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선택(4)
여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뒤뜰 공터에서 돼지를 잡았다.
"남은 건 제게 팔아요. 후하게 쳐 드릴게. 배급받는 빵만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여관 주인이 말했다.
물론 남은 건 두고 갈 거다. 값을 쳐준다면 고맙고.
심슨은 능숙한 솜씨로 돼지를 토막 내어 불에 올렸다. 어느덧 기름이 뚝뚝 흘러나오고, 고소한 냄새가 뒤뜰을 메웠다.
그러자 침이 고이고 뱃속이 꼬르륵대며 난리를 쳤다.
심슨은 앨리스, 아이작, 토마스, 라번 순으로 고기조각을 내밀었다.
"잠깐, 왜 나보다 라번이 먼저야?"
심슨은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야, 엘피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뭘 그랬는데?"
"라번을 봐라. 작고 말랐어. 얼마나 굶고 살았으면 그러냐. 아무리 사람이 미워도 인정은 있어야지."
얼씨구.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이상하네?
"미워한 적 없는데? 라번을 미워하는 건 너 아니었어?"
심슨은 대답하는 대신 괜히 짜증을 냈다.
"아우, 고기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큰 거야?"
그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뒤뜰에 들이닥쳤다.
"도시에서 열심히 먹이며 키운 거니 당연히 크지. 여기 있었군! 도둑놈들!"
*
완전무장을 갖춘 십여 명의 병사들이었다.
체인메일과 도끼창, 다리에는 판금으로 만든 보호대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머리를 통째로 감싼 투구까지 덮어쓰고 있어서 괜히 주눅 들게 하는 차림새였다.
"도둑놈이라고?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심슨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병사 중 대장노릇 하는 자가 말했다.
"너희들이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아. 도시의 재산을 갈취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잡아뗄 심산인가?"
토마스가 나섰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우리는 이 돼지가 시의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길거리에 갑자기 나타나 우릴 공격했기에 얼떨결에 잡았을 뿐입니다."
토마스는 알맞게 각색하여 설명했다. 썩 훌륭한 요약이었다.
그러나 병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사정이야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것이지."
심슨이 소리쳤다.
"이봐, 우리가 도둑이라면 냄새를 풍겨 가며 고기를 굽고 있겠어?"
"그건 너희들이 바보라서 그런 거다. 길바닥에 흔적을 아주 적나라하게 남겨 놨더군. 덕분에 찾기도 쉬웠지. 핏자국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됐으니까. 자, 이제 가실까?"
"어딜 간단 말이야?"
"당연히 감옥이지!"
토마스가 다시 나섰다.
"이보시오. 보상하겠어요. 얼마를 내면 되겠습니까?"
"보상?"
병사는 진득한 미소를 그렸다.
"글쎄? 너희가 보상금을 낼 만큼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오십 골드, 있나?"
무심하던 아이작도 이번에는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과하군. 시장의 명령인가?"
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왜 그따위야. 시장님이 네 친구냐? 어디 귀족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그러자 앨리스가 흥분한 우리를 진정시키며 나섰다.
"나는 로버트 다우니 남작의 딸 앨리스 다우니라고 한다. 우리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 없을까? 보상은 영지에서 해줄 거야. 설마 귀족을 가둘 생각은 아니겠지?"
병사는 잠깐 멈칫했다. 정말 귀족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병사는 곧 꼬질꼬질한 앨리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귀족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디서 거짓부렁을?"
참다못한 심슨이 나섰다.
"이 자식들아! 얌전히 물러가지 않으면 혼쭐날 줄 알어!"
그가 롱소드를 빼 들자 병사들이 우리를 포위하며 할버드를 내밀었다.
좁은 공간이었기에 칼날 사이에 갇힌 모양이 되었다.
심슨이 칼을 뽑으려는데, 앨리스가 말렸다.
"심슨, 괜히 싸울 필요 없어. 가서 시장님을 뵙자. 뵈어서 오해를 풀자."
병사는 의기양양해져서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군. 모두 포박해!"
병사들이 다가와 우리의 손을 묶었다.
"얌전히 따라가겠다는데 묶을 필요까지 있을까?"
내 말에 병사 하나가 답했다.
"아무렴. 죄인들을 끌고 가는 데 묶지도 않고 끌고 간단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병사들에게 이끌리는데, 대장 병사가 여관 주인에게 뭔가를 내미는 것이었다.
천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그녀는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핏 보니 빵이 들어 있는 듯했다.
"저기, 주인아줌마! 병사들을 부른 게 아줌마였어?"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러나 주인은 대꾸도 않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이가 없어서. 고기도 나눠준다는 데 고작 빵 따위를 얻으려고 신고를 했데?
멧돼지고기는 뒤따라오는 병사 서너 명이 나눠서 들었다. 솔솔 풍기는 고기 냄새를 맡으며 입맛을 다셨다.
쳇,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손이 묶인 채 거리를 걷고 있으려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타니는 여관방에 숨겨두었고, 가만 보니 라번이 없었다.
*
병사들에게 붙잡혀 도착한 곳은 시청 공관이었다.
철창 같은 출입문 주뷔오 담장이 넓게 둘러쳐 있었다.
경비병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마당에 꽤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있었다.
"이자들인가?"
회랑 안 벽난로 앞에 앉은 시장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병사들은 우리를 시장 앞으로 끌고 가 세웠다.
"앨리스 다우니예요."
앨리스가 선수를 치며 말했다.
"도시 사정을 몰라서 그랬으니 부디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군요. 우리를 공격하는 멧돼지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잡았습니다. 도시의 재산이라고는 생각 못한 건 저희 불찰입니다."
곤란한 상황임에도 앨리스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러나 시장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가 아니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중대한 위기에 놓여 있소. 시민들이 굶고 있지. 이 시국에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멧돼지가 외지인의 손에 죽어버렸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앨리스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말했다시피, 저희의 불찰입니다. 손해를 보상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보상? 기회?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군. 보상금에 대해서 들었소?"
"저 병사에게서 듣긴 했습니다만, 터무니없는 액수라."
"어이, 지프레! 얼마를 불렀지?"
지프레라고 불린 병사는 대장노릇 하던 녀석이었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오십 골드를 불렀습니다."
"적당하군! 들었소? 보상금을 내고 싶다면 오십 골드를 내시오."
앨리스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정말 멧돼지 한 마리가 오십 골드나 한단 말이에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당장 다른 마을에 가면 돼지 한 마리쯤 비싸봐야 오실버면 충분할 거예요. 이렇게 하죠. 저희가 양보해서, 금화 하나를 내겠어요."
"안 될 말이지. 다른 마을과 우리 도시의 사정이 똑같을 수야 없지 않소? 협상은 없을 거요. 돈을 내던가, 아니면 감옥에 들어가시오."
"귀족을 감옥에 가두겠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해서 뭘 얻을 수 있죠? 금화 하나라도 얻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 되는 방향이 아닐까요?"
시장은 앨리스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때로는 금화보다 사람이 귀할 때가 있는 법이오. 당신들은 오십 개의 금화의 가치를 충분히 해낼 수 있소. 나를 믿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우리 다섯 명의 값어치가 멧돼지 한 마리밖에 안 된다고? 이봐! 너무 하는 거 아냐?"
시장은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것 같군. 지프레, 이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라!"
시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고, 지프레는 병사들을 이끌고 우리를 공관 지하로 데려갔다.
*
무장을 모두 압수당하자 심슨은 씩씩댔다.
"두고 봐 너희들! 내 앞에서 살려달라고 빌게 해주지!"
경비병들은 대꾸도 없이 나갔다.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퀘퀘한 냄새가 났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천장 가까이 작은 창이 있어 낮인지 밤인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심슨에게 말해서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밖을 가만 내다보니 우리가 들어왔던 공관 정문이 보였다.
창문 쇠창살을 잡고 흔들어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슨의 어깨에서 내려와 일행들에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얌전히 잡혀 들어와도 되는 거야?"
그리고 아이작에게 말했다.
"아이작, 너무 태평한 거 아니에요?"
"너무 걱정 마라, 엘피온. 여차하면 다 죽여버리지 뭐."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짧은 시간 룬대륙의 생리에 벌써 적응해버린 것 같다.
사실 나도 여차하면 녀석들을 죽여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어떻게 빠져나갈 건데요?"
"어려운 것 있나? 병사가 오면 잡아서 열쇠를 빼앗고 철창을 열고 나간다. 방해하는 것들은 죽인다. 더 필요한가?"
"병사들이 많던데, 가능할 거로 생각하세요?"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았다.
"이상하군. 왜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엘피온."
잠시 후 병사 하나가 와서 빵 조각을 몇 덩이 던져주고 갔다
"아니, 식량이 귀하다면서 죄인들에게 빵을 다 내어준대?"
나는 빵 하나를 덥석 집어 물었다.
그러자 일행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고기를 못 먹은 건 나뿐이었다.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 너희들은 실컷 고기를 먹었다 이거지? 나는 배고프니까 이거 다 먹을래."
빵을 우물거리는데 기분이 묘했다. 토마스가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빵 먹는 사람 처음 봐?"
심슨이 대뜸 말했다.
"괜찮아?"
"뭐가?"
"그 빵 괜찮냐고. 독을 탔을지 누가 알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아니, 그런 생각이면 진작 말렸어야지!"
그러고 보니 앨리스마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 자식들이 정말!
"괴물, 너는 재생능력 탓에 독을 먹어도 회복되지 않나? 우리는 죽는다. 그런 건 토마스의 신성으로도 회복이 어려워."
"참나, 마루타가 된 기분이군!"
토마스가 말했다.
"마루타?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맛있기만 하구만."
빵을 우물거리고 있으니 이번엔 정말로 기분이 묘해졌다.
하늘이 빙글거리는 것도 같고, 몸이 붕 뜨는 것 같기도 하였다. 실실 웃음이 나왔다.
어, 어, 이거 왜 이러지?
몸이 이상해서 일어났더니 땅이 갑자기 수직으로 선다. 나는 똑바로 선 땅바닥에 기댔다.
어, 좀 이상한데?
"괜찮아, 엘피온?"
앨리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는 옆으로 서 있었다. 곧추선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으니 옆으로 설 수밖에.
"앨리스, 그러다 떨어질라. 얌전히 기대라고. 나처럼. 어어? 그렇게 걸어도 괜찮아? 중력이 바뀌었나?"
"저게 정말 미쳤나?"
토마스가 실소를 흘리는 사이 아이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토마스, 뭐 생각나는 거 없나?"
"글쎄요? 꼭 술에 취한 것 같네요."
"환각제다. 독이 아니라 마약을 넣었군."
눈이 팽팽 돌아가는 와중에도 일행들이 하는 말은 전부 다 들렸다.
희안한 일이었다.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안되는 와중에, 문득 그것이 보였다.
검은 호수에서 보았던, 빨간 눈을 한 악령이.
그것이 말했다.
-너는 어째서 나와 같은 신성을 지닌 것이냐.
아니, 아니, 아니.
-너는 어째서 신성의 부름을 거역하는 것이냐?
이봐, 토끼는 힘도 빼앗고 멀리 가버렸다고!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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