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깨달음(9)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성벽 위로 올라갔다.
"계획은요?"
"와이번. 저 녀석에게 마법을 적중시켜야 한다! 전에 말한 적 있지? 허공에 있는 것은 마법을 적중시키기가 어려워. 때를 잘 노려야 한다."
고작 한 마리의 와이번 때문에 베켄 마을은 절망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할 수 있을까?
마법에 제법 익숙해 졌다지만, 아이작도 힘겨워 하는 것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곧 떨쳐내었다.
"제가 놓치면 아이작, 당신이 맡아주는 거죠?"
"그래!"
내 자신을 믿고 뻔뻔하게 나서기로 했다.
만약 놓치더라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서툰 나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긴 아이작의 탓이고, 내가 놓치더라도 뒤를 맡을 사람들이 있었다.
나탈리, 아이작, 심슨, 그리고 베켄 마을의 수많은 전사들.
실수할 수 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자.
다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와이번은 서서히 날아왔다.
녀석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왔을 때, 누군가 외쳤다.
"몬스터웨이브다!"
그럴 리가.
블랙드래곤 루시퍼는 분명 약속을 했고, 긍지 가득한 녀석은 약속을 깰 리 없었다.
그렇다면 와이번 밑으로 먼지구름을 만들며 달려오는 몬스터들은 대체 무엇인가.
그래, 이건 몬스터웨이브가 아니다.
말하자면 좀비 웨이브인 것이다.
나탈리는 양팔을 번쩍 들고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과 온 몸에서 하얀 빛이 삐져나왔다.
동시에 베켄 마을의 전사들이 활을 빼들었다.
그러자 심슨이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화살 따위는 소용 없어! 모두 칼을 들어라!"
베켄 마을의 전사들은 아직 좀비를 겪어보지 못했다.
사전에 좀비에 대해 수차례 알렸지만, 들은 것과 직접 경험한 것의 괴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베켄의 용맹한 전사들에게도 여지없이 다가왔고, 점차 다가오는 군세를 보면서 몸을 바르르 떠는 자들도 있었다.
두두두두.
진동이 코앞까지 느껴졌다.
와이번은 앞으로 나서지 않고 좀비 군단의 한 가운데에 떠 있었다.
지성이 남아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군세를 이끌듯 와이번은 허공을 천천히 유영하는 것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와이번을 주시했다.
그럴 리 없지만, 혹여라도 지성이 남아있다면 베켄 마을은 오늘 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준비!"
심슨이 외쳤다.
베켄의 전사들은 성벽 위에서 버클러를 앞세우고 자세를 낮췄다.
드디어 좀비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 고블린, 오우거, 트롤.
서로를 짓밟으며 성벽으로 돌진했다.
쿠웅.
선두에 있던 몬스터들은 스스로 벽에 머리를 찧고 부서져 내렸다.
그 뒤를 다른 좀비 몬스터가 올라탔고, 마찬가지로 벽에 부딪히며 박살났다.
좀비들은 앞선 동료들을 거세게 밀어부쳤다.
그렇게 쌓인 시체가 언덕처럼 경사를 만들었고, 결국 좀비들은 가볍게 경사를 뛰어 올라왔다.
"밀어내라!"
심슨의 지시와 동시에 베켄 전사들은 버클러를 내밀었다.
성벽 위로 막 올라서려던 좀비 몬스터들은 그대로 밀려 떨어졌다.
뒤이어 심슨이 재차 외쳤다.
"목을 노려라! 단숨에 잘라내야 한다!"
사전에 주의사항을 전달한 터였다.
베켄 전사들은 좀비에게 물리면 감염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료가 좀비가 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는 피부로 느끼지 못하겠지.
방심하는 녀석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심슨은 좀비몬스터를 상대하는 대신, 성벽을 뛰어다니며 지시하고, 베켄의 전사들을 독려하고, 혹여라도 물린 자들이 있는지 살폈다.
그런 심슨을 흘깃 보면서 와이번의 동태를 주시할 때였다.
불현듯 나탈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그녀의 온 몸에서 하얀 빛이 폭사했다.
우워어어어.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떠올랐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좀비 몬스터들이 한 순간에 허공으로 치솟은 것이다.
수백이나 되는 좀비 무리 중 거의 절반이나 되는 숫자였다.
장관이었다.
그것들은 금새 와이번보다 높은 곳으로 떠올랐고, 이내 추락했다.
퍽, 퍼억.
여기저기서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확인한 나탈리는 서서히 내려오더니, 발이 닿자마자 쓰러져버렸다.
"나탈리!"
그녀에게 다가갈 시간은 없었다.
나는 와이번에게서 잠시도 눈을 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탈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걱정 말라는 투로 말했다.
"힘을 너무 썼을 뿐이야. 곧 괜찮아질거야."
"다시 쓰려면 얼마나 걸려요?"
"한 시간."
너무 길다.
고통을 모르는 죽음의 전사들은 지치지 않고 덤벼들 것이다.
베켄의 전사들이 견뎌낼 수 있을까.
*
좀비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와이번의 동태가 이상해졌다.
괴성을 지르며 성 위를 크게 선회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의 죽음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일까?
정말 지성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길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뒤에 남은 좀비들이 재차 밀려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작이 나서서 마법을 준비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룬어를 길게 읊었고, 누가 보아도 매우 강력한 마법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성벽 위로 뛰어오른 좀비들은 베켄의 병사들이 잘 막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좀비들과 다르게 우리는 체력이 무한하지 않았다.
"으악!"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심슨은 지체하지 않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얼핏 보니, 좀비 오크 하나가 베켄 병사의 팔뚝을 물고 성벽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동료들이 좀비를 떼어내려고 달라붙었을 때, 심슨은 다시금 외쳤다.
"자리를 지켜!"
동시에 거침없이 칼을 휘둘러 병사의 팔을 싹둑 잘라내버린 것이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 심슨은 팔을 잘라낸 병사를 기대어 앉히고 차갑게 말했다.
"네가 좀비로 변한다면 즉시 목에 칼을 꽂아 넣을 거다. 살고 싶다면 기도해!"
심슨은 다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말했다.
그제야 병사들은 좀비라는 것의 무서움을 실감한 듯 했다.
좀비에게 물리면 같은 동료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병사들은 부쩍 경계하며 방패를 신중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육중한 몸체 때문에 좀처럼 올라오지 못하던 오우거 좀비 중 하나가 기어이 성벽 위로 기어올랐다.
우워어어어!!
천둥같은 고함에 공기가 진동했다.
베켄의 전사들은 귓가에 들이닥친 충격에 일순간 멈칫거렸다.
오우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병사 하나를 한 손으로 집어 들고 입을 크게 벌려 머리통부터 아가리로 쑤셔 넣는 것이었다.
오우거의 싸움 방식이 아니었다.
내가 겪은 오우거는 주먹을 휘두르는 걸 더 좋아한다.
하지만 좀비로 변한 오우거는 주먹보다 이빨이 앞섰다.
당황한 것은 베켄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오우거의 전투방식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로 심슨이 달려들었다.
"정신차려, 엘피온! 와이번에게 집중해라!"
마법을 준비하던 아이작이 다그쳤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대한 좀비 오우거.
그것에게 달려드는 심슨이 마치 파리처럼 보였다.
손바닥 한 번 마주치면 으깨어질 것이었다.
"엘피온!"
아이작이 재차 외쳤지만, 심슨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오우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돼! 엘피온!"
아이작의 외침을 흘려보내며, 물과 변화의 라그룬을 발동시켰다.
곧바로 손에서 초록색 뭉텅이가 빠져나오며 오우거를 향해 날아들었다.
심슨이 오우거에게 롱소드를 쑤셔넣는 찰나였다.
오우거는 저 칼에 맞아도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었고, 자신도 그걸 아는지 칼을 피하지 않고 주먹을 내리쳤다.
순간, 초록색 마법의 빛이 오우거에게 스며들며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나는 곧바로 외쳤다.
"심슨! 바닥을 봐!"
그는 즉각 알아듣고 바닥에 있는 오우거를 찾아 발바닥으로 마구 짓이겼다.
"엘피온!"
아이작이 다시 고함쳤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더니, 어느틈에 다가왔는지 내 앞에 흉측한 와이번의 얼굴이 보였다.
혀를 낼름거리는 뱀 아가리가 반쯤 썩어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아직 살아있었다.
저것은 좀비의 눈빛이 아니다.
불안하게 만들었던 추측은 절망스럽게도 맞아들었다.
내게 달려드는 좀비 와이번은 바이러스에 완전히 먹히지 않았다.
코 윗부분은 살아있을 때처럼 멀쩡했고, 노란 자위 안에 세로로 박힌 검은 눈동자는 분노한 것처럼 번들거렸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날아든 와이번은 그대로 나를 덥쳤다.
"엘피온!"
아이작이 다시금 외쳤지만,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악착같이 와이번의 머리통을 붙들었다.
녀석에게 부딪히며 부숴진 갈비뼈와 망가진 내장은 곧 재생될 것이다.
버티면 된다.
게다가 나는 물렸다고 해서 좀비가 되지도 않는다.
와이번! 이 자식아!
너 실수한 거야!
*
녀석의 목을 붙들고 위로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와이번은 곧장 날아오르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나를 떼어내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떨어지지 않자, 위아래로 빠르게 비행하며 묘기하듯 움직였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녀석의 목을 안전바 잡듯 꽉 잡았다.
그 사이 밑에서 검은 빛이 성벽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이작이 드디어 준비한 마법을 풀어낸 것이었다.
동시에 남아 있는 좀비 중 다시 절반 정도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마법을 사용한 아이작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때, 심슨이 벼락같이 나섰다.
"얼음을 깨부숴라!"
곧이어 베켄의 병사들은 성벽 밖 좀비의 시체로 이루어진 동산을 뛰어 내려가며 버클러와 아밍소드를 부지런히 휘둘렀다.
일사분란하게 성벽 밖으로 퍼져 나가는 병사들의 모습은 웅장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방패를 휘두를 때마다 얼음 조각이 산산이 조각났고, 칼을 휘두르면 좀비들이 무너져내렸다.
심슨은 그 와중에도 주변을 훑어보면서 혹여 좀비에게 물린 자들이 없나 살피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와이번이 나를 떼어내지 못한 것이 분한 듯 숨을 씩씩 쉬더니, 한 차례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거의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바람에 와이번에게서 튕겨나갈 뻔 했지만, 가까스로 녀석의 목을 부여 잡고 버텨내었다.
그렇게 바닥과 거의 가까워질 때쯤, 와이번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이번에는 수직으로 솟구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악착같이 버티는 것 뿐이었다.
한참을 솟구치던 와이번은, 다시 방향을 바꿔서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나는 와이번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성벽을 향해 몸을 날리는 중이었다.
점차 가까워지자 심슨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성벽으로 물러나라!"
얼어붙은 좀비들을 얼추 정리하자마자 다시금 후퇴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베켄 전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성벽으로 돌아왔고, 남은 좀비 몬스터는 이제 이백이 채 되지 않았다.
베켄의 병사들도 백여 명은 되었으니 버텨볼만 한 숫자였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와이번은 아까처럼 바닥에 내리꽂는 시늉한 하는 게 아니었다.
성벽을 정말 부술 셈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속도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빨라져갔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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