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버린 세계(4)
*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심슨이 찾아 왔다. 나와 대련하는 것이 정말 즐거운 모양이었다.
토끼와의 일을 털어버리고 땀이라도 시원하게 빼자는 심정으로 심슨과 대련을 시작했다.
내 솜씨는 부쩍 늘어 있었다.
심슨이 자주 쓰는 패턴이 눈에 익었다. 그는 목을 찌르는 척하면서 칼을 돌려 무릎을 치는 수법을 좋아했다.
나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무릎으로 향하는 칼을 가볍게 쳐내고 어깨로 심슨을 밀어버렸다.
모처럼 공격이 성공하자 심슨은 대견한 듯 웃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각턱 카일의 눈이 커졌다.
"운 좋은 꼬맹이."
그는 장난 섞인 말투로 빈정거렸다. 질투가 나는 모양이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예요, 카일. 그런데 왜 자꾸 꼬맹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자식이 말이야.
생긴 건 산적 같아도 기껏 해봐야 스물 대여섯 될까 싶었다. 어린 녀석이 자꾸 꼬맹이라고 하니 듣기가 싫었다.
그러잖아도 앨리스에게 거울을 부탁했었다.
황동거울이었는데, 표면이 매끈하지 않았다. 연마 기술이 부족한 탓이었다.
선명하지 않아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아라곤의 수도 아라고니아에는 유리 거울이 있다던데, 그곳에 가면 꼭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성문이 열리며 경비병 볼튼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알프레도! 영주님은 어디 있소?"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 들어갔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사방에서 오크가 몰려들고 있어요.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무리를 지었어요!"
로버트 영주는 즉시 기사들을 불러 정찰을 보내고 심슨에게 마을을 정비하도록 명했다.
나도 가만있을 수 없어 심슨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갔다.
심슨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양 떼를 통나무 성벽 안으로 몰아넣는 한편, 마을 안의 모든 식량을 끌어모았다.
주민들은 집안에서 기르던 닭이나 오리 따위의 날갯죽지를 잡고 성안에 내던졌다.
경비병 볼튼은 성문 주변에 목책을 세웠는데, 나무 따위를 무작위로 쌓은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주민이 솥단지를 들고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어서 들어가! 어서!"
심슨은 주민들을 거칠게 통제했고, 때로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마침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로버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십여 마리라. 생각보다 많군. 심슨, 어쩌면 좋겠나?"
"겨울철도 아닌데 몬스터라니, 이상합니다. 먹을 것을 찾아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크니 일단 버티는 것이 좋겠습니다."
토끼가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선언한 것이 어제 저녁이었다. 우연일까?
*
어수선한 사이 밤이 찾아 왔다.
성안 곳곳에 횃불이 타올랐고, 마당에 있는 주민들은 솥단지를 걸었다.
이윽고 성벽 밖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들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심슨에게 다가갔다. 그는 임시로 만든 감시탑에 올라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엘피온?"
"오크를 보고 싶어요."
감시탑에 오르니 오크 무리가 보였다.
녀석들은 벌거벗고 있었는데, 키는 나와 비슷했고 몸은 녹색이었다. 우람한 근육과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가 매서웠다.
두 발로 걷고 있지만 눈빛은 짐승처럼 번뜩였다. 주먹 두께의 몽둥이는 생나무를 뜯어 만든 것 같았다.
"한 대 맞으면 골로 가는 거야, 엘피온. 힘이 무지막지하거든."
오크들이 몽둥이로 통나무 담장을 퉁 퉁 두드렸다. 왠지 담장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보였다.
넘어오지는 않겠지?
"오늘 밤은 별일 없이 지나갈 것 같다. 어때 엘피온, 한 판 하겠어?"
이 상황에서 대련이라니. 대담한 걸까, 아니면 익숙한 걸까?
그때 앨리스가 한손검 레이피어(Rapier)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는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모처럼 몬스터 무리가 왔는데 갇혀 있어야 하다니, 맘에 들지 않아요. 파커 경, 오랜만에 저랑 어울려 볼래요?"
심슨은 정색했다.
"위급한 상황입니다, 앨리스. 오늘은 제 임무에 충실해야 할 거 같군요."
이 거짓말쟁이야. 조금 전까지 나랑 붙어 보자면서?
"어쩔 수 없네요. 엘피온은 어때요? 그간 파커 경에게 롱소드를 배우는 걸 봤어요. 괜찮죠?"
아니. 아니. 안 괜찮을 것 같은데? 귀족가의 하나뿐인 영애를 실수로 다치게 하면 어떻게 될까?
앨리스는 대뜸 칼을 들이댔다.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으아악"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앨리스는 빙긋 웃었다.
"그래서 아라곤의 전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냥 오 년 차 사무직이야.
"일어나서 검을 들어요."
그녀는 정말 해볼 셈이었다. 엉거주춤 일어나 롱소드를 말아 쥐었다.
앨리스는 갑자기 어깨를 찔러 왔다.
롱소드를 바깥으로 휘둘러 레이피어를 걷어냈다.
그녀는 반동을 이용해 가볍게 한 바퀴 돌았고,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세를 낮추어서 사라진 것처럼 느낀 것이다.
곧 아래쪽에서 레이피어가 튀어나와 배를 찔러왔다.
화들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레이피어가 롱소드와 피하며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작은 원을 그리며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날렵한 움직임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레이피어는 내 어깨를 툭 건들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심슨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어휴, 오크가 우글거리는구나. 정말 큰일 날 수도 있겠는걸?"
녀석은 괜히 딴청을 피웠다. 젠장, 무슨 꼴이람?
앨리스의 검술은 빠르고 유연했다. 반격에 맞춰 물 흐르듯 이어지는 패턴은 한두 해 연습으로 나올 게 아니었다.
문득 칼을 쥔 그녀의 오른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단단할 것 같았다.
한 합을 맞췄을 뿐인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뽀송뽀송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해요? 얼른 자세 잡아요."
앨리스의 레이피어가 춤을 추며 얼굴과 복부를 노리고 들어왔다.
나는 허둥지둥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녀는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대여섯 번 정도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심슨이 넌지시 말했다.
"거리가 중요한데..."
앨리스가 눈을 흘기자 심슨은 딴 데를 보면서 칼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가만 보니 이상하다. 손을 등 뒤로 쭉 당긴 상태로 찔러대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일어나서 발을 가볍게 했다.
앨리스는 아까처럼 어깨를 노렸다. 나는 그것을 쳐내자마자 즉각 뛰어들어갔다.
앨리스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는 재빠르게 한 바퀴 돌아 칼을 찔렀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녀는 바짝 붙은 나를 찌르기 위해 손을 뒤로 길게 뺄 수밖에 없었고, 그 자세에서는 칼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발 들어가며 어깨로 앨리스를 밀쳤고, 그 와중에 서로 엉키며 바닥에 넘어졌다.
갈색 머리카락이 코끝을 스친다.
어우, 오랫동안 감지 않은 쿰쿰한 냄새다.
코앞에서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떨렸다.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앨리스. 너는 귀엽지만 냄새나는 십 대 소녀일 뿐이야. 고작 이딴 거에 수줍어하지 마.
심슨이 감시탑 위에서 엄지를 척 들었다.
나는 엉기적거리며 일어나 앨리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떻게 숙녀를 넘어뜨릴 수 있어요, 엘피온? 그러고도 아라곤의 전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뭐 어쩌라는 건지.
앨리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꽤 하는데 엘피온? 다음부터는 말이야, 레이피어를 상대할 땐 겁먹지 말고 검을 힘껏 맞대라고. 저런 한 손 검은 롱소드와 제대로 부딪히면 뚝 부러져 버려. 상대는 그게 무서워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거야."
대련을 통해 검을 가르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대의 칼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그나저나 괜찮을까요?"
나는 감시탑에 올라 심슨의 옆에 섰다.
오크들이 건물을 부수고 괴성을 지르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별일 없을 거야. 올해는 조금 빠르게 왔지만 사실 매년 겪는 일이지. 운이 좋으면 밤사이에 모두 물러갈 거다."
"마을 주변에 몬스터를 막는 울타리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매번 대피하려면 번거롭잖아요."
"농사를 지어야 할 주민들을 그런 일에 동원할 수는 없지. 잠깐만 버티면 돼."
촘촘한 별빛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영지전을 앞두고 오크 무리의 습격을 받다니, 다우니 남작 꽤나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비어만 공은 기어코 기사들을 보내겠지요?"
"보내든가 말든가."
심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정말 대범한 건지 뭔지 모르겠다.
가만 보니 주민들도 별로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검을 곁에 지니고 있어. 당분간은 그게 좋을 것 같다."
롱소드는 영주의 재산이었기에 대련이 끝나면 즉각 반납했었는데, 오늘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검을 빌려주었다.
*
"크아앙!"
울부짖는 소리에 깼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소리였다.
그렇지, 내가 처음 룬대륙에 떨어진 날, 그때 언덕 너머에서 들려왔던 소리다.
나는 그때 부리나케 도망쳤었다.
"오우거다!"
네모 턱 카일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롱소드를 움켜잡고 마당으로 튀어나왔다.
"오우거가 달려온다. 어어, 부딪힌다!"
심슨이 감시탑 위에서 외쳤다. 어두운데 뭐가 보이긴 하나?
"크아앙!"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오우거가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감시탑에 올라 살펴봤더니, 달빛 아래 오우거의 거대한 형체가 어렴풋이 보인다.
몬스터들이 격돌하며 마을이 사정없이 부서져 나갔다.
오우거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가 허공을 날았다. 주먹을 내리치면 머리통이 박살 났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통나무 성벽은 저 주먹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오우거가 영주성으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심슨?"
"다 같이 죽는 거지."
심슨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 오크를 노리고 온 거야. 배를 채우고 나면 얌전히 물러갈 테니까 오히려 행운이라고. 대신 싸워 주잖아?"
소란을 들었는지 토마스가 신전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감시탑에 올라 오우거의 살육을 지켜보았다.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절반에 가까운 오크가 머리통이 가루가 되어 쓰러졌다. 남은 녀석들은 오우거를 피해 도망쳤다.
홀로 남은 오우거는 한참 동안 오크의 사체를 뒤적거리더니, 날이 밝아올 무렵 마을을 떠났다.
이런 괴물이 활보하는 룬대륙을 활보한다고? 스카이랜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몬스터가 물러간 후에도 다우니 성은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
날이 밝자 주민들은 앉은 자리에서 솥단지를 걸고 불을 피웠다.
토마스가 감시탑을 내려왔다.
"비어만 공이 며칠 내로 기사들을 보내올 거야. 협상이 끝나는 대로 떠날 거니까, 미리 준비하도록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토마스, 주민들이 무덤덤하네요. 몬스터가 무섭지 않은가 봐요?"
토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어쩔 수 없잖아? 하루 배를 채우기도 빠듯한 사람들이야. 오크가 아니더라도 걱정할 게 많아."
"괴물이 득실대는데, 사제들은 어떻게 나다니는 거예요?"
"그분께서 지켜 주시길 그저 기도할 뿐이지. 신의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으니."
이틀이 더 지나고 경계 태세는 풀렸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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