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흉한 분위기
한스는 짐을 풀고 파이퍼 여단의 호랑이가 그려진 부대 깃발을 소중히 서랍에 보관해두었다. 이 깃발만 보면 자신의 자랑스러운 여단이 생각났다. 앞으로 전투가 없다고 생각하니 막상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한스는 자신의 전투 일지를 기록해 놓은 노트를 펼쳐보았다. 그 당시 전투가 머리 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진짜 지독했지...'
에밀라가 한스에게 물었다.
"전쟁터는 어땠어? 힘들진 않았어?"
에밀라의 말에 한스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도 안 힘들어. 난 장교였잖아."
"진짜?"
"난 사령부에만 있었어."
에밀라가 장난기 있는 눈으로 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령부에는 뭐 있는데?"
"내 사령부에는 서재도 있고 탁구대도 있어서 아주 편했어. 전방에 병사들이 고생했지."
죽어도 에밀라나 어머니한테는 몇 년간 자신이 겪은 일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을 것 이었다. 한스는 에밀라를 껴안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은 내 영지를 보러 가야지!'
다음 날, 한스는 으꺤 감자 요리를 먹고, 외출 준비를 마치고 에밀라에게 입을 맞췄다.
"갔다 올게!"
입을 쪼물거리며 웅얼거리는 오토와 카를에게도 한스는 손을 흔들었다.
'이젠 나도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 거야!'
한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차역으로 갔다.
'과연 내 영지는 어떤 모습일까?'
그 재수없는 베르너 새끼의 아버지는 성을 하나 갖고 있는 부유한 융커였다. 한스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내 땅이라니! 빨리 가보고 싶다..'
한스는 부푼 마음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 캠머리히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패여있는 잔뼈가 굵은 농부였다.
"백작님, 안녕하십니까?"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한스는 캠머리히와 함께 자신의 영지로 걸어갔다.
'이..이럴수가!'
저 멀리 지평선에 나무들이 10m 정도 간격을 두고 띠엄띠엄 굳건히 자라고 있었고, 푸르른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땅에서는 초록색 이파리들이 새 생명을 농축시키고 있었다. 한스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마 전까지는 고작 몇 백 미터 차지하려고 수 만명이 죽었는데...'
한 번 포탄이 터질 때마다 땅에는 거대한 흉터가 파였고, 잠시 뒤면 구덩이에서 물이 차올랐다. 병사들이 땅에 파둔 지그재그 형태의 참호는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을 했고, 삽질할 때 재수없으면 시체의 팔다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기저기 포탄 파편과 지뢰가 밝혀있는 화약 냄새 가득한 지옥은 도저히 땅이라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한스가 발을 밟고 있는 이 곳은 그야말로 새 생명이 약동하는 땅이었다. 예전 한스가 정찰을 위해서 정찰기를 탔다가 무사히 땅에 돌아오고 나서 조종수 미하엘이 땅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지금 한스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이 땅 위를 걷고 싶었다.
"경치가 기가 막힙니다!"
캠머리히가 말했다.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한스는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돈 모으면 나중에 여기 별장부터 지어야겠어! 오토와 카를 녀석이 크면 여름마다 이 곳으로 오는 거야!'
한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쉬어 보았다. 흙 냄새, 식물 냄새가 폐 속으로 들어오며 한스는 자신의 심장이 뛰고 핏줄 속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스의 영지 옆에 있는 다른 영지에서도 나이 든 농부들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캠머리히가 이파리를 만지며 한스에게 말했다.
"이 이파리 좀 보십시오!"
한스 또한 푸르른 이파리를 만져보았다. 캠머리히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수확을 할 겁니다! 파종에서 수확까지 80일에서 100일 정도 걸립니다! 하나 가져가시겠습니까?"
"네! 하나 주십시오!"
그렇게 캠머리히는 땅에서 작물을 하나 뽑아냈다. 초록색 이파리 밑에 누렇고 보라색의 동그란 작물이 나왔다. 한스가 그 작물을 받아 들고는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이것이 바로 대지의 냄새다! 분명 맛있을거야!'
"이 채소는 무엇입니까?"
캠머리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타바가를 모르십니까?"
'에?'
"아...하하! 물론 압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한스의 머리 속에 순무 커틀릿, 순무 샐러드, 순무 빵, 순무 잼이 떠올랐다. 캠머리히가 멋적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맛 있는 채소는 아니죠."
'맛만 없는게 아니라 영양가도 없지..'
그래도 한스는 애정이 어린 눈빛으로 루타바가를 바라보았다.
"이거 수확하면 다음엔 다른 채소를 재배합시다."
캠머리히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감자는 어떨까요?"
한스는 캠머리히가 신문에 포장해 준 루타바가를 갖고는 열차역으로 걸어갔다. 제 아무리 지긋지긋한 루타바가라고 해도 막상 자신의 영지에서 나온 작물이라 한스는 기분이 좋았다.
'왜 그렇게 땅 차지하려고 목숨까지 걸고 싸우는지 알 것 같군!'
열차를 기다리는데, 20대 중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쥐꼬리만한 봉급을 모아서 전시 채권을 샀는데 모두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네."
"넌 운이 좋은거야! 팔 다리는 성하잖아! 저길 보라고!"
열차역 구석에는 다리 한 쪽이 없는 병사가 앞에 모자를 두고는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병사의 군복에는 2급 철십자 훈장과 1급 철십자 훈장이 달려 있었다. 전시 채권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는 젊은이가 씨부렸다.
"난 몇 년을 군에서 썩었는데 군수 공장만 돈을 갈퀴로 모으고 말이야..망할 놈의 부르주아 새끼들..."
에밀라의 집도 군수 공장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한스는 이 말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젊은이의 친구도 씨부렁거렸다.
"지주라는 새끼들도 일은 안 하고 소작농만 뜯어먹고 말이야.."
기분이 좆같아진 한스는 말없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그리고는 철십자 훈장을 달고 구걸을 하고 있는 병사에게 걸어간 다음, 모자에 돈을 넣었다. 그 병사가 고개를 들며 한스에게 말했다.
"이렇게 큰 돈은 필요없..."
그 때, 한스는 각잡힌 자세로 경례를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열차역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쳐다보았다.
"강철 사냥꾼 아냐?"
열차역에 있던 기자는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퍼엉!
그 다리를 잃은 병사도 한스에게 경례를 했다. 어느덧 열차가 왔고 한스는 열차에 탑승했다. 잠시 뒤,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덜커덩
한스는 순무를 들고는 창문을 통해서 열차 밖을 바라보았다. 전쟁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실과 마주해야했다. 수 많은 젊은이들이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원년 전차병 중에 헤이든은 중산층 출신이라 대학을 진학할거라고 했지만 다른 녀석들은 취업 문제로 꽤나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한스는 한숨을 쉬고는 순무 이파리를 때서 입 안에 넣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한스는 히틀러에게 청첩장을 받았다.
'에바 브라운?'
한스가 가방을 싸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전쟁 끝나서 그런지 다들 서두르는군...'
한스는 히틀러에게서 받은 청첩장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들뜬 마음으로 가방을 들고는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오늘은 처음으로 대학에 가서 수업을 듣는 날 이었다.
'대학 한 번 가기 힘드네!'
한스는 고대하던 기계 공학 수업을 듣고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그 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헤이든이었다.
"이봐!! 헤이든!"
"어? 여단장님!"
헤이든은 한스에게 경례를 했다.
'쪽팔리게 여기서 왠 경례냐!!'
"이보게! 밥은 먹었나?"
"먹어야 합니다!"
한스는 헤이든과 함께 구내 식당으로 걸어갔다. 여기저기 커다란 글자로 벽보가 붙어 있었다.
[노동자에게 더 많은 권리를! 농부에게 더 많은 권리를!]
[사회주의 사회가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동지들이여, 투쟁하자!]
[지주에게 죽음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이 한 벽보에 쓰여져 있었다. 헤이든이 이걸보고 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 망할 년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한스가 말했다.
"요새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만약 그 년 의도대로 혁명이라도 일어난다면 저는 독일 제국을 위해 다시 싸우러 나가고 싶습니다!"
한스는 지금 독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엿 같은 일들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전쟁은 끝났고 이제 젊은이들은 현실의 문제에 맞부딪쳐야 했던 것 이다. 백수들이 증가했고 사회 분위기는 계속 흉흉해지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어록이 적혀 있는 벽보에는 크게 페인트로 X자가 그려져 있었다. 한스가 중얼거렸다.
"참 멍청한 여자군."
헤이든이 외쳤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몇 년 동안 전쟁에서 구르고 구른 녀석들이 일자리를 못 구해서 백수된 상황인데 저렇게 집단을 자극하고 선동하다니...'
한스는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이 여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강렬한 경멸과 혐오감을 느꼈다.
'꼭 이런 능력도 안 되는 이상주의자들이 설쳐대다가 맞아 죽고 지 말이 틀렸다는 것을 온 몸으로 입증하지...'
헤이든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것을 볼 때마다 군을 떠난 것이 잘한 결정인가 싶습니다. 유럽 최고의 사령관인 여단장님 바로 밑에서 싸웠던 것이 늘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저도 그냥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죠."
한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전투 때마다 똥오줌 지리던 것은 벌써 까먹었군..'
헤이든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계속 나불거렸다.
"어쩌면 저런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내부 세력때문에 우리 군이 프랑스 남부까지 진격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한스는 헤이든 말에 대꾸를 할 필요도 못 느끼고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노획으로 겨우 긁어모은 전차도 퍼지기 일보 직전이고 포탄도 부족한 상태였던 것은 잊었냐?'
전쟁과 그 이후 초례된 혼란스러운 상황은 많은 것을 바꾸고 있었다. 그 날 한스는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에밀라에게 말했다.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아."
에밀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나도 내년이면 투표를 할 수 있어!"
"어?"
에밀라가 말했다.
"몰랐어? 이젠 여성도 참정권을 갖게 되었어! 어디를 뽑을까 생각 중 이야!"
에밀라는 오토와 카를을 돌보며 기대에 부푼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스가 말했다.
"뽑고 싶은 쪽 뽑으면 되지."
한스는 조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남편 몰래 시위를 나갔다가 체포되는 일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이다.
'설마 사회주의 같은거 관심갖는 것은 아니겠지?'
에밀라가 뭔 생각을 갖던지 그건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혹여나 위험한 일에 엮일까봐 한스는 걱정이 되었다.
"에밀라, 요새 사회주의 난리던데 그거 알아?"
"사회주의? 난 관심 없어!"
에밀라는 실제로도 사회주의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요새는 시간 날 때 소설책을 읽느라 바빴다.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대학에 다니는 일상적인 나날이 흐르고 며칠 뒤, 한스는 전차에 사용할 무선통신 기술 테스트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았어!!!'
한스는 테스트 보고서를 읽어 보았다.
'7미터가 넘는 안테나는 적군의 눈에 띄어서 표적이 될텐데...근데 전쟁도 끝났는데 왜 이렇게 연구를 서두르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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