆에 앉아서

運以一手,

한손으로 운전하고,

用以運水, 使在山襄陵,

물이 산언덕을 올라가게 운반하려면

則作車若干.

수레를 작게 만들어야 한다.


기별만 봐서는 그 생김새를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옆에 이민철이 내놓은 도면을 보니 대충 이해가 되었다.


그 도면이 얼핏 중국 위나라의 마균이란 자가 고안했다는 용골거龍骨車와 흡사했다. 그 용골거도 발로 밟는 구조인데, 도면의 수거는 손으로 돌리는 구조였다. 지남이 신기한 눈빛으로 도면을 검토하는데 최석정이 곁에서 또 궁시렁거렸다.


"답거는 많이 봤어도 수거는 좀...손보다는 발을 쓰는 게..."

"이 친구 다 끝난 얘긴데..."


이민철이 눈을 흘기는데도 최석정은 계속해서 소신을 폈다.


"백성들이 싫어하는 데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반대한 돈도 이젠 잘만 돈다, 돌아! 자네가 틀렸으이!"

"거참...두고 보시라니까요. 나중엔 저 돈이 백성들한테 독이 될 거라니까요."

"독 없는 약도 있나? 인삼도 학질엔 안 좋다며."

"그리 사치스런 약재를 꼭 갖다붙여야겠습니까?"

"어쨌든 이 수거는 손으로 돌리고 굴려야 한다니깐!"

"예에예에."

"아참, 지남이. 다음에 올 때는 육촉 2백자루 좀 가져다주게. 매달 오십자루는 넘게 쓴다네."

"일을 밤에 하시니까 그러죠."


그렇게 투닥투닥 실랑이를 하며 그들은 발로 밟는 답거가 아니라 손으로 돌리는 수거를 만들어갔다.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나고, 자고...다람쥐 쳇바퀴처럼 지루하게 돌고 도는 일상 속에 수레바퀴의 형체를 갖출 때까지.



"이쪽이 좌구산, 이쪽이 구석산..."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질마재를 지나 구석산龜石山 초입에 들어서자, 길잡이가 마름 황씨와 허견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허견은 목화솜을 세누비로 곱게 누빈 두루마기와 담비털이 복슬복슬한 방한용 쓰개, 휘항揮項으로 온몸을 친친 감고, 징신에 설피까지 대어 산자락을 오르내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겨우 도롱이를 뒤집어쓰고 뒤따르는 노비들보다도 더 산행을 못견뎌 했다.


"어흐으! 추워추워...뭐 이런 데서 살아? 도 닦아?"

"글을 닦나 봅니다."

"지랄!"


허견은 숨이 턱에 차서 욕지기를 내뱉고는 휘항을 더욱 푹 눌러서 삭풍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한시진 가까이 걷고 보니 취묵당醉墨堂이라 현판이 내걸린 독서당이 눈에 들어왔다.


"다 왔습니다."

"누가 모른대?"


질마재에서 이리로 올 때는, 언제 취묵당에 도착하나, 그게 걱정이었다.하지만 막상 당도하고 보니 이젠 또 언제 내려가느냐가 문제였다.


하지만 취묵당에 당도하자마자, 허견은 또 새로운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냥 두칸짜리 정자라니. 문창지도 없이 사방팔방이 휑하였다. 겨우 나무난간만 두른 이 독서당에서, 겨우내 먹고 자고 읽고 다 하는 건 아니겠지, 이 추운 초겨울에 미쳤다고.


당장 옆에서는 마름 황씨가 그 사마귀가 귓볼을 스칠 듯 말 듯 가까이 입을 대고 소근거렸다.


"꼭 구석산인龜石山人이라 불러드려야 합니다. 백곡이란 별호는 흔하다고 싫어하시니..."

"알았대도! 같은 말 왜 자꾸 시켜!"


당장 여기서 하루 묵게라도 되면 자다가 입 돌아갈 지경인데, 지금 김득신이란 다 죽어가는 노인네 별호에 목숨 걸겠나 싶었다. 짜증스레 취묵당에 눈길을 던진 허견은 아비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허연 구석산인 김득신이 대나무가지를 칼로 가닥기닥 가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의아한 얼굴로 바짝 다가서자, 구석산인이 대나무가지를 웬만한 서책 길이로 잘라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서산書算(책갈피) 같은 것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서산은 책을 읽는 부분을 표시하는 용도도 있지만, 몇번이나 읽었냐도 표시하는 용도도 있었다.


"서산 만드시게요? 도와드릴까요?"

"자넨...?"

"허상국相國(재상의 별칭)의 서장남 허견이라 합니다. 아버지의 서찰을 가져왔습니다."

"허상국? 어느..."


구석산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둔하다더니, 고개짓도 유난히 느릿했다. 허견에게 착석을 권하는 손짓도 느려터졌다.


"아...묵...묵...묵..."

"묵재란 별호를 쓰십니다."


기다리다 답답하여 허견이 짐짓 공손하게 밝혔다. 구석산인은 어눌하게 발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지...묵재공..."

"..."

"앉게나."

"예."


허견은 신을 벗고 마루로 들어서다 발바닥을 파고드는 냉기에 인상을 썼다. 온몸의 신경이 쭈볏 곤두설 정도로 시렸다. 이런 마루에 엎드릴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는 엎드리다 말고 손발을 움츠렸다. 벌써 손끝이며 발끝이 시리다 못해서 아렸다. 금세 죽을상이 되어 구석상인의 안색을 살피니 마냥 평온했다.


사람 맞아? 아니면 늙어 죽을 때가 되어 감각이 둔해지나?


휘항을 슬그머니 발밑에 깔았다간, 이내 복슬복슬한 담비털에 발가락을 넣어서 꼬물거려 보았더니 그제야 조금 살 만 했다. 앞에 앉은 구석산인에겐 보이지 않았어도, 뒤에 시립한 마름황씨와 노비들의 눈엔 적나라히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러자 황씨는 잽싸게 휘항을 더 매만져서 휘항 속 담비털에 작은주인의 발가락부터 발뒤꿈치까지 푹 파묻히게 감싸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무릎이 시큰거렸다. 허견은 둔해진 손가락으로 품속에서 편지봉투 두개를 꺼내었다. 둘 중 겉봉에 구석산인이라 적힌 봉투를 두손에 받쳐들고, 허견은 예를 다하여 구석산인에게 바쳤다.


"여기..."

"어디..."


구석산인은 미적미적 서찰을 받아들고, 촛농으로 봉한 봉투를 뜯고 서한을 꺼내어 펼쳤다. 눈이 침침한지 두눈을 비비고선 그는 계속해서 서찰을 읽어내리다가 큭큭 실없이 웃었다.


"나더러 조정에 출사하라니..."

"..."

"자네 이름이..."


이미 좀전에 이름을 밝혔지만 상대가 귀담아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견은 애써 정중하게 답하였다.


"양천허씨에 굳셀견堅자를 씁니다."

"아...허견...합하께서 다른 말씀 없으시던가?"

"뭘 말입니까?"

"그간에 나한테 벼슬만 내렸다 하면 다들 들고 일어났다는 그런 내력 말일세."


구석산인이 씁쓰레히 웃었다. 가만 있어도 얼굴에 자글자글하던 주름이 웃으니 더욱 징글징글했다. 주름이 아니라 계곡이라고 허견은 말없이 속으로 비웃었다.


"관을 짤 노인네가 관을 쓴다니, 지나던 개도 웃을 일이지.."


구석산인은 실없이 웃었다. 하지만 말 속엔 뼈가 있어서, 그 말을 허견은 그대로 받아넘길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이 하필 개견犬자와 동음인 굳셀견堅자이니, 이를 빗대어 비꼰 느낌이었다.


"물론 미수공은 더 연로하신 나이에도..."

"난 내 자신을 잘 안다네...뭘 담아놓질 못하는 머리라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이..."

"그래도 만주 홍석기, 동명 정두경, 백곡 김득신, 휴와 임유후..이 네 이름은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히시는데..."

"어어...다섯인데..."


구석산인은 방금 허견이 언급한 이름 중 뭔가 빠진 느낌에 고개를 느릿하게 갸웃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뭔가 흐릿하게 꽉 찬 느낌이라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는 다섯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중얼거렸다.


"나, 정공, 홍공...임공...경공...거기서 둘이 죽고 셋이 남고..."

"경공요? 성이 경씨란 말입니까? 그런 명인이 있다는 얘긴 금시초문인데..."

"아...그냥 죽은 정공이 부르던 별칭일세. 경정산敬亭山...봐도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뜻인데...그 친구 이름이..."


구석산인은 깜깜한 머릿속을 더듬었다. 하지만 둔하고 흐리멍덩한 머리로 기억을 해낼 리가 없었다. 이러다 날 새겠다고 허견이 속으로 욕하는 순간, 구석산인은 목뒷덜미를 긁적였다.


"내가 무슨 얘길 하다 말했지?"

"경정산요."

"아...맞다."

"..."

"우리 앞물결들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뒷물결일세. 자네랑 나이가 얼추 비슷할텐데..."

"아...그 현묵자로 알려진..."


허견이 두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구석산인은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그래, 그래 그 친구...그 친구 본 적 없나? 서호에 살다가 지금은 성균관에 들어가 있는데..."

"누군질 알아야지요."

"내 그 친구 만나면 자네 얘길 물어보겠네. 자네 이름이..."


도대체 알고 이러는 건지, 모르고 이러는 건지. 허견은 속이 답답해서 터질 지경이었지만 조선팔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현인들을 초빙해야 한다는 아비의 당부를 떠올리고 할 수 없이 한숨을 삼키며 답하였다.


"허견입니다."

"아..."

"이만 일어나도 되는지...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꼭 좀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삼고초려는 해야지요."

"음...서찰 한장 써줄테니 아랫마을에서 묵어가게."

"..."


허견은 구석산인이 과연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이나 할 지 의심스러웠다. 앉은 자리에서 이름을 묻고 또 묻는 모습이 사람을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 쉬어꼬부라진 도라지 같은 노인네가 사기 백이전伯夷傳을 읽고 또 읽는 모습도, 그의 눈엔 정상이 아니었다.


사흘이 흘러서야, 허견은 거친 걸음으로 콧김을 뿜어내며 구석산을 내려왔다. 그는 휘항을 깊이 눌러쓴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어으 저 노인네 이거래도!"

"좀 참으시지..."


황씨의 만류에 허견은 성질에 못이겨 자신의 금관자를 쥐어뜯었다.


"더 이상 어떻게 참아! 봤잖아? 하루만 더 같이 있다간 내 머리가 돌이 되든, 돌아버리든 나 어떻게 된다니까!"

"그래도 나으리가 주인마님의 분부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증거인데...삼아 서찰이라도 받아오시는 게..."

"아 다음 늙은이한테 받아오면 될 거 아니야! 어디야 거기."

"..."

"어디냐니깐!"

"검단산입니다. 요 아래에 있는."

"..."


황씨의 말에 허견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여기 구석산에서 저기 검단산까지 또 내려가야 하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진눈깨비가 누구 약올리듯 흩날리며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간지럽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하여, 허견은 날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지도!"


허견이 신경질적으로 손짓하자 황씨가 얼른 품에서 지도책을 꺼내어 공손히 바쳤다. 허견은 충주 괴산군의 구석산에서 그 아랫지방에 있는 청주 검단산으로 손가락끝을 이동했다. 이어서 그는 더 아래인 부여군 자운대란 지명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이 씨...사흘은 더 걸리게 생겼네."


허견은 지도책을 확 덮고서 황씨에게 건네고서 걸음을 서둘렀다. 이미 구석산인인지 구석탱이인지 하는 노인네는 쓸모가 없었다. 벼슬을 문장력 하나로만 시킨다면, 출신이니 신분이니 외모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나마 다음에 만나는 검단산 늙은이는 좀 더 멀쩡하길 바랄 뿐이었다.



"누구?"


청주 검단산 후운정의 늙은이는 느긋하게 책을 읽다 말고 대뜸 인상부터 쓰고 눈가와 입가를 실룩였다. 삼베로 만든 각건角巾에 도복까지 입고 은자입네 하는 모습이 허견의 비위엔 영 맞지 않은 터에, 전혀 달갑지 않게 대하는 모습에 허견은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늙은이가 탁 덮는 책도 하필이면 사기 백이전伯夷傳이었다.


"제 부친의 함자가 쌓을적積자십니다."

"그래...적을 쌓는 허적이구나."


가시돋친 말에 허견은 흠칫 놀라 두눈을 홉뜨고 검단산 늙은이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원망스런 아비라 해도 남의 입에 더럽혀지는 건 싫었다. 자신이 개차반으로 굴면서도, 아비가 욕먹는 건 또 싫었다. 아비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어야 했다. 아비가 아무에게나 사람을 보내지 않고 세상이 외아들로 아는 자신을 시켰으면, 그만큼 대접받는구나 하고 감지덕지 할 일이지, 오히려 조롱이나 하다니?


"..."

"그래, 여기 온 용건이나 말해라."

"아버님이...어르신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조정에 자리 하나 마련해 두시겠다고."

"뭐?"

"여기, 서찰입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서찰을 꺼내는 허견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이 만주 홍석기란 검단산 늙은이의 태도로 봐서, 서찰에 대한 반응은 충분히 짐작이 간 터였다. 검단산 늙은이는 짜증스레 서찰을 낚아채곤 거칠게 겉봉을 뜯어버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읽어내려가다 우악스레 서한을 구겨버렸다.


"이런...미친 놈을 봤나..."

"..."

"성현을 누명을 씌워 끌어내고 조정을 더럽힌 놈이, 뭐? 나더러 조정에 나오라고? 허참! 양심이 썩어 문드러진 게지."

"말씀이...심하십니다?"

"심하긴 뭐가 심해? 모든 건 지놈 업보인 것을."


한눈에도 아비보다 두어살은 더 많아보였지만, 그렇다고 막말을 내뱉을 권리는 없었다. 허견은 발끈하여 두손을 불끈 쥐고 검단산 늙은이를 노려보았다.


"어르신께선 제 부친과 막역하시다 들었사온데..."

"막역? 이젠 그저 막연할 뿐이지."

"어찌 사람의 의리가 그리 가볍습니까?"

"나는 화양선생(송시열을 지칭하는 말)과 형동생 하는 사일세. 나의 의리는 묵재보다야 화양에 더 가까운가 보이.."

"..."


검단산 늙은이의 냉랭한 음성에 허견은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성질 같아선 두드려패고 싶었다. 세상이 그 시명을 좀 알아준다 하여 눈에 뵈는 게 없는 건지, 그저 기가 막혔다. 이 남인천하를 이끄는 영의정을 감히 모욕하다니.


"썩 꺼지거라!"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허견은 한마디한마디 뼈를 발라 살을 씹듯 말하였다. 하지만 이미 각오나 한 듯 검단산 늙은이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어차피 은혜를 원수로 갚는 모리배가 아니더냐."

"어르신!"

"꺼지기나 해라."


답신도 못받고 쫓겨나오면서, 허견은 후운정後雲亭이라 써진 편액을 돌아보고 이를 빠드득 갈았다.


"확 불태워버릴라!"

"나으리 그것만은..."


황씨가 만류했지만 허견은 도저히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그는 뒤따르는 노비 한명의 손에서 조족등을 뺏으려고 들며 길길이 날뛰었다가 자신의 팔다리를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노비들 덕분에 기운이 금세 빠졌다.


"이 씨..."


그는 홧김에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황씨의 오른다리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으로 울화를 풀었다.


"끄흐으어!"


황씨가 돼지 멱따는 비명에 이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앙감질로 뛰어다녔지만 개의치도 않았다. 그나마 대신들에게 박치기를 하는 당저(현 임금)보다는 성격이 좋은 것 같았다.


"다음!"

"어흐으..."

"다음!"

"없...구먼요."

"또 있잖아!"

"현묵자는 누군지도 모르는지라..."

"그 얘기가 아니잖아. 왜 말귀를 못알아들어?"

"아...윤이아가씨."


황씨의 안색이 흐릿해졌다. 얼녀이긴 해도, 이미 주인어른이 속량을 시킨데다, 무려 영의정의 여식이니 좋은 혼처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을. 애꿎게 신세만 망치게 되었다 싶었다.


"그래. 허면 이제 어디로 가지?"

"부여 자온대...구먼요."

"그래...이제 매부의 얼굴을 보러갈 차례지? 꺽정이 그놈 얼굴 볼 만하겠구만."

"..."


황씨는 모처럼 작은주인의 얼굴이 밝아졌나 싶어서, 겨우 마음이 놓였다. 아가씨가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니...이번 만큼은 차질을 빚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침일찍 만종과 함께 엿바위골 인근 호수에 당도한 윤이는 눈앞에 엄청난 위용을 드러낸 수거를 보고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너무도 경이로웠다. 위아래로 바퀴 달린 두어장 길이의 사다리 같은 물체를 호숫가와 둔덕에 걸쳐놓은 것이, 저게 수차인지 수거인지 하는 건가 싶었다.


둔덕에서 김석하와 김지남이 양쪽 손잡이를 돌리면, 톱니처럼 생긴 물바퀴가 돌아가며 물을 자아올리고, 그 물길이 계단 같은 복판腹板(배판)을 타고 올라가는 구조였다. 그렇게 올라간 물길이 또 도랑을 타고 논밭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물보라가 튀는 물바퀴 주변으로 영롱한 무지개가 어려 아름다웠다.


"..."


윤이가 하염없이 무지개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기척이 일었다. 귀청이 울릴 정도로 관군들이 지축을 밟는 소리, 요란한 함성까지.


"나으리들이 소나무 벌목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부여현감이 스무명의 관군을 이끌고 나타나서 하는 소리에 최석정과 이민철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이 떡 벌어졌다.


"소나무? 웬 소나무?"

"저 부산浮山에 밑동만 남은 소나무를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부여현감이 성황당 쪽을 가리키며 내뱉은 말에 이민철과 최석정 등은 뒷통수가 멍해졌다.


"국법으로 금한 소나무를 누군가가 몰래 벌채했다?"

"예, 그 수차가 증거겠지요."


부여현감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턱짓으로 등뒤를 가리켰다. 언덕 위에서 석하와 지남이 수레의 손잡이를 잡아돌리면 물을 자아올리는 수거가 소나무 벌목의 증거라니.


최석정도, 이민철도, 홍만종도 모두 기가 차서 부여현감을 노려보았다. 특히 이민철과 최석정은 반년전만 해도 엄연히 부여현감보다 품계도 관직도 높은 상관인 셈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자신들에게 이토록 어설프고 허술하게 소나무 벌목의 죄명을 씌우려고 나선 건지.


작가의말

실제로 홍만종은 당대에 손꼽히는 명사들과 나이차를 뛰어넘어 친구처럼 지낸 인물이고, 또 수백편의 시와 소설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하여 문학사적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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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1.16 11:40
    No. 1

    즐겁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16 12:19
    No. 2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1.19 21:07
    No. 3

    윤이 아씨는 누구일까 궁금합니다.
    체건은 불쑥 커버려서 별로 궁금하지 않고,
    우리 우희는 사고뭉치라서...

    실록을 보고 그 상황을 유추해서 우리말로 다시 구성하기가 굉장히 힘든 것 같습니다.
    한자 표현 방식의 한계가 아닐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21 07:34
    No. 4

    며칠 안 보이시더니...

    우리 우희가 사고뭉치였던가요? ㅎㅎ 아직 사고칠 게 더 남아있어서. 실록에 자세한 정황이 누락된 것도 많고, 한자표기가 어렵기도 하고...그래도 그만큼 인물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1.21 15:04
    No. 5

    예 ㅋㅋ 저도 못 참고 찾아봤죠. 덕분에 앞으로 요 몇 편은 반전 대신 극적 아이러니와 함께 감상할 수 있겠군요. 황씨의 속 생각이 의미심장하네요. 저라면 허적이 고려하던 고관 대작보다 홍만종을 백배 훌륭한 혼처로 치겠습니다.
    오늘 나온 신캐들은 근데 마음에 안 들어요. 백이 편이라......이건 뭐 자위도 아니고. 차라리 현실 정치로 백성들 삶을 걱정해 줄 수 있는 자리로 나간 허적이 저들 보다 나아 보이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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