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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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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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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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0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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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해의 그림자 149

DUMMY

"이거...눈금이 많이 닳았습니다."


방갓으로 얼굴을 가린 최석정은 수표석을 자세히 관찰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

"하긴 뭐...2백년 된 다리니..."


맨위쪽 눈금은 멀쩡한데, 아랫쪽 눈금이 희미했다. 세종조에 처음 측우기 형태로 만들 때만 해도 물속에 부석趺石(낮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홈을 깊게 파서 눈금 매긴 방목주方木柱(네모꼴의 목재기둥)를 꽂아서 쓰다가 성종조에 석주石柱로 바꿔 꽂아서 썼다. 그 이후로 벌써 2백년 남짓 흘렀다. 물살과 바람살에 깎여 눈금이 점점 지워지는 참이었다.


"닳긴 뭐가, 앞으로 2백년이 더 흘러도 거뜬할 걸세."


이민철은 물가에서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드는 허견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서 최석정이 쓴 방갓을 툭툭 두드려 얼굴이 푹 파묻히도록 하였다.


"어..."

"허견일세. 빨리 가세"


방갓이 너무 깊숙하게 눈앞을 가리자 최석정이 말없이 방갓을 추켜세우려는데, 이민철이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뒤돌아서며 속삭였다. 최석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느낌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이면 몰래 도성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허견한테 들키다니. 그는 굳은 손가락을 방갓에서 떼고, 도포자락을 툭툭 문지르며 걸음을 보챘다.


"거기..."


허견이 따라붙어 최석정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최석정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린 채로 살짝 몸을 틀어 옆으로 피하였다. 하필이면 허견이 퇴로를 막았기에 최석정은 수표교 아래로 몸을 피신했다. 초봄의 물속은 몸서리처지게 추웠다. 흑혜를 신은 탓에 물속에 잠기는 것이 신경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기 서!"


허견이 소리치며 뒤쫓아 오자, 이민철이 얼른 팔을 뻗어 허견의 팔을 잡아당겼다.


"왜 이러나?"

"방금..."

"왜 이러냐니까?"

"아 비키라고!"


상대가 당상관인 것도 당장 허견의 머릿속엔 없었다. 상중이라 직책은 없지만 엄연히 품계가 정3품인 이민철을 허견은 거칠게 밀어젖혔다.


"아니 이 친구가!"


이민철은 그대로 비틀비틀하며 허견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아 놓으라니까!"


허견은 거칠게 이민철을 밀어젖혔다. 하필이면 물쪽으로 떠민 탓에, 이민철은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면서 물속에 첨벙 빠졌다.


"아으 츠...!"


허견을 뒤따르던 마름 황씨가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이민철이 물속에 팔을 짚은 채로 소리를 질러댔다.


"어이구야! 저놈이 감히 당상관인 나를...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인 나를...어이구야!"


이민철은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고래고래 괴성을 질러대는 이민철의 볼 썽 사나운 몰골에 황씨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아들이 사고를 치지 못하게끔 옆에서 잘 보필하라던 상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필이면 당상관이라니...작은 주인이 대비전 서모를 폭행한 죄로 심리審理를 받는 중인데, 이번엔 또 당상관을 폭행했다는 죄목까지 더해지게 생겼다. 눈앞이 캄캄해서 그는 이민철을 황망히 부축했다.


"괜, 괜찮으시옵니까?"

"흥! 내 이 일은 상감께 꼭 주달奏達(왕에게 아뢰는 일)하겠네."

"그건 좀..."

"어우...피! 피! 피!"


이민철은 손바닥이 하필이면 조약돌에 긁혀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 놀리선, 손목을 부여잡은 채로 덜덜 떠는 시늉으로 마름 황씨를 움찔 놀랬다. 그렇게 한참을 소동을 일으키다가는 힐끗 눈길을 수표교 아래로 던져서, 최석정의 모습이 수표교 받침돌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최석정은 수표교 받침돌 사이로 요리조리 미꾸리처럼 빠져나갔다. 큼직한 네모꼴 받침돌을 물결을 따라 어슷하게 쌓아올려 균형을 절묘하게 잡아서 짜맞춘 탓에, 받침돌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도 괜히 조심스러웠다. 불규칙하게 재단된 상판돌 틈새로 햇빛이 비치어, 받침돌들이 무지개빛깔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엉성한 듯, 허술한 듯, 그렇게 2백년이 넘게 지탱해온 다리의 속살을 지나는 느낌은 신경이 쭈볏 곤두설 밀큼 아찔했다.


"거기 서!"


그 순간 그는 받침돌 옆에 바짝 달라붙어 자신에게 손짓하는 지남을 발견했다. 자네...최석정이 입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한 채로 지남을 쳐다보자, 지남은 얼른 자신의 갓끈을 풀어헤치더니 최석정의 머리로 손을 뻗어 방갓을 낚아챘다. 최석정이 깜짝 놀라는 사이, 지남은 자신의 갓을 최석정의 머리로 씌웠다.


"나 아니면 어쩔 뻔 하셨수?"


지남은 얼른 방갓을 눌러쓰고, 최석정의 베옷으로도 손을 뻗으려다, 자신과 옷 색깔이 똑같은 것을 보곤 도로 손을 거두었다. 그는 힐끗 최석정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얼른 몸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고마우이.


최석정은 입모양으로 얘기하곤 더욱 받침돌에 달라붙어 허견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겼다. 집요하게 뒤따라잡은 허견이 김지남의 어깨를 붙잡은 순간이었다.


"잡았다."

"..."


어깨에 닿은 손을 느끼고 지남은 등뒤의 허견을 곁눈으로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일부러 겹바지 허리춤을 추슬리는 시늉을 하며 슬쩍 돌아보았다. 방갓을 워낙 깊이 눌러써서 허견에겐 턱수염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앳띤 음성이 들렸다.


"아 왜 자꾸 옷이 내려가..."


허견은 두눈을 깜빡였다. 뭔가 이상했다. 여태 뒤쫓아왔는데, 목소리가 달랐다. 게다가 자신을 피해 도망갔다기 보다는 영락 없이 물속에 소피를 보고서 황급히 추슬리는 본새였다. 개국조부터 개천에는 오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한성부, 사헌부, 6부에 감독을 맡겨서 정결하게 관리해온 터에, 몰래 오줌을 눈 건가 싶을 만큼 흐트러진 차림새였다.


"너?"


허견은 손을 뻗어 방갓의 테를 툭 쳐들었다. 방갓 속의 미사리가 상투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갑자기 눈앞의 상대가 엄살을 부렸다.


"아, 아아..."

"너는..."


허견은 눈앞에 얼굴을 드러낸 앳띤 얼굴을 보고 온몸에서 맥이 탁 풀렸다. 방갓이 들리는 순간 턱수염이 보이지 않아서 가슴 언저리가 싸하더니, 수염도 없는 애송이였다. 지난번 경기감영에서 자신에게 살기 어린 화살을 쏘아댔던 그 애송이들보다는 한두살 더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달래내고개에서 이민철을 따라간.


"에이 씹...!"


허견은 성질이 나서 당장 방갓을 그대로 패대기쳤다. 면면히 흐르는 수표교 아래의 물결을 따라 방갓도 함께 떠내려갔다. 지남은 당황스럽고도 황당한 표정으로 떠내려가는 방갓을 내려다보고선 다시 허견을 쳐다보며 따졌다.


"당신..."

"역상놈이 다리 밑은 왜 얼쩡대?"

"아 왜 이러는 겁니까? 왜요? 몰래 소피라도 봤나 해서요?"

"..."

"그럼 맡아보시든지."

"..."


지남은 아예 팔을 뻗어서 허견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을 기세였다. 허견은 낯빛이 희뜩하게 질려서 뒤로 상체를 젖혔다. 최석정과 어울리는 놈들은 하나같이 고약했다. 하필이면 김지남을 최석정으로 착각하고 쫓아온 사실이 허탈했다.


"지남이! 이만 가세나!"


등뒤에서 이민철이 지남에게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허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전에 이민철을 내동댕이쳤던 일이 뇌리를 들쑤셨다. 이미 처형을 복날 개 패대듯이 두들겨 팬 일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마당에, 이민철까지 자신에게 폭행 당했다고 나서면 어떡하나 싶었다.


"헌데 나으리야말로 우리 동네는 웬 일이십니까?"


지남은 이민철에게 서너발짝 걷다 말고 힐끔 허견을 돌아보며 물었다. 가만히 다리나 건널 일이지, 괜히 내려와서 바지자락부터 가슴팍까지 젖은 꼬락서니가 한심했다.


"우리 동네?"

"네. 여기 원래 역관들이 모여 사는 동넨데요."

"..."

"자네들만 모여 사나? 우리 일관에, 의관까지 다 모여 사는 동네거늘."


이민철도 한마디 끼여들어 하는 말이었다. 물론 허견 역시 한때는 여기 장통방에 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며 애오라지 자신들의 동네인 양 우리 동네 운운하는 꼬라지에 속이 뒤틀렸다.


"누군 이 동네 안 살았나..."

"지금은 안 살잖습니까? 여긴 웬 일입니까? 어디 빚이라도 받으러 오셨나?"

"험험, 그냥 일이 좀 있어서..."

"아...여기 청풍부원군 작은댁이 살던가..."


슬그머니 염장을 긁는 말이었다. 허견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고 김지남과 이민철은 쿡쿡 웃어대며 허견의 곁을 지나쳐서 물가로 나아갔다.


허견은 멀어져가는 김지남과 이민철의 모습을 인상을 쓰고 눈여겨 보았다. 수차인지 수거인지를 만들라고 조정에서 불러온 이민철이 왜 개천 주변을 얼쩡대는 건지. 그는 마름 황씨에게 얼른 저들을 뒤따르라 손짓했다. 그리고 자신도 어기적어기적 뒤따를 셈이었다. 황씨가 눈치로 알아듣고, 재빨리 김지남과 이민철의 뒤로 따라붙었다.


참 척하면 척이란 말이야.


허견은 마름 황씨의 엽렵함이 내심 흡족하여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자신은 뒷짐지고 천천히 뒤따랐다. 괜히 방갓에 낚여서 이 차디찬 물속에까지 뛰어들어 옷을 적셨다는 사실이 분통했다. 힐끗 방갓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허견의 시야로, 좀전에 자신이 내동댕이쳤던 방갓을 찾아 힐끗 눈길을 던졌다.


어라라?


방금 이민철과 함께 수표교를 떠났던 김지남이 어느새 되돌아와서 방갓을 집어드는 참이었다. 축지법縮地法을 쓰기라도 했나, 분신술分身術을 쓰기라도 했나. 허견은 눈살을 찌푸리고 김지남을 쳐다보았다. 혹시 황가가 따라붙진 않았나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황씨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김지남은 버리고 이민철을 쫓아간 모양이었다.


허견은 입을 비쭉이고 가만히 김지남을 쳐다보았다. 따라가 봐야 하나, 귀찮은데 내버려 둬야 하나. 남을 시키기는 쉬운데, 자신이 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가만, 젖은 방갓을 왜 도로 쓰지? 허견은 미심쩍은 눈길로 김지남을 쳐다보았다. 방갓에 가려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방갓을 도로 머리에 깊숙하게 눌러쓰는 꼬라지가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내 평소에도 꼬질꼬질하게 다 구겨지고 해진 갓을 쓰고 다니던 김지남의 몰골이 생각나 버렸다. 그깟 방갓 몇푼이나 한다고...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부류였다.


어느덧 방갓에서 흐르는 물이 목덜미와 어깨까지 적신 채로, 소매와 팔꿈치까지 젖는데도 방갓을 손으로 부여잡고 수표교 위로 올라가는 김지남의 뒤를 허견은 차근차근 밟았다.


김지남은 훈도방薰陶坊의 크고 작은 고개들을 지나서 종현鍾峴이라고도 불리는 북고개를 낑낑대며 올라갔다. 평소 일각도 두 다리로 걸어본 적이 없는 허견에겐 더 고단하고 짜증스런 일이었다. 벌써 2각도 훌쩍 넘은 것 같았다. 어쩌면 2각도 안되었겠지만 느낌상 더 오래 걸린 것 같기도 하였다. 괜히 따라왔다는 후회가 들어서 허견은 지남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해가 중천을 지나서 그림자도 조금 길어졌다. 앞서가는 지남은 뒤따르는 허견의 존재를 눈치채지도 못했는지, 계속해서 그렇게 무심히 걸어갔다. 마침내 지남의 발길이 닿은 곳이,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북고개 돌다리였다. 옆에 네모난 방목주가 세워져 있는.


"방목교?"


방목교方木橋는 남쪽에 감간지고敢諫之鼓, 즉 간고諫鼓를 걸어놓고, 서쪽 다리엔 진선지정 進善之旌, 즉 방목方木을 설치한 다리였다. 왕과 조정의 잘못을 규탄할 일이 있을 때는 기탄없이 북을 치고 글을 매달라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감히 잘못을 간하는 일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특히나 김지남은 여기에 왕을 흉보는 투서 같은 것을 써붙일 이유가 없었다.


왜 여기로?


허견은 고개를 갸웃했다. 옛날옛적에 이 다리에다 방목方木을 설치해 놓고서 백성들이 왕에게 간하는 글을 걸어놓는 곳이었다. 헌데 자세히 보니 저 방목에 무언가 글이 적힌 흰 천이 묶여 있었다.


지남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방목에 무슨 글귀가 적힌 천을 서둘러 풀더니 재빨리 방목교 아래로 사라졌다.


"뭐야 저놈?"


허견은 마음이 급해서 당장 따라잡으려 했다. 무슨 도깨비짓인지는 몰라도 그 글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고, 얼핏 방갓 아래로 까슬까슬한 검은 턱수염을 본 것도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방목교로 황급히 뛰어드는 허견의 눈앞에 웬 시꺼먼 개두蓋頭(머리를 가리는 짧은 쓰개)자락이 비끼는가 싶더니 여인의 말캉거리는 육체가 탁 부딪혔다.


"어?"

"눈은 어디에 두고 다니는..."


계집이 인상을 쓰고 짜증을 내려다가 허견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눈앞의 사내가 한눈에도 낯이 익었다.


누구더라.


계집은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다 그 비린 눈빛에 두눈을 찔린 듯이 움찔거리면서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너..."

"..."


계집은 허견이 자신을 알아볼세라 허둥지둥 방목교 아래로 뛰어갔다. 그 뒤로 계집의 몸종이 스쳐 지나가며 미심쩍은 눈빛으로 허견을 살폈다. 귀하디 귀한 밀화를 갓 아래로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귀남자라니. 호기심이 웬수였다.


허견은 두리번거리며 지남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지남은 이미 저 멀리 북고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가버렸다.


"에이 씹..."

"숙지야, 안 오고 뭐 하느냐?"


허견이 욕설을 내뱉으려는 순간 자신을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계집이 몸종을 다그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꽃바람에 개두자락이 살짝살짝 들춰지며 앵두 같은 입술, 오똑한 콧대가 보일락 말락 허견의 눈꺼풀을 감질나게 간질였다.


"저 계집은?"


워낙 길에서 꺾고 싶은 꽃을 보면 거침없이 손을 뻗는 허견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하고,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하는 성품이었으니. 그러지 못하면 칠칠맞게 손까지 떠는 아들을 보다 못해서, 아비도 아예 손수 계집을 허견의 입에 물어다 준적도 있었던 탓에, 개 버릇 남 못주고, 이젠 병이 되어버렸다.


어디서 봤더라.


허견은 막례의 당집에서 보았던 너울 계집의 얼굴을 얼핏 떠올렸다. 잽이의 피리 구멍을 손가락으로 틀어막으면서 야비하게 웃던 그 계집. 자신보다 미색이 환한지, 침침한지 너울 사이로 두눈을 반짝이며 지나는 계집들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기도 하고, 또 자신의 미모에 홀린 듯한 사내들의 반응을 즐기느라 맹랑하게도 뚫어져라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러다 허견 자신과 몇번이고 시선이 얽힌 적도 있었던 그 맹랑한 계집.


아니다. 그 계집은 아니다. 그 계집보다 좀더 사타구니 비린 냄새가 난다. 처녀가 아니다. 이젠 냄새만 맡아도 기가 막히게 처녀인지 아닌지 알아맞힐 자신이 있다. 헌데 자신을 알아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눈빛이 필시 어디선가 한두번쯤 마주친 여자였다.


허견은 그 자리에서 여인을 뒤따라가서 그 어깨를 잡았다. 계집이 화들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다리 난간 뒤로 뒷걸음을 쳤다. 그 바람에 개두자락이 확 뒤로 젖혀지며 계집의 용모가 좀더 뚜렷하게 허견의 시야에 들어왔다.


코너비도 좁고, 코허리도 높고...눈꼬리도 살짝 위로 들려서 어쩐지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얼굴. 한번쯤 마주쳤던 그 얼굴.


"어마마!"

"괜찮소?"


허견은 계집의 허리를 자신의 하복부에 바짝 붙여서 끌어안았다. 지난밤부터 불씨가 숨어서 모락모락 타오르는 것이 한순간에 활활 타올랐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목안이 바짝 타들어서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놓, 놓으셔요."


하지만 사내는 그녀를 안은 허리를 오히려 바짝 끌어당겼다. 젖은 옷이 이내 그녀의 치맛자락에 바짝 달라붙어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이차옥. 오랜만이오."

"오...랜만이라뇨? 저는 나으리가 누군지도 모르옵니다."


계집은 파르르 몸을 떨며 허견을 품에서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허견은 그녀를 안은 팔을 풀 생각이 없었다.


"이거 왜 이래? 알면서."

"나으리야말로 모르면서 왜 이러시어요?"

"네 눈, 네 눈이 말해주거든."


허견이 계집의 개두자락을 걷어 얼굴을 확인했다. 아는 얼굴이든 모르는 얼굴이든, 일단 얼굴부터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


시꺼먼 개두자락이 걷히자 계집의 얼굴윤곽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더 오래 전에, 이동귀의 집에서 마주쳤던가. 워낙 미색이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첩으로 삼으려고 찾아갔다가 퇴짜만 받고 쫒겨난 일이 얼핏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 숙지야! 숙지야! 나 피...


그때, 계집은 안채에서 수를 놓다가 실수로 바늘에 중지를 찔려서,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채로 안채를 나오다가, 마침 중문을 넘던 자신에게 딱 걸렸었다.


- 지혈해 주겠소.


말이 지혈이지, 허견은 그 자리에서 계집의 손목을 잡아서 자신의 눈앞으로 끌어당겨, 계집의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새빨간 피가 송골송골 맺힌 하얀 손가락을 핥아대자, 계집은 온몸을 소스라칠 듯 당황하며, 자신을 밀어냈다.


- 가, 가까이 오면...


계집은 벌레를 보듯 노려보곤 그 자리에서 은장도를 꺼내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 왜? 죽으려고?

- 오, 오지 마...

- 내가 그렇게 드러워?


일개 무관의 딸 주제에, 사대부의 영애나 되는 것처럼, 손가락 좀 닿았다고 제 손가락을 자를 것처럼 질색을 하다니. 계집의 눈에 비친 그 경멸에 자신은 환멸과 모멸을 느껴야만 했다. 그 일이 있고, 고작 보름 안에 계집은 무관 서억만에게 도망치듯 시집을 가버렸다. 그런다고 자신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그래놓고도 기억조차 못한다고?


"저런 손에 뭐가 묻었소."


허견은 자신의 등짝으로 몸종의 시야를 차단하고서는 징그럽게도 여인의 손을 잡아당겨 손가락끝을 혀끝으로 핥았다.


"허읍!"


계집이 숨이 넘어갈 듯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아이고 아가씨? 아니 아씨!"


몸종이 화들짝 뛰어들어 허견의 손을 잡아 계집의 몸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계집이 경멸어린 눈빛으로 허견을 흘겨보고서는 허견의 손이 닿은 허리를 맨손으로 탈탈 털어내었다. 그러자 몸종이 한술 더떠 계집의 허리를 먼지 털듯 다시 탈탈 털어내었다.


"아이고 어쩐다요? 외간사내의 손이 닿았으니..."

"호들갑 떨지 마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계집은 오히려 몸종의 입을 틀어막고 소리낮춰 주의를 주며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머리를 틀어올린 덕분에 바람에 나부끼는 개두자락 아래로 희디흰 목덜미가 허견의 눈시울을 간지럽히는 느낌이었다. 허견은 손가락 끝으로 눈밑을 괜히 긁적였다.


차옥도 목덜미를 핥는 듯한 허견의 시선이 거북했다. 길에서 모르는 사내와 우연히 원치 않는 신체접촉 쯤 하였다고, 닿은 손모가지를 자르고 스스로 모가지를 긋는 여인들이 간혹 있다. 조정에선 그런 여인을 열녀문을 세워 길이길이 기리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었다. 그건 미색이 흐려서 사내를 홀리는 재주도 없고, 주제도 안되는, 그런 못난 계집들이나 하는 미련한 짓이었다. 그저 시늉만 하고 말지, 제 손모가지를 잘라서 스스로 팔병신이 되어 무엇할까.


이미 어딜 가나 얼굴 한번 잡혀보고, 손목 열댓번도 잡혀보고, 무릎 열두번도 잡혀보았다. 어쩌랴. 그게 미인의 숙명인 것을. 자신처럼 미모가 빼어나서 탈인 여인은 그저 다리 사이만 정결하면 된다고 흘려넘길 줄도 안다.


하지만, 어쩐지 뒤통수에 집요하고 질척하게 달라붙는 허견의 눈길에 그녀는 다리가 뒤틀리는 느낌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네 입은 거짓말을 해도 네 눈이 참말을 하더라.


"역상 놈의 며느리 주제에 ..."


허견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좀전까지 최석정을 뒤쫓았던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녀 일행을 가만히 뒤쫓았다. 이번엔 또 돌고 돌아, 도로 수표교 어귀로 돌아와버렸다. 불과 한시진 전쯤 보았던 광경들이 또 다시 비웃듯이 허견을 맞이했다.


"나으리!"


어느덧 이민철을 미행하고 되돌아온 황씨가 하필이면 허견의 시야를 가로막아버렸다. 허견은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에 말도 없이 손으로 황씨를 툭 밀어젖혔다. 하지만 황씨는 눈치가 없는 건지, 있는 건지, 자꾸만 허견의 눈앞으로 얼씬대었다.


"나으리..."

"가만 좀 비켜!"


허견이 황씨를 옆으로 밀어내었지만, 이미 계집은 장통방 골목으로 훌쩍 사라지는 참이었다. 허견은 수표교에 발을 딛고 아래를 굽어보며 계집의 모습을 집요하게 눈으로 쫓았다. 아흔아홉칸 기와집은 아니지만, 제법 규모있는 기와집으로 계집이 들어서는 참이었다.


"서효남의 며느리면..."


역관 서효남은 사역원의 실력자였다. 장현과 함께 청국을 와는 사행단에 걸핏하면 포함될 정도였다. 작년에도 진주사陳奏使에 포함되어 청과의 외교에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장현과 함께 왕이 가자를 명한 적도 있었다. 허견 역시 손쉽게 꺾을 수 없는 꽃이란 사실을 알았기에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런 허견의 모습을 황씨가 눈여겨보며 인상을 썼다. 얼핏 붉은 홍단령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황씨도 본 듯했다. 황씨는 불길한 느낌에 버벅거리면서 말하였다.


"저어 나으리...얼굴가린 계집들은 상종을 안하시는 게..."


황씨는 괜히 불안하고 불길했다. 전모를 쓴 계집은 왕의 비였고, 너울을 쓴 계집은 대왕대비의 지밀나인이었고, 개두를 쓴 계집은 역관의 며느리였다. 왜 하필이면 작은 주인이 넘봐선 안될 여인들과 자꾸 엮이는 건지. 그냥 벌건 대낮이든 컴컴한 한밤이든 버젓이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천것들을 상대로 일을 치르는 편이 안전할 것을. 왜 또 다시 얼굴 가리고 싸돌아다니는 계집에게 눈독을 들이는 건지.


인달방으로 돌아와서도, 사돈댁엔 다녀왔냐고 아비가 다그치는 말을 들었어도, 허견의 정신은 딴 데 팔려 있었다. 그저 내일은 꼭 가보겠노라고 건성으로 답할 뿐이었다.



"또 친정엘 가겠다고?"


시어머니는 갓 시집온 며느리가 탐탁지가 않았다. 물론 아들만 낳으면 좋은 시절 다 가는 게 이땅의 며느리들이었다. 자신도 한때는 누군가의 며느리였던 탓에 모르진 않았다.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더 형편이 좋았다. 전란이 조선팔도를 무참하게 휩쓸고 간 뒤라, 수많은 여인들이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여성의 위상이 점점 추락하는 참이긴 했어도, 적어도 그때만 해도 여인들은 생전에 초상화도 그리고, 수시로 산수를 유람도 다닐 만큼 자유로웠다.


최근 스무해 동안 여인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진 게 문제였다. 전쟁 이후 먹고 살기가 더 어려워진 탓에, 여인들은 살림이란 미명하에, 일년 열두달에 열두번도 넘게 있는 집안의 제사들을 주관하는 것도 모자라서, 길쌈을 하여 쌀을 얻어오고, 그렇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자신이야 사행역관의 안사람인 만큼 굳이 그런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여인들의 입지가 약해진 만큼, 그녀의 운신도 제약이 심해졌다. 하지만 굳이 그런 얘길 차옥에게 할 필요가 없었다.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빠질 년 같으니. 우리 땐 친정 문턱은 밟지도 못했어. 아들 낳자마자 시어머니가 바로 건넌방으로 물러앉는 바람에, 일년에 서른번씩 성치도 않은 몸으로 제삿상 차리고, 치우고...허구한 날 제사에 치여서 드러누울 새도 없었다. 그뿐이냐? 먹고 살기도 힘들 때라 아예 밥에 소금까지 타서 반찬도 없이 맨밥만 먹었구만. 뭐? 어딜 가? 친정?"

"그러니까 저도 아들 낳기 전에 친정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지요. 저도 아들만 낳으면 어머님이 바로 건넌방으로 건너가실텐데."

"저, 저...한마디도 지질 않고..."


차옥은 귀 따갑게 들은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몸종 숙지를 데리고 1각여를 걸어갔다. 조금만 더 가면 자신의 친정집이었다. 방목교 앞에서 어린 서조카가 두손을 모으고 공손히 마중했다. 그녀는 서조카의 머리를 툭 쓰다듬고 길모퉁이를 돌아섰다.


"또 본다? 친정나들이가 너무 잦은 거 아니냐?"


모처럼 친정집을 찾아온 차옥을 외삼촌이 반기면서 하는 말이었다. 차옥은 개두를 벗고 머리를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시댁에서 숨죽이고 지내다가 친정을 찾으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마당 한가운데에 짚자리를 서른 개도 더 깔아놓고 술과 음식으로 성대하게 잔치를 벌이는 광경도 흥겨웠다. 차옥은 혼례 준비로 분주한 집안 풍경을 살피면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외삼촌까지 그러지 마세요. 여기 오기 전에 시어머니한테도 들은 얘긴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그만 좀 하세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시어머니도 편찮으시다면서, 적당히 놀고 가거라."

"예 외삼촌."


차옥은 뜨락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선, 잔칫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뜨락 안의 눈길이 온통 차옥에게 쏠렸다.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아선지, 차옥은 꽃샘바람에 얼굴이 발개졌는데도,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큼 아리따웠다.


"우리 차옥이, 신부보다 이쁘면 곤란한데."


외삼촌의 농에 차옥은 살짝 우쭐한 얼굴로 오히려 뽐내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례를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이미 차옥의 아리따운 외모를 곁눈질로 흘끔흘끔 살피는 참이었다. 이미 신부보다 돋보이는 자신을 차옥 스스로도 잘 알았다. 시댁 바깥만 나서면 이렇게 자신 세상이 되는 것을. 차옥은 친척들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흥겹게 어울렸다.


"여기 서역관 나으리의 며느리가 있소이까?"


웬 사내가 말안장을 얹은 귀한 준마를 타고 와서 묻는 말이었다. 차옥은 술기운이 올라서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로 사내를 향해 헤죽 웃어보였다.


"난데. 왜 그러는가?"

"그댁 안방마님이 지금 위독하십니다."

"무슨..."


술김에 머리가 멍한데도, 차옥은 말귀를 알아듣고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사내는 급하게 비뚤어진 초립을 바로잡을 생각도 못하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얼른 따라오시지요. 그댁 안방마님께서 저희 나으리를 찾아왔다가, 갑자기 쓰러지시어...급히 찾으십니다."

"어머님이요?"


차옥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신다? 방금 전에도 펄펄하게 타박하던 시어머니가 반나절도 안됐는데 갑자기 쓰러질 이유가 없었다. 보나마나 홧병이거나, 꾀병이었다. 자신을 도로 본댁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어머님도 참..."

"어서 가시지요."


차옥은 도로 장통방으로 갈 생각을 하니 입안이 썼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좀더 눌러앉고 싶었다.


"헌데, 정말로...어머님께서 보낸 사람이란 말입니까? 못본 얼굴인데..."

"저희 나으리가 조카뻘이 되어서..."

"아..."

"어서 따라오십시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


차옥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친정 식구들을 돌아보았다. 이럴 때 친정부모라도 좀 나서서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다.


"아버지..."

"어, 가야지...얼른 가보거라."


이동귀와 그 처 박씨는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카의 혼례라 분위기가 워낙 좋다보니, 다들 먹고 즐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처남 박찬영은 그 와중에도 이동귀의 손에 술사발을 쥐어주며 향긋한 백자주를 가득 부어주었다.


"우리 매형, 제 술도 받으셔야지요."

"어 처남..."


이동귀는 술사발에서 희누런 술이 뚝뚝 떨어지자 마음이 급하여 얼른 입을 술사발에 갖다대었다. 박씨는 그런 남편과 동생을 보고 혀를 차며, 차옥에게로 다가서서 그 손을 가만히 부여잡았다.



"안사돈께서 괜찮으셔야 할 텐데..."

"..."


차옥은 머뭇거리면서 친정어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아쉬운 얼굴로 어미의 손을 놓았다.


"또 올게요."

"그래, 그래. 너 좋아하는 민어찜이랑 굴전도 챙겨놓으마."

"예 어머니..숙지야!"


차옥이 행랑채 쪽을 보며 소리쳐 부르자, 따로 술상을 받아서 다른 노비들과 부어라 마셔라 흥겹게 놀던 몸종 숙지가 손안의 대구전을 마지막으로 입안에 우겨넣고 뒤따랐다.


손 없는 잔칫날 음식은 두손으로 배터지게 집어먹고 일어서야 하는 법이었다.이럴 때나 먹어보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대구전도 아니었다. 그나마 상전들은 더 귀한 민어전을 먹는 마당에, 자신은 고작 대구전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면 억울할 것 같았다.


"근데 저 말은 못보던 말인데..."


그렇게 숙지가 입을 우물거리면서 걸어가는 동안, 차옥은 문앞에 대기된 한필의 백마 앞에서 꾸물거렸다. 하지만 숙지는 차옥의 말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필이면 생선가시가 입천정을 콕콕 찔러대는 탓에 뾰족한 가시에 인상을 쓰며 입속으로 손을 넣어 가시를 빼내느라 바빴다. 그런데, 잠깐 머뭇하는 그 사이, 하필이면 눈앞에서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상전을 태운 말이 달려가 버렸다.


"아, 아씨!"


숙지가 입안의 대구전 부스러기가 흘러내리는 것도 잊고 헐레벌떡 뒤따랐다. 하지만 뿌옇게 눈앞을 가려버린 흙먼지 속에서 더이상 아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집안으로 뛰쳐 들어가서 알려야 할 지, 아니면 그대로 돌아가서 기다려야 할 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머리를 부여잡고 왔다갔다 서성이는 숙지의 등뒤로 박찬영의 비릿한 웃음이 은밀하게 비껴갔다.


- 허면, 정말로 다음 사행使行(사신행차)에 넣어주실 게요?


닷새전 허견의 제안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아무나 역관이 되기도 어렵지만, 아무나 사행에 끼기도 어려웠다. 다음 사행에 넣어준다니, 다시 없을 기회였다.


- 물론이외다. 내 말 한마디면 안될 게 무어겠소?

- 아...그래도...내 질녀는 이미 혼인한 몸인데...

- 누가 데리고 산다 했소? 그냥 건너만 가겠다는 거지.

- 건너만 가겠다...

- 다리만 놓아주면 내 그 은혜 잊지 않겠소.

- 흠...내 직접 나서긴 좀 그렇고...그냥 건너만 갈 거면...

- 다리를 못깔면 자리라도 깔아주시오.


허견의 은근하고도 간곡한 말에, 박찬영은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이내 묘안을 짜냈다.


- 자리라...닷새 후면 혼례가 있소이다. 우리 차옥이도 올 것이니, 그때 한번 잘해보시든지.

- 잘해보라?

- 뭐...그 아이 시모가 위독하다고 사람을 보내면 제발로 따라나설게요...

- 아...무슨 얘긴지 알겠소.

- 나한테 들었다는 얘기만 하지 마시오.


그날, 박찬영이 고개를 숙이며 허견의 귓가로 소근거렸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허견의 눈앞에,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분노어린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차옥의 얼굴이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는 자리에, 얼마든지 쓰다듬을 수 있는 다리를 뻗은 채로.


차옥은 방안에 드러누운 채로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이미 이집 솟을대문을 자신을 태운 말이 그대로 뛰쳐들어가는 순간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담장과 문턱이 그렇게 높은 기와집이 시모의 친척집일 리가 없었다. 담을 넘어 도망치려고 해도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시야가 꽉 막혀야 하는데도 오히려 탁 트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끌려와서 섬돌을 오를 때 느꼈지만, 축대가 유난히도 높았다. 부유한 역관 집안인 자신의 친정도, 시댁도 이렇게까지 크고 높은 집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여긴, 신분상 양반들만 짓고, 살 수 있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심지어 별채조차도 어지간한 서민들의 집보다도 커서, 자신의 목소리는 담장을 넘지도 못했다.


"이래도 내가 기억 안 나오?"


또 다시 손가락끝에 축축한 감촉이 닿았다. 차옥은 소름이 끼치면서 뇌리를 찔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가, 캄캄하게 막혔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기억이 나는가보군."


허견이 여릿하게 웃었다.


"난,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그러니 날...날..."

"너무 겁먹지 마시오. 난 억지로 꽃을 꺾는 취미는 없소."


차옥은 기가 막혀서 사레들린 것처럼 잔기침을 해대었다. 여기까지 자신을, 그것도 유부녀인 자신을 납치하고도 억지로 꽃을 꺾는 취미가 없다니.


하지만 허견은 그녀의 눈앞에서 나머지 손가락으로 혀를 옮겼다. 그리고 미끄덩거리는 혀끝으로 계속해서 그녀의 손가락을 공략했다. 차옥은 숨이 가쁠 정도로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사내의 손가락이 그녀의 버선을 벗겨냈다. 차옥은 눈을 굴려서 발치로 기울이는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허견의 혀끝이 낼름낼름 차옥의 발가락끝도 핥기 시작했다. 차옥은 발끝을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반응이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허견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목덜미로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이래도 기억이 안나오?"

"나, 납니다."

"난다?"

"..."

"내가 누군데?"

"..."

"내가 누구냐고?"


허견은 다시 그녀의 목 아래 쇄골을 핥았다. 차옥은 소스라쳐서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온몸을 뒤틀면서 허견을 밀어내려 했다. 재갈도 물리지 않고 자신을 탐하는 이 사내를 어쩌면 좋을까.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몸 위로 엎드린 사내를 밀어낼 재간은 없었다. 천정 대신 사내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누구냐니까?"

"허, 허견...영상댁 도련님..."


허견은 그제야 조금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하지만 뭔가 미흡했다. 그는 얄궂게도 입술이 점점 쇄골 아래로 내려와서 손가락끝이 앞섶에 닿았다.


"그걸로는 안되지. 그냥 날 아는 거랑 기억하는 거는 다르니까."

"무슨 말을..."

"말해.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바, 방목교 친정집..."

"친정집?"

"첩실로 삼겠다고..."

"그래. 첩실로 삼겠다고 했었지. 헌데 날 거부하고 서효남의 집으로 시집을 가더니, 얼마전엔 또 날 모르는 척을 해? 깜찍한 것 같으니."


허견은 멈추질 않았다. 오히려 그 손가락끝이 무자비하게 옷고름도 풀어버렸다. 차옥은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가슴 속 깊은 계곡을 따라서 축축한 혀끝이 미끄러지는 기분은 차라리 끔찍했다. 숨을 헐떡이며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는 차옥의 모습은 허견에겐 싱싱한 먹이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재갈을 물려 놓지도 않은데다, 계집을 둘러업고 들어오는데도 아무도 막아서지 않고 오히려 비켜서는 이곳. 높디 높은 담장이 무섭기만 한 이곳. 그녀가 눈길을 둔 흰 장지문에 검은 어둠이 밀려들었다가 물러가고...그렇게 시간만 속절 없이 흘러갔다.



"물렀거라! 영상대감 행차시다!"


다섯명의 머슴들이 허적이 탄 초헌을 몰고 가는데다, 구사들 다섯명이 앞뒤로 초헌을 에워싸고 인달방 길가의 행인들을 향해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거리를 오가던 행인들은 황급히 길가 양 옆으로 바짝 붙어서서 꿇어엎드렸다. 그나마 평소에는 좀 꾸물대도 느긋하게 넘기던 양반이, 오늘은 몹시 심기가 불편한 탓에 초헌의 팔걸이 옆으로 팔을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초헌을 타고서 인달방 갑제의 솟을문턱을 넘는 허적은 온몸에서 살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턱밑에 또아리를 튼 남구만의 존재가 이제는 목을 조여드는 참이었다. 솟을대문을 넘자마자 뜨락에 머슴들이 초헌을 세우자, 허적은 짜증스레 고개를 돌렸다.


"견이는?"

"저기..."


마침 아들이 헐레벌떡 바지춤을 추스르고 별채 쪽에서 뛰어오는 참이었다. 허적은 아들 견이를 보자마자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별채에서 아들이 달려올 이유가 없었다. 또 별채 안에 누군가 있다는 의미였다.


"오셨어요 아버지?"

"..."


허적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대로 아들을 지나쳐 별채로 향하였다. 심상치가 않은 분위기에 허견은 마름 황씨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황씨 역시 영문을 모른다는 턱짓으로 답하였다. 허견은 쫄레쫄레 허적을 뒤따르며 애써 넉살좋게 말을 붙이는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

"이번엔 또 누구냐?"

"네?"

"이번엔 또 누구냐 물었다."


허적은 별채 앞 섬돌에 놓인 비단꽃신을 보고 더욱 얼굴이 험악해졌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천것들을 납치해오던 아들이, 이번엔 어느 양가집 부녀자를 납치해왔나 싶었다. 허적의 서슬퍼런 눈초리에, 허견은 껄렁껄렁하게 귀를 후비면서 대꾸했다.


"아버지...왜 그래요. 다 아시면서."

"하아...누구냐 물었다. 이 꽃신 말이다!"


허적은 신경질적으로 발로 섬돌 위의 꽃신을 툭툭 걷어찼다. 한번 발로 걷어차고 보니,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던 불같은 기질이 그대로 폭발했다.


"야 이놈아! 이 미친놈아! 너 죽고 나 죽자! 내가 네놈 때문에 못 산다, 못살아!""

"아! 아아! 왜 이래요 또?"

"또? 또오? 내가 물을 소리다 이놈아! 조용히 죽어지내도 모자랄 판에 또 사고를 쳐?"


허적이 미친 듯이 허견을 두드려패자, 마름 황씨가 당황해서 얼른 허적의 허벅지를 얼싸안고 애원했다.


"어이구 대감마님! 참으십시오! 이러다 작은나리 죽습니다요!"

"어차피 우린 다 죽었다 이놈들아! 중궁이 또 회임을 했단 말이다! 또! 또! 또!"


허적이 분기탱천해서 소리치는 순간, 허견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중궁? 회임? 전기수의 공연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 노란 전모를 쓴 계집의 붉은 입술이 시야를 붉게 메우고선, 그 입술 아래 반짝이는 하얀 입술이 또 시야를 하얗게 비웠다.


중궁이 세번째 회임을?


"그럴 리가...분명 상중인데..."

"어휴..."


허적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조금 진정된 음성으로 답하였다.


"기년복이잖느냐. 벌써 나례날에 그 상복 벗었고, 바로 전하와 복침해서 벌써 한달이 되었느니라."

"..."

"요즘 궐 안팎으로 우스개소리가 나돈다지. 중궁은 상의喪衣와 포의胞衣(아기를 감싼 태막과 태반), 단 두 종류의 옷만 입는다나.."

"..."


또, 또, 또 회임이라니...허견은 얼빠진 얼굴로 사랑채를 나왔다. 회임이 이렇게 쉬운 계집도 있다더냐. 상복만 벗으면 뱃속에 포의를 껴입는 계집이라니.


그는 머리 위를 휘영청 비추는 보름달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느낌 탓인지, 보름달이 팽이처럼 핑그르르 도는 것만 같았다. 달빛에 젖은 허견의 눈빛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괜히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달빛이었다.


작가의말

1. 차옥 사건은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허견이 유부녀인 차옥을 납치하여 욕보인 일이었는데, 차옥의 신분이 당상역관의 며느리라 시끄러웠습니다.


2. 중궁의 세번째 회임도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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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2.09 08:54
    No. 1

    임금이란 자리가 금슬이 좋아도 사람들이 삐딱하게 생각하는군요.
    중궁은...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12 01:43
    No. 2

    에...상상력을 동원한 장면이지만, 실록 읽다보면 기가 찰 때가 많습니다. 인경왕후 폐위를 남인들이 모의했다거나...숙종의 성품을 희로폭발이라 적어놓는다거나...기타 등등..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2.09 09:57
    No. 3

    참 대단한 허견이구만
    견이 혹시 이 犬이 아닌지 모르겠구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12 01:44
    No. 4

    진짜 추악한 건 이 다음이라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2.12 11:46
    No. 5

    그러고도 멀쩡했어요? 다른 놈은 죽어도 몇 번을 죽을 사고를 왜 이렇게 자주 친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13 20:26
    No. 6

    그러니 죗값이 점점 쌓이고 또 쌓이지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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