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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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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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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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5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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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해의 그림자 171

DUMMY

붉디 붉은 해그물이 서온돌 장지문으로 스며들었다. 서안 위에 펼쳐진 희누런 모변지毛邊紙도, 그 모변지 뒤에 놓인 백자완白磁碗(흰 접시)에 담겨서 새하얗게 반짝이는 호분胡粉도, 그 호분을 붓끝에 묻혀서 흰 연꽃잎을 그려내는 희고 고운 손도, 그 손끝에 움직이는 호분胡粉을 덧발라 희디 흰 자태를 자아내는 연꽃잎도 모조리 은근한 연홍빛으로 물들였다.


진홍은 호분胡粉이 담긴 백자완 위로 붓을 내려놓고 가만히 자신의 연화도蓮花圖를 내려다 보았다. 흰 연꽃을 그렸는데, 붉은 석양 탓에 연홍빛 연꽃이 되고 말았다. 진홍은 실없이 웃고선 또 다른 붓을 들어 진한 먹물을 묻히고 연꽃 아래의 연잎을 그려나갔다.


"중전마마, 병판대감이 서찰을 보내왔사옵니다."

"병판대감이?"

"예."

"들이거라."


진홍은 침울한 눈빛으로 수락했다. 뒤이어 장지문이 열리고 소반에 서찰을 받쳐든 상아가 사뿐사뿐 들어섰다. 해그물이 당장 문틈을 파고들어 시뻘건 빛을 내뻗었다. 그 붉은 광채는 너무도 강렬하여 진홍의 서안까지 뻗어 흰 연꽃을 핏빛으로 물들여버렸다.


"..."


진홍은 손가락 끝이 굳은 채로 붉은 석양에 물든 연꽃을 내려다 보았다. 불길했다. 한참을 연꽃잎만 들여다 보자, 붓끝을 타고 검은 먹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그림의 왼쪽 상단에 먹뜸을 두 방울이나 만들어놓았다. 당황하여 붓을 옆으로 빼었지만 이미 늦었다. 진홍은 진한 먹물이 담긴 벼루에 붓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움츠렸다.


"어우 이 아까운 그림을...이게 다 돈인데..."


상아도 당혹하여 서안 앞에 꿇어앉아 소반을 무릎맡에 내려놓곤 황급히 품에서 무명 손수건을 꺼내어 먹뜸을 살포시 눌렀다. 이제 먹물이 흡수되었으려나 싶어서 손수건을 떼고 보니 그럭저럭 먹뜸이 흐려졌지만 그래도 자국은 남았다. 아쉬움에 입안이 다 매운지 상아가 혀끝을 말았다.


"어우 이를 어째..."

"..."

"이게 다 돈이라니?"


상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먹뜸을 수습하려 애를 쓰는데, 뒷덜미를 상전의 맑은 음성이 훑었다. 상아는 흠칫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낭패감에 상아의 두눈이 좌우로 흔들렸다.


"예?"

"이게 다 돈이라지 않았느냐?"

"제가요?"

"나를 기망할 셈이냐?"


진홍은 상아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상아는 진홍의 눈치를 보며 눈밑을 움찔거렸다.


"그게...중전마마께오서 버리라고 주신 그림을 소녀가 서화전書畵廛에 가지고 나가보니...거기 주인이 은 한냥에 사겠다고 하여서..."

"그래서, 팔았느냐?"

"그게...팔려고 판 게 아니고..."


상아가 쭈뼛거렸다. 진홍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상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팔려고 판 게 아니라니. 어쨌든 상아의 방금 태도로 봐선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제법 재미를 본 모양이었다.


"그래, 그동안 준 그림을 다 갖다 팔았더냐?"

"에...거기 주인이 마마의 그림을 워낙 마음에 들어해서...한번 팔아보았더니...그 뒤로 입소문이 나서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서...송구하옵니다."

"..."


꿇어엎드린 상아는 상전의 문책을 당할까 저어되어 두눈이 퀭해졌다. 벌써 목도 움츠러 들어 자라목이 되고 말았다. 슬그머니 두눈을 홉뜨고 눈치를 보니 상전은 오히려 시들어가던 두눈이 모처럼 생기를 띠는 참이었다.


"내 그림을 찾는 사람들?"

"예...지금은 마마의 그림이 은 두냥이나 하옵니다."

"은 두냥..."

"이 자리에 그냥 화압花押(수결 또는 서명)을 놓으시면...그런대로 가려질 것 같은데..."


상아가 진홍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권하였다. 이왕 들킨 일이니, 이참에 상전을 꼬드겨서 아예 본격적으로 그림을 팔아볼 요량이었다. 진홍은 상아를 쳐다보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봉이도 아니고 상아가 그림을 팔아올 줄은 몰랐다. 새침데기한테 이런 강단이 있었나 싶었다. 정말로 상아는 열심히 먹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심히 설득했다.


"안 그래도 서화전 주인이 화압을 넣으라고 성화였사온데..."

"화압?"

"예, 화공들이 자기 이름이나 별호를 써서 표식을 놓는 거요..."

"..."

"중전마마도 이젠 그림을 찾는 사람이 생겼으니 화압을 넣으심이..."


상아가 열띤 음성으로 계속 권하자, 진홍은 묘한 흥미를 느꼈다. 구중심처에 갇혀서 궐담을 넘는 일은 꿈도 꾸질 못했는데, 자신의 그림이나마 활개치고 돌아다닌다니 그저 신기했다. 진홍은 자신도 모르게 초점이 또렷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시선이 허공에서 흩어진다고 해야 하나...자꾸만 허공에서 초점이 풀리던 느낌이었는데, 웬일로 두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이나.


"하지만 내 본명을 넣을 수는 없고..."

"허면 당호를..."

"통명전, 대조전을 넣을 수는 없지."

"하오시면 별호를 넣으시면 되지요."

"내가 별호가 어디 있느냐."

"만드시면 되지요."


정말로 상아는 열심이었다. 진홍은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꼬집다시피 비틀어잡고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궐담에 갇힌 자신의 인생에 모처럼 숨통이 트일 일이었다. 그림이라도 궐담을 넘나드는 것이 그나마 좋았다. 반년동안 웃을 일이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새순이 돋듯 입가에서 웃음이 돋았다. 진홍은 다시금 손을 뻗어 먹물을 묻힌 붓을 집어들고 먹뜸 위로 한글자한글자 써내렸다. 두글자의 화압이 먹뜸을 감쪽같이 덮어버렸다.


麗生


"려...생?"


상아는 어쩐지 사내느낌이 나는 화압에 고개를 갸웃했다. 당호를 써서 통명전通明殿의 통명通明이라고 쓰는 것도 아니고, 평소 즐기는 연꽃을 별호로 삼아서 연화蓮花라고 쓰는 것도 아니고, 려생麗生이라니.


"고울려에 날생이면...?"

"김씨란 뜻이다."

"김씨...요? 이게 어떻게요?"

"그런 게 있다."


상전이 더 설명을 해주지 않자, 상아는 아랫입술을 비죽였다. 불만스런 눈길은 이내 화압으로 먹뜸을 가려서 멀쩡한 그림이 되어버린 연화도에 머물렀다.


"이건...저 주실 것이지요?"

"욕심도 많구나."

"하오시면..."

"일단 팔아서 가져오너라. 허면 그동안 나 몰래 그림을 판 죄는 묻지 않으마."

"..."


상아가 입을 다시 비죽이는 것도 아랑곳 않고, 진홍은 다시 붓을 벼루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반 위로 손을 뻗어 김석주의 서찰을 펼쳐 들었다. 빠르게 서찰을 훑던 그녀의 눈길이 흩어지듯 흔들렸다. 분부를 받들어 자신이 암탉 한마리를 사람을 시켜 허적의 고유제 제삿상과 시호연 잔칫상에 시원하게 투하하였다며, 허적은 이를 두고 유인酉人이 스스로 망할 징조라며 암탉을 잡아죽이고, 갈기갈기 찢어놓았다는 얘기였다.


"..."

"중전마마? 혹여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아니다."

"하오나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


진홍은 석주의 서찰을 접었다. 나쁜 소식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모악산에서 가장 힘이 좋은 닭을 잡아다가 허적의 좋은 날을 망쳐놓고 싶었을 뿐이었다. 본디 암탉보다는 수탉이 더 힘이 센 법이지만, 그래도 수탉이 아니라 암탉이어야 했다. 서인을 뜻하는 닭, 그 중에서도 여인을 뜻하는 암탉, 암탉 중에서도 어미모母자가 찍힌 모악산 사축서의 암탉이어야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허적과 허견은 그 암탉을 보낸 손이 누군지를 알아차리고 자신을 찢어죽이겠다고 벼르고 벼를 터였다.


그러라고 그 암탉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라고. 진홍 자신이 그 암탉이 되어 허적이든 허견이든 그들 손에 숨이 끊어지면, 지아비도 더는 참지 만은 않을테니. 허적 부자는 가장 처참하게 핏값을 치를테니. 그렇게 그녀 자신이 적진에 뛰어든 채로, 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저들 수중에 쥐어준 채로 핏빛 동아줄만 기다릴 따름이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그러다 몸이 축나십니다."


홍만종이 곁에 서서 재촉하였지만 허적은 밤안개가 자욱한 양화진 잠두봉 위에 정좌하고 앉아 자신의 그물을 손볼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무릎맡에 놓인 두개의 좌등이 어슴푸레 어둠을 밝혔다. 지팡이에 새겨진 잉어문양 정도는 비출 만큼은 불빛이 밝았다. 그래도 눈이 침침해서 허적은 몇번이고 두눈을 끔뻑였다.



낚싯그물이 삼천 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라, 허적은 자신이 벼리만 잘 다루면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삼천코의 벼리가 한순간에 풀어헤쳐지는 참이었다.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그물코가 하나둘씩 풀어헤쳐져서 고기를 잡긴 커녕 자신의 손모가지도 김석주의 고리못에 찍혀버릴 판이었다.


허적은 눈도 침침한 마당에 그물을 고치겠다고 혼자 미련을 떨다가 그만 한숨이 목에 걸렸다.


"대, 대감마님!"


별안간 잠두봉 기슭에서 마름 황씨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달려왔다. 허적은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황씨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흙빛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데 말라붙은 입술이 채 떨어지질 않았다.


"..."

"..."


달려온 황씨도 숨이 가쁜 탓인지, 맘이 급한 탓인지, 입술을 달짝이기만 하고 말을 꺼내질 못했다. 보다 못한 만종이 답답해서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

"심호흡을 하고 나서 답하게나."

"예, 예..."


황씨는 거무죽죽해진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겨우 호흡을 골랐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또 마시고, 그러다 제 숨이 목에 걸려 켁켁거리면서 가슴을 두들겨도 보고. 그렇게 겨우 호흡을 안정시킨 끝에 그는 허적의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금부도사가...집에 배소단자를 가져왔구먼요."

"배소? 나 말인가? 나도 유배령이 떨어졌더냐?"


허적이 덤덤한 음성으로 물었다. 금부도사라 하였으니 필시 자신일 터였다. 이 집안에서, 여기 서호 부근에서 금부도사가 직접 배소단자를 가져올 만한 인물은 자신 밖에 없었다.


"아니...작은 나으리요..."

"뭐? 우리 견이는 금부도사가 올 신분이 아닌...아니 견이가 왜?"


허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자신에게 배소단자를 가져온 것이라면야 얼마든지 두렵지 않았다. 서인이니 남인이니, 산당이니 한당이니, 청남이니 탁남이니, 서로 물어뜯는 조정에서 귀양 한두번 다녀오지 않은 당상관이 있기나 하던가. 품계가 오를 수록, 관직이 오를 수록 그만한 수난은 당연히 수반되는 일이었다. 헌데 자신이 아닌 견이라니? 이렇게 빨리 견이한테 배소단자가 내리다니?


"견이가 왜!"

"..."

"왜! 왜냔 말이다!"


허적이 벌떡 일어나서 황씨의 멱살을 두손에 틀어쥐었다. 황씨는 갑자기 목이 졸린 듯이 숨이 턱 막혔다. 칠순 넘긴 노인네가 무슨 힘이 그렇게 센 지. 하지만 자신의 멱살을 잡은 주인나리의 주름투성이 손은 후들후들 떨리는 참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허적의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자신의 배소단자라고 여길 때는 그나마 느긋하던 주인나리가 아들래미의 배소단자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급해졌다. 손가락이 수전증환자 마냥 파르르 떨렸다.


"왜냐, 왜냔 말이다..."

"그게...온갖 죄목이 덕지덕지 붙어서...소인도 잘 기억이..."

"뭐?"


허적은 다시금 숨이 턱 막혔다. 온갖 죄목이 덕지덕지 붙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금부도사가 직접 와야 할 정도면 대역죄인이거나 최소한 거기에 준하는 중죄인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아니, 자신의 신분이 영의정이니, 영의정의 자제란 이유로 금부도사가 왔을 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아들에 걸맞는 대우로. 예우로.


"어디더냐?"

"네?"

"어디로 귀양을 간다더냐?"

"에?"


황씨는 상전이 정신을 쏙 빼놓는 바람에 품속에 배소단자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기억했다. 배소단자가 내렸다고 가져와 놓고도 기억을 못하였다. 깜빡 졸다가 잠이 깨듯, 그렇게 정신이 돌아왔다.


"제, 푸, 품에...배소단자가..."

"배소단자? 어디, 어디?"


허적은 정신 없이 황씨의 품을 더듬어서 배소단자를 꺼내어 확인했다. 일어나서 배소단자를 보려니 좌등 불빛에서 멀어져서 글자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허적은 좌등에 가까이 상체를 굽혀서 배소단자를 불빛에 비추었다.


남해현南海縣


허적의 두눈이 지릅떠졌다. 남해현이라니. 이건 말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남구만을 귀양보낸 그곳이라니. 그는 배소단자를 꽉 구겨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남해현이라니, 남해현이라니. 이럴 수는 없었다.


"내 아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


홍만종은 옆에서 두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고, 두더쥐도 제 새끼는 귀하다더니. 아직도 장인이니 처남이니 하는 소리가 입에 달라붙지 않은 자신이었다. 내심 장인과 처남이 거북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맞이한 처妻도 아니고, 습첩으로 맞이한 첩妾일 뿐이었다. 그런 절차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허적은 남인의 영수이고, 허견은 아비의 위세를 빌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다니는 위인이었다. 허견을 볼 때마다 내심 인간말종이란 생각이 앞서는 마당에...자기 아들이 뭘 그리 잘못했냐면서 억울해 하는 허적의 모습도 어쩐지 괴리감이 들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는 홍만종의 시야 한켠에, 자신들을 몰래 염탐하는 충장위忠壯衛(궁문의 시위 및 궁밖을 감찰하는 부대)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가 만종을 보고 은근한 눈웃음을 지었다.


"..."


만종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의 별들이 그물에 얽매인 듯한 느낌에 몸서리가 처졌다. 당장 이곳 잠두봉을 내려가서 재산루로 달려가고 싶기도 하였다. 재산루엔 무서운 귀신이 있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땅의 수많은 돌들도 꾸역꾸역 먹어치울 귀신이 있었다. 그 시커먼 뱃속에 소중한 별과 돌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만 하는.



"우리 최부응교께선 안 가 보십니까?"


홍문관 청사에서 서학西學 서적이나 느긋하게 뒤적이는 최석정을 보고 오도일이 꺼낸 말이었다. 어쩌면 홍문관에서 가장 바쁜 이가 저 최석정일텐데도, 이토록 한가하게 명나라 말기에 편찬된 서학책을 들추는 것을 보면, 마음이 콩밭에 가 있거나, 콩팥이라도 어딘가에 팔아넘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뭘 말이오?"

"가 봐야지. 견공犬公이 귀양을 떠나는 날인데. 최부응교가 문외출송 당하는 날에도 그 난리를 쳤던 견공이잖우. 원래 사람은 받은 만큼 주는 거고, 주는 만큼 받는 거고. 그러니 나 같으면 당장 그 길목마다 꽃잎이라도 뿌려준다."

"난 바쁘오."


배소단자가 내렸으니 곧 허견이 여장을 꾸려서 귀양을 떠날 터였다. 그래도 남의 눈 무서운 줄은 알아서 아직도 인달방에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든 끄집어내려고 벼르고 벼르는 사람이 많았다. 헌데도 최부응교는 책에 실린 간평의簡平儀 도면이나 들여다보는 참이었다.


"아니 바쁜 사람이 천문책을 보시나?"

"누구한테 좀 선물로 줄까 해서 들춰보는데...이 천학초함天學初函이 무려 쉰세권 짜리라...이래서야 줄 수도 없고...이 간평의설簡平儀說 한권만 겨우 필사해서 줄까 해서."


석정은 천학초함天學初函의 간평의설簡平儀說 편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김석주의 곁엔 당연히 김석하가 있다. 김석하라면 그 내막을 충분히 알 터였다.


"누구 주게? 나는? 나는 안 주고?"

"이 정도 선물은 줘야 입을 열 놈이라서."

"뭐야, 그럼 뇌물이잖아."

"뇌물이란 말 하지 마시오. 그럼 안 먹힐 것 같거든."

"뇌물을 뇌물이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르라고?"

"..."

"뇌물에도 안 넘어갈 놈이면 괜히 애쓰지 마쇼."

"..."


오도일이 핀잔을 주듯 충고를 던지자, 석정은 콧잔등을 실룩였다. 누가 모르나. 머릿속이 복잡하고 또 착잡했다. 석하 그놈이 연루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그놈..."

"응?"

"아니 그놈..."

"누구 말이시오?"

"있소 그런 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알 수가 없는 그놈."


석정의 입꼬리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김석주가 온갖 모략을 꾸미는 와중에 자신을 진천에 감금시켜 버린 그놈. 김석주가 족제라고 아끼면서도 어쩐지 경계하는 듯한 그놈. 김석주를 위하는 건 분명한데 또 김석주를 위하지 않는 것도 분명한 그놈. 그러고 보니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게 없는 그놈. 그저 이 책을 건네면 몹시 좋아할 거란 사실만이 분명했다.



"같이...인달방에 가자구요?"


석하는 석정이 갑자기 자신을 대궐 앞으로 불러내어 한다는 말이 의아했다. 인달방에 가자니. 허견이 귀양가는 것을 보러가자는 얘기인가. 하긴 최석정도 사람인데 그간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서 어떻게든 뽑아내려 들었던 허견의 말로를 보고 싶을 터였다.


"그냥 혼자 가시지 왜..."

"왠지 자네는 영상댁 가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아서."


석정은 대궐 담벼락에 기대어 천학초함天學初函 간평의설簡平儀說 편을 읽으면서 덤덤히 대꾸했다. 석하는 두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석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석정이 방금 뭔가 의미심장한 얘길 한 것 같았다. 영상댁 가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다니. 자신은 영상댁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최석정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영상댁 가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긴다면...자신이 영상댁에 음으로 양으로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얘기였다.


"앞장서시게."


석정은 책을 접어 겨드랑이에 탁 껴고 걸음을 옮겼다. 겨드랑이에 낀 천학초함 간평의설 편이 석하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명明 말에 푸른눈의 선교사들이 전파한 천학天學 총서였다. 천문에 관심이 많은 김석주가 재산루에 야금야금 모으는 중이라 자신도 서학범西學凡 편이나 직방외기職方外記 편 정도는 읽었다. 덕분에 간평의설의 가치에 슬그머니 눈이 돌아가기도 하였다. 도대체 부응교 나으리는 왜 저리 귀하고도 위험한 책을 버젓이 팔에 끼고 다니는 건지, 괜히 조바심이 났다.


인달방에 당도하니 허적의 집은 이미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허견의 어미와 첩실은 눈물이며 콧물이 뒤범벅된 채로 허견의 도포자락을 부여잡고 몸둘 바를 몰라했다. 허견의 처남 강만송과 강만철, 그리고 친우인 이태서와 정원로, 신범화, 이원길 같은 자들도 안타까운 얼굴로 배웅나왔다. 하지만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 허견이었다. 어제는 금부도사가 왔는데, 지금 자신을 집앞으로 마중 나온 것은 금부서리였다.


"아니 금부도사가 온다더니 왜..."

"그분들은 바쁩니다."


금부서리가 딱 잘라서 답하였다. 정말로 바빴다. 갑자기 조정이 물갈이 되더니, 중신들의 귀양행렬이 시작되었다. 그 많은 중신들을 호송하려면 금부도사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터였다. 그런데 왜 사실대로 대답해놓고도 켕길까.


전에도 한두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당상관 한사람을 남해로 호송하는 역할을 자신이 맡았었다. 당상관 신분에 걸맞지 않게 금부서리가 호송을 맡은 일에 상대가 어이없어 했었다. 그때도 부비채浮費債를 내놓으라 그 당상관을 들들 볶았는데, 마침 제자가 나타나서 부비채를 대신 내주었다. 그 제자는 언제 어디서든 한눈에 띌 만한...


"아니 이것들이 나를 뭘로 알고! 내가 영상댁 자제니라!"

"어? 저 나으리는?"


금부서리는 버럭 성을 내는 허견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건너편 담벼락에 웬 어린 사내와 함께 나란히 기대어 선 청단령의 관얼굴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때 그 당상관의 제자와 얼굴이 똑같았다. 똑같은 얼굴이 싱그럽게, 혹은 징그럽게 웃었다.


"잘 지냈나? 이댁은 재물이 많으니 부비채를 미리 요구하게나. 많이많이."


그 얼굴이 눈웃음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금부서리는 움찔해서 목이 움츠러 들었다. 불과 몇달 전만 해도 꾀죄죄한 포의를 입었던 서생이 지금은 푸르른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청단령을 입은 모습이라니.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금부서리를 돌아보는 허견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금부서리는 어깻죽지를 움츠린 채로 두눈을 기민하게 굴렸다. 청단령의 사내와 일면식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이렇게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것만 봐도, 이 죄인과 저 청단령은 사이가 몹시 나쁜 모양이었다.


"최...최..."


겨우 보름간 본 얼굴이라선지 금부서리는 청단령의 이름까진 기억나지 않았다. 헌데 금부서리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허견이 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최석정에게 따져 물었다.


"최부응교께서 여긴 웬 일인가? 무슨 구경 났나? 뭐 줏어먹을 게 있다고 여길 왔으이?"

"아니...시호연 때 웬 암탉이 날아들었다고 하여...그 일을 물어보러 왔소만...아무래도 내가 날을 잘 골라서 왔나 보오."


석정이 웃는 낯으로 허견의 복장을 긁었다. 그 모습을 보는 금부서리의 속이 시꺼매졌다. 겨우 저 나이에 벌써 부응교라니. 지난날 그 스승을 괄시했던 일이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암탉? 그건 말 그대로 암탉이 뛰어든 거지. 모악산 하늘에서 몹쓸 암탉이."


허견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대며 답하였다. 어쩐지 어감이 이상하여 석정은 두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모악산 하늘에서 몹쓸 암탉이라니. 말뜻을 곱씹는 석정의 두눈에, 옆에서 석하가 열손가락을 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만 가시지요."


금부서리가 어깨가 위축되어 목소리가 수그러든 채로 허견에게 말하자, 석정은 미간을 찡그리고 한마디 툭 던졌다.


"이보게. 죄인호송을 할 땐 굳이 집앞까지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네. 육조거리에서 여기 인달방까지 이 먼거리를 뭘하러 힘들게 오나. 상대가 영상댁 자제라 그러나."

"그게...약속시간을 안 지키시어..."

"이왕 데리러 온 거 부비채나 두둑하게 뜯어가게. 부비채가 없으면 저 밀화갓끈을 빼앗게. 저래 뵈도 아주 귀한 보물이니."


석정은 다시 한번 얄궂게 강조하고 허견을 보고 진한 눈웃음을 지었다.


"꺽정이 너..."


허견이 석정을 보고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정말로 개의 목젖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졸지에 부비채도 뜯기게 생겼다. 물론 영상댁인 만큼 부비채를 낼 여력은 충분했다. 하지만 당장 금부서리가 출발을 요구하는 게 문제였다. 정말로 허견이 아끼던 밀화갓끈을 뜯기게 생겼다.


"우리가 대신 내겠소."

"이거면 충분하지."


허견의 처남인 강만철과 그 이복아우 강만송은 석정을 노려보며 자신들의 갓끈을 그자리에서 뜯었다. 귀한 청옥과 홍옥 틈새로 군데군데 밀화蜜花가 섞여 있었다. 당상관 이상만 할 수 있다는 밀화를 갓끈에 단 것만 봐도 허견이 그들에게 자신의 밀화를 내어준 걸 알 수 있었다.


"의리는 있으이."


석정은 그래도 허견의 인간적인 면을 본 것 같았다. 평소 허견이 저들에겐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어울리는 자들의 면면은 그리 시답지도 미덥지도 않았지만. 형편이 기울어 귀양을 떠나는 마당에 보옥을 떼어주는 정리는 보기가 좋았다. 허견을 배웅나온 자들의 면면을 훑어보던 석정의 눈길에 얼핏 낯익은 얼굴들이 닿았다.


저자들은?


착각일까. 통명전과 양화전을 지키는 자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 누구보다 왕의 침전 근처를 자주 찾은 탓에 금군들 얼굴 상당수는 외우는 터였다. 특히나 충장위 예닐곱씩 거느리고 통명전과 양화당을 지키는 충장장忠壯將 박빈, 남두북 정도의 얼굴은 알았다. 그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노려보며 한마디 하는 듯한 자도 낯이 익었다.


석정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옆의 석하를 쳐다보았다. 석하는 이미 그들과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그대로 자리에서 굳은 상태였다. 석정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고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배웅할텐가?"


허견이 끝내 금부서리의 독촉에 걸음을 옮기면서 비웃듯이 건넨 말이었다.


"나는 견공을 보러 온 것이 아니오."

"견공..."


석정마저 견공이란 말을 입에 담자 허견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하지만 눈동자에 담긴 불씨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석정에 대한 왕의 신임은 너무도 공고했다. 벌써 종4품 부응교라니. 자신이 귀양에서 돌아올 무렵엔 벌써 당상관에 오를 지도 몰랐다.


금부서리를 따라 걸음을 내딛는 허견의 뒤를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면서 강만철과 강만송이 가만히 뒤따랐다. 정원로와 신범화도 침울한 얼굴로 뒤따랐다. 벌써 정오의 해가 짧고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참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 고개를 틀어 곁눈질로 마주보는 정원로와 신범화의 눈길은 아까 석정이 발견했던 충장장 남두북과 박빈에게 슬며시 맞닿았다. 그 모습을 보고, 석정은 허견의 말을 곱씹으며 석하에게 넌지시 물었다.


"모악산? 모악산이면 저 아랫지방인데?"

"그냥 무악산毋岳山이지요. 모악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무악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영광靈光이 아니라 연희延禧에 있는...?"

"물론이지요. 사축서가 거기 있으니까요."


무심결에 답하는 석하를 보고 석정의 눈동자가 더 짙어졌다. 역시나 석하가 사축서라고 단정하는 것만 봐도, 허적의 제삿상과 잔칫상을 망친 암탉은 사축서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석정은 찜찜한 기분으로 석하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왜 이러십니까?"


석정을 돌아보는 석하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자신이 계집을 밝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사내를 밝히지도 않았다. 이왕이면 여인이 보드라운 손길로 소매를 잡아주면 모를까, 사내가 소매를 꽉 비틀어잡는 것은 원치 않았다. 더구나 이렇게 의심 짙은 눈길로 자신의 소매를 잡는 것은 더더욱.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같이 가주겠나?"

"어딜...말입니까?"

"모악산"

"..."


석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털갈이도 하지 않는 봄에 자신이 도포자락에 그만큼 닭털을 묻힌 것도 사축서의 그 많은 수탉과 암탉들을 붙들고 씨름을 한 탓이었다. 제삿상과 잔칫상을 망칠 만큼 기운이 펄떡펄떡 넘치는 놈으로 잡아야만 했다. 헌데 숫놈을 잡아가니 암놈을 잡으라는 명이 내려왔다. 꼭 암탉으로 해야 한다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보통은 수탉이 더 힘이 넘치는 것을, 수탉을 능가하는 암탉을 찾으려니, 등짝이 온통 젖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같이 가자니?


"..."


박제라도 되어버린 듯한 석하의 얼굴 앞에 석정이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회심의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잘못 걸린 거라고 놀리는 듯한 그 눈짓에 석하는 할 말을 잃었다. 석정을 못 데려갈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사축서의 닭을 훔칠 범인으로 몰릴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석하는 석정을 모악산으로 데려갔다. 정확히는 모악산 남쪽의 사축서였다. 부아암負兒岩(삼각산 인수봉)이 아이가 집을 나가는 형상인데, 이 모악산이 뒤에서 감싸안은 형상이라 어미모母자를 써서 모악母岳이라고도 하고, 또 말안장의 형상이라 하여 말무毋자를 써서 무악毋岳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선지 아이를 뒤쫓는 형상 같기도 하고, 뒤에서 끌어안는 형상 같기도 하고, 아이를 잃은 어미의 마음이 애절하게 와닿는 산이었다.


"..."


석정은 무릎에서 힘이 빠져서 점점 걸음이 풀렸다. 어찌 됐든 종육품 사축서 별제別提라도 만나봐야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한 손길이 자신을 등뒤에서 끌어안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걸음을 더욱 보채었다. 사축서 별제는 고작 두명이 정원인데, 사소한 실수만 해도 태거汰去(하급관리가 쫓겨남)가 되는 자리라선지 괜히 마음이 더 급했다. 조금 늦게 걷는다고 그사이에 사축서 별제가 갈릴 리가 없는데도. 그렇게 석정은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사축서 앞에 이르러 별제를 찾았다.


"별제요? 지금은 저 하납니다만."


별제 안원이 시큰둥히 대꾸했다. 참알參謁(벼슬아치의 성적을 포폄할 때 해당 관청의 으뜸 벼슬아치를 뵙는 일)을 행할 적에 당시 호조판서 민점한테 밉보인 죄로 자신도 쫓겨나갔다가 겨우 돌아왔다. 또 다른 동기는 지난달에 공좌부公座簿(관료의 근무실태를 적은 장부)를 고준考準(베낀 문서 따위를 원본과 대조함)할 적에 자기 성씨를 잘못 기재한 죄로 쫓겨났다. 그런데 또 이번에 관리가 들이닥치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이조가 아니라 홍문관 관료라는 것이 희망적이었지만.


"얼마 전에, 누구한테 닭을 내어준 일이 있는가?"

"글쎄요? 중궁전에서 영상대감의 기로연耆老宴을 위해 암탉을 한마리 내릴 것이라고, 사람을 보내어 암탉을 한마리 잡아갈 거라 이른 적은 있지만."

"기로연? 그 기로연은 가을로 연기되었는데...그 대신 시호연을 먼저 열었네만."

"모릅니다. 한마리 잡아갈 거라 하신 뒤에 나중에 보니 한마리가 없기에 그러려니 했지만요."

"..."


석정은 힐끔 석하를 쳐다보았다. 기로연 때 허적의 집에 내리려던 암탉을 시호연 때 내렸다. 아무래도 석하 이놈이 직접 잡아왔거나, 뭔가를 알고 있을 것만 같은데, 문제는 중궁전의 관여였다.


"혹시, 사축서 특유의 표식 같은 것이 있는가? 이를 테면 관방關防이나 압자押字라든지."

"날개죽지 아래에 어미모母자를 찍어놓지요. 사축서의 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석정은 손바닥이 갑자기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열손가락을 모두 오므려서 손가락 끝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핏기가 가시고, 손가락 끝이 아릿했다. 중궁전이 맞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한을 그대로 되돌려 주려고 일부러 모악산 사축서의 암탉을 골라서 보낸 것이었다.


석정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세번이나 아기를 연달아서 잃은 어미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어미가 잃어버린 아이를 따라나서는 듯한 저 모악산의 형세를 보니 더욱 가슴이 서늘했다. 중전마마가...김석주와 손을 잡았다?




"전하, 해작거리지 좀 마시고..."

"..."


두광의 잔소리가 지금은 듣기 싫었다. 숙종은 조반상에 오른 냉잇국을 보니 한술 두술 뜨는 것도 버거웠다. 식욕이 싹 가신 채로 그저 냉잇국을 수저로 해작거릴 뿐이었다.


아비가 좋아하던 냉잇국...


그나마도 연꽃이 피는 봄의 끝물이라 향도 흐려졌다. 아무리 아비의 복수를 하려고 해도, 더 이상은 송시열과 김수항의 목숨을 거둘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진홍 스스로 인달방에 제 목숨을 던져버렸다. 날 물어뜯어라...그 대신 너희도 물어뜯길 것이다...변해가는 중궁을 지킬 수 있을까.


숙종은 겨우 조반을 먹고 일찌감치 침수에 들었지만 진홍의 세번째 회임마저 잘못된 이후로 도무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람결에 장지문이 덜컥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기도 했고, 고양이 울음에 짜증이 나서 묘생을 혼내기도 했다. 지금도 새벽녘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겨우 눈을 붙인 참이었다. 동온돌로 아침햇살이 깃들기도 전인데도 밖에서 두광과 석주가 나누는 대화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병판대감, 어찌 이리 이른 시각에..."

"화급을 다투는 일일세."

"하오나, 전하께서 잠을 못 이루시다가 이제 겨우 잠이 드셨는데..."


숙종은 시퍼런 새벽어둠 속에서 두눈을 떴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니 더는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요즘 자신의 눈꺼풀은 점성粘性이 말라버린 아교처럼 너무도 잘 떨어지는 터라, 애써 눈을 붙여봤자 소용이 없었다.


"드시게 하라."


섬돌 앞에서 김석주와 대화를 나누던 두광은 동온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평소에도 귀가 밝은 왕이었지만, 이제는 잠귀마저 밝았다. 이토록 왕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내심 불안했다. 성정도 점점 까탈스럽고 밴덕맞아지는 느낌이었다. 그제 새벽에는 더운물을 찾더니 또 밤에는 찬물을 찾고, 어제 새벽에는 찬물을 찾더니 어제 밤엔 또 더운물을 찾으니, 물을 떠다 바치는 나인들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애를 먹었다.


"들어가 보시지요."


두광은 석주에게 고개를 조아리곤 그의 등뒤며 품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훔쳐보았다. 유사시엔 자신이라도 왕을 지켜야 한다는 별별 생각을 다해보며. 석주가 먼저 섬돌을 오르자, 두광은 재빨리 그 등뒤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바짝 등뒤에 붙어 석주를 따라 동온돌에 들었다.


"그래, 무슨 일이오?"


문간에 들어서는 석주를 숙종은 묘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강화흉서에 맞먹는 또 무슨 사달이라도 났나 싶었다. 어쩐지 찜찜하고 불안했다. 허적은 이미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수를 모두 동원했다. 흉서사건을 통해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 잔당들을 모조리 싹쓸이 하려다, 숙종 자신의 반대로 가로막힌 지금, 허적도 수 틀리면 무슨 짓을 할 지도 몰랐다.


"송구하오나...여기...우연히 해괴한 서찰을 입수하여..."

"해괴한 서찰?"


숙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흉서인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해괴한 서찰이라고 꺼내놓는 것을 보니 괜히 온몸이 굳었다. 하지만 석주가 허적을 통해 가져온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에게 가져왔으니 더욱 수상쩍은 일이었다.


"여기..."


석주는 품속에서 주섬주섬 서찰을 한통 꺼내어 무릎맡에 내려놓았다. 두광이 얼른 서찰을 집어들어 숙종에게 다가가서 바쳤다. 명색이 왕의 외숙, 아니 외종숙인데도, 두광은 그 와중에도 눈으로는 왕의 금침 한구석에 놓인 검을 찾아 확인했다. 도대체 이른 새벽에 김석주가 찾아올 일이 뭔지.


"..."


숙종은 턱을 꿈틀하며 두광의 손에서 서찰을 집어들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서체인데, 발신인도, 수신인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물을 엎지르기라도 하였는지, 구석구석 물기가 번진데다 중간중간 구겨지고 찢겨져 있었다. 물론 먹을 갈아 쓴 글씨인 만큼 글씨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번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물기로 달라붙은 것을 억지로 떼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종이가 찢겨져서 서너글자가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숙종은 어쩐지 불결하고 불길한 느낌의 편지를 손가락 끝으로만 살짝 집은 채로 찬찬히 서찰을 읽어내렸다. 글이 워낙 은밀하여 은어 투성이인데다, 어쩐찌 께름칙한 구절도 있었다.


由麗水辛女不可圖謀矣.

여수신녀가 있으니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유여수신녀불가도모의?"


숙종은 눈시울에 가시가 확 틀어박히는 느낌으로, 서찰을 보고 또 보면서 그 숨은 뜻을 곱씹었다. 여수신녀 때문에 도모할 수가 없다, 여수신녀를 죽여야 도모할 수 있다...뭘 도모한다는 건지.



"신도 잘은 모르겠는데...도모할 수가 없다는 말이 찜찜하여..."


석주가 가만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도 먼동이 트질 않아, 동온돌의 공기는 여전히 푸르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숙종은 한글자한글자를 다시금 천천히 곱씹었다.


"려수신녀麗水辛女...여수 출신 신辛씨녀..."


보통은 성을 붙여서 김녀金女, 홍녀洪女라고 지칭한다. 또는 궐녀厥女나 피녀彼女 등으로 막연하게 지칭하기도 한다. 헌데 신녀申女도 아니고 신녀辛女라니. 그러고 보니 병자년에 끌려간 볼모들을 속량시켜 데려오는 속환사贖還使로 청국 심양에 다녀왔던 신계영辛啓榮이란 자는 특이하게도 성이 신辛씨였다. 그 신씨녀 때문에 도모할 수 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린지.


"이건 어디서 났소?"


숙종은 서찰의 출처부터 따졌다. 출처를 알면 그 은밀한 뜻을 헤아리기 쉬워질 터였다. 헌데 김석주가 입가를 꿈틀하더니,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어디서 났냐니깐!"

"그게...봄도 되고 신이 병풍을 수리하려 병풍장에게 맡겼다가...병풍장이 신에게 가져온 속지에 섞인 것인데..."

"병풍장?"


숙종이 눈밑을 꿈틀거렸다. 어처구니가 없다. 병풍장이 어쩌다 김석주에게 가져왔다는 건지. 하지만 김석주는 망설이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목젖이 꿈틀거리도록 침을 꼴깍 넘기고서 고하였다.


"그 병풍장은 허적의 집에서 병풍과 속지를 가져왔다고 하여..."

"허적?"

"예."

"이 서체는 허적의 필체가 아닌데."


숙종은 다시금 간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영의정 허적의 필체를 자신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이 필체가 눈에 익었다. 조정에서 한번이라도 녹을 먹은 자이고, 그자의 수본手本이나 서계書啓를 자신이 보았다는 얘기였다. 더군다나 허적이 아니면 그집에 있는 자는...


"허견인가?"

"그러하옵니다."


김석주는 움찔하며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숙종은 간찰에 다시금 시선을 고정했다. 허견의 서체라...얼핏 보기에도 허견의 필체와 비슷한 것 같긴 한데, 일단은 확실히 필적을 대조해야 할 것 같았다. 이미 김석주도 허견의 필적이라는 건 확신하고 가져왔을테니, 진위를 떠나서 허견의 필체는 맞을 터였다. 허견이 제 손으로 직접 썼든, 김석주가 누군가를 시켜서 위조했든, 어느 쪽이든간에.


"허견이 썼으면...이 여수신녀는...또 어느 멀쩡한 처자를 첩실로 맞으려고 일을 꾸미는 모양이군."


석주는 움찔했다. 왕이 헛다리를 짚었다. 그저 허견이 평소처럼 어느 양가댁 규수를 첩실로 맞겠다고 일을 꾸미는 걸로 해석하다니. 낭패였다. 하기야 그 아들 허견이나 그 아비 허적이나 평소 행실이 그러니, 왕도 이 서찰을 보고 바늘 만한 사건으로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바늘이 아니라 몽둥이인 것을. 그는 더는 가만 있을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엊그제 고유제 때, 웬 암탉이 난입하여 제삿상과 잔칫상을 엎어놓아, 허적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사옵니다. 그때 허적이 유인인지, 여인인지 망할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고서 암탉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게 하였다 하옵니다."

"암탉?"


숙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도 별군직 군사에게 일러 거지로 위장을 시켜서 허적의 집앞을 기웃거리게 하였다. 하지만 별군직은 암탉에 대해서는 고하지 않았었다. 수탉이 아니라 암탉이라니...그리 기운찬 암탉도 있던가.


"그때 병풍을 망쳐서...병풍장에게 보수를 맡긴 것이오니...필시 그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옵니다."


김석주는 조심스레 고하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자신이 너무 단정짓듯 말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그는 천천히 뜸을 들이면서 왕의 눈치를 보았다. 일부러 자신은 입을 꾹 닫고서 왕이 혼자 유추해낼 때까지 기다렸다. 괜히 조급하게 끼여들어 한마디라도 보태었다간 쓸데없이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여수신녀...


숙종은 가만히 뇌까리며 서찰 속의 글귀를 다시금 곱씹었다. 이 글귀가 중궁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새벽이라 졸음이 아주 가시진 않았는지 글귀를 보니 어쩐지 좁은 바늘귀에 갈라진 실끝이 빠져나올락 말락하는 느낌이었다. 침방 생각시인 우희가 바늘귀에 굵은 실을 넣으려고 씨름하며 낑낑대던 것을 보고, 차라리 내가 해주마고 나섰다가 바늘귀에 실도 못 넣고 실끝만 갈라진 것을, 그 갈라진 실끝 한가닥을 집어넣고 나머지도 잡아빼려 애를 쓰는 그 느낌 그대로.


작가의말

1. ‘기황후’를 보다 안보다 하는데 숙종 때 사건들과 비슷한 게 제법 나오네요. 장희빈이 인현왕후 저주하는 것, 또 대비 김씨가 아들 숙종을 위해 한겨울에 찬물을 몸에 뿌리며 치성을 드리다가 숙종은 천연두가 낫고 본인이 독감에 걸려 죽는 것...제가 나중에 다뤄야 하는 장면들인데...


2. 여수신녀 얘기는 18세기 역사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을 참조해서 다뤘습니다. 실록에선 麗生이 김석주를 뜻하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상으로 재창조하다 보니 조금 얘기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3. 최석정의 승진 속도가 너무 빨라서 다루느라 정신이 쏙 빠집니다. 속편에서 좀 피눈물 예약...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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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4.03.05 07:10
    No. 1

    제자가 고생했으니 스승도 구르는건가요 ㅜㅜ
    숙종도 이제 도화선에 불붙기 직전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09 11:02
    No. 2

    최석정은 그저 피눈물만 예약...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3.05 19:06
    No. 3

    이게 허견을 옭아맬 자료인가보네요
    아예 이참에 뿌리까지 캐버릴 모양입니다
    하기야 중궁이 당한걸 생각하면....
    진짜 피바람 부는걸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09 11:03
    No. 4

    피바람이 너무 심해서 쓰기가 부담될 정도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3.05 23:23
    No. 5

    최석정이 또 구르는가보군요 ㅠㅠ
    보는 제가 다 조마조마합니다. 피바람이 언제 불어닥칠 지 모르겠어서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09 11:04
    No. 6

    최석정보다는...다른 사람들이 구르는데...왜 제 소설들은 본의 아니게 여주들이 구르는 건지 모르겠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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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해의 그림자 141 +6 13.11.05 1,872 37 39쪽
141 해의 그림자 140 +6 13.10.30 2,350 61 38쪽
140 해의 그림자 139 +6 13.10.26 1,975 41 33쪽
139 해의 그림자 138 +6 13.10.23 3,545 33 34쪽
138 해의 그림자 137 +6 13.10.20 3,223 41 34쪽
137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2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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