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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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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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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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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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W는 젊은 회사다.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압구정에 위치한 커피숍 쟈뎅(JARDIN).

종업원이 서빙하는 커피숍이나 다방이 일반적이던 이 시기에 본인이 주문 후 직접 가져다 먹는 ‘테이크-아웃’ 방식을 도입한 본격적인 원두커피전문점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여기요!”


안쪽 창가 테이블에서 막 커피숍으로 들어서는 류지호를 향해 오동석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앞에는 20대 후반의 보조개가 인상적인 여성이 앉아있다.


“응?”


낯이 익다.

류지호는 테이블로 걸어가는 사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을 헤집었다.

그리고 한 명의 대단한 프로듀서를 기억해냈다.

전하영 프로듀서.

1세대 기획 PD이자, 수많은 영화를 성공시킨 영화제작자.

이전 삶에서는 서로 인연이 없었다.

노는 물도 달랐다.

류지호는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재벌2세인가?’


전하영이 류지호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남자는 역시 수트발이라는 말이 맞았다.

캐서린이 뉴욕에서 사준 맞춤 정장이 값어치를 했다.

테이블로 다가온 류지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류지호입니다.”


전하영이 가볍게 류지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떼었다.


“반가워요. 전하영이예요.”

“대표님, 이쪽으로 앉으시죠.”


오동석이 창가자리를 류지호에게 양보했다.


“고마워요. 잠시 주문하고 올게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나이는 자신보다 어려도 류지호는 명색이 회사대표다.

부하직원인 자신이 주문을 하고 오는 것이 마땅했다.

그것은 오동석의 생각일 뿐.

류지호가 전하영에게 양해를 구하고 성큼성큼 주문대로 향했다.

에스프레소, 카페오레, 카푸치노 등의 커피를 1000원~15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케익류와 패스츄리 같은 디저트도 따로 메뉴에 표기 되어 있다.

잠시 아네모네 채사장과 이모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들이 현재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류지호는 아이스커피를 받아 테이블로 돌아왔다.

전하영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류지호에게 물었다.


“오 실장님에게 말은 들었지만... 무척 젊어 보이네요?”

“어떤 일이든 나이와 성별은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화 같은 분야에서는 더욱이요.”

“호호.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오동석이 전하영의 근황을 대신 알려줬다.


“전하영씨는 몇 달 전 개봉한 장유식 감독님의 <행복은 성적순 아니야> 홍보마케팅을 막 마쳤습니다. 현재는 일영영화사 마케팅팀에 있습니다.”


피카디리 극장을 소유한 일영영화사는 종로극장의 협동영화사와 함께 충무로 배급의 양대 축이다.


“일영영화사를 나오신다면 누보-씨네에서 남편분을 도와야 하지 않나요?”


영화기획사 누보-씨네의 신강 대표와 전하영은 부부다.

그녀는 <행복은 성적순 아니야>를 남편과 함께 기획·홍보를 한 바 있다.


“저는 성격상 모험을 좋아해요.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돌파하는 재미가 있거든요.”

“WaW에 합류하는 것을 모험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작품을 하고 싶어요. 홍보마케팅도 재미있지만 기획이 저와 맞는 것 같더군요. 홍보팀은 영화인이라고 인정도 못 받고 있기도 하고.”

“모든 창작자들은 좀 더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만 영화인이라고들 하지만, 전 생각이 다릅니다. 영화라는 매체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영화인입니다.”

“진성 영화인들에게 욕먹을 말을 잘도 하시네요?”

“진성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일부 영화인들이 가진 배타적인 선민의식은 없어져야 합니다. 그게 밥그릇 챙기기로 변질이 되서 시스템 발전을 가로막고 있잖습니까?”

“말을 참 재미있게 하네요. 꽤나 반골이기도 하고요.”

“반골이라니요? 저 선비에요.”


잠시 테이블 주위로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당장 전하영씨는 신 대표하고 프로덕션이 아닌 기획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할리우드처럼 기획·제작 파트도 전문화의 길로 가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 열아홉 맞아요?”


오동석이 류지호를 대신해 대답했다.


“하영씨, 대표님은 곧 스무 살이 됩니다.”


한창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할 나이다.

그런데 말하는 것이나 태도를 보면 충무로에서 수년 굴러먹은 영화판 딴따라가 따로 없다.

꽤나 개혁적인 성향으로 보이기도 하고.


“제가 WaW에 들어가면 홍보마케팅을 맡게 되는 거겠죠?”

“당장은 그렇습니다. 오 실장이 칸 필름마켓에서 영화 두 편을 구입했습니다. 내년에 개봉하게 될 것 같습니다.”

“...흠”


전하영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고심에 빠졌다.

류지호는 그녀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능력 있고, 똑 부러지는 사람.

그러면서도 열정을 가진 사람.

류지호가 기억하는 전하영이다.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전하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느 정도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결정이 류지호에게 좋은 쪽이라는 보장은 없다.


‘과연 나는 이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능력이 있는 유능한 인재를 동료로 삼는 것.

류지호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솔직히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을 배워보지도 못했고, 그것과 관련해 많은 경험을 해보지도 않았다.

쥐뿔도 없으면서 제 잘난 맛에 살다보니 진실 된 동료도 몇 없었고.


“WaW의 앞으로 행보는 어떻게 되죠? 외화 수입·배급만 할 계획인가요?”

“아닙니다. 한국영화에 기획, 투자, 제작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류지호는 그 이상의 비전은 말하지 않았다.


“제게도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요?”

“WaW가 자리를 잡고, PD라면 누구나 기획, 개발, 제작의 권한을 가질 겁니다. 다만 제가 최종결정할 뿐입니다.”


류지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전하영은 피식 미소를 흘렸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얘기가 안 통하면 저는 일 못해요.”

“감독은 영화가 계속해서 쌓이다 보면 예술가가 될 수 있지만, 프로듀서는 성취감과 보람 외에는 어떤 명예도 가지지 못합니다. WaW의 프로듀서들이 영화 잘 만드는 장인으로 불리길 바랍니다.”

“멋진 말이네요. 감독은 예술가가 되고, 프로듀서는 장인이 된다는 말.”


오동석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새삼 자신의 대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영화로 돈을 벌겠다가 아니다.

뭐랄까 좀 더 큰, 충무로의 체질이나 시스템에 손을 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십대가 영화산업의 변혁을 구상하고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제가 독립을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죠?”

“상관없습니다. 때가 돼서 독립한다면 만류하거나 붙잡지 않을 겁니다.”


당연한 것이다.

영화업이라는 게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게 되면 자기 힘으로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스스로 작품을 꾸려갈 능력이 된다면 밀어주면 밀어주었지 품안에 가둬둘 생각이 류지호는 전혀 없다.

그것이 류지호에게도 좋은 일이고, 독립하는 프로듀서에게도 좋다.


“그때가 온다면 우리가 경쟁할 일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개봉영화에 한하여 스크린을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것. 그 외에는 한국영화라는 큰 틀 안에서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감독이나 시나리오를 두고 경쟁할 수 있진 않을까요?”

“미래도 지금처럼 한국영화시장이 작을 거라 보십니까?”


전하영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커지겠죠.”

“충무로에 돌아다니는 시나리오만 5,000편이 넘는 날이 곧 옵니다. 감독이요? 너도 나도 감독을 꿈꾸는 재능 넘치는 영화학도들이 넘쳐날 겁니다. 그 가운데 원석이 없겠습니까? 이미 잘 세공된 준비된 보석이 없겠습니까? 별로 경쟁하거나 다툴 것 같지 않습니다. 서로 프로젝트를 공유하고 협업하면 몰라도.”


할리우드는 시나리오나 제작권리를 두고 제작사끼리 자주 분쟁이 벌어진다.

반면에 충무로는 창작자와 제작사의 분쟁은 곧잘 벌어져도, 제작사끼리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놓고 다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전하영은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명확한 주관과 자기 비전을 가지고 있군요?”


류지호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정말 열아홉 살이 맞아요?”

“만으로 열여덟입니다.”

“저를 대표님 회사에 붙잡아 두고 싶으면 도전거리를 계속해서 던져주세요.”

“그 말은....?”

“언제든지 불러만 주세요. 합류하겠어요.”

“충동적으로 결정인 것 같군요.”

“맞아요.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어요.”

“......?”

“대표님하고는 잘 통할 것 같아요.”


류지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잘 부탁드려요. 전 PD님.”

“제 계획 하나가 무너지네요.”

“계획이요?”

“서른 전에 홍보, 마케팅을 접고, 신나게 현장을 뛰고 싶었는데.”

“곧 현장도 뛰실 겁니다. 그건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 젊음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있다.

한국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바꿔 말하면 관객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거다.

방화는 재미없고 고루해서 보고 싶지 않다는 관객들의 편견을 깨고 싶다.

남편과는 그런 면에서는 지향하는 바가 같았다.


“세상 사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WaW가 잘나가게 되면 제게도 기회가 오겠죠.”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좋아요.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죠?”


성공했다.

또 한명의 유능한 인물을 품에 안은 것이다.

사람을 얻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만약 얻게 된다면 어떤 재화보다 더 가치가 있다.

현재 전하영은 완성된 프로듀서는 아니다.

하지만 오동석처럼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도 몇 편의 영화에서 기획, 홍보능력을 증명하고 있었고.

한편으로 염려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의 인생에 끼어들어 혹시나 전도유망한 영화인 한 명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닐지.

문제적 영화와 흥행영화를 여러 편 기획하고 제작했던 전하영.

이제 존재하지 않는 미래다.

류지호가 설립한 WaW에서 영화인생을 걸어가게 되었다.

좋은 결과로 이끌지 나쁜 결론을 만들어 낼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 ❉ ❉


박건호는 얼마 전까지 동우수출공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했다.

메이저 영화사의 부장이라면 편하게 데스크에 앉아서 지시만 내려도 충분했는데, 그는 항상 평직원처럼 많은 일을 했다.

부하직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매사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영화판의 평판도 좋았다.


“73년 신장욱 감독의 <삼일천하>에 출연한 남궁현 배우 가방모찌부터 충무로 생활을 시작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배급업계로 뛰어 들어 경상도 지역을 아우르는 영향력 있는 배급업자가 되셨죠.”

“지방 배급업자가 동우에서 일을 해요?”

“동우 회장님이 스카우트해서 배급업무를 총괄시켰다고 합니다.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3년 동안 두 명의 부하직원과 함께 박봉의 월급과 거의 없다시피 한 회사의 지원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없이 묵묵히 회사를 위해 일을 했다고 하죠.”


오동석이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는지 목소리가 조금 촉촉해졌다.


“지방 배급업자 파워가 상당히 셀 텐데 굳이 남의 밑으로 들어가서 고생을 사서 했다라......”

“여차저차 하던 차에 2년 전 박 부장님이 대박을 쳤습니다. 대표님이 아실지 모르지만 당시에 정부에서 동구권 영화수입개방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때 박 부장님이 충무로에서 제일 빨리 움직이셨죠. 소련영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2편의 영화 판권은 물론 TV방영권·비디오판권을 포함해 34만 달러에 계약을 따낸 것이죠.”


배급이란 게 그렇다.

누구보다 먼저 될 만한 영화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MBS와 판권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영화배급 세계의 비사다.


“MBS가 박 부장님이 판권을 구입하기 3년 전에 미국의 프랜스 아메리카란 배급회사로부터 두 편의 소련영화를 2만 달러에 수입했다고 발표를 한 것이죠. 그 때문에 두 영화에 대한 판권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흔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박 부장님이 책임을 지고 MBS의 영화부장과 협상을 벌였고, 서로 수입루트만 다를 뿐 양쪽 모두 수입계약상에는 하자가 없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합니다.”

“방송국과 협상을 했다니 확실히 능력이 있으신 분이군요?”

“동우 왕회장님의 신임이 대단했었죠. 그게 문제였나 봅니다. 어찌된 일인지 사안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는데 이후로 소련영화 두 편의 극장개봉과 관련한 배급업무에서 박 부장님이 배제가 된 겁니다.”

“사내 정치나 알력이 있었겠네요.”

“맞습니다.”


오동석은 다시 한 번 류지호에 대해 놀랐다.

19살이 기업이나 조직 내의 정치까지 알고 있다니.


“동우에 고 실장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알랑방귀 잘 뀌는 사람이죠. 출세지향적인 사람이라서 영화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충무로 술자리에서 대놓고 씹히는 인사입니다.”


오동석이 한동안 고 실장이란 사람에 대해 뒷담화를 늘어놨다.

류지호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서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들었다.


“왕 회장님이 내가 알기로 대인배이신데... 그런 얄팍한 사람에게 놀아나셨다구요?”

“고 실장이란 사람이 해외유학파입니다. 게다가 박 부장님보다 젊죠.”

“이 시기에 유학파가 영화판에 들어왔다고요?”


영화감독이나 배우는 유학파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스태프도 아니고 배급분야에서 해외유학파가 있었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미국에서 경영을 공부했다는데 졸업장을 가라로 팠다고도 하고. 솔직히 사람 자체가 진실되지 않아서 잘 안 믿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영화판이 은근히 폐쇄적이다.

끼리끼리 해먹으려는 풍조가 매우 강한 분야다.

해외유학파가 쉽게 들어와 자리 잡기 쉽지 않았다.


“암튼 왕 회장님이 고 실장한테 홀딱 넘어가셔서 박 부장님이 맡았던 업무들이 하나둘 넘어가고 심지어 권고사직을 은근히 권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겁니다. 토사구팽을 당하신 거죠.”

“현재는 동우수출공사에서 퇴사한 상태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지방배급으로 복귀를 도모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류지호는 몰랐지만, 박건호의 토사구팽은 충무로에서 제법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오동석은 해외 필름마켓에서 자주 만나면서 박건호와 친분을 쌓았다.

그에게 배운 것도 많았다.

오동석은 박건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한편 스카우트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사실 박건호는 더는 남의 회사에 들어가 일할 생각이 없었다.

오동석의 끈질긴 설득 끝에 류지호를 한 번 만나보기로 했던 것.

그렇게 해서 류지호는 박건호와 신사동 참치횟집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수입·배급사 상무라......”


박건호가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고민이 있을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다.

부장의 지위에서 외화수입·배급사 상무 제의를 받다니, 당장에 수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제안이다.

하지만 박건호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동석씨에게 WaW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제안을 해주니 감사합니다.”


류지호로서도 쉽지 않은 제안이다.

아무리 오동석을 믿을 수 있다고 해도, 그가 추천한 사람까지 모두 뛰어난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전하영이야 워낙 유명한 제작자였고, 평판이 좋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고민 없이 영입했지만, 박건호는 솔직히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류지호가 영화를 했던 시대와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전하영을 비롯해 단편영화를 찍으며 친분을 쌓은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박건호에 대한 걸 물었다.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부장님, 안주 좀 드세요. 속 버립니다.”

“아이쿠. 내가 주책없이 쌍팔년도 시절 이야기를 늘어놨군요.”


저녁을 먹고, 술자리로 옮겨와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박건호의 영화인생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다.

사실 60~70년대에 충무로 생활한 선배들의 삶이 다들 그렇다.

영화로 만든다면 다양한 장르가 나올 정도로 버라이어티 하긴 했다.

다만 그런 말에 홀랑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한 류지호가 아니다.

류지호는 분위기에 취해 자신의 목적을 잊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박건호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메이저 영화사의 부장으로 일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고, 평판도 좋았다.

맨바닥에서 시작해야 하는 WaW에 꼭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


"부장님은 충분히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WaW의 실질적인 오너가 그렇게 평가해 주니 감사하면서 민망합니다.”

“......”

“부장에게 대표 바로 다음인 상무를 제의한다라. 류 대표는 참 재미있는 분입니다.”

“부장님은 직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해 뒷조사라도 했습니까?”

“충무로에서 소문이 좋게 돌더군요.”

“좋습니다. 나에게 기대하는 건 뭡니까?”


류지호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소통입니다”

“모호하군요.”


영화배급에 대한 전권을 생각했던 박건호의 눈빛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장님은 이를 위해 가장 적합한 분이라고 판단했고, 제가 직접 모셔가기 위해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배급하는 것 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 말에 류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하직원 모두를 고른 시야로 바라보시잖습니까. 귀를 열어두고. 언제나 이야기를 듣겠다는 신호죠.”

“고른 시야라......”

“<전쟁과 평화> 말고도 부장님이 밀어붙여 수입한 영화들 가운데 상당부분에서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이 바닥은 오야지의 의견이 절대적이지 않습니까? 실패한 영화도 부하직원에게 돌리지 않고 본인이 책임을 지겠다고 하셨더군요.”

“하하하. 그래서 회장님께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죠.”

“저는 그런 권위적인 상사하고 다릅니다.”


박건호의 눈매에 감탄이 물들었다.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확실히 자신을 어필하는 남자다운 모습.

그런 당당한 태도가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저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조사라기보다 충무로에 퍼져있는 부장님에 대한 소문을 리서치했습니다. 중요한 자리를 맡겨야 할지도 모르는데, 충분히 준비를 하고 뵈어야죠.”


윗사람에게는 미운털, 아랫사람에게는 신뢰와 존경을 받는 남자,

류지호가 소문을 취합해 내린 박건호에 대한 정의다.

비록 WaW의 상무 직위가 동우수출공사 부장에 비해 보잘 것 없을지도 모르지만, 난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겠다.

그것이 오동석을 통해 박건우가 전해들은 스카우트 조건이다.


“부하직원들에게는 두터운 신뢰를 얻었지만 웃전에 미움을 받았죠. 요상한 이유로 물러난 후 다시 지방배급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그 마저도 신통치 않습디다.”


박건호는 충무로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환영을 받는 인물이다.

다만 동우수출공사 실권자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쉽게 갈 곳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류지호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그를 영입하려고 한다.


“흠......”


박건호는 빈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생각이 복잡해 졌다.

스물도 되지 않은 사장의 나이는 걸리지는 않는다.

오동석이 칸 필름마켓에서 어떤 영화를 사왔는지 들었기에.

자신이 보기에도 탁월한 판단이다.

박건호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40대의 중년이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류지호의 진심은 그런 그를 뒤흔들어놓고 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박건호는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시 누구 밑으로 들어가는 걸 고려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

“부장님! 저는 WaW의 모든 영화를 전국동시상영 하고 싶습니다.”

“그건.....”


박건호의 꿈이다.

종로극장이나 피카디리 극장 라인이나 가능한 전국동시상영.

말이 전국동시상영이지 실제로 10개도 안 되는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게 현실이다.

박건호는 미국처럼 전국의 극장이 같은 날 같은 영화를 동시 개봉하는 걸 꿈꿨다.


“직배사가 아무 준비 없이 한국시장에 들어왔겠습니까? 곧 프린트 제한도 없어지고, 극장배급 체제도 변합니다. 막대한 힘을 가진 자본이 충무로로 들어옵니다. 지금 눈앞에 닥친 것에 급급해 밥그릇 싸움하다가는 그들에게 주인자리를 내줄지도 모릅니다. 부장님이 십년 넘게 몸담았던 지방배급. 그 시장이 곧 사라지고 새로운 자본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박건호는 입을 꾹 다물고 류지호의 말을 들을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박 회장님이나, 이 회장님이나 결국 사업가입니다. 그 분들이 쓸모를 다한 배급업자들을 보살펴 줄까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영화인들이 똘똘 뭉쳐도 못 막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건호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필름마켓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합니다.”

“아무도 신경을 안 썼겠죠. 왜? 상관이 없으니까요. 누가 영화를 가져오든 자신들은 그걸로 돈만 벌면 되니까. 한국영화? 스크린 쿼터가 없으면 일 년 내내 자신의 극장에 외화만 걸 겁니다.”

“류 대표도 결국 외국영화를 수입해 와 배급할 생각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한국에서 번 돈을 모두 가져가는 것보다 일부라도 한국에 남겨두게 하려는 노력은 해보려고 합니다.”

“사업가가 돈만 벌면 되었지 그런 것까지 신경 씁니까?”

“제가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영화를 좀 더 편하게 하고 싶습니다. 영화로 번 돈이 영화판에 남아서 그 돈이 재투자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저도 그 돈으로 영화를 찍고, 돈도 벌고 하지 않겠습니까?”


박건호는 멍하니 눈을 껌뻑이며 류지호를 바라보았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이 청년의 패기만큼은 높이 사줄만 했다.


“영화로 번 돈이 영화판에 남아야 한다라...”


박건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부장님도 도태되기 전에 준비를 해두셔야 합니다. 영화판을 떠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말입니다.”


쪼르르.


류지호가 박건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신다면 저도 부장님과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스스로 WaW를 나가지 않는 한 제가 식구를 내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부장님, WaW로 와주시겠습니까?”


꿀꺽.


박건우가 류지호가 채워 준 술을 단숨에 넘겼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먼저 지방배급업자들에게 의존하는 영화투자구조에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류지호는 긴 시간을 들여 한국영화 배급구조 개편에 대해 설명했다.


“후우. 졌습니다.”

“그럼...?”

“주변을 정리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박건우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후후. 늙었다는 소리 안 듣도록 철저히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40대 후반이면 한창이십니다.”


굳게 잡은 두 손.

한국영화 배급업계의 전설이 될 박건호가 류지호 사단에 합류했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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