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9,153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4.01.02 00:57
조회
3,414
추천
32
글자
38쪽

해의 그림자 155

DUMMY

"또 왔구먼 백어의."


해거름에 백광현이 침함을 겨드랑이에 끼고 중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니, 허적이 다 죽어가는 몰골로 사랑채 안방 문지방을 넘어 대청마루로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타고 온 말 두 필을 허적의 머슴이 마구간으로 이끄는 사이, 허적이 섬돌 아래로 내려서지도 못하고 무겁게 엉덩이를 뭉그적거리자 광현은 손사래를 쳤다.


"나오실 것 없습니다."


물론 허적 역시 정말로 나올 생각은 없을 테지만, 광현으로선 마지 못해 예의라도 차려야만 했다.


말은 두 필인데...허적은 광현의 뒤를 게슴츠레 지켜보았다. 웬 약관의 선비가 손에 부채 하나를 쥔 채로 뒤따르는 참이었다. 흑옥을 깎아놓은 듯한 이목구비에다, 콧잔등에 살갗보다 짙은 점이 도드라져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헌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허견이 실눈을 뜨고 시선을 석하에게 내리꽂자, 드높은 대청 아래에서 광현이 물어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방금 전까지 다 죽을 것 같았는데, 자네 얼굴을 보니 살 것 같구먼."

"뭐...제 손끝이 좀 신통하긴 하지요."


광현이 우쭐대자 허적은 미간이 슬그머니 꿈틀거렸다. 웃자고 하는 소리였지만 허적은 웃어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석하를 눈짓으로 가리켜 물었다.


"헌데 저 친구는...낯이 익구먼?"

"그럴 리가요."


석하는 두눈을 반짝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런 태도가 허적의 두눈엔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렇게 으리으리한 갑제에 와서, 무려 영의정의 면전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태평하게 돌아보는 모습이라니. 하다 못해 얼뜨기처럼 두눈을 멀뚱거리지도 않고, 마냥 태연자약하여 눈길을 끌었다.


"허면..."

"청풍김문의 석하라 합니다."


인사하는 자세도 놀랍도록 단정하고 단아하다. 허적의 두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될성 부른 떡잎인가.


청풍김문의 석하...김석주의 종제 또는 족제인가? 그러고 보니 귀에 익은 이름이다. 김석하...김석주의 재산루를 관장한다던가. 말이 마름이지, 수많은 장서들을 마음놓고 읽을 수 있도록 김석주가 재산루를 떠안긴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 김석하라...


갓끈은 나무구슬 일색이었지만, 갓 아래 망건 앞이마쪽에 보일 듯 말 듯 비치는 반달 모양 풍잠 만큼은 귀한 밀화로 꽂은 것이, 절제의 멋을 아는 듯 하였다.


허적은 자신도 모르게 탐이 나서 입맛을 쓰게 다셨다. 홍만종에게 첩으로 들여보낸 여식이 새삼스레 아까웠다. 아무리 조선팔도에 명성이 자자한 현묵자라 해도, 벼슬도 마다하고 초야에 숨어사는 자일 뿐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배도 곯고, 손에 물 묻히고 할 일이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무슨 핑계라도 갖다붙여 벼슬을 떠안겨주면 좀 나을까.


그래도 당장 눈앞에 젊음이 파릇파릇하니 두눈에도 총기가 번지르르한 녀석을 보니 또 왜 이리 입안이 시고 떫은 건지.


"들어오시게나."

"예 대감."


허적은 섬돌에 발을 내딛는 백광현의 어깨너머로 석하를 한번 더 힐끗 곁눈으로 보고서 광현에게 따져 물었다.


"근데 왜 자네는 매번 혼자 다니나? 수발 들어줄 손도 없이."

"뭐, 혼자서도 거뜬합니다만."

"그래도 그 귀한 손을 지켜줄 머슴들이라도 데리고 다니시지."

"내 몸 하나 건사할 실력은 있습니다."


백광현은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허적의 병세를 탐지하러 왔다가, 도리어 자신이 탐문을 당하니 기분이 묘하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달랑 석하만 데리고 찾은 것이 미심쩍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고작 구종 한명 데리고 허적의 집을 찾은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도.


"..."


백광현의 곁에서 석하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할 실력은 된다고 큰소리를 친 백광현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 탓이었다. 석하는 검지를 구부려서 망건 옆을 긁적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흔 아홉칸 기와집인데도, 담장너머로 겹겹이 자리한 열두 채의 초가들이 단순한 이웃이 아니라 호지집護持家(무사들이 기거하는 집)이란 것을 눈치챈 탓이었다. 백광현이 비록 한때 겸사복을 했더라도, 홀로 열명, 스무명, 서른명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까.


"자네 지금 비웃나?"

"비웃긴요."


광현이 심드렁히 따지자, 석하는 치미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허적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서 눈에도 가시가 돋친 느낌으로 석하를 쳐다보았다. 담장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을테지만, 하필이면 이놈이 쳐다본 쪽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준기가 기거하던 초가였다.


괜히 켕긴 탓이겠지. 준기는 물론 나머지 초가에 기거하는 이들은 웬만해선 함부로 나서지 않는 그림자였다. 외부인은 결코 그 존재를 알 수가 없었다.


느낌 탓이겠지. 허적은 재차 위안을 삼고서, 백광현과 석하를 대청 안으로 들였다. 석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광현을 뒤따라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아프다는 제 아비보다 더 뭉그적대면서 건넌방에서 허견이 대청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구먼."

"헌데 뒤에 있는 그 친구는..."


허견이 빙긋 웃으며 석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허견의 눈밑이 꿈틀거렸다. 하필이면 그놈이다. 감히 자신의 면전에 촉 없는 화살을 날린, 그 미친 놈. 죽이려고 화살을 날린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촉을 빼고 날렸다며 한 마디도 지지 않던, 그 썩을 놈.


"네놈은..."

"또 뵙습니다."


허견의 손가락질에 석하는 여릿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 웃음이 허견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


얼굴이 벌개져서 이를 악무는 아들의 모습에, 허적은 힐끔 두눈을 홉뜨고 쳐다보았다.


"아는 얼굴이냐?"

"그놈이에요 그놈."

"그놈?"

"아 진짜...용모파기도 보여드렸잖아요. 아버지 아들한테 화살 쏜 그놈이라고요."


허견은 당장 석하에게 돌진했다. 제발로 찾아오다니. 아무리 몸을 삼가야 할 때라지만, 눈앞에 이 웬수같은 놈이 있는데 참을 수는 없었다. 헌데 뒤에서 주름 많은 손이 그의 팔 위로 소리없이 얹혔다. 허견이 흠칫하여 돌아보니, 참으라는 아비의 눈짓이 자신의 두눈에 틀어박혔다.


"..."


아버지? 허견이 입모양으로 실룩이자, 허적은 더욱 두눈에 힘을 주며, 아들의 팔을 잡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 이놈 때문에 기껏 칭병을 하고 드러누웠는데, 또 이놈 때문에 칭병도 들키게 생겼다.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죽기 살기로 뜯어 말려야 하니.


아니 된다.


아비의 간절한 눈빛에 허견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비가 많이 약해졌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아비가, 앉아서 삼천리를 호령하고 움직이는 아비가 이리 약한 모습이라니. 기분이 참으로 묘하였다. 언제나 아비를 볼 때마다 가슴 속에 울분과 기대가 뒤엉켜서, 자신이 아비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허견은 왠지 입꼬리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번뜩이는 눈빛을 옆으로 슬그머니 치웠다.


네, 네. 지금은 참지요. 잠시만 참지요.


오래 참을 생각도 없었다. 허견은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꼿꼿이 들고서 대청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허견의 뒷모습을 보는 석하의 시야로, 희미한 해무리가 담벼락 너머 인왕산자락을 찍어눌렀다.


"안 들어오나?"

"예, 갑니다."


석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해무리를 지켜보다 사랑채 안방에서 허적이 독촉하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석하를 보는 허적의 눈빛이 언뜻 뱀의 비늘처럼 차갑게 식었다.


싹수 없는 놈.


그렇게 석하가 방안으로 들어가고, 그림자조차 대청에 남지 않고서야, 허견이 도로 사랑채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섬돌에 놓인 백광현의 검은 목화와 석하의 흑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신발 안쪽에 덧댄 가죽 표면에 세모꼴의 모공들이 눈에 띄었다.


돈피?


어이가 없게도, 둘다 내피가 돈피로 된 신발이었다. 당금 조선은 소고기보다 돼지고기가 더 귀했다. 소고기야 농번기엔 금물이라지만, 돼지고기는 사시사철 소고기보다 더 값진 식재였다. 자연히 돈피 또한 귀하였다. 털이 두둑한 이엄耳掩(방한모)에 돈피를 덧대는 것조차 당상관 이상만 허용될 정도였다.


물론 당상관인 백광현이야 이엄에 돈피를 대든, 목화에 돈피를 대든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고작 재산루 마름 주제에 돈피라니?


허견은 입을 비죽이며 자신의 청회색 비단 태사혜를 벗고 석하의 흑혜 속에 자신의 두발을 넣어보았다. 꼭 맞았다. 허견은 눈밑을 실룩이며 발치를 하염 없이 내려다보았다.


"..."


한시진이 흐르고서, 광현과 석하가 도로 대청으로 나올 때는 이미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린 뒤였다.


"벌써들 가나? 식사라도 들고 가지 그러나."

"그럴 짬도 없습니다."

"내 아쉬워서 그러이."

"이제 좀 살만 하신 모양입니다."

"아들 놈 때문에 죽을 맛이었는데, 백어의 덕분에 한결 나아졌네. 역시 앉은뱅이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신의다우이!"

"다 나으신 게 아니니 내일 또 오겠습니다."

"아니 이보게..."

"이만 갑니다. 나오지 마십시오."


대청까지 배웅을 나간답시고 또 엉덩이를 뭉그적대는 허적을 보며 광현이 다시 손사래를 쳤다. 뻔히 속 보이는 수작들을 지켜보며 석하는 코웃음을 삭이며 섬돌 아래로 내려섰다. 흑혜를 신으려다 멈칫하고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뭐 하는가? 후딱 신지 않고?"


허견이 옆에 바짝 붙어서서 턱짓으로 섬돌 위 석하의 사슴가죽 흑혜를 가리켰다. 비단도 아니고 무명으로 지은 도포를 입은 놈이, 꼴에 신은 귀하디 귀한 돈피를 안쪽에 덧댄 흑혜라니. 아까 백광현이 진맥을 하는 동안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잠깐 신어보니 확실히 착 감겨들던 것이, 지금도 발끝에 선하였다.


"내일은 비바람이 불 것 같군요."


이젠 달무리도 비치는 참이었다. 하늘을 보며 비 타령을 하는 석하를 보고 허견은 내심 비웃었다.


비바람은 걱정 하덜 말고 피바다나 걱정하거라.


허견 자신은 순전히 신을 신어만 본 게 아니었다. 유독 모공이 듬성듬성한 돈피 안창을 보고 장난도 쳐놓았다.


그것도 가는 못을 왕창.


돈피 여기에 송송 뚫린 모공 탓에 티도 나질 않았다. 이제 이놈이 두발을 신속에 내딛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저 삼척동자 놈은 두발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리라.


"..."


그런 허견의 기대에 부응하듯, 석하는 두발을 흑혜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허견의 입꼬리가 가늘게 비틀렸다. 최석정 그놈은 덫을 쳐놓아도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더니, 이놈은 제대로 걸렸다.


"으..."


석하는 두발을 흑혜 속에 넣더니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고통을 애써 참듯 눈시울이 경련했다.


하지만, 허견이 기대한 만큼 비명을 지르지도, 깨금발로 뛰어다니지도, 두발을 부여잡고 볼 썽 사납게 나뒹굴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발꿈치로 중심을 옮겨 걸어갈 뿐이었다.


허견의 기대에 턱 없이 못 미치는 반응이었다. 그저 신에 모래나 돌이 들어갔을 때나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뭐야?


허견은 두눈썹을 꿈틀대더니 아예 노골적으로 석하의 발끝만 내려다 보았다. 이쯤 했는데도 고통을 참는 게 사람이긴 한지. 다치기는 했는지.


"견아."


허적은 어쩐지 불안어린 음성으로 아들을 불렀다. 왜 왕은 유독 아끼는 백광현을 이리로 보내는 건지. 동태를 살피려는 건지. 게다가 아들놈은 또 왜 입을 오므리고 실룩거리면서 저자의 발치만 내려다 보는 건지. 뭔가 꿍꿍이가 보이는 게 아무래도 불안했다. 하지만 아들은 들은 체 만 체 석하의 발밑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


허견의 집요한 시선에 꿰인 석하의 걸음은 조금씩 새 발자국 같은 핏자국을 콕콕 남기며 사랑채 앞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허견의 입가에 비로소 회심의 미소가 군침처럼 고였다. 핏자국이 점점 짙어지는 참이었다. 허견은 상투 끝만 겨우 내비칠 정도로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는 머슴 하나를 보며, 정읍사井邑詞 한 소절을 자진모리로 흥얼거렸다.


어긔야 즌 데를 디디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하필이면 정읍사를 빠르게 불러대는 허견의 노래에 석하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하지만 허견은 더욱 놀려댈 뿐이었다.


"이보게? 발이 왜 그러나?"

"..."

"다친 것 같은데 치료하고 가지 그러나?"

"괜찮습니다."

"괜찮긴. 비를 걱정하더니, 피를 뽑는구먼. 아흐 다롱디리..."


허견이 마냥 속시원한 얼굴로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는 모습에, 석하는 대꾸도 않고 싹 무시한 채로 문간의 허적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항간에 해무리와 달무리가 나면 비바람이 불고, 허무리가 나면 피바람이 분다는데, 제 피로 액땜이나 되면 좋겠군요."

"허무리?"


당장 백광현과 허견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문간에서 뭉그적거리던 허적은 콧마루가 꿈틀거릴 정도로 코를 실룩이며 석하를 쏘아보았다. 그 눈길은 칼날이 되어 당장 석하의 온몸을 난도질 할 기세였다.


하지만, 석하는 흑혜에서 새어나오는 벌건 피가 마당의 누런 흙과 더덕더덕 엉겨붙는데도 계속해서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새발자국 같은 핏자국을 남기고.


"어휴 유치하긴. 애도 아니고..."


중문 앞에서 각자의 말을 인계받고 허적의 갑제를 나서자마자 광현은 피투성이가 된 석하의 흑혜 끝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뭐 저런 철부지가 다 있나 싶었다.


"그러게요."


석하는 발끝이 매운 고통을 참아내며 혀끝을 말아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발 앞부분에 가는못이 박힌 흑혜를 조심스레 벗었다. 손에 든 흑혜에선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이마에선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버렸다. 석하는 밑창에 박힌 가는못을 손가락 끝으로 하나하나 뽑아냈다.


"그리 아픈 걸 어떻게 참았나 몰라?"

"제가 원래 참는 건 잘합니다만."

"사람이 아니야...자넨 참으로 이상하고 또 이상적인 환자일세. 내가 꿈에 그리던 그런 환자..."


광현이 혀를 내둘렀다. 석하가 심드렁히 노려보는데도 그저 연신 군침을 흘릴 뿐이었다. 그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곤 길가의 너부죽한 바위를 찾아 얼른 걸터앉았다. 그리고 침함을 내려놓고 손으로 바위를 툭툭 두들겨 보였다.


"이리 앉게나."

"..."


석하는 괴롭게 인상을 쓰며 겨우 입술을 달짝거려 답하고선 그 자리에서 발꿈치로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광현은 광대뼈까지 꿈틀거릴 정도로 안면근육을 움찔거리며 석하가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꼴로 집까지 갈 수나 있겠나 어디?"

"말을 타고 가면 되지요."


석하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하곤 눈앞의 높은 담벼락, 그 일대의 초가집들을 돌아보았다. 어느 집에서는 진한 먹냄새가, 또 어느 집에서는 흐릿한 피비린내가 났다.


"아시는 분들 중에 개코가 한분 계시댔지요?"

"뭐...좀...개코긴 하지."


광현은 서종태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최석정이 존경각에 갇혔을 때, 비천당으로 찾아온 내금위의 손샅에서 녹슨 쇠비린내를 맡을 정도로 코가 예민한 녀석이었다. 그리 섬세한 후각도, 곱게 자라 비위가 약한 탓인지, 타고 난 집안내력 탓인지 모르겠지만서도.


"그분 좀 빌려주시지요."

"어이구, 물건도 아닌데 어떻게 빌려줘?"

"아니 제 말은..."

"상중이라 도성 밖에 나가 있네. 나도 얼굴 못본 지 꽤 됐으이."


두런두런 얘기하는 동안, 광현은 침과 지혈산으로 지혈을 마치고, 간단한 소독도 하여 목면도 발에 감아주었다. 그리고 침함을 챙기며 그는 두손을 옷자락에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다 되었다."

"고맙습니다."

"다치지나 말고 다녀라."

"제 맘대로 되나요?"


석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을 내려다보았다. 목면을 친친 감은 발로는 신을 신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맨발로 걸어갈 수도 없었다. 석하의 눈길이 광현의 목화에 머물렀다. 우람한 체구라 발도 큰 탓에, 목면을 동여맨 자신의 발과 엇비슷해 보였다. 그 눈빛을 읽고 광현이 물었다.


"왜, 빌려달라고?"

"됐어요. 아저씬 궐부터 들어가셔야죠."

"그래야지."

"어서 가보세요."


석하가 시큰둥히 대꾸하자, 광현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그의 걱정을 덜어내려는 듯이 석하는 날렵하게 말 위로 올라탔다. 배 위라면 몰라도 말 위에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석하였다. 하지만 광현은 괜히 아쉬워서 재차 입맛을 다셨다.


"배도 고픈데 육면이나 들고 가세나..."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

"아까 비도 온댔지?"

"그냥 그럴 것 같다고만..."

"자네가 비 온다면 비 오는 게지. 옛날부터 비 냄새는 귀신같이 잘 맡았잖나."

"비가 문제가 아니라, 피가 문제지요."

"피? 피는 다 멎었잖나."

"그 피가 아니라..."

"아니라?"

"아까 말한 허무리, 아...스흐..."


석하는 광현과 입씨름을 하다가 혀가 꼬이는 바람에 잘못 오른쪽 옆구리를 깨물고 인상을 구겼다. 정말이지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다. 턱 오른쪽을 감싸쥐고 석하는 매운 입안을 달랬다.


"괜찮으이?"

"아흐...네."

"아까 그 얘기는 뭔가? 허무리는 뭐고, 피바람은 또 뭐고?"

"아...혀물...아니, 허무리가 나면 피바람이 분다지요."


깨물린 혀로 발음하려니 발음이 새어, 다시 정정하는 석하였다.


"허물?"

"강원도 방언으로 허무리...허적 말입니다."

"허적?"

"피바람이 불 때면 미리 알고 몸을 사리지요. 바로 여기, 인달방 사직동에서."


석하는 드높은 담벼락을 바라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혀를 잘못 깨문 탓에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해무리, 달무리, 허무리..."


광현은 석하가 목청을 돋우어 담벼락에 대고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들으며 입술을 달짝였다. 듣고 보니 맞는 얘기였다. 처경사건 때도 칭병하여 뒤로 빠지더니, 이번 흉서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허무리란 석자에 담벼락을 에워싼 초가들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주인을 욕했으니 심기가 불편한 건지, 불안한 건지. 광현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석하는 가만히 고개를 고정한 채로 코끝의 숨을 깊게, 또 길게 들이마셨다.


필시 저 담벼락 아래에 허적이 있을 터였다. 들으라고 떠든 것이니 더더욱.


물론, 그 담벼락 아래서 허적은 용모파기 한장을 들고 내려다보면서, 광현과 석하의 대화를 주의깊게 엿듣는 참이었다.


"저, 저..."


마름 황씨가 치를 떨면서도 담벼락 아래서 꼼짝도 않자, 허적은 힐끔 곁눈질로 살피고선, 다시 손에 든 용모파기를 내려다보았다. 눈코입이 모두 선명하고, 숱 많은 속눈썹, 게다가 콧잔등에 짙은 점이 콕 박혀서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얼굴.


"이 아이가 재산루의 마름이라지?"

"예, 에..."

"김석주가 애지중지한다지...세상을 놀라게 할 학문의 소유자라던가..."

"..."


허적은 여전히 용모파기를 쥔 채로 눈빛을 가만히 휘둘렀다.


"헌데 집안이 왜 이리 조용해."

"네?"


마름 황씨가 움찔하여 되묻자, 허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속을 긁어내듯 황씨의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주, 주인마님..."

"하긴 견이 저놈이 가만 있을 놈이 아니지."

"말려도 듣질 않으시니...소인도 죽겠습니다."


황씨의 하소연에 허적이 혀를 찼다.


"쯧쯧...김석주의 덫인 줄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간 꼴을 봐라."

"네?"

"너도 머리가 이젠 굳은 게냐?"

"그 말씀은..."

"그놈이 할 일 없이 왔겠느냐. 다 우릴 유인하려는 게지."

"허면 지금이라도..."


황씨가 중문으로 달려가려는데, 허적의 조용한 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아서라. 아서."

"하오나..."

"저기 준기만 없으면 그만이지."

"..."

"준기는, 어디로 갔는지는 그놈들도 모르지?"

"예 주인마님."

"흐음..."


허적은 한결 느긋하게 누그러진 눈빛으로 황씨를 쳐다보곤, 이내 눈길을 용모파기 위로 내렸다.


"고놈 참 잘생겼다."

"예에?"


황씨가 아랫입술을 실룩거렸지만, 허적은 더는 어떤 말도 입 밖에 내뱉지 않고 조용히 용모파기를 내려다보았다. 집안이 조용하다 못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리 고요한 어둠 속에서 지붕 위로 체건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더니, 품속의 용모파기를 꺼내어 확인해 보았다. 얼굴이 대체로 길고 날렵하지만 눈은 짝눈인 자...방금 저들은 준기가 이 안에 없다 하였다.


체건은 석하가 간 쪽을 돌아보고, 이내 다시 사랑채 쪽을 돌아보았다. 가서 석하를 도와줄까, 아니면 이 원수를 갚아줄까.


갈등은 짧았다. 체건은 장통방으로 향하긴 커녕 솟을대문 옆에 떨어진 가는 못을 줏어들더니 야금야금 사랑채 앞으로 다가들어, 섬돌에 놓인 허견의 청회색 태사혜에 고스란히 박아놓았다.


그러고 도로 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또 다른 가는못을 한웅큼 구해와서 그 태사혜와 비슷한 크기의 멱신, 징신에 모조리 거꾸로 박아놓았다. 그리고는 콧마루를 실룩거리며 씨익 웃었다.


아무나 걸려라.



광현은 인달방 어귀의 떡집에서 인절미로 간단히 허기를 때우고서 석하와 떨어져 홀로 궐로 향하였다. 아무래도 고약한 장난을 쳐놓은 허견이 괘씸하였지만, 그를 어찌어찌 해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궐문 앞에 이른순간 요란한 징소리가 또 고막을 난도질했다.


뭐야, 이건?


마흔이나 됨직한 귀부인이 징을 쳐대는 참이었다. 한눈에도 귀한 비단으로 지은 옷을 걸치고서 있는 힘껏 징을 치는 모습에 광현은 두눈을 멀뚱거렸다. 처음엔 어둠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는데, 점점 그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초롱과 조족등, 횃불을 들고 몰리면서, 얼굴이 훤히 드러나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지동에서 함께 작대기를 잡고 휘두르며 뛰놀던 친구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니, 어쩌니 해도 엄연히 그들은 중인이었고, 어릴 때 한때 한데 어울려서 노니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순금이...?"


마흔 남짓한 귀부인이 고개를 돌리고 눈물 젖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광현이?"

"..."


막상 불러놓고 광현은 그저 할 말을 잃었다. 어엿한 당상역관의 부인이 되어있을 그녀가 여기서 이렇게 격쟁을 하다니?


"..."


이차옥의 시어미, 순금도 그저 할 말을 잃었다. 들리는 풍문으론 우림위인지 겸사복인지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병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마의 노릇을 하다가 고관대작의 눈에 들어 내의원에 들어갔다고도 하고, 어린 왕에게 잘 보여서 어의가 되었다고도 하고, 중궁의 아기가 죽어서 귀양을 갔다고도 하고...그런데 이렇게 버젓이 홍단령을 걸친 진짜 어의가 되어있다니.


"물럿거라! 형판대감 나오신다!"


구종들과 서리들의 외침이 들리더니, 궐문 앞의 인파가 두갈래로 쫙 갈라졌다. 이내 형조판서가 구사와 서리, 그리고 나장과 의녀들까지 줄줄이 이끌고 걸어나오더니, 순금 옆의 광현은 무시한 채로 턱짓으로 명령했다.


"끌고 가라!"

"네!"


의녀들이 답하고서 차옥의 시어미에게로 다가들었다. 광현은 미간을 좁히고서 찜찜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격쟁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의녀까지 대령해서 데려간단 말인지. 일반 양가의 아녀자는 나장 내지는 사령들이 잡아갈 수 있어도, 지체높은 사대부가의 부녀자는 의녀들을 동원하는 법인데, 그 와중에 벌써 신원확인까지 마치고 데려가는 건지.


"격쟁을 한 연유가 무엇이냐?"


이윽고 편전 앞까지 끌려와서 왕의 면전에 꿇어엎드린 차옥의 시어미는 짐짓 옷고름으로 눈물부터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소인은 역관 서효남의 지어미이자, 이차옥의 시어미가 되옵니다. 비록 출신은 미천하나 지아비가 성총을 입어 당상역관에 오르는 영광에 힘입어, 소인 역시 숙인의 지위를 얻었사옵니다."

"그런데?"

"이런 저희 서씨 집안도 삼강을 알고 오륜을 알며, 예를 압니다. 차옥이 훼절을 당했으면 어찌 한집에 데리고 살겠나이까?"


숙종은 할 말을 잃었다. 차옥의 지아비 서억만이 죽음을 각오하고 격쟁을 한데다, 이제는 시어미까지 나서서 격쟁으로 호소했다. 이래서야 차옥이 겁간을 당했다고 판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그시 차옥의 시어미를 쏘아보며, 대나무 마디처럼 한마디한마디 나누어 물었다.


"그 말은, 네 며느리는, 훼절을 당한 일이, 없다?"


왕의 옥음에 서리가 내리는데도, 차옥의 시어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비틀어잡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맹세코 제 며느리는 겁간을 당한 일이 없습니다. 제 말이 거짓이면 단매에 쳐죽이셔도 좋습니다."

"..."

"허면, 네 며느리가 역으로 무고죄, 또 반좌죄로 결장決杖(장형이 결정됨) 및 유배, 정속定屬(관노로 전락함)의 처분을 받게 되는데도? 그러다 죽을 지도 모르는데도?"

"할 수 없지요. 다 그 아이가 자초한 일이지요."


차옥의 시어미는 뱀처럼 차가운 비늘을 온몸에 둘렀는지, 차갑게 번들거리는 얼굴로 답하였다.


"알겠다."


숙종은 차옥의 시어미를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형조판서를 돌아보았다.


"격쟁을 한 자는 형조에서 결장하여 방면하는 바, 형조판서는 지금 당장 장형을 집행하라."

"네?"


형조판서 이관징이 당황한 얼굴로 숙종을 쳐다보다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여기서, 왕의 면전에서 장형을 집행하라니?


일이 틀어졌다는 느낌에 그는 차옥의 시어미를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순전히 형조로 끌고 가서 우선 형식적으로 장형을 집행하고 구술을 받아적어 사흘 안에 왕에게 보고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허견의 사건인 만큼 일부러 왕에게 먼저 보고하고 나중에 솜방망이로 치고 풀어주려던 것이...


"지...금 말입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으니, 속전속결로 답을 줘야겠지."


숙종은 가차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차옥에게 내릴 처분에 비하면 그야말로 다디단 약과였다.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차옥의 시어미를 냉랭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것이 나의 비답이다."


이제는 진실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차옥의 지아비와 시어미까지 부정하고 나선 마당에, 차옥의 옥사는 무고죄로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전에, 격쟁의 값은 비싸게 치르도록 할 참이었다.


"서억만은, 형조에서 어찌 처분하였더냐?"

"그게...아직..."


이관징이 쭈볏거리면서 답하자, 숙종은 심드렁히 되물었다.


"아직이라?"

"예...전하...전하께서 장형을 보류하라 명하시어..."

"허면 서종태 때와 똑같이 하면 되겠군."

"예, 에 전하..."


똑같을 턱이 있나. 이관징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왕의 분부대로 장형을 차옥의 시어미에게 집행하는 수 밖에 없었다. 차옥의 시어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이관징을 돌아보았다.


얘기가 다르잖아!


이관징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럴 때 시선을 마주쳤다가는 왕의 의심을 살 터였다. 이미 왕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마당에 얕은 수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단순히 장杖 열대이니 그 정도는 무방하리라 싶었다.


당장 두 구의 형틀이 편전 앞에 마련되었다. 차옥의 시어미와 지아비 역시 가차 없이 형틀 위에 엎드린 채로 손발이 포승줄에 묶였다. 명색이 당상역관의 부인과 아들인 만큼, 형조 사령들이 가시나무로 만든 장杖을 들고 옆으로 다가서는데, 숙종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잠깐, 서종태에게 장형을 가했던 나장, 아니 사령이 거기 있느냐?"

"예?"


사령이 두눈을 끔뻑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관징의 뒷줄에 서 있는 사령 하나를 쳐다보았다. 당시 형조판서 정익의 지시를 받고 버드나무로 만든 곤棍을 들고 나섰던 사령이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사령은 두눈을 크게 뜨고 마치 두루마리를 말듯 제 시선을 돌돌 말았다. 이럴 때 날 쳐다보면 어쩌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게 먼저였다. 헌데 둘 사이에 오가는 시선을 읽었는지, 왕이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로구나."

"흐읍!"

"나오너라."

"..."

"어서. 나는 인내심이 짧다."

"..."


사령은 고개를 조아린 채로 쭈볏쭈볏 앞으로 나섰다. 그는 왕의 측근이라던 최석정이 당시 형조로 찾아드는 바람에 황급히 곤장을 대청 아래로 숨긴 일을 기억했다. 그땐 어찌나 살 떨리던지, 심장이 벌렁벌렁하였다. 그런데 왕이 그 일을 묻는 것이, 이러다 목이 달아날까 두려웠다.


"네가 집행해라. 그때 서종태를 내리쳤던 그 곤棍으로."

"저, 전하..."


사령은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며, 왕의 용안을 훔쳐보곤, 이내 형조판서 이관징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은 바뀌었지만, 당黨은 그대로였다. 이러나 저러나 자신은 결딴나게 생겼다.


"어서."

"예, 전하..."


사령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한참이 흘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이미 밤이 깊어, 일경삼점一更三點을 알리는 인정人定이 울리는 참인데도, 왕이 손속에 한치의 인정人情도 두질 않은 탓에, 모조리 두발이 그대로 얼어붙은 채였다.


그래도 중년 여인의 몸인데, 또 겨우 약관 청년의 몸인데, 저들에게 어찌 이리 가혹하신 건지.


"늦었구나."


지루한 기다림 끝에, 사령이 버드나무로 만든 곤棍을 들고 되돌아와 편전 앞에 서자, 구경하던 관료, 내관, 무관들은 모두 기가 질려 입이 벌어졌다. 한뼘도 넘는 묵직한 몽둥이라니. 하지만 왕은 주저없이 명을 내렸다.


"그대로 저자들의 볼기를 쳐라."

"예?"


사령은 멍청히 되물으면서, 도와달라는 듯 이관징을 뎅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관징은 사령의 눈짓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당장 서효남의 처, 즉 이차옥의 시어미가 죽게 생긴 마당에.


"전하, 원래 곤棍은 넓적다리와 볼기를 나누어 치게 되어 있사옵고..."

"백어의가 서종태의 진료를 하였을 때 상처는 볼기에만 있었다."

"예?"

"사령은 저자들의 볼기에 곤棍 열대 씩 집행하라."

"..."


형틀에 엎드린 차옥의 지아비와 시어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요상했다. 왕은 지금 자신들의 목숨을 끊어놓을 심산이었다. 차옥의 지아비와 시어미는 형틀에 손발이 단단히 묶인 채로 형조판서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다.


사, 살려주세요...

얘기가 다르잖습니까...


형조판서 이관징은 가슴에 북받친 한숨을 소리없이 내쉬면서 눈길을 외면했다.


그날 자신은 서억만의 집을 찾아 영의정 허적의 뜻을 전하였다. 격쟁을 하여 차옥이 겁간을 당한 일이 없다고 고하여라, 그리하면 차옥은 무고죄로 도리어 결장決杖(장형이 결정됨) 및 정속定屬(관노로 전락함)의 처분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래야만 이미 정절을 잃은 차옥을 내치고, 새로 아내와 며느리를 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만약 말을 듣지 않을 시엔 불이익이 따를 것이라고.


당연히 차옥의 지아비와 시어미의 선택은 격쟁이었다. 하지만 곤장이라니...아직도 그때 자신들을 회유반 협박반으로 꼬드기던 형조판서의 음성이 귀에 선한데...


- 걱정말게. 그냥 좀 간지러울 걸세. 우리가 다 알아서 한대도.


당시의 일을 떠올리던 차옥의 시어미는 벼락같이 볼기를 파고드는 곤의 위력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옆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참으로 고약한 왕이었다. 여인인 자신에게 어찌 이리도 가혹하단 말인지.


자신들을 어르고 달래던 형조판서나, 그 뒤에 버티고 선 허적이나, 아비 도포자락에 몸을 숨긴 허견이나, 참으로 못 믿을 놈들이었다. 애초에 며느리를 납치하고 강간했던 자들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두 대요오!"

"세 대요오!"

"네 대요!"

"다섯 대요!"

"여섯 대요!"

"일곱 대요!"


차옥의 시어미는 이제 아들의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일곱 대를 맞으면 피와 살이 튄다 하였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곤장 아래, 엉덩이가 으스러지면서, 뇌리에 가까스로 붙어 있던 의식도 함께 뭉개졌다.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끊어져서 형틀에 축 늘어진 서억만과 그 모친의 주검을 뒤로 하고, 숙종은 자리를 뜨며 차갑게 판부判付를 내렸다.


"이차옥의 지아비와 시어미가 죽음으로 그 원통함을 증명하였으니, 이로서 이차옥 부녀가 구일의 사주를 받아서 허견을 모함한 것이 명백해졌다. 이차옥은 장杖 1백대 유流 삼천리로써, 결장 및 정속하라."

"..."

"또한 포도대장 구일을 잡아 문초하여, 그 죄를 정하고, 포도청 군관과 하인들도 각각 순차로 논죄하라. 또한 허견을 비롯하여 금부에 갇혀 있는 자들을 방송하라."


왕의 서릿발 같은 옥음에 이관징은 하얗게 질린 채로 대답도 잊었다. 왕은 만 2년도 훌쩍 지난 서종태의 격쟁 사건을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모두가 새까맣게 잊어버린 그 순간에 불쑥 그 사건을 상고하여 서억만과 그 어미를 요절을 내버렸다. 뒤끝이 무언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경고했다.


나중에 지금 이 사건이 뒤집히기라도 하면, 그때는 자신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죄를 입을 터였다.


"전하, 하오나...허견에게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이 일은 좀더 시일을 두고 조사하심이..."

"이제 와서?"

"..."


이제 와서 판의금 오시수가 꼬리를 말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목내선과 이하진, 정유악도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주저했다.


왕의 뒤끝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했다. 격쟁에 대한 처벌을 가장하여 서종태를 곤으로 그 명줄을 끊어버리려던, 혹은 엉덩이라도 뭉개놓아 대를 끊어버리려던, 자신들에 대한 경고인가.



인달방을 나선 지 반시진이 지나서야 석하는 겨우 장통교에 이르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말도 평소와는 달리 비실비실대며 제대로 달리질 못하였다. 아무래도 허견 그자가 자신의 말에까지 손을 써놓았나 싶었다. 뒤늦은 의심에 석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 정도로 손을 써둔 것은 단순한 장난은 아닐 터였다.


석하는 난간도 없는 장통교로 올라서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태 자신의 뒤를 미행한 자들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뒤를 밟을 자들은 조선땅에 없었다. 물론, 발에 가는못이 잔뜩 박혀, 부상으로 감각이 흐려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봐도, 그의 시야에 잡히는 그림자는 없었다.


이제 조금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보름달 아래로, 이 널다리에 비치는 그림자라곤, 오직 자신을 태운 말 한마리 뿐이었다. 그렇게 석하가 재차 뒤를 확인하는 그 순간, 오히려 앞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돌이 날라왔다.


히히힝!


석하가 탄 말이 그의 엉덩이 밑에서 요동쳤다. 짧은 경련과 함께 앞다리에서 힘이 탁 풀리면서, 말이 앞으로 기우뚱하였다. 석하는 말갈기를 타고 미끄러지면서, 전방을 쳐다보았다.


새까만 무복을 입은 자들이 장통교 끄트머리에만 넷, 수표교에 다섯, 작은 광통교에 둘, 큰 광통교에 셋...


미행은 뒤에 붙은 것이 아니었다. 검은 무복에 복면까지 갖춘 괴한들이 오히려 자신이 오기를 기다려 장통교, 수표교, 작은 광통교, 큰 광통교까지 미리 길목을 막고 기다리는 참이었다.


"왜 이제 와? 얼마나 기다렸는데."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저 정답고 다정하게 들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시퍼런 살기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나머지 다리에서도 저들이 개천으로 뛰어들어, 먹이를 노리듯 물살을 가르며 한발한발 조여들었다.


"..."


석하의 손끝이 갓 아래의 풍잠으로 올라가다가 멈칫하더니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나무구슬이 주렁주렁 달린 갓끈을 잡아빼었다. 이제는 아예 걸었다 빼었다 할 수 있게 고리로 거는 갓끈의 운명이 고작 암기라니. 석하는 가만히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일각 후,


장통교 위의 괴한들을 때려눕혔더니, 또 그 위로 시꺼멓게 꾸역꾸역 몰려드는 자들로 석하는 곤욕을 치렀다. 난간이 없는 다리라, 까딱하면 아래로 떨어져내릴 위험이 있어, 가장자리로 가지 않으려 해도, 저들이 자꾸만 가장자리로 몰았다.


게다가 불편한 두 발 대신 양 손으로 갓끈의 나무구슬을 저들의 옆구리며 허벅지까지 주저 없이 던져놓았는데도, 저들은 수표교 아래서, 광통교 아래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심지어는 널다리 아래서 팔을 뻗어 석하의 발을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풍덩!


석하는 다리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두눈이 홍단딱정벌레처럼 번뜩였다. 더는 손속에 인정을 둘 수도, 사정을 봐줄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를 가르는 칼을 피해 허리를 뒤틀면서, 오른손을 뻗어 칼을 나꿔챘다. 그리고 칼로 수면을 내리쳐서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켰다.


엇?


석하를 물 속에서 에워싼 괴한들은 두눈을 구슬처럼 강타하는 물보라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석하는 없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괴한 하나도. 그들이 석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석하는 수표교의 석주 사이로 머슴 하나를 거세게 밀어부쳤다.


"말해라. 준기는 어디 있느냐?"

"..."


으슥한 어둠 속에 눈동자 속 동공도 이슥했다. 괴한은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어 파르르 떨었다. 눈앞에 너무도 가까운 상대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듯하였다.


"어디 있느냐?"

"..."


듣는 사람의 숨결마저 얼려버릴 만큼 시린 바람이 동공에서 휘몰아쳤다. 괴한은 그 눈빛에 질식하여 머릿속이 온통 멍하였다. 눈앞에서 상대가 갓 아래의 풍잠을 빼어 그 예리한 끝으로 자신의 목덜미에 동맥이 팔딱거리는 지점을 지그시 눌렀다. 소름끼치게 차가운 감촉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사, 살려주세요."

"어디 있냐고."

"섬, 섬이라고만..."

"섬?"

"예, 섬이라고 했습니다. 물살이 너무 세서 배 타기도 무섭다고...그, 그냥 섬이라고...더는 모릅니다. 참말이구먼요!"

"..."


석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목구멍도 뻐근해졌다. 물살이 너무 센 섬...섬...강나루에서 나룻배도 겨우겨우 타는 자신인데, 섬이란다. 이래서야 쫓아갈 수나 있을까.


작가의말

1. 서억만과 억만모, 즉 이차옥의 남편과 시모가 격쟁을 한 일은 실록을 참고하였으나, 그 뒤의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숙종의 판부 중에 죽음에 이르러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글귀가 있어 상상으로 전개했습니다.


2. 김석하는 실존인물을 가공하였는데,  그 인물의 일화에 배 위에서 공을 던져. 배가 공보다 먼저 당도하는 현상으로 지전설을 입증했다는 얘기가 있어서,  그냥 무예의 귀재로 설정해버렸습니다. =_= 도대체 어떻게 던지면 지전설이 입증이 된답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4 해의 그림자 163 +5 14.02.03 2,362 33 38쪽
163 해의 그림자 162 +5 14.01.30 2,159 34 37쪽
162 해의 그림자 161 +4 14.01.26 2,162 26 40쪽
161 해의 그림자 160 +6 14.01.22 2,411 35 38쪽
160 해의 그림자 159 +5 14.01.18 2,205 31 40쪽
159 해의 그림자 158 +7 14.01.14 2,524 33 39쪽
158 해의 그림자 157 +4 14.01.10 2,097 33 38쪽
157 해의 그림자 156 +4 14.01.06 2,460 30 37쪽
» 해의 그림자 155 +7 14.01.02 3,415 32 38쪽
155 해의 그림자 154 +6 13.12.29 2,490 40 38쪽
154 해의 그림자 153 +4 13.12.25 3,129 35 39쪽
153 해의 그림자 152 +4 13.12.22 2,493 43 35쪽
152 해의 그림자 151 +6 13.12.17 3,968 102 37쪽
151 해의 그림자 150 +5 13.12.13 2,122 36 38쪽
150 해의 그림자 149 +6 13.12.09 1,972 30 38쪽
149 해의 그림자 148 +6 13.12.04 2,107 34 36쪽
148 해의 그림자 147 +8 13.11.29 1,968 35 37쪽
147 해의 그림자 146 +10 13.11.25 2,624 30 37쪽
146 해의 그림자 145 +11 13.11.21 2,295 30 33쪽
145 해의 그림자 144 +5 13.11.16 2,287 33 34쪽
144 해의 그림자 143 +5 13.11.12 2,681 32 31쪽
143 해의 그림자 142 +8 13.11.07 3,089 32 24쪽
142 해의 그림자 141 +6 13.11.05 1,872 37 39쪽
141 해의 그림자 140 +6 13.10.30 2,350 61 38쪽
140 해의 그림자 139 +6 13.10.26 1,974 41 33쪽
139 해의 그림자 138 +6 13.10.23 3,545 33 34쪽
138 해의 그림자 137 +6 13.10.20 3,222 41 34쪽
137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1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