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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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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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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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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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50

DUMMY

"세상에...이게 무슨 일이다야?"

"에그머니 망측해라!"

"웬일이야 웬일?"


차옥은 온몸에 뼛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와 함께 쑥덕거림을 듣고 눈을 떴다. 자신의 눈앞을 뒤덮은 장통방 아낙들과 아이들, 사내들의 얼굴 뒤로 무지개빛 햇살이 반짝였다. 꽉 막힌 천장 대신 퍼런 하늘이 그들 어깨너머로 내려앉았다. 오른편엔 처녀가 머리를 감듯 기다랗게 드리운 버들가지가 손짓했다. 자신이 며칠전 시어미와 구박을 받으며 대문을 나설 때 눈에 들어왔던 그 풍경 그대로.


"..."


차옥은 엄청난 공포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지난밤에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별채의 천장이었는데, 눈을 뜨니 동네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다니.


이미 낯익은 시야가 펼쳐진 것을 깨닫고도, 그녀는 부정하고 싶어선지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그 시선이 닿은 자신의 꼬락서니는 하필이면 만신창이가 되어 멍석에 돌돌 말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친정간 거 아니었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

"어휴...얼굴값 했구먼."

"..."


차옥은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의 얼굴들, 그 뒤로 자리잡은 담장들과 지붕들, 그리고 버드나무들이 일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짐승같은 작자가 자신에게 몹쓸 짓을 했다. 하지만 진짜 몹쓸 짓은, 자신을 하필이면 친정도 아닌 시댁 집앞에 버린 일이었다. 훼절당한 여인이라, 만천하에 자자刺字를 새긴 꼴이었다.


이런 자신을 시댁에서 받아들여 줄 리도 없었다. 이미 파루가 울리고, 문밖에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데도, 빗장이 굳게 걸린 채로 문이 열리질 않았다.


"쯧쯧..."


마침 남여를 타고 가던 김석주와, 가마꾼들과는 별도로 남여 좌우를 수행하던 어린 사내 둘이 딱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들로선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그저 뎅그렇게 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혀를 차는 소리는 그들 어깨 사이로 보이는 남여 위에서 들려왔다.


"이동귀가 구일에게 자기 딸년 좀 찾아달라고 남모르게 부탁했다더니..."


김석주는 기가 찼다. 무관 이동귀로선 친정 대문 앞에서 낯선 사내의 말을 타고 사라진 딸이 무사히 시댁으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납치되어 잘못되었는지, 몸이 달아 한밤중에 한성부 우윤 겸 포도대장 구일具鎰을 찾아와서 믿을 만한 수하들로 조용히 찾아달라 비밀리에 부탁을 했었다. 세상이 알까 두려운 일이라, 차마 드러내놓고 찾지도 못하고서 구일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구일은 사흘 밤낮을 순라꾼들을 닦달하여 혹여 차옥의 행방을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 아들 구지정이 자신에게 몰래 귀띔을 한 바, 최대한 혐의자를 압축해나가는 참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을 찾아왔더라면, 저자거리에 구경거리가 되는 일은 면했을 것을.


"가자."


김석주는 대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남여를 출발시켰다. 이미 대궐과 조정은 허견과 윤휴의 일로 골머리를 앓는 터라, 차옥의 일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물론 친정에서 차옥을 납치해서 욕보이고 시댁에다 버릴 정도로 고약한 수법을 볼 때, 허견의 수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석하야, 체건아, 너희 둘이 한번 알아보거라. 지난 사나흘간 허견이 무얼하고 돌아다녔는지."

"예 형님."

"예 나으리."


석하와 체건이 마지 못해 대답했다. 내키지가 않았다. 그날 허견의 발치로 화살을 쏘지 말고 좀더 위로 쏘았더라면, 귀밑을 스치게 히지 말고 좀더 아래로 쏘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멀쩡한 여인의 신세를 구제할 수도 있었을까.


"그러게 왜 친정출입을 해서."


김석주는 이내 차갑게 식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송시열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 집밖으론 한걸음도 나서지 않고 오로지 부엌만 지키는 여인의 부덕이었다. 그런 송시열의 노력으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산으로 들로 꽃놀이를 다니고 뱃놀이를 하던 이땅의 여인들이 이제는 애오라지 부엌데기가 되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자신은 서인이고, 송시열의 권역에 있었다.


당금의 서인들은 아무도 차옥을 동정하지 않으리라. 이번 일이 허견의 소행으로 드러나는 즉시, 차옥을 벌거벗겨 의금부로 밀어넣을 뿐. 그의 눈길은 이내 편전의 청기와를 그렸다.



"또 사직단자요?"


편전에서 숙종은 양손에 사직단자를 하나씩 펼쳐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느글거렸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길에 허적과 윤휴는 짐짓 몸둘 바를 모르는 듯 고개를 더욱 납작하게 조아렸다.


"송구하오나, 신 영의정 허적...무슨 면목으로 수반首班(조정의 최고 책임자)의 소임을 맡겠사옵니까?"

"신 대사헌 윤휴, 관인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대사헌의 직임으로 오히려 금령을 어긴 죄인의 누명을 썼으니,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나이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왕이 자신들을 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영악하게도 너무 잘 알았다. 송시열을 불러들일 왕이 아니었다. 그러니 서인들도 언제나 소수로 제한해서 불러들였다. 그것도 기껏해야 최석정 주변의 인물들이었다. 왕의 손에 쥔 패를 읽어버린 저들로선 거리낌이 없었다.


"전하, 어디까지나 대사헌은 김세보란 자에게 목재를 샀을 뿐이옵고, 김세보는 솔뿌리가 선산의 무덤을 침범하여, 선례에 의거하여 한성부에서 허가를 받아, 그 문장文狀(공문서)에 의거하여 무덤 주변의 소나무를 베었을 뿐이옵니다."

"선례?"


숙종이 되묻자, 허적이 계속해서 아뢰었다.


"신 허적, 근자에 인달방에 집을 개축할 당시, 한성부에 허가를 받아서 벌목한 목재를 썼나이다. 하여 윤휴 역시 한성부에 알아보고 김세보에게서 그 목재를 정당한 값을 치르고 샀을 뿐이옵니다."

"..."

"예, 전하! 고작 열칸의 집에 금송이 천그루나 들어갈 리가 없사옵니다. 남구만이 대사헌을 무함한 것이옵니다. 그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고약하옵니다."


숙종은 기가 막힌 눈초리로 입을 허적을 쏘아보았다. 오시수가 나서서 거들었지만 숙종은 오시수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전에 그의 아들 허견이 멀쩡한 새 갑제를 헐어 다시 축대를 높이고 지붕도 더 높인 적이 있었다. 자신은 그 일을 빌미로 아들 허견의 사직소를 받아오라 허적을 압박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허견이 보는 자리에서 허견을 직접.


- 억울? 억울해서 과인과 최봉교 둘만의 대화가 궁궐담장을 넘던가? 억울해서 육의전에서 그 귀한 대홍토주와 초록토주를 강탈하던가? 억울해서 팔도 각지에서 목재를 끌어다가 집을 새로 짓던가?"


당시 인달방으로 진맥을 왔던 백광현이, 또 은밀히 정찰을 했던 김석하가 적발했던 목재는 하필이면 금지된 소나무였다. 차마 허견은 물론 허적까지 싸잡아서 변방으로 보낼 수는 없었던 탓에, 허견의 사직소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물론 허견의 사직소는 받아내야 했다. 감히 장희재를 시켜 최석정을 해코지했던 죄값이었기에. 그리고 자신이 말미를 내준 동안 허적은 한성부에서 허가해준 것처럼 문장을 꾸며서 일을 매듭지었다. 물론 아들의 사직소도 깔끔하게 가져왔다.


그때만 해도 벌벌 떨며 설설 기었던 허적이 지금은 오히려 그 일을 기화로 자신을 압박한다. 윤휴를 처벌하려면 자신도 처벌해야 한다. 그러니 결정하시라...윤휴와 자신 모두를 전가사변에 처할 것이냐, 아니면 대신에 대한 예우로 무마할 것이냐.


"한성부는 윤휴의 금송 건에 대한 심리를 중지하라."

"전하?"


병조판서 김석주가 두눈을 부릅떴다. 윤휴의 일을 중지하라니. 왕이 대신들의 사직소에 기가 눌려 한발 뒤로 밀린 건가. 이럴 수는 없다. 적어도 윤휴만이라도 찍어낼 수 있는 기회인데.


"해조(해당관청)도 아닌데 병판도 할 말이 있는가?"

"하오나 이는 기강의 문제이온데..."

"일전에 영상이 말한대로, 귀한 자에겐 법이 펴지 못하는가 보오. 어쩌겠소? 집이 없는 대신에겐 집도 지어주는 마당에, 대사헌의 집이 열칸도 되지 않는다 하니 이번 일은 예우 차원에서 넘어갈 수 밖에."

"..."


김석주는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로 아랫입술을 오징어다리 마냥 질겅질겅 씹었다. 역시나 왕은 서인의 등용문을 넓혀줄 생각이 없다. 가마 한대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디 좁은 피맛길로 서인들을 내몬 채로, 그렇게 서인들은 남인들이 타고 다니는 가마를 보고 꿇어엎드리게끔, 딱 그만큼의 아량만 베풀 요량이었다.


이를 어쩐다...


차라리 최석정이라도 끌어안을 것을. 남구만과는 이미 손을 잡았다. 한패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남구만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허견과 허적을 공격하는 것이 제자 최석정을 지키는 일임을 잘 알았다. 제자가 1백명도 넘는 위인이, 최석정을 지키려고 나섰다. 박태보에 이어 최석정까지 표적이 된 사실이 참을 수 없었을 터.


최석정이 문외출송된 그 장막 뒤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남구만이 알게 되면, 그 다음엔 자신을 물어뜯으려고 들까.


김석주가 터벅터벅 궐밖으로 나와 남여에 오르니, 김석하와 김체건이 재빠르게 다가들었다. 김석하가 먼저 입을 열어 보고했다.


"허견은 좌윤대감의 상소 다음날로...어제까지도 줄곧 장통방 청풍부원군 생가를 맴돌았습니다."

"작은 숙모님을...?"

"예, 영상대감의 불호령이 있어 작은댁의 용서를 받아내러 왔다고는 하나...안으로 들어가진 않고 그저 그댁 앞을 얼쩡댈 뿐입니다."

"무슨 꼴을 당하려고 대문턱을 넘겠나?"


김석주는 피식 웃고서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차옥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장통방에 드나드는 허견, 장통방에서 사라진 차옥...얼추 칠교가 맞춰졌다. 좀더 확실한 증거와 증인을 확보하여 허적 부자를 아예 끌어내릴 셈이었다.



다음날로 또 다시 편전에 허적의 사직단자와 함께 장문의 상소가 올라왔다. 숙종은 삼공 육경의 대신들과 삼사의 중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손엔 사직단자를, 또 한손엔 상소를 들고 읽어내리다가 극심한 현기증과 두통을 느끼고 이마를 짚었다. 그 와중에도 눈앞을 가리는 사직단자와 상소문이 눈앞에 걸리적거렸다.


"영상, 이 상소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오?"

"신 허적, 신의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사옵니다."

"..."


숙종은 할 말을 잃고 허적을 쳐다보았다. 쉽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어려운 사정이 상소문에 적혀 있었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이 같은 일을 적시한 허적의 됨됨이가 너무도 독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신은 고故 홍순민의 딸이 천적賤籍(천민명부)에 오른 이름인 줄도 모르고 속아서 아들 허견과 혼인을 시켰사옵니다. 하오나 이종사촌 유철과 불미스런 소문이 있어...신의 아들은 그 일을 예형의 일가친척을 불러 대질하려 그 언니인 홍씨를 불러 그 일을 따졌을 뿐,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사옵니다. 하온데 저들이 변명도 못하고 돌아간 연후에 앙심을 풀고 신과 신의 아들을 모함한 것이옵니다. ."


허적의 말에 편전 안이 술렁거렸다. 영의정 허적의 아들이 속아서 천적에 오른 계집과 혼인을 하였다? 분을 참지 못하고 허적이 주먹을 휘둘러 대비전을 위협했을 뿐이다? 하지만 대비전 서모는 이미 이가 부러져서 돌아갔다 했다.


허적은 통명전에 잠입시킨 허후를 떠올리고 살짝 켕기긴 하였지만 이내 죄책감을 털어내었다. 아들 허후에 대한 자책 빼고 그는 거리낄 게 없었다. 설령 며느리와 처조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대비전의 서모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이를 부러뜨린 죄를 모면하려면, 이 정도 맞불은 질러야 했다.


어차피 지아비의 바람에 맞바람을 피운 대가는 져야 했다. 게다가, 감히 천출 주제에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하였으니,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쳐내야 했다. 조선은 결코 유부녀의 불륜에 관대한 나라가 아니었다. 간부姦婦도, 간부姦夫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옥중에서 송장이 되어 실려나갈 터. 왕 몰래 고개를 틀어서 생각에 잠기는 허적의 두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남구만 이놈...감히 사마귀 주제에 수레바퀴에 맞서? 제자에 이어, 이번엔 스승이라...어이가 없었다. 칼을 뽑았어도 두손으로 한손을 대적해야 할 놈이, 감히 윤휴와 자신을 동시에 치겠다고 나서다니. 그것도 금송 문제라...


"하옵고, 옥체는 괜찮으시옵니까?"


허적은 편전 문 틈새로 스며드는 초봄의 아침햇살 만큼이나 살뜰한 눈웃음으로 왕에게 여쭈었다. 사실은 이미 수의 이동형에게 왕의 상세에 대해서 들은 터였다.


- 그저 전하께오서 성정이 예민하시어...


하지만 왕의 옥체를 살피는 건 약방 도제조인 자신의 소임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왕의 옥체를 챙기는 충심으로 왕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매야만 했다.


"고맙소. 그저 비위가 좋지 않아 곧잘 체하는 것이니 크게 심려는 마시오."


숙종은 가만히 허적을 보며 정답고 다정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입만 웃어보였을 뿐, 눈은 웃지 못했다. 어떻게 이 와중에도 허적은 가짜웃음을 지어보일 수가 있는 건지. 자신은 웃으려 해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눈앞의 상대는 자신이 섣불리 찍어낼 수 없는 자였다. 허적이 없는 남인조정은 오합지졸이나 다름 없었다.


남구만이 너무 서두른 건 아닐까. 허적이든, 윤휴든, 남구만의 도끼질 한번에 나가떨어질 인사가 아니었다. 이번 싸움은 남구만이 필패必敗였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건 견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송시열을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덕분에 겸사겸사 중궁도 여의에게 진맥하게 하였더니, 기쁜 소식을 들었소."


숙종이 뜬금없이 꺼낸 말에 편전 안은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미 허적은 물론 권대운과 민희도 들어 아는 얘기였지만, 그들은 감히 왕이 먼저 발표하기 전에 먼저 어둠의 경로로 소식을 접한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민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꾸했다.


"무슨...?"

"중궁이 용종을 잉태하였소."


숙종은 펀전 안 신료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겸사겸사 진맥을 했더니 기쁜 소식이 있더라고, 자신이 먼저 운을 떼었는데도,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한답시고, '설마'가 아니라 '무슨'이라니. 언어 선택 봐라...역시 민희는 허목보다도 재상될 그릇이 아닌 모양이었다.


"경하...드리옵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얼떨떨한 건지, 떨떠름한 건지, 중신들의 안면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경하가 아니라 경악에 찬 표정이라니. 아무래도 얄궂은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용종이란 단어를 콕 집어 말하면서, 숙종은 통명전 근처에서 울릴 장악원의 연주를 상상하고 싱글거렸다. 오늘따라 아침햇살이 참으로 싱그러웠다. 누구에게는 징그럽겠지만.



태교라는 명목으로 진홍의 일상은 또 다시 밤낮으로 고달프게 되풀이 되었다. 장악원의 가전악假典樂 한립韓立이 악공들을 데리고 와서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과 취풍형醉豊亨을 연주하여 그녀의 귀를 괴롭히는가 하면, 그들이 물러간 다음엔 임상궁이 온갖 시들을 엄선하여 낭송하여 눈을 괴롭혔고, 임상궁이 물러간 다음엔 패망한 명나라 출신의 최상궁과 유상궁이 와서 주름 많은 손으로 능숙하게 자수를 가르쳐서 손을 괴롭혔다.


더군다나 소원했던 대비전과 대왕대비전이 시시때때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등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죽로차竹綠茶를 마시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세번째 회임, 감축드립니다."

"고맙사옵니다."

"힘들면 편히 앉으세요."


자의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였다. 별로 화제도 없는데 새모이를 먹듯 입술을 찻잔에 콕콕 찍어가며 차를 홀짝거리면서.


"어찌 할마마마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리겠사옵니까?"


진홍은 창백한 얼굴로 답하였다. 콧잔등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는 게 느껴졌다. 소맷자락으로 훔쳐내리면서 희멀겋게 웃는 진홍을 자의전은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미 옅어져서 눈에 띄지도 않는 곰보자국, 혈색도 없이 허여멀건 살결, 주전부리라도 해댔는지 벌건 입술, 동백기름이라도 덕지덕지 발랐는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릿결, 삐쩍 말라 도드라진 쇄골, 그 아래로 흐트러짐 없는 은록빛 당의...


진홍은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는 자의전의 뱀 같은 시선이 거북하여 두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우리 중궁이 곤위坤位에 오른지 벌써 5년인데, 줄곧 상의喪衣, 아니면 포의胞衣만 입는다는 우스갯말이 궐내에 파다해서 말입니다."

"..."


진홍은 자신도 모르게 아래위 입술을 빨았다. 잘 되어도, 못 되어도, 자신의 탓이 될 말이었다. 벌써 세번째 임신인데 궐안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숨결이 살짝 거칠어진 진홍의 가슴을 자의전은 얄궂은 눈초리로 내려다보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 눈동자를 힐끔 들어 다시 한번 진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참으로 하늘의 복을 타고 났습니다. 지아비의 은애恩涯와 하늘의 은총을 두루두루 입었으니 벌써 세번씩이나 회임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할마마마께서 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보잘 것 없는 늙은이가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자의전은 힐끗 눈길을 던져 진홍 옆에 놓인 서안을 쳐다보았다. 서안에는 웬 시와 그림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한눈에도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눈에 들어오는 참이었다.


"신부인申夫人의 초충도라..."

"태교의 일환이라..."

"삼장三場, 구도九度 장원의 기염을 토해냈던 현자 율곡공을 낳은 어머니...이땅의 모든 부인들에게 부덕婦德이 귀감이 되는 현모양처라...중궁은 신사임당을 뛰어넘어 태임이 되셔야지요."

"..."


진홍은 힘겨운 얼굴로 서안 위를 돌아보았다. 화제가 끊기니 서안을 보고 억지로 찾아낸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대청에서 봉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사가에서 왕대부인이..."

"누구? 할머님...?"


진홍은 뜻밖이라 두눈을 뎅그렇게 떴다. 이미 칠순을 바라보는 조모는 좀처럼 궐안으로 발길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자신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한 조모였다. 자신이 입궁을 한 뒤로도 그냥 무심하게 한번을 들여다보질 않던 할미가, 이제 와서 뜬금 없이 자신을 찾아왔다. 그 사실이 신기하여 진홍은 장지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계집이 너무 뛰어나도 형제들 앞길 막는 법이라고, 한자를 적당히 가르치라 했던 그 할미가, 대궐 쪽은 발길도 두지 않던 그 조모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다니.


"..."


진홍은 자신도 모르게 자의전을 돌아보았다. 그 눈결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오롯이 드러났다. 언제 가실 건지를 묻고 싶은, 목소리는 대신 눈초리로 묻는 그 모습에, 자의전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너무도 기쁨에 빛나는 눈빛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아, 내가 너무 오래 있었지요...이만 일어나야지요."


자의전은 자신도 모르게 엉겁결에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민망하여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한발한발 내딛으면서 벌써 후회가 급물살로 밀려들었다. 아무리 눈앞의 상대가 조선의 국모라 해도, 까마득히 어린 아이인데, 감히 자신에게 이런 수모를 안기다니, 용납이 되질 않았다. 만수전으로 돌아가면 당장...아니 주상에게 구구절절 서한을 보내어 하소연이라도 해야 하나.


장지문이 열리고, 문턱을 넘자마자, 대청 앞에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선 해평 윤씨의 모습이 자의전의 두눈에 들어왔다. 저 노파가 그 유명한 해평 윤씨인가.


미망인의 몸으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어, 김만기는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김만중은 정시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를 하였다. 두 아들을 모두 상위 성적으로 급제시킨 홀어머니라 하여, 세상이 혀를 내둘렀다.


그 아들 중 장남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동시에 겸임한 문형文衡, 즉 조선의 학문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차남도 지나치게 급진적인 성품만 누른다면 얼마든지 그 자리를 이어받을 인재라는 소문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터였다. 지금이 남인 세상이긴 해도, 이들 형제는 조선팔도 어디에 내놓아도 반짝이는 관옥 같았다.


"그 해평 윤씨라..."


자의전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해평윤씨를 요모조모 살폈다. 자신은 절대로 얻지 못할 명예였다. 홀로 아들 둘을 모두 번듯하게 문형에 올릴 조선의 어머니. 세상 모든 아들을 둔 어미들의 거울이 된 어미, 게다가 국모의 할미라는 귀한 수식어란 수식어는 모조리 쓸어담아버린 여인.


"고명하신 존함은 많이 들었으나, 이제야 뵙는군요."

"귀한 분께서 어찌 천한 이몸께 말씀을 높이시옵니까? 부디 낮춰 주시옵소서."


해평 윤씨는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방금 전까지 진홍에게 언짢은 심사를 가졌던 자의전으로선 해평 윤씨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영의정도 함부로 못하는 문형, 그 문형을 배출한 해평 윤씨에게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자의전은 그저 코끝에 닿은 공기를 마치 콧방귀를 뀌듯 깊이 내쉬고서 말 없이 섬돌 아래로 내려섰다. 햇볕이 섬돌에 어리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이 어쩐지 자의전의 속을 긁었다.


"중전마마, 본방에서 왕대부인이..."

"뫼시어라."

"예."


바로 장지문이 열리고, 해평 윤씨가 조심스레 섬돌을 딛고 대청으로 올라서고, 진홍의 낡은 사슴가죽 흑혜와 비슷한 또 한켤레의 사슴가죽 흑혜가 섬돌 아래로 놓였다. 자의전은 어쩐지 질시로 속이 쓰리는 것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해평 윤씨의 기품어린 걸음이 장지문 속으로 사라지고, 문이 닫히고서야 자의전은 입맛을 쓰게 다시면서 만수전으로 향하였다.


"할머님께서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진홍은 장지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오는 할미를 얼떨떨히 쳐다보며 웃었다.


"그간 너무 적조했지요?"


해평 윤씨가 담담히 웃었다. 오랜 세월을 홀몸으로 아들 둘을 건사하다보니 눈코입이 모두 뾰족뾰족하게 변한 얼굴이었다. 이 얼굴이 중궁의 눈동자엔 어떻게 비칠 지 스스로도 잘 알았다.


여장부女丈夫.


자신도 어릴 때는 눈코입이 둥글둥글하였는데도, 세월이 흐르는 사이 모진 풍파에 깎인 느낌이었다. 온몸에서 강인한 기운이 흐르다 못해서 얼굴도 그렇게 변하였다.


이런 자신을, 어쩌면 자신의 손자, 손녀들 중에서 가장 쏙 빼닮은 아해가 진홍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눈이 또렷하게 살아있는 아해. 태어나기도 전에 전설의 왕후인 태임太任의 운명을 지녔다는 술사의 예언이 먼저 있었던 탓에, 어릴 때는 아명이 태임太任이었던 아해...일찌감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은 오히려 탄식을 하였다.


세상은 크고도 넓은데, 고작 대궐에 갇히겠구나.


해평 윤씨가 상념에 잠기는 사이, 봉이가 냉큼 주안상을 준비해왔다. 소반이 장지문을 넘는 순간 바로 진한 당귀향을 퍼뜨렸다.


해평 윤씨가 좋아하는 당귀주였다. 진홍이 입궁하기 전에도 해평 윤씨는 귀한 인삼주人蔘酒나 당귀주當歸酒를 즐겨 마시곤 하였다. 홀로 숙부를 낳은 뒤로 몸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하며 아들 둘을 키우다보니, 유난히도 오한에 시달린 탓에, 인삼이나 당귀처럼 몸을 덥히는 약초주가 필요한 탓이었다.


해평 윤씨는 자신의 앞에 찰랑이는 금빛 당귀주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아까보다 더 주름이 늘어져서 웃음이 더 부드러워졌다.


"회임을 감축드립니다."

"축하를 해주시러 오신 것입니까?"

"그냥...꿈에 보여서 왔습니다. 이 늙은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이젠 속지 않을 것입니다."


진홍은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에 할미도 비시시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흐려지는 순간 이내 화제가 뚝 끊겼다. 참 이상하게도 조손간에 서먹서먹했다. 어릴 적에 자신에겐 한자를 적당히만 가르치라 억압했던 할미였던 탓에, 천자문을 가르친 이후로는 거의 손에서 놓다시피 했던 할미였던 탓에,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불쑥 찾아와서 회임을 축하하러 왔다...믿기지가 않았다.


"신씨의 초충도로군요."


자의전이 했던 것처럼, 화제가 떨어지자, 할미는 서안 위로 눈길을 돌려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쳐다보았다. 뻔한 삼장이니 구도니 하는 얘기가 할미의 입에서도 나오려나 싶었다.


"삼장三藏, 구도求道 입산의 기행을 보였던 땡중 율곡공을 낳은 어미이기도 했지요."


뜻밖의 말에 진홍은 두눈을 깜빡였다. 땡중 율곡공을 낳은 어머니라니. 선대의 서인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고, 당대의 서인들이 팔도 각지에서 달려올 발언이었다. 아들 둘을 문형의 지위에 올릴 분이 이리도 거침 없는 발언을 하시다니. 그러고 보니 호칭도 '신부인'이 아니라 '신씨'라 불렀던가.


"할머님..."

"그 그림 보여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부덕의 표상이니 어쩌니 떠들었겠지요? 존경스런 신부인, 신부인 해대면서..."

"예..."

"흥, 중궁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신씨申氏로 불리던 분입니다."


직설적이긴 했어도, 할미는 사임당에 대한 존경심이 은연중에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쩐지 당대의 사람들이 입에 담는 존경심과는 그 음색이 남달랐다. 진홍은 의아히 되물었다.


"신부인이 아니라...신씨로 불렸다구요?"

"조선이 자랑하는 화사로서의 신씨였습니다. 명국, 청국 사신들도 앞을 다투어 찾는, 그런 명작을 남긴 여화공으로서의 신씨."

"..."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미가 아니라 그냥 평산 신씨...그 이름 신인선申仁善..."


명호가 아닌 이름 석자를 입에 담는 해평 윤씨의 두눈은 뿌듯함에 반짝였다. 진홍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짝여서 뇌까렸다.


"평산 신씨...신인선..."

"여인이 그 이름을 남기기 쉽지 않지요. 그렇게 백년이 넘도록 반짝이던 신인선이란 이름이, 얼마 전부터 그 아들의 이름에 묻혔지요. 율곡을 낳은 어머니, 여인의 부덕을 실천한 신부인申夫人, 신부인, 신부인..."

"..."


진홍은 입을 다문 채로 두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신인선 혹은 신씨로 불리던 여인이, 이제는 신부인으로 불린다니. 시류가 그렇게 변한 건지. 어떻게 된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진홍이 의혹어린 눈길로 쳐다보는데, 해평 윤씨는 불편한 눈길로 초충도에서 눈길을 떼고 고개를 더 깊숙이 조아렸다.


"옥안 뵈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할머님...잔도 다 비우지 않으시고..."


진홍이 아쉬운 눈빛으로 해평 윤씨를 쳐다보자, 해평 윤씨는 손을 뻗어 당귀주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진홍은 거침 없는 할미의 성품을 익히 알았지만 기가 막혀버렸다.


"이만...물러가도 되옵니까?"

"할 수 없지요."


한숨을 꾹 삼키며 진홍이 답하였다. 젊어 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할미는 성품이 다소 변덕스럽고 괴팍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대궐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몰라도, 앉자마자 촌각 만에 일어나서 물러간다니. 입안이 쓴데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들려왔다.


"일간 또 뵙지요."

"..."


일간日間? 며칠 안에? 며칠 후를 기약하는 할미의 음성이 뜻밖이었다. 진홍은 또 얼떨떨히 고개를 끄떡였다. 진홍의 시야에서 해평 윤씨가 스르르 일어나서 뒷걸음질로 사뿐히 장지문을 넘었다. 진홍은 그런 해평 윤씨의 모습을 두눈에 담았다. 정말로 며칠 안에 또 찾아오시려나. 자신에게 한번도 살갑게 굴지 않았던 할미가 갑자기 관심을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떨떨하다. 하지만 할미의 방문 만큼 그녀의 뇌리를 꽉 채우는 것은, 저 초충도의 주인이 백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신씨에서 신부인으로


해평 윤씨는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진홍의 눈동자를 힐끗 쳐다보고 여린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장지문이 열리고, 자신이 문턱을 넘자 닫히고, 기다란 대청을 지나서 다시 섬돌 앞에 서자, 너른 뜨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해평 윤씨의 눈엔 그저 좁기만 했다.


"아무리 대궐이 넓다 한들...세상만 할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한발한발 걸음을 내딛어, 통명전을 벗어났다. 이제 막 거문고와 가야금, 비파를 들고 통명전으로 들어서는 가전악 한립과 장악원 악공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태교를 위해 통명전 뜨락에서 여민락을 연주할 모양이었다. 좋은 음악을 듣게 생겼다 싶어서 해평 윤씨는 더 걸음이 느려졌다. 통명전 담장을 돌 무렵, 여민락만與民樂慢의 선율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이건..."


해평 윤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좀처럼 듣지 못한 악곡이었다. 해평윤씨는 고개를 기울인 채로 한발한발 더 느릿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봄바람 같은 선율이 귀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통명전 담장이 다 끝나도 무슨 악곡인 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곡이지?"


해평 윤씨가 답답하여 중얼거리자, 그 뒤에서 앳띤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민락만이지요."

"..."


해평 윤씨는 의아히 뒤를 돌아보곤 눈앞의 곤룡포에 흠칫 놀라 허리를 숙였다. 이대로 엎드려 부복해야 하나. 아니면 허리를 숙이고 서 있으면 되나. 머릿속은 혼란스러운데, 두손을 모아쥐고 다소곳이 서 있으려니 허리가 아팠다. 얼핏 보았던 왕의 용안이 아직도 속눈썹 밑에 아른거리는 듯 하였다. 눈길을 떨구었는데도 비단솔기가 눈에 띄는 왕의 검은 녹피화와 함께 그 뒤로 내시들의 목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뉘신데 통명전을..."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해평 윤씨로..."


해평 윤씨가 자신을 더 소개하기도 전에, 숙종은 이내 눈앞의 노부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할머님이시군요. 조선 모든 여인의 귀감이신..."

"귀감이라니...당치도 않사옵니다."


노부인이 더욱 허리를 굽혔다. 숙종은 몸둘 바를 몰라 하는 그녀를 보고 오히려 더 진한 웃음을 지었다.


"자꾸 겸양을 하시면 더 큰소리로 떠들 겁니다. 두 아들을 학문의 거울로 훌륭하게 키워내신, 모성의 거울, 아들을 둔 어미들이 언감생심 본받으려 하는 귀감..."

"..."


숙종이 떠들 수록 해평 윤씨의 허리는 마침내 낫처럼 구부려져서 더는 내려갈 수가 없게 되었다. 숙종은 낭패한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이거...자꾸 겸양을 하시다 겸자鎌子(낫)가 되셨군요."

"..."

"헌데...할머님의 귀한 얼굴을 처음 뵙는군요. 왜 이제야 찾으셨습니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몸이다 보니, 죽기 전에 금강산도 유람해야겠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말입니다."

"..."


숙종은 할 말을 잃었다. 당금의 조선은 반가의 여인의 바깥출입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참이었다. 정월대보름날 밤에도 여인들이 마전교馬廛橋(수표교)와 큰 광통교, 작은 광통교 할 것 없이 다리란 다리마다 모여들어 답교놀이를 하고, 삼짇날의 꽃놀이도 여인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사내들의 시회를 모방하여 술을 마시면서 언문으로 시도 읊고, 심지어는 기녀도 불러서 가야금과 거문고 연주를 듣는다고는 하지만, 감히 여인이 금강산이며 백두산 같은 산수를 유람하고도 모자라서, 거리낌 없이 얘기를 꺼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도, 아들을 둘씩이나 문형, 혹은 그에 준하는 경지에 올려놓은 여인이. 그렇게 명망 있는 여인이.


"헌데...이 노래가 여민락만이라니...생각보다 너무 빠르군요."


마침 연주가 뚝 끊기자, 해평 윤씨가 하는 말이었다. 숙종은 뎅그레진 눈으로 통명전 쪽을 돌아보았다. 빠르다? 자신 같은 젊은 세대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더 느려야 한단 말입니까?"

"소인이 어찌...여민락만을 들었겠사옵니까? 왜란에, 호란에...팔도강산이 폐허가 되고, 곳곳에 곡曲이 아닌, 곡哭이 울려퍼지는 마당에...여민락은 더더욱 들을 수가 없었지요. 다만...소인이 어릴 때 듣던 곡들보다 빠르게 들려서..."


해평 윤씨는 대답하다 말고 쓰라린 눈웃음을 지었다. 회갑을 넘기고 머리가 희끗해지면 너도 나도 으레 하는 말이, '우리 때는...' 하는 소리였다. 우리 때는 스승을 공경하여 감히 그림자도 밟지 못했는데, 우리 때는 성균관에서 나물죽 소금밥도 고맙게 알고 먹었는데...아마 앞으로 백년, 이백년, 삼백년이 흘러도 똑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 터였다. 헌데 자신도 똑같은 소리가 입에 나왔다.


"그 말씀은...곡이 점점 빨라진다...?"

"예, 서두르고 또 서두르는...그런 음률인가 하옵니다."

"..."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제는 치화평이 흘러나왔다. 언문으로 된 용비어천가 가사가 온갖 악기연주와 함께 느긋하고 느릿하게 들리는데도, 해평 윤씨는 또 미간을 은근히 찌푸렸다.


"이 치화평도 빠르군요..."


그 순간 숙종은 깨달았다. 악곡에 관심이 많은 김만중, 그 김만중을 낳은 여인이 눈앞의 해평 윤씨란 사실을. 이미 칠순을 바라보는 주름투성이의 얼굴이, 그녀가 지나온 세월의 질곡과 여한을 말해주었다. 그녀가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린 것이다.


"들어가서, 같이 듣겠습니까?"

"송구하오나 늙은이가 몸이 고단하여...수일 내로 또 찾아뵐 것이옵니다."

"그럼...그때 뵙지요."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앞에서 해평 윤씨가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숙이고선 뒷걸음질로 물러갔다. 숙종은 해평 윤씨가 했던 말을 가만히 곱씹으며, 뒤에 다른 내관들과 함께 시립한 두광에게 나직하게 분부했다.


"악보들을 가져와라. 빠짐없이, 남김없이..."

"예에? 악보는 또 왜..."

"노래가 빨라지고 느려진다는 건, 그 악보가 바뀐다는 뜻이다. 좀 설명 좀 시키지 좀 말아라 좀...!"


숙종은 버럭 짜증을 내고 통명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다른 내관들도 숙종을 따라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두광은 입을 비쭉였다.


"칫. 전하께오서 성질이 급하시니, 노래도 빨라지는 거지 뭐."


두광은 툴툴대며 홍문관부터 장악원, 왕실 서고까지 샅샅이 뒤져서 악학궤범 같은 서적들을 챙겼다. 두광이 동온돌로 그 많은 악보집을 가져오니 이미 장악원의 연주가 끝나버렸다. 숙종은 타박을 하고서 악보들을 비교했다.


"똑같은 취풍형인데 칸수가 갈수록 줄어드는구나."


정간보의 네모칸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숙종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똑같이 취풍형이라 적힌 정간보의 마디마디가 점점 얄팍해졌다. 처조모의 말이 맞았다. 용비어천가 구절, 그 간격이 점점 좁아지는 것을 보니 속이 답답했다.


"두광아."

"예."

"방목교에 다녀오너라."

"또요?"

"그럼 내가 가리?"

"다녀오겠나이다."


두광은 입가를 실룩였다. 이제는 먹는다고 키로 갈 나이도 아닌데, 자신은 점점 몸집이 홀쭉해진다. 당장 장지문에 비치는 그림자는 물론, 방목교로 가는 길에 있는 크고 작은 연못, 시내 등에 드리운 물비늘에 비치는 그림자도 호리호리하다. 누구 덕분에.


그날밤, 홍예형과 유철은 물론, 홍예형의 오라비 홍진웅, 사촌 오라비 홍진석, 숙부 홍양민은 물론 그들과 연이 닿은 식솔들이 모조리 의금부로 끌려왔다. 두사람의 간통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은 한사람씩 불려나가 국청에서 문초를 받았다.


"바른대로 말하지 못할까! 너희 둘이 통간을 하는 것을 허견이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예형의 언니, 곧 청풍부원군 소실을 불러와 따지다가 홧김에 주먹이 나간 것이거늘! 이래도 두사람이 아무 사이도 아니란 것이냐?"


쌍학흉배를 단 붉은 홍단령을 입은 오시수를 보고, 유철은 처음에는 주눅이 들었지만, 오시수의 호통을 들을 수록 울화통이 터졌다.


"그게 말이 되오? 나는 허견의 외사촌이요. 헌데 우리가 뭘 혼인전에 서로 아는 사이였다가 간통을 했으며, 뭘 따진다고 사돈댁을 불러 따진단 말이오?"

"그야...예형의 죄는 그 언니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


유철은 온몸을 버둥거리며 두눈을 지릅뜨고 소리쳤다. 이미 두눈에 뵈는 게 없었다. 허견이 그 처형을 두드려 팬 일이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더니, 애꿎게도 자신들한테 그 불똥이 튀었다.


"혹시 뭐 덮을 게 있소? 우리가 뭐 허견의 죄를 덮는 이불이요, 덤불이요?"

"그래도 이놈이 제 죄를 뉘우치지 않고...! 여봐라! 저놈이 바른대로 말할 때까지 매우 쳐라!"


오시수가 버럭버럭 호통을 치는데, 국청 한구석에 유의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의걸은 깍지손을 하고 애가 닳아 서성이다 황급히 오시수 쪽으로 다가들었다.


"저어...잠깐만, 잠깐만요."

"자넨?"

"아버지!"


오시수가 상대의 신원을 묻기도 전에, 형틀에 묶인 유철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아들을 돌아보는 유의걸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제가...잘 타일러보겠습니다."


오시수는 힐끗 돌아보곤 입가를 실룩였다. 아들보다 아비가 더 말이 통하게 생겼다. 아비가 아들을 설득하면 아들도 들을 수 밖에 없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제깐 놈도 버틸 재간이 없으니.


일각이 흐르고, 추국이 속개되자, 유철의 태도가 고분고분하게 돌변했다. 그는 형장이 엉덩이에 닿기도 전에, 술술 불었다.


"예, 예형과 잤습니다. 실수로, 술에 취해서...그댁 여비인 줄 알고 그만..."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오시수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유철을 옥사로 들여보내고, 예형을 교대로 불러 형틀에 앉혔다. 예형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매질을 가하기도 전에 유철이 시인을 했단다. 시인한 게 도대체 뭐가 있다고. 예형은 이를 악물고서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터였다.


작가의말

김만중의 모친 해평 윤씨는 전란으로 남편을 잃고, 친정 근처로 이사하여 홀로 두 아들을 키워낸 여인입니다. 김만기와 김만중, 둘 다 대단한 인재인 만큼 해평 윤씨의 명망도 높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묘비문 및 행장에 여인들의 덕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희생을 추켜세우는 사대부들의 행태를 보고 '병통'이라 탄식했다는 내용이 '조선 여성의 일생'이란 책에 적혀 있습니다. 그 책이나 또 다른 책들이 사임당에 대해서도 숙종 때 송시열의 주도로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상으로 사임당 미화작업이 진행된 정황도 다루었습니다. 김만중의 어머니라면 달가워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상상으로 에피를 넣었습니다. 물론 사임당 스스로 태임 같은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집요한 송시열의 기질 덕에 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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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2.14 09:18
    No. 1

    역사를 입맛에 맞게 윤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즐겁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1 18:24
    No. 2

    일전에 천지인을 쓰면서 섭렵했던 자료 중에, 제자가 스승을 욕보인 사건이 생기면, 우리 때는 ㅈᆞㄱ러지 않았다느니...우리네 행태랑 똑같더군요. 역사를 윤색하고 이용하는 것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2.15 16:14
    No. 3

    송시열 이전에 주자가 가장 큰 원흉이 아닐까 합니다
    그걸 집대성?한 조선시대 유학자들도, 또 그걸 발전시킨 후대들도,
    그리고 그걸 욕하면서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는 현대인들도.

    작가님이 지금까지 조사하신 모든 자료를 출간한다면
    책 열 몇권 정도의 한질 분량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해봅니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1 18:27
    No. 4

    고려 때는 사대부가의 부인이 남의 장례에 참석한 일도 있었는데, 조선 건국 이후로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죠. 주자의 폐해이긴 할 듯...자료는 커녕 제 책을 출간할 일도 아득한 꿈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한국사랑꾼
    작성일
    18.07.18 07:50
    No. 5

    송시열은 편협된 사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성을 개돼지 수준으로 보아 가르친다고 생각하면서 가르칠 생각보다 무식한 사람이라 말할뿐이죠. 그는 주자에 심취해 주자에 살고 나라를 망치게 만든 서인 노론의 괴수이죠. 그는 관직생활은 적지만 제자를 중앙과 지방 각각 보네 향촌을 장악하고 자신의 뜻을 따른 정치질 대마왕이죠. 그러니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많이 거론되죠. 그만큼 정치질 노략을 얼마나 했는지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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