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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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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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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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62

DUMMY

해질녘에 강화도에 당도한 김석주는 두 다리로 걷는 것도 귀찮은지 배 위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강화유수가 마지 못해 남여와 가마꾼을 보내주자, 그제서야 배에서 내려서 가마에 올랐다.


품계라곤 반푼어치 차이인 것을, 강화유수는 아니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는 부동의 병판대감이었다. 왕의 외종숙으로, 대비전의 사촌오라비로, 그렇게 사시사철 병조판서 자리를 내어놓지도 않는, 그 누구보다 자리가 굳건하고 견고한 자였다. 정확히는 왕의 외숙도 아니고 외종숙인 것을. 속으로 아니꼬운 탓에 강화유수는 비꼬듯이 말하였다.


"오랜만입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갈 수록 듬직해지시오."


말에 뼈가 있는 강화유수의 말에 김석주는 눈꺼풀을 치뜨고 오만하게 내려다 보았다. 비록 누구나 봐도 움찔움찔 놀랄 만큼 자신의 몸집이 두꺼워지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은근슬쩍 조롱하는 말에도 맷집이 두꺼워지지는 않았다.


"그러게 유수께서도 살좀 찌우시오. 너무 말라붙어서 말 속에 뼈가 보이면 어쩌누."

"..."


김석주가 손으로 강화유수의 가슴팍을 툭 쳤다. 석주가 탄 남여와 강화유수가 탄 말이 바짝 붙어서 가던 참이라, 김석주의 시꺼먼 손이 충분히 닿았다. 강화유수는 얼굴이 와락 붉어져서 김석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달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축성현장을 살피러 왔으니, 승군들이나 소집해주시오."

"..."


석주가 비웃듯이 말하고서 고개를 홱 돌려버리자, 강화유수는 그 뒷통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석주는 곧장 갑곶으로 직행했다. 먼빛으로도 새하얀 꽃이 만발한 탱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노을이 탱자나무의 흰꽃들을 감싸안았다. 저러다 가시에 찔려서 붉은 광채도 사그러들테지만.


하늘이 붉게 물들고, 이젠 작업도 끝내고 돌아갈 시간이라 저마다 손에서 가래 등을 내려놓던 승장과 승병들은 갑자기 눈앞에 한때의 군병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높으신 분이 납셨는데."


승장과 승병들은 어리둥절하여 전방을 주시하면서도 눈밑이 실룩거렸다. 이제 일을 끝내고 전등사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강화유수는 물론 웬 남여의 거물이 찾아왔으니, 일찍 가긴 틀렸다 싶었다. 원래 높은 사람이 한번 찾아올 때마다 아랫사람들만 피곤해지는 법이었다. 괜히 집어먹을 거라도 있나 부리로 쪼고 또 쪼고. 혹은 번갯불에 콩 볶겠다며 볶고 또 볶고.


그렇게 볼멘 얼굴이 되어버린 승병들 틈새로, 짝눈 명오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만큼 더욱 두눈을 찌푸렸다.


저 멧돼지는 뭐야?


느낌이 좋질 않았다. 자신이 알기로 도성에 유명한 개, 돼지하면 자신의 작은 주인 허견과 왕의 외숙이라는 김석주가 있었다. 허견許堅이 아니라 허견許犬이고, 김석주金錫胄가 아니라 김석저金錫猪라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 김석주는 결코 큰 주인의 사람이 아니었다. 명오는 여차하면 튈 기세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동료들의 뒷줄로 물러났다.


"승장들은 앞으로 나오라."

"예?"

"병판대감이시다. 얼른 앞으로 나오지 못할까!"

"에..."


강화유수의 명령에 승장 여덟이 쭈볏쭈볏 앞으로 나섰다. 김석주는 그들 승장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그중 쉰살 즈음의 승려 하나가 유독 눈길을 잡아끌었다. 겉으로는 둔하지만 속으로는 예민한 신경이 자꾸만 그 승려를 보니 간지럽게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는 눈길을 주지 않고 이내 체건에게 슬쩍 눈짓했다.


체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사람한사람 승장들 앞으로 다가들어 용모파기 한장을 내밀었다. 그 용모파기는 유별나게 수염이 많은 흉인이 아니라, 유난히도 눈이 짝눈인 사내의 용모파기였다.


"아는 얼굴입니까?"

"아니..."

"아는 얼굴입니까?"

"모르겠는데..."

"..."

"모르네."

"..."

"나도."

"..."

"모르오."

"..."


김석주가 눈여겨보았던 승려, 성총性聰은 물끄러미 용모파기를 내려다 보았다. 이미 강화도 전역에 뿌려진 용모파기가 아니었다. 흉인의 용모파기를 가져와서 묻는 것도 아니고, 이건 또 누구의 용모파기인지. 하지만 어쩐지 눈에 익어서, 물끄러미 쳐다보게 되었다.


"아는 얼굴인가?"


무심한 척 둘러보던 김석주가 시선을 못박고서 물어왔다. 성총은 어깨를 움찔했다. 사제 겸 제자 성능聖能이 등뒤에서 웅크린 손가락으로 슬그머니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대답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괜히 스승이 잘못 말려들까 겁이 난 모양이었다. 성총은 가만히 두눈을 깜빡였다. 아주 느릿하게, 눈꺼풀에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감았다, 떴다 했다.


"어디서 봤더라..."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의 맑은 눈동자도 허공을 더듬었다. 그때 강화유수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성총과 김석주 사이로 끼여들었다.


"용모파기가 틀렸지 않소?"

"어? 뭐?"

"용모파기가 틀렸다고. 보시오. 흉인은 수염이 많은데 이자는 수염이 적잖소. 게다가 짝눈이고."

"그래요?"


석주는 능청스레 두눈을 뎅그렇게 뜨고선 체건을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틀렸다는데?"

"틀리다뇨?"

"못 들었느냐? 흉인의 용모파기를 보였어야지, 네놈 누이 강간범의 용모파기를 보이면 어쩌누."


김석주의 말에 성총과 성능이 뜨악하니 자신들도 모르게 명오를 돌아보았다. 여인을 겁탈하였다니. 도망한 노비가 승려나 승병이 되는 일이면 몰라도, 여인을 욕보이는 자는 결코 봐줄 수가 없었다. 명오, 아니 준기는 움찔해서 두손에 땀을 쥐었다.


병판대감이 자신을 찾으러 왔다. 직접 수하들을 대동하고, 흉인을 찾는 척 자신에게 강간범의 누명까지 씌웠다. 아니, 차옥을 비롯해서 작은 주인이 점찍은 숱한 여인들을 납치해왔으니 누명이랄 것도 없었다. 이제 여기서는 발도 못 붙이고 이대로 도주를 해야 할 판이었다. 준기는 턱 밑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이 도주할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눈을 분주하게 굴렸다.


"찾았다."


웃지도 않고 체건이 준기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준기가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멈추고 뒤로 한발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목덜미로 무언가 뾰족한 칼끝이 툭 와닿았다. 칼집에서 빼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헐벗은 칼날이 자신의 목덜미를 겨누었는지는 몰라도, 준기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내 누이를 납치해서 견공犬公한테 갖다바친 죄값을 받아야지."

"..."


준기는 찍소리도 못하고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체건을 쳐다보았다. 강화유수를 비롯해서 2백의 승병들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설마하니 자신을 어쩌랴 싶으면서도 겁이 더럭 났다. 아니, 세상 천지에 작은 주인을 건드릴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잡혔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저 시주한테는 누이가 없을텐데요."


뜬금없는 성능의 말에, 체건은 두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이 어린 승병은 체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누이가 없다는 말을 하였다. 그저 어리둥절하여 성능을 돌아보는 체건의 두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무슨..."

"성능아..."


성총이 화들짝 놀라 제지하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김석주와 체건의 날카로운 눈길이 그들 사제에게 꽂혀들었다. 성총은 황급히 승모를 벗어 성능의 머리에 씌웠다. 나서지 말라는 신호일까. 성총은 성능 대신 자신이 입을 열었다.


"부모형제 복이 없는 상입니다. 자존심에 한번 금이 가면 평생 뼈에 새기고 자신을 괴롭히는 성격일테고, 지기 싫어해서 한솥밥 먹는 동료들한테도 가족 같은 정을 느끼지 못하지요. 게다가 역마살이 있어서 산 넘고 물 건너 돌아다니기도 바쁠테고...벌써 살생도 범한 모양이고..."

"..."


성총을 보는 체건의 두눈이 살기로 짙어졌다. 그 입 닥쳐! 눈동자가 소리없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성총의 두눈은 묘하게도 따스했다.


"한평생 칼날을 가슴에 품고, 칼날 위를 걸어갈 운명이죠. 하지만 이 시주가 걷는 길이 곧 조선의 길이 될 것이고, 이 시주가 휘두르는 칼이 곧 조선의 칼이 될 것이니..."

"..."


사납게 일렁이던 체건의 눈빛이 잠잠해졌다. 상처받은 고양이 같은 눈동자도 더는 눈앞의 상대를 할퀴지 않았다. 그 대신 성총을 보는 두눈에 일말의 두려움이 자리잡았다. 어떻게 된 자인지. 강화도로 끌려와서 돌이나 나르고 성이나 쌓는 자가 어떻게 남의 운명까지 들여다보는 건지.


석주는 성총과 성능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촉이 맞았다. 한눈에도 범상치가 않은 사제였다. 체건을 보자마자 가족관계, 기질, 운명까지 읽어낸다면...


"자네들 이름이..."

"소승은 화엄사의 성총이라 하옵고, 이 친구는 성능이옵니다."

"성총과 성능...혹시 관상 말고 사주도 보시나."


쳐다보기만 해도 눈이 찌푸려질 만큼 비대한 거구를 보고도 성총이 덤덤히 웃었다.


"물론이지요."

"따라오게."


석주는 가만히 뒷짐을 지고 탱자나무 앞을 떠났다. 축성현장을 감독하겠다며 승군들을 사열시킨 병조판서의 행보 치고는 특이했다. 성총은 그런 석주의 뒷모습을 쳐다보곤 자신의 어린 제자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같이 가자꾸나."

"예..."


성능은 고개를 갸웃하며 체건을 흘끗 돌아보았다. 어느덧 덤덤하게 준기를 잡아끌고 석주를 뒤따르는 그 옆얼굴이 도토리묵처럼 굳어 있었다. 겉보기엔 단단해 보여도, 막상 한입 베어물면 부드럽게 부서지는...아직은 여린 영혼이 보였다.


헌데 묘하게도 자신 만큼 유심히 이 형을 관찰하는 눈길이 있었다. 정영의 집요한 눈길을 느끼고서 성능은 체건과 정영을 번갈아서 쳐다보곤 이내 입을 닫았다. 옆에서 스승이 소매를 잡아당기는 참이었다. 넌 그 호기심이 문제니라, 그리 스승이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성능은 스승 성총과 함께 김석주와 체건 일행을 따라 탱자나무 뒤로 돌아 산등성이 쪽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강화유수는 눈밑을 또 실룩거렸다. 뚱땡이가 웬 뚱딴지 같은 짓을 하는 건지.


"신축년 팔월 십오일. 어떤가?" 

 

성총은 발치의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줏어서 그 자리에서 정좌하곤 석주가 불러준 사주를 적었다.

 

辛丑年 八月 十五日


"태어난 시각은요."

"시각까지 알아야 하나."

 

석주가 시큰둥히 되물었다. 본인 사주가 아닌 모양이었다. 성능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되었습니다."


성능은 성총이 사주를 읽어내길 기다리며 자신도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앞에 커다란 흰소가 눈부신 빛을 발하는 환영이 그려졌다. 얼룩이라곤 한점도 없이 순백의 털을 반짝이는 소가 눈앞에서 가만히 투레질을 했다. 흰소의 해, 유독 음기가 많아서, 가뭄이 들고 만물이 굶어죽는 해에, 투레질을 하여 비를 예견하는 환영...


희우犧牛...


천자天子가 제사를 지낼 때에 사용하는 순백의 소...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제물의 환영이 점점 또렷해졌다. 성능은 그 희우의 잔상이 남은 눈동자로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희우로 제사를 지내는 천자의 환영이 점점 윤곽을 드러냈다.


봉안鳳眼을 가진 용안龍顔, 세 개의 여의주를 잡으려다 그 용안을 스스로 할퀴는 일곱개의 손톱, 칠조七爪에서 그중 두개는 깨져버려 오조五爪가 되어버린 손톱, 그 손톱 위로 스스로 쓰러져 피투성이가 되는 흰소, 희디 흰 목덜미에서 한방울 두방울 불어나는 핏물, 그 핏물에 잠겨 몸부림을 치며 함께 피눈물을 흘리면서 제 다리를 찌르는 황룡, 그 두눈에서 피눈물이 들어가며, 다리에서 철철 흐르는 붉은 핏물을 딛고 일어서는 황룡...깨져 버린 세개의 여의주에서 한알 만을 입에 물고 비통하게 포효하는 황룡의 가슴어림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세 마리...반쯤 홀려 있는 성능의 귓가로 스승 성총의 음성이 들렸다.


"전생에 여자였습니다."

"뭐?"


석주는 기가 차서 왼쪽눈을 실룩이며 되물었다. 하지만 성총은 석주의 반문이든 질문이든 대답해줄 겨를이 없었다.


"음기가 지극히 강한 신축년에 태어났으나, 그 영혼이 메마를 것이요. 성품도 본래 인자하고 인내하나 한번 화를 내면 잘 풀리질 않으며, 스스로 정직하나 남을 믿지 않고, 부모의 덕이 없어 홀로 외롭게 성취하리니...몸이나 얼굴에 흉터가 있어야 명줄을 이을 것이고, 자식은 세 아들을 두지만 한 아들만이 종신終身(천수를 누림)을 할 것이고, 처복이 불길하여 기러기를 세번 품으리니..."


석주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들을 수록 흉하였다. 이 요망한 땡중이 지금 가당치도 않은 얘기만 늘어놓는 참이었다. 음기니, 흉터니, 이런 흉한 말로도 부족해서 처복이 불길하여 기러기를 세번 품는다고까지 하였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아내를 맞이할 때 기러기를 품에 안는다. 헌데 기러기를 세번 품는다고 하였으니, 말 그대로 세번 혼례를 치른다는 얘기였다. 석주는 두눈에서 흉폭한 살기를 폭사하며 물었다.


"지금 누구의 사주를 입에 담았는지 아는가?"

"누구입니까?"

"알면 너는 죽는다."


석주는 어금니를 꽉 물고 씹어먹듯 을러댔다. 성총은 흠칫하여 입을 채 다물지도, 벌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석주를 쳐다보았다.


"사부, 흰소로 제사를 지내는 천자의 모습이에요."


성능의 말에 성총이 흠칫 놀랐다. 하필이면 희우로 제사를 지내는 환영이 성능의 눈앞을 덮었다니. 지금 자신은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지존의 운명을 떠벌렸을 지도 모른다. 그 생각 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한 사람만 더 봐주게."

"예?"

"신축년 구월 삼일."

"똑같이...흰소띠로군요."


성총은 석주가 굳이 또 한사람의 사주를 불러준 것이 찜찜했다. 앞서 들은 자의 생년일시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교란을 시키려고 이러는 건지. 하지만 스스로도 기억하면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그는 앞서 들은 귀인의 생년일시를 애써 담아두지 않고 바로 눈을 감았다.


"태임이로군요.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성군의 비로서 훌륭히 보필하고 또 성군의 모후로서 보양할..."


하지만 성총의 풀이는 성능의 돌발적인 말로 끊겨버렸다.


"어? 희우, 그 자첸데요. 천자를 위해 희생하는 귀한 제물 그 자체..."

"뭐? 희우...그 자체?"


석주는 미간을 찌푸리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성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두눈을 지릅뜨고 성능에게 따져 물었다. 그 짙은 눈동자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희우라니!"


성총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석주의 질문만 들어도, 상대가 여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찜찜했다. 제자는 희우를 보았다.


성능의 두눈은 자신이 들은 생년월일의 임자에 대한 서글픈 연민으로 반짝였다. 문왕을 낳고, 길렀다는 전설의 여인, 세상 모든 여인들이 꿈꾸는 여인상...사부는 그 태임의 운명을 읽었지만 자신은 희우의 운명을 읽었으니 억울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희디 흰 소의 환영만 떠올랐으니, 스스로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성총과 성능의 얼굴을 보고 석주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 분명 태임의 사주가 맞았다. 그 용하다는 화엄사의 벽암 각성覺性, 그리고 불영사의 천옥天玉에게 거듭 확인했던 터였다. 게다가 방금 저 총섭(승장)도 태임이라 말했으니...


애송이의 말쯤이야...


석주는 애써 부인하느라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워낙 육중하여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도 않을 듯한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는 허공을 응시했다. 머릿속이 그저 혼란스러워서 다 잡은 고기인 준기도 그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정영과 체건이 준기의 양 옆구리를 꿰어차는 참이었지만.



아침부터 두 장의 사직소가 또 편전 어탑 위 서안에 놓였다.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의 이름으로 올라온 사직소를 받아들고 숙종은 입술을 가만히 비죽이며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일단 승지를 보내어 허적부터 함께 들게 하였더니, 허적은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어탑 아래에 엎드려 말 없이 흐느끼기만 하는 참이었다. 허적과 함께 입시한 승지가 혀끝을 말아올려 윗니를 더듬으며 말없이 눈치만 보았다. 이리 서글프게 울어대니 왕이 좋은 말로 달래줘야 할 판이었다.


"영상...진정 좀 하시오."

"신 허적...전하를 뵐 낯이 없사옵니다. 강도 흉서에 이어 이젠 궐문 까지 불측한 벽서가 판을 치니...이대로 전리로 돌아가 농사나 짓다가 죽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런 소리 마시오. 내 영상의 충심을 어찌 모르겠소?"


충심忠心이 썩으면 충심蟲瀋(벌레즙)이 되겠지만. 숙종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하는 수 없이 허적을 위로했다.


"그저 전하의 성은에 감읍, 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허적은 서럽게 헐떡이는 흉골이 진정되고서야 품속을 더듬어 한장의 종이를 꺼내어 주섬주섬 펼쳐놓았다.


"여기, 벽서의 등본謄本(옮겨적은 사본)이옵니다."

"등본은 어이하여?"

"일단 보시옵소서."


허적은 배석한 승지에게 눈짓했다. 승지가 벽서 등본을 들고 어탑을 올라 서안 위로 다소곳이 놓았다. 숙종은 의아한 눈빛으로 허적을 힐끔 쳐다보곤 손을 뻗어 벽서의 등본을 집어들었다. 그제야 허적이 말문을 이었다.


"그 말이 허망하지만서도, 거창居昌이란 이름까지 있어 신이 포청을 시켜 알아보았더니...거창의 말이, 이는 이환李煥이란 자가 날조했을 거라 하옵니다."

"이환?"

"예 전하. 이환이 거창의 주인 신성로辛聖老와 노비 문제로 다툴 적에, 거창이 주인을 대신하여 송변訟辨하여, 이환이 크게 망신을 당했는데, 이에 원한을 품고 거창과 신성로를 모함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종 이름까지 누가 알겠습니까? 거창의 말이 근거가 명백하여, 이환을 체포하도록 하였으니, 의금부로 넘겨서 엄히 다스리면 벽서의 일은 마무리가 될 것이옵니다."

"..."


빠르다. 너무도 빠르다. 숙종은 묘한 눈길로 물끄러미 허적을 쳐다보았다. 이미 김석주의 말대로, 거창과 금전 혹은 원한으로 얽힌 자를 수소문하는 참이었다. 헌데 허적이 기민하게 이환이란 자를 의금부로 넘겼다. 고작 하루만에.


왕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아랫입술 아래를 손가락끝으로 긁자, 허적은 내심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승지의 눈치를 살폈다. 왕의 언행을 적는 승지로선 그나마 왕의 동작을 눈치껏 살피고, 또 허적에게 눈치껏 전하는 터였다. 승지가 아닌 척하면서 슬그머니 오른손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긁었다.


"허면 이환이란 자의 입에서 공초만 받아내면 되는 건가?"

"예 전하."

"벽서의 일은 하루이틀 만에 마무리가 되겠군."

"그러...하옵니다."

"알았으니 영상은 나가서 일이나 하시오."

"예, 전하."


허적은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뒷걸음질로 물러나왔다. 하지만 편전 앞 행각으로 다가서는 허적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김석주...


그 빌어먹을 놈은 두눈 뜨고 코를 베이지도 않았고, 앉아서 손 놓고 당하지도 않았다. 미리 왕에게 언질을 두고서, 또 미리 포도청 종사관에게 손을 써서 거창에게 원한관계를 직접 물어보게 하였다. 훈련도감 백광보란 놈이 그 사실을 훈련대장 유혁연에게 고하고서, 유혁연도 눈치를 보면서 자신에게 발빠르게 고했다. 이미 김석주가 조치란 조치는 다 취하고 간 뒤인 만큼, 허적으로선 공정을 기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허적은 평소보다 뻐근하니 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힘겹게 행각의 신도를 걸어갔다. 신도 끝에는 윤휴와 허목이 굳은 얼굴로 수군거리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 고하셨습니까?"

 

굳은 얼굴로 윤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곁에서 허목도 그늘이 깔린 눈빛으로 허적 자신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허적은 입술끝을 말아올리면서 친근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냥 사직소를 내었을 뿐이네."

"사직소요?"

 

윤휴의 눈밑이 실룩였다. 미심쩍은 느낌으로 윤휴는 허적을 쳐다보았다.

 

"그게, 답니까?"

"그럼 또 뭐가 있겠는가?"

 

허적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고서 의금부로 향하였다. 의심을 거두지 않은 윤휴의 눈길이 집요하게 뒤통수에 꽂혔다. 하지만 그런 윤휴에게 쉽사리 속내를 보여줄 허적이 아니었다. 바둑이든, 장기든 수싸움인 만큼.

 

허적이 의금부에 당도해서 국청 뜨락을 지나는데 피떡이 되어 형틀에 축 늘어진 이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숨이 끊어졌나? 허적은 미간을 찌푸리곤 이내 측은한 감정을 떨쳐내고 서간西間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의금부에선 이환이 끌려와 옥사에 갇힌 채였다.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을 가두는 남간南間도 아니고 서간西間에 갇혔는데도, 가추枷杻(나무 칼과 차꼬)를 차지도 않고 고개와 손발이 자유로운데도, 이환은 의금부에 갇힌 사실 만으로도 벌벌 떨던 참이었다. 그는 창살 틈새로 불긋한 옷자락이 비치자 반사적으로 홱 돌아보았다.


"대감! 대감! 대감!"

"..."

"이건...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환이 냅따 창살로 달려들어 두손으로 움켜쥐고 물었다. 손발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아니라, 목소리도 염소울음처럼 떨렸다.


"..."

"제가 잘못되면...저처럼 칼쓰고 힘쓰는 놈들이 어디 대감을 믿고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

"대감, 제발 살려주십시오 대감..."

"..."

"제가 잘못되면, 저희 재종숙 어른도 가만 안 계실 겁니다요..."

"..."


허적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이환이 윤휴의 족손이었다. 무관 벼슬을 얻겠다고 윤휴의 집을 들락날락하다가, 또 허적 자신의 무사들과 얽히면서 이번 일을 시켰다. 허견은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고개를 기울여 이환에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그러니 윤휴의 이름을 팔란 말이다."

"네?"

"벽서가 걸리던 밤에 어디서 잤느냐?"

"그, 그건...이교항 이사립의 집에서..."

"그래서야 살아남겠느냐?"

"그래도..."

"걱정마라. 전하께서 윤휴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저, 정말이십니까?"

"윤휴의 이름만 나오면 다 묻으실 것이다."

"..."

"다시 묻겠다. 어디서 잤느냐?"

"저희 아저씨댁에..."

"그래, 그리 공초를 구술하면 되는 것이지."


허적의 얼굴은 차가웠다. 이제 불똥은 윤휴한테 튀었다. 허목을 선인仙人이니 뭐니 떠받드는 윤휴놈을 물고 늘어질 터였다. 제 핏줄이라면 한방울이라도 섞여도 다 거두고 보는 윤휴가 이환을 외면할 리도 없었다. 윤휴는 물론 허목까지 손발을 묶어두었으니 이번 일은 그저 조용히 수습하면 그만이었다.



"신의...이름이 나왔다구요?"


윤휴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하지만 푸르른 새벽공기가 드리운 통명전 대청에서 왕은 뒷짐을 지고 오연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감히 왕의 용안을 올려다볼 수가 없어, 고개를 조아린 채로 왕의 그림자만 내려다보면서, 윤휴는 자신의 홍단령 한자락을 꼬깃하게 움켜쥐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아니, 이미 이환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다. 자신의 먼 손주뻘 되는 녀석. 그러니까 외사촌의 손주쯤 되는 녀석. 자신과는 피가 한두방울 섞였을까 말까 한 녀석. 그래도 벼슬 한 귀퉁이 얻어보겠다고 자신한테 와서 자신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자게도 해주었다. 헌데 이놈이 벽서를 쓴 익명의 손으로 지목되어 불안하긴 했다.


환이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윤휴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옷자락을 부여쥔 손가락끝이 덜덜 떨렸다. 허적의 짓이다. 제 손으로 밑을 닦는 허적이 아닌 만큼, 환이의 손을 빌려 벽서를 쓰게 하고, 나한테 떠넘긴 것이다. 한번쯤은 전하께서 덮어주시겠지, 그리 믿고 덮어씌운 건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청남을 하나라도 없애버리려고 수를 쓰는 건지.


"나는 백호공을 믿소. 공을 믿지 않았다면 이리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아무도 모르게 공을 불러 독대를 하겠소?"

"..."


윤휴는 왕의 서늘한 옥음에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왕은 지금 자초지종을 들으려고 자신을 구슬린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탓에 뭐라 답할 수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


윤휴는 대답할 말도 잊었다. 날이 밝으면 당장 판부사 허목을 찾아가서 살려달라 청해야 할까나. 언제나 자신이 비빌 언덕은 허목이었다. 그 은백색의 눈썹과 수염에 가린 눈은 세상만물의 이치를 통달했고,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발은 천지간의 도道에 도달했다. 허목이 왕에게 한마디만 해주면 왕은 조용히 이 사건을 덮어줄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어심을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윤휴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사이, 왕이 도로 동온돌로 들어가 버리고, 그 측근내관 두광이 지필묵을 윤휴의 무릎맡에 내려놓고 대청 앞을 지키고 섰다. 하지만 윤휴는 섣불리 먹을 갈지도, 붓을 잡지도 못했다. 일단 서늘한 새벽공기에 머리를 식히고서, 이번 일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 봐야만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도, 이번 일은 허적의 농간이 분명했다.


나를 건드렸다 이거지, 우리 환이를 건드렸다 이거지...


윤휴는 검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벼루 위의 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옆의 연꽃무늬 연적을 기울여 물을 붓고서는 먹을 갈기 시작했다. 시꺼먼 먹이 조금씩 갈리면서, 물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렇게 벼루 위에 갈리는 먹처럼, 윤휴의 눈동자도 더욱 검게 짙어졌다. 반시진이 흘러서야, 윤휴는 차자를 써내렸다. 그리고, 그 차자는 동온돌 안에서 의관을 정제하던 왕의 수중에 들어갔다.


- 죄수 이환이 공초에서 신의 성명을 거론했다는데, 이환은 신의 먼 친척으로서 일찌감치 신의 집에 왕래했던 자입니다. 그는 송사 상대방이 지목한 탓에 금부에서 형을 받는 중입니다. 만약 이환이 실제로 간악한 죄를 범했는데 신이 알지 못하고서 물리치지 않았다면, 이는 진실로 신의 죄입니다. 또한 그에게 죄가 없는데 상대방의 잘못된 지목으로 죄를 입는다면, 이는 죄가 없으면서 신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이오니, 모든 것이 신의 죄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글이군."


왕의 냉소에 두광은 두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어디서 많이 본 글이라니. 자신이야 정치든 학문이든 그리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윤휴의 글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저 의아히 왕의 눈치를 볼 따름이었다.


한달 전에 허적이 내게 했던 말과 똑같단 말이지.


숙종은 입안의 차가운 한마디를 꾹 눌러 삼켰다. 신의 아들이 남의 아내를 약탈해서 집에 두었다가 돌려보냈으면 어찌 한집에 있으면서 신이 몰랐겠나이까...였던가. 윤휴는 지금 일부러 그때 그 허적의 변명을 흉내내어 썼다. 어디에도 허적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윤휴는 허적이라 행간의 화살로 지목한 것이었다.


"아, 머리야..."


꼭두새벽부터 두통이라니. 숙종은 의관을 정제하다 말고 그대로 살금살금 동온돌 문을 열어젖혔다. 놀란 두광이 만류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문간을 지키던 나인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숙종은 그대로 소리죽여 동온돌을 나와 대청마루를 가로질렀다. 서온돌 문간을 지키던 나인들이 화들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이쪽으로 온다...이를 어째...


이미 두 다리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것을. 숙종은 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손수 문을 열었다. 희디 흰 명주로 만든 적삼과 속곳치마 차림으로 중궁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귀가 어둡지가 않은데도, 회임하고부턴 잠귀가 어두워진 모양이었다. 그러다 출산이 임박해오면 도로 잠귀가 밝아지기야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숙종에겐 좋은 기회였다. 그는 그대로 까치발을 하고 문지방을 넘어 진홍의 옆으로 가서 철푸덕 드러누웠다.


"중궁, 나요...놀라지 마시오..."

"..."


놀라기는 커녕 깨지도 않는 것을. 숙종은 입맛을 쓰게 다시면서 진홍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허리가 그다지 굵어지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 굵어졌을 뿐이었다. 허리를 감은 두 팔 가득 진홍의 말랑말랑한 체온이 느껴졌다. 숙종은 진홍의 희디 흰 목덜미에도 얼굴을 묻었다. 다디단 살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전하..."

"춥소..."


잠결인지, 얼떨결인지, 진홍의 음성이 자신을 부르자, 숙종은 오뉴월에 추위 타령을 하면서 입술도 목덜미에 묻었다.


"하오나 전하, 태중에는 함께 동침해선..."

"손만 잡고 자는데도?"

"..."


진홍은 눈꺼풀을 깜빡였다. 이미 잠이 달아났다. 손만 잡고 잔다면서 그 손은 지금 자신의 허리, 아니 배 위에 얹은 낭군이다. 한숨이 나왔지만, 그 한숨 속에 웃음도 범벅이 되었다. 등에 바짝 달라붙는 지아비의 체온을 느끼면서 진홍은 두눈을 다시금 깜빡였다.


손만 잡고 잔다더니...


진홍은 자신의 기나긴 머리채를 슬그머니 잡고선 자신의 배 위에 얹은 지아비의 손등을 살짝살짝 간지럽혔다. 목덜미 뒤에 닿은 지아비의 입술이 피식 웃음을 뿜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진홍도 배시시 웃으면서 불안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이번엔 무사히 아기가 태어날까. 아기가 무사히 와줄까...살얼음이 얇게 깔린 듯한 오늘 또 내일이 그저 불안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을 편히 먹는 것일 따름...진홍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짙은 속눈썹이 이유없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숙종은 편전 서안에 올라온 상소를 훑어보다 자못 흥미로운 얼굴로 두건의 상소를 따로 솎아내어 양쪽 무릎 위로 펼쳐놓고 가만히 편전 안 신료들의 등줄기를 훑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조아리지만, 서로 고개 밑으로 오가는 시선들이 금세라도 서로 물어뜯을 기세로 맹렬하게 충돌하는 참이었다.


이 두 건의 상소 덕분에 남인일색인 조정이 두 갈래로 확 찢어져 버렸다. 허목을 위시한 청남, 허적을 위시한 탁남이 제대로 충돌했다. 그게 신기하여 숙종은 두건의 상소, 아니 차자를 양쪽 무릎 위로 펼쳐놓고 다시금 읽어내리면서 손가락 끝으로 어좌를 두드렸다.


톡, 톡톡, 툭툭


신료들의 등줄기가 움찔했다. 반면 미동도 않으려고 오히려 굳어있는 등줄기도 있었다. 허적이었다. 숙종은 심술궂은 얼굴이 되어 더욱 신명나게 손가락 끝으로 어좌를 두드렸다.


탁, 탁탁, 턱턱


왕이 어좌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다, 점점 신명나게 탁탁 두들기는 소리에 신료들은 눈초리가 더욱 험악해져서 허목, 홍우원, 권대재, 이수경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모르긴 해도, 지금 누구의 상소를 읽는지는 불을 보듯 훤하였다. 저 손끝에 어린 심술이 말해주었다.


"전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허적이 힐난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이미 승정원에서 저들 상소를 봉입하며 자신들도 무슨 내용들이 올라왔는지는 충분히 알았다. 그래서 더 부아가 치미는 터였다.


"아, 벌써 중궁이 넉달째가 되어가지 않소. 넉달이면 소산의 위기는 넘긴 걸로 봐도 좋다기에."

"그러시옵니까?"


허적이 굳은 얼굴로 건조하게 대꾸했다. 아들 허후에게 쥐를 풀든, 고양이를 풀든, 중궁을 괴롭히라 하였더니 왜 중궁이 벌써 회임 넉달째로 접어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놈이 중궁을 연모하더니 똥오줌 분간도 안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 일은 편전을 나서서 궁리할 일이고, 당장 왕이 상소 두건을 무릎에 놓아두고 어좌를 두드리고 또 두들기는 것만 봐도 중궁 때문에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허적은 어물쩍 둘러대는 왕이 얄미워서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하오나 아기의 태동에 주의를 하셔야 하옵니다. 태동이 들리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으시면 아니되옵니다."

"걱정해주는 거요?"


숙종은 두눈에 가시가 돋친 채로 허적을 쏘아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눈에 가시가 박혔는데 웃는 것도 참 힘든 노릇이었다.


"물론이옵니다. 전하, 벌써 세번째 회임이시오니..."

"..."


세번째 회임. 숙종은 아픈 곳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벌써 세번째 회임인데, 중궁이 무사히 아기를 낳을 수는 있을 지, 아기가 무탈히 태어날 수는 있을 지, 또 무고히 자랄 수는 있을 지...가슴 한구석 또아리를 틀어버린 불안이란 놈이 혀를 낼름거리는 것만 같았다.


"국정이 평안해야 복중태아도 평안할 것이오. 허니 영상이 제대로 과인을 보필해야지 않겠소?"

"무슨 말씀이시온지..."


허적이 시치미를 떼고 묻자, 숙종은 무릎 위의 차자를 툭툭 발치로 내던졌다.


"이건 그대들이 아무나 흉인이라 의심하여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니, 이러다 도성에 개미새끼 한마리도 남지 않게 될 거라는, 이조판서 홍우원의 상소."

"..."

"또 이건 영상이 흉서를 이틀이나 감추었다가 뒤늦게 공개한 곡절이 미심쩍다는 헌납 이수경의 상소."


어탑 바로 아래에 서 있던 도승지 민종도는 하나하나 발치로 굴러떨어지는 상소문들을 당혹스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같은 남인인데 자신들에게 칼을 빼들었다. 흉인을 잡아들이는 문제로 반기를 들질 않나, 또 영상대감을 감히 수상쩍다고 모함하질 않나...저 상소문에 적힌 글자들을 한자한자 파내어서 씹어먹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 공자와 양호가 서로 용모가 닮은 것과 같이, 어찌 용모만으로 범인을 찾겠습니까? 진짜 흉인이라면 벌써 도성에서 자취를 감추고 멀리 숨었을 터인데, 무조건 흉인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도성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고문을 하니, 민심이 동요하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이러다 도성에 개미 새끼 한마리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전하, 신이 대사간 권대재와 상회례를 행할 당시, 권대재의 말이 흉서는 초9일에 병조판서의 집에 전달되었고, 그 이튿날 병조판서가 영상에게 보였으며, 또 이틀이 지나서야 영상이 비로소 좌상에게 알렸습니다. 그 이틀을 영상이 지체한 것이 괴이하다 하였습니다. 기밀을 유지하고 흉인을 은밀히 수색하려는 뜻이었다고는 하나, 자꾸만 쉬쉬하고 덮어두려는 듯 하니, 밝으신 성총으로 살펴 주시옵소서. 헌납 이수경 배상拜上


이미 봉입하는 과정에서 열두번도 더 읽어본 상소들이었다. 하필이면 이조판서와 헌납이 올리는 차자라서 봉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 대신 저들을 찍어내기로 결정한 터였다.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영상대감이 아니었다. 문제는 저 권대재였다. 사헌부 헌납 이수경이 이런 상소를 내어놓은 것은 그 수장인 권대재의 묵인이 있었을 터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좌상대감의 사촌아우인 저 권대재가, 그간 충실히 허적의 말을 듣던 저자가 어찌 허목의 편에 설 수가 있는 건지.


"참으로 유감이오. 그동안 영상이 조정을 잘 다스려온 것은 과인도 잘 아오. 헌데 어찌 이런 분란이 생겨서 과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지."

"송구...하옵니다."


허적은 두손에 땀이 배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꾹 누르고, 고개를 틀어 권대운과 시선을 교환했다. 품속의 물건, 즉 사직소를 뜻하는 눈짓이었다. 권대운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허적은 재빠르게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자신들은 언제든지 사직소를 내어놓을 수 있도록 품속에 넣고 다니는 신세였다. 그만큼 조정의 수장 노릇을 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물론 사직소의 절반은 왕을 길들이는 용도로도 쓰이고, 또 절반은 신료들을 길들이는 용도로도 쓰였다. 지금 자신에게 날카로운 손톱을 내어보이는 왕에게도, 감히 자신에게 발톱을 세운 허목 이하에게도, 꼭 필요한 사직소였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사직소를 꺼내놓는다면, 왕이 읽어보기도 전에 먼저 상소를 접한 괘씸죄가 적용될테니, 일단 오늘밤만 넘기고서...그렇게 뜸을 들였다가 꺼내놓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왕은 자신들의 사직소를 반려할 수 밖에 없다.


허목이냐, 허적이냐...그 선택의 순간에 왕이 누구의 손을 잡을 지는 너무도 뻔한 것을. 허적은 차갑게 입꼬리를 굳혔다. 자신들의 왕은 뱀처럼 차가운 온도를 지녔다. 지금 자신에게 신랄한 혀끝을 보이더라도, 그 혀끝을 돌리고 손을 잡아줄 위인이었다. 어리지만, 너무도 어리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계산할 줄 아는 만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편전을 물러나오면서, 허적은 행각 앞에서 허목과 날선 시선을 주고 받았다. 지팡이를 짚은 허목은 서로 시선이 부딪치자 오히려 상체를 쭈욱 펴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런 허목에게 질 세라 허적 또한 정면만 보았다. 더는 서로 시선이 합쳐질 이유가 없었다.


"북망산北邙山이 코 앞인데 더 올라갈 산꼭대기가 남으셨소이까?"

"영상이야말로 황천黃泉이 발밑인데 더 퍼마실 샘이 남으셨소?"

"저야 오래 살아야지요. 대감 관棺도 짜드리려면."

"내 죽기 전에, 영상 머리에 쓴 그 관冠부터 벗겨드리리다."

"어디 한번 해보시지요. 가뜩이나 생각 많은 전하께서 누구를 선택하시나."


앞만 보고 대화하는 두 사람의 표정은 그저 평온했다. 하지만 그들의 흉중은 무섭게 들끓었다. 적이 없다 보니 같은 남인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빼들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장은 끝나지 않을 이 싸움이 끝나면, 아마 둘 중 하나는 다시는 이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작가의말

1. 김석하는 실제로 김석주의 족제 김석문을 모델로 가공한 인물입니다. 일찌기 부모형제를 잃고 포천에서 장성했고, 김석주가 높이 샀던 인재이고, 김석주와 최석정의 천문관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고도 하고, 조선에서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고. 정조대 홍대용 등 북학파들이 김석문의 지전설을 수용했다고도 하네요. 한평생 집밖으로 두문불출했다는데 저는 초년기까지 좀 방랑하는 인물로 설정했습니다.


2. 김석주가 죽고 그 외아들마저 죽은 후에 대가 끊겨 족손이 양자가 되어 대를 이었는데 그 이름이 하필 김성하...입니다. 알고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제 작명센스가 이 모양일 뿐...=_=


3. 신축년 사주는 그냥 웹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인용했습니다. 숙종의 사주는 아닌데 너무 비슷해서.


4. 설연휴 즐겁게 쇠시길...^^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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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1.30 14:14
    No. 1

    작가님의 자료 조사가 그만큼 깊이가 깊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작명 센스의 문제가 아니라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해 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1.30 15:57
    No. 2

    아니요. 제가 원래 '-하'자 이름을 좋아해서, 그냥 김석하로 바꾸고 봤는데...왜 하필 김석주의 양손자로 입계한 이름이 김성하인지...;; 천지인 때도 이천림으로 지은 이름이 실제로 이천기란 이름에 근접해서, 결국 그냥 이천기로 바꿔버렸구요.

    ANU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해 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1.30 14:14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1.30 15:58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2.02 09:14
    No. 5

    설 잘쇠셨는지요

    늦게 돌아와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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