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진리(3)
다행스럽게도, 룬을 전승받는 동안 아이작이 우려했던 위험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디스메이랜드의 신비한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덧붙였다.
"이스룬은 전해줄 수 없다. 그것은 함부로 다룰 것이 아니다."
자존심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스룬은 아이작이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이며, 어쩔 때에는 그와 한 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나도 이스룬까지 달라고 고집부리지는 않았다.
굳이 그의 고집과 싸우고 싶지 않았으며, 내 가설에는 이스룬이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승받은 룬을 보면서 하나하나 정리했다.
바퀴와 여행의 라드, 불과 지성의 켄, 얼음과 재앙의 하갈, 고난과 필요의 니드, 도박과 우연의 페오스, 수호의 에오로, 태양과 건강의 시겔, 전투와 용기의 티르, 물과 변화의 라그, 생명과 풍요의 잉그.
열 개의 룬이 모였다.
이 외에도 14개의 룬이 더 있었지만 현재 아이작이 가진 룬은 이것이 전부였다.
아이작은 널리 쓰이는 룬을 애써 모으지는 않았다.
주로 알려지지 않은 룬을 수집하려 하였고, 알려진 룬 중에서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널리 퍼트릴 가치가 있는 유용한 룬을 가지고 있었다.
널리 쓰이지만 수집하지 않은 대표적인 것이 음유시인들의 룬인 신과 언어의 안스르 같은 경우였다.
나 역시 모든 룬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디스메이랜드, 이곳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
아이작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깊숙히 들어가야 하니 단단히 준비하도록."
디스메이랜드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구태여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말발굽을 살피며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고집스런 아이작을 원만하게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에 나탈리를 따로 불렀다.
아이작이 북방의 마녀이자 실버 콕스 장군의 전략가인 나탈리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알아본 것이 있어요."
"무얼?"
"제가 생수와 먹을 것을 만들어낸 것을 기억하죠? 먹을 것을 원하면 생겨나고, 휴식을 원하면 마을이 나타나요. 꼭 룬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어요."
"아! 베오크를 찾을 실마리를 찾은 거야?"
"잘 될 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탈리는 내 제안을 듣고 눈을 반짝였다.
"좋아! 아이작에게는 내가 말해 볼께."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한층 진보된 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나탈리의 말을 듣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 그녀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대신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다.
"무슨 사단이 벌어질 지 몰라.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지. 각오는 되어 있나?"
"위험한 일이 있다면 경험 많은 아이작과 나탈리가 적절히 대응해 줄 거라고 믿어요. 당신들이 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작의 말이 맞다. 어떤 위험이 발생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무모한 도전에 앞서 경험 많은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작하지."
*
여관방 한가운데에 신중하게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성과 새싹의 베오크.
너는 어떤 존재이지?
자식을 향한 따뜻하고 맹목적인 사랑 따위를 느껴본 적 없다.
아직 미혼인데다가, 자식을 낳은 경험도 없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생명이라는 걸 겪어보지 못한 자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
새싹은 또 무엇인가.
봄을 상징하는 풋풋한 생명력.
작고 여린 것이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와 마침내 커다란 나무가 된다.
나무의 첫 시작이 손톱만한 새싹이었음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직접 보지 못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아니 직접 목도하고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다.
베오크는 모성과 새싹이라는 있을 수 없는 두 가지의 기적이 수식하는 단어였다.
상상해낼 수 있을까.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놀잇거리에 푹 빠져 하루를 보내곤 했던, 남다를 것 없던 시절.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로 기쁨을 느끼고, 오락실에 가는 친구를 동경했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의 두려움.
고등학교 시절의 막막함.
서툴었던 첫 연애의 설레임.
그런 내가 어느덧 사회에 나가 무미건조한 하루에 익숙해졌고, 게임도 영화도 지루해져서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새싹은 그렇게 커서 나무가 되었지만, 그것이 베오크가 수식하는 기적에 해당하는 지 잘 모르겠다.
특별할 것 없이 그냥 살았기 때문에.
그런 내가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적이 있었던가?
문득 타니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타니를 목숨보다 사랑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를 위해서 녀석을 희생시킬 수도 있었다.
모성과 새싹의 베오크를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곧 깨달았다.
나는 베오크의 기적을 간절히 원한 적 없음을.
그것을 감히 상상해낼 수 없음을.
*
무엇일까?
눈을 떴을 때, 앞에 보이는 풍경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나는 베오크를 상상하는 것에 실패했고, 그래서 당연히 여관방에서 눈을 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아이작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나도 아는 것이 없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우선 몸을 피해요."
나탈리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곤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근처의 담벼락에 몸을 숨긴 후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무너진 지붕과 허물어진 담벼락.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우리는 매우 신중한 태도로 마을을 수색했다.
무엇이 튀어나올 지 몰랐기에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히도 괴물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
"여긴 대체 뭐지?"
아이작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러자 나탈리가 의견을 제시했다.
"전투의 흔적들이 보여요. 꽤 오래된 것 같군요."
그도 그럴 것이, 둔기 같은 것에 패인 것이 분명한 담벼락 흔적에 오래된 이끼가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의아하게 느낀 부분은 다른 것이었다.
"어째서 이끼가 붙어 있느냔 말이다. 디스메이랜드에서 이런 생명체를 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니 처음 황야에 들어선 이후 풀 한쪼가리조차 본 적이 없었다.
바람조차 없는 곳이었다.
생명체가 전혀 살지 못하는 곳일까?
문득 든 생각에 곧바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물을 한 웅큼 꺼내어 이끼 위에 뿌렸다.
그러자 오래되어 하얗게 말라붙은 이끼가 슬금슬금 일어나며 금새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해놓고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아이작은 대단히 놀라워했다.
"살아있어. 어떻게?"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한 거지? 여긴 어딘가?"
"모르겠어요. 아이작, 저는 상상하는 것에 실패했어요. 사실은..."
그리고 내가 시도했던 것에 대해 알려주었다.
베오크를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베오크를 만들려고 하였다.
"룬을 조합할 수 있다는 것에서 가능성을 보았어요. 물과 변화의 라그룬이 고난과 필요의 니드룬과 합성되면서 수통을 채우고 고기를 만들어냈어요. 가능성의 끝은 어디일까요?"
아이작은 눈을 부릅떴다.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나?"
"실패하면 어때요. 밑져야 본전인데. 잃을 것이 있나요?"
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베오크를 감히 상상해내지 못했지만, 그것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을 알아요."
굳이 누구인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크메이지 데이몬은 베오크를 평생의 숙원이라고 표현했다.
그들만큼 간절히 원하는 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이작, 당신도 베오크를 원하는 마음은 간절하지 않나요?"
*
룬 글리너라 불리는 아이작은 내가 제시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말았다.
나를 인정했다기 보다는, 베오크를 원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새로운 가능성을 믿어버렸던 것이다.
폐가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대비하도록."
아이작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모성과 새싹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을 아이작은 뭐가 잘 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을까.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현듯 풍경이 전환되었다.
순식간이었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처음에는 바뀐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였다.
한 박자 느리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이곳은 방금전까지 서있던 폐가가 아니었다.
처음 디스메이랜드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황야였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나탈리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눈을 뜬 아이작은 바람 한 점 없는 황야를 마주하고 갸웃거리더니, 문득 긴장하며 버클러를 쥐었다.
"젠장! 다시 그곳이잖아!"
무슨 소린가 싶었더니, 바닥에 자국이 있었다.
우리가 남긴 말 발자국.
어째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일까?
생각할 틈도 없이, 무엇인가가 불쑥 나타났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땅, 야수들의 세계."
그것은 잔뜩 쉰 목소리로 노래 비슷한 것을 부르면서 서서히 다가왔다.
"싸움광 하인달크가 이곳에 누웠지."
"와일드 워커!"
아이작은 스태프를 말아 쥐며 외쳤다.
저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나탈리와 내가 칼을 빼들며 대응하자, 와일드 워커는 킥킥대며 웃었다.
"실버 콕스도 꽁무니를 말았지. 이름도 없는 너희들이 나를 이길 수 있을까."
검은 형체를 한 저것의 생김새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었지만 마치 환각처럼 흐릿한 것이었다.
게다가 하는 말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땅이라니, 그리고 실버 콕스가 도망갔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이작의 태도를 보건데 저것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악마 앞에서도 이스룬을 앞세워 권위로 찍어누르던 아이작이, 고작 저런 존재에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오만했던 그가 작은 방패 뒤에 잔뜩 움츠린 것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와일드 워커를 향해 먼저 움직인 것은 나탈리였다.
그녀는 버클러를 앞세워 급소를 보호하며 아밍소드를 찔러 들어갔다.
그런데 와일드 워커는 피하지도 않은채 클클 웃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나탈리의 칼은 와일드 워커의 복부를 틀림없이 찌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당황스러웠다.
와일드 워커는 분명 가만히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나탈리의 칼은 엄한 곳을 찌르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나탈리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시 한번 와일드 워커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녀석을 향해 나탈리는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듯 신중하게 칼을 찔러 넣었다.
"으악!"
엉뚱하게도 비명은 아이작에게서 터져나왔다.
나탈리의 칼이 그의 얼굴을 스쳐간 것이었다.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