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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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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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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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흐르는 강물처럼.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후 전하영은 한국으로, 류지호와 오동석은 뉴욕으로 향했다.

류지호는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호수 미시간호를 눈에 담았다.

지상에서 볼 때는 바다 같았던 오대호다.

까마득한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호수가 맞았다.


“무슨 생각하십니까?”

“.....응?“

“영화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형, 우리끼리 있을 때 말 놓기로 하지 않았어?”

“그, 그랬지... 요.”


두 사람은 사석에서는 편하게 지내기로 했다.


“명색이 회사 대표한테 이름을 막 부르는 건 아닌 거 같고... 난 지금이 편하니까 류 대표는 자기 편할 대로 해.”

“그게 편하다면..... 근데 뭐라고 했어?”

“마빈 코트너가 찍는다는 영화 말이야.”

“<늑대와 춤을>?”

“그 영화..... 제목만 가지고 찾아야 한다는 거지?”

“영화사 이름은 몰라. 단지 영화사를 마빈하고 친동생이 함께 만들었다는 것하고, 지금 한창 어딘가 국립공원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것. 마빈 코트너가 직접 연출까지 맡고, 동물, 어린이들, 인디언 원주민까지 동원해서 찍다보니 많은 시행착오가 생겨 제작비가 오버됐을 거야. 할리우드 소식을 전하는 잡지에는 정확한 내용이 나오지 않더라.”


오동석이 다이어리를 볼펜으로 톡톡 두드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입도선매라....”

“자금은 내가 마련해 볼 테니까, 형은 거기 제작사와 접촉해봐.”

“할리우드 영화는 배급사가 붙은 상황에서 제작에 들어가는데....”

“제작비가 부족할 때 해외 선판매도 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겨울이 되기 전에 촬영을 끝낼 테니까 조금 서둘러야 할 거야.”

“영화사가 LA에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

“전미제작가협회에 등록되어 있다면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을까?”

“그건 내가 알아볼게. 물론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 전매여야겠지?”

“응.”


이전 삶에서는 동우수출공사가 대략 90만 달러에 영화를 수입했다.

한국의 다른 수입업자와 경쟁을 하지 않고, 선판매로 구매할 수 있다면 그 가격보다 적은 돈으로 판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30만 달러 정도밖에 안 돼.”

“알고 있어.”

“반드시 그 영화 판권을 사야하는 이유가 있어?”

“수입배급사가 터질 만한 영화를 사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나는 류 대표가 무리하는 거 같아 보여.”

“내후년에 배급할 영화를 꼭 내년에 사야만 한다는 법 있어? <늑대와 춤을>에 해외배급사가 붙으면? 다른 수입사와 경쟁을 해야 하잖아. 우리는 기회가 왔을 때 망설이지 말고 질러야 해.”

“그 영화가 터진다고 확신해?”

“응.”

“어떤 근거로?”

“......시나리오를 봤거든.”

“언제?”

“올 초... 월가에 투자유치 하러 왔을 때.”

“나도 볼 수 있어?”

“아마 지금은 그곳에 없지 싶은데. 제작사와 협상할 때 스크립트 달라고 해서 읽어봐.”


류지호가 영화를 사고야말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오동석 자신이 꼼꼼하게 따져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계약은 영화 제작비와 시나리오 읽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자.”

“난 자금 부분을 책임질게.”


말을 마친 류지호가 시카고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펼쳤다.

잠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오동석을 돌아봤다.


“형.”

“응?”

“말 놓으니까 좋지?”


그 동안 오동석과 사무적인 관계로 지내다보니 류지호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난 조금 불편해. 이러다가 실수할까봐.”

“우리가 많이 친해진 것 같지 않아?”

“류 대표한테 충성을 다 바치고 있어. 이미 충분히 친하다고 생각해.”

“앞으로도 더 친하게 잘 지내봐.”


그 말을 끝으로 류지호가 다시 책에 시선을 뒀다.

오동석 역시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메모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뉴욕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자 볼일을 보기 위해 헤어졌다.

류지호는 픽업을 위해 마중 나와 있던 죠셉과 함께 파커가의 저택으로 왔다.


“다녀왔습니다!”


류지호는 마치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저택고용인들에게 인사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군요?”

“하하하. 브래드 잘 있었어요?”

“마스터께서 돌아와 계십니다.”

“이 시간에요?”

“컨디션이 조금 떨어지셔서 일찍 귀가하셨습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서재에 계십니다.”


류지호가 여행용캐리어도 내팽개치고 서재로 달려갔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와라. 영화제는 재미있더냐?”


류지호는 대답 대신 윌리엄의 안부부터 챙겼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면 병원으로 가시지 저택으로 오셨어요?”

“괜찮다. 비가 올 모양인지 무릎이 조금 불편한 것뿐이야. 호들갑 떨 일이 아냐.”


윌리엄이 안경을 벗은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류지호가 그가 가리키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성과는 있었고?”

“드라마 부문에서 상을 받았어요.”

“허허허. 축하한다.”

“시카고 시장님이 할아버지께 안부를 전했어요.”

“리처드가 말이냐?”

“기부를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달라고 제게 당부하더라고요.”

“도시가 발전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시민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인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보였더냐?”

“잠깐 인사만 한 거라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그 분이 시장이라면 앞으로 시카고가 크게 발전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테일리는 중부에서 영향력이 큰 가문이란다. 그들과 친분을 쌓아둔다면 앞으로 네가 미국에서 일을 해나가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게야.”

“아직은 감당하기 힘든데, 노력해 볼게요.”

“호의를 받으려면 먼저 호의를 보이 거라. 호의를 보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뭔 줄 알아?”

“재물이죠. money!”

“일부러 진흙탕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지만, 사업가의 길은 항상 깨끗한 물로만 다닐 수는 없는 법. 매사 밝은 눈으로 썩은 물과 늪을 살피는 노력을 하도록 해.”

“예!”


서재를 나온 류지호가 방에 짐을 옮겨놓고 저택의 차고로 왔다.

리무진부터 밴까지 다양한 차종들이 각을 맞춰 주차되어 있다.


“죠셉!”


활짝 열려진 리무진의 보닛 안쪽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죠셉이 몸을 일으켰다.

죠셉이 어깨위에 올려놓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물었다.


“외출하려고?”

“부탁이 있어.”

“뭐든 말만 해.”

“맷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봐 줘.”

“매튜 그레이엄?”

“내가 뉴욕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진즉 찾아왔을 텐데, 연락도 없네.”

“그러지.”

“그리고...”


류지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죠셉은 성급하게 류지호의 다음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상명하복이 몸에 밴 태도다.

류지호가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맷과 대니얼 할아버지의 관계가 왜 서먹한지, 그리고 제법 유능했다는 그레이엄가의 막내 매튜가 왜 망가졌는지도 알아봐 줘.”


죠셉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거 꽤 민감한 문제야. 그 부분은 내가 관여할 수 없어.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무리한 부탁해서 미안해. 그건 놔두고, 맷이 어디서 뭐하고 다니는지만 알아봐 줘.”


죠셉이 굳었던 표정을 풀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레이엄의 망나니가 노는 곳은 뻔하지. 하루만 시간을 줘.”

“고마워.”

“지호, 내가 충고 하나 하지.”

“말해 봐.”

“그레이엄 집안의 일을 알고 싶다고 아무에게나 의뢰하지 마. 그런 짓은 단순히 그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차원의 일이 아니야. 때에 따라서는 누군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수도 있어. 차라리 캐서린이나 제임스에게 직접 물어봐. 그편이 좋아.”

“충고 고마워.”


류지호가 차고를 빠져나와 가을 하늘을 올려다봤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매튜 그레이엄에 대해 류지호가 관심을 기울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신경이 쓰인다.

자꾸 감정을 건드렸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패배자처럼 구는 꼴이 보기가 싫었다.


“쯧. 괜히 정이 들어서는..”


✻ ✻ ✻


류지호는 내친걸음에 G&P 사무실로 제임스를 찾아갔다.

제임스가 너무 바빠서 곧바로 만날 수 없었다.

류지호는 손님 접대용 룸에서 비서가 챙겨준 차를 마시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제임스가 손님 접대용 룸으로 들어왔다.


“기다리느라 지루했지?”

“신문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이야기는 점심 먹으면서 하자.”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즐길 줄 알았다.

그런데 제임스가 류지호를 데리고 간 곳은 G&P 빌딩에서 한 블록 떨어진 수제 햄버거 가게였다.

햄버거를 구입한 제임스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두 잔 사들고 왔다.

두 사람은 근처 광장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무는 제임스에게 류지호가 물었다.


“설마 매일 이렇게 점심을 해결 하는 건 아니죠?”

“간단하게 먹어야 할 때마다.”

“월가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비즈니스 파트너들하고 매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줄 알았어요.”

“비즈니스 업무일 때나 그렇고. 대부분 나처럼 간단하게 먹는 편이야.”

“환상 하나가 또 깨졌네요.”

“맨해튼의 비즈니스 블록은 총성 없는 전쟁터야. 일분일초가 다 수익과 손해로 이어지는데 한가하게 여유부릴 순 없지.”


두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그리고 류지호는 궁금했던 매튜 그레이엄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매튜 그레이엄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월가로 들어와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여러 방면에서 능력을 보여 가문에서도 기대가 컸고, 서른을 갓 넘은 시점에 G&P의 M&A 부서 팀장으로 승진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동료가 투신자살했던 것.

아침까지도 함께 시시덕거리던 동료가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된 매튜 그레이엄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심리치료까지 받았다.

자살한 동료가 죽기 전에 만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 대니얼이란 걸 알게 된 매튜 그레이엄은 아버지와 크게 다퉜다.

부자지간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당사자만 알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G&P를 뛰쳐나간 매튜 그레이엄은 완전 딴 사람으로 변해버렸고, 망나니에 걸맞은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모두 맷을 방치 하는 거죠?”


사연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자세하게 들려주던 제임스는 이 대목에서 대답 없이 묵묵히 커피만 마셨다.


“가족이잖아요. 왜 보고만 있는 거죠? 대니얼 할아버지는 냉정한 분이라 그럴 수 있다고 쳐요. 캐서린은 누나로서 조치를 취할 수도 있잖아요.”

“왜 녀석에게 신경을 쓰는 거지?”

“친구라서... 맷이 제 친구이기 때문이에요.”

“친구라... 참 그리운 단어야.”

“......?”

“우린 모두 가족이지.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반드시 지켜야할 게 가족이야. 헌데, 녀석이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와서는 안 돼.”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가족들이 맷을 버렸다는 말입니까?‘

“녀석이 예전 모습으로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큰 문제가 생겨.”

“무슨... 혹시 후계문제라던가 권력...”


류지호는 설마 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속 가문이란 게 그래. 거대한 기업집단의 내부 역시 사회의 축소판이고. 그 안에는 정치가 있고, 권력투쟁과 세력 간 알력이 있지. 서로 이해관계가 모이고 해체되고 이합집산이 수시로 벌어져. 실제 맷을 복귀시켜 자신들의 욕심을 실현하려는 이들도 존재하지.”

“맷이 그 모든 걸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거란 말이에요?”


제임스가 단언했다.


“녀석은 진짜로 망가졌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마치 한국의 아침드라마 한편을 보고난 느낌이랄까.

물론 불륜과 후계자들끼리의 막장 암투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현실감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이제 깨달았지? 녀석의 사정에 관여하려 들지 말고.... 지금처럼.... 뭘 할 필요는 없어.”


맞다.

제임스의 말처럼 류지호가 매튜 그레이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는 세계가 다르고, 매튜 그레이엄의 인생은 그의 인생일 뿐이니까.


“제임스는 괜찮아요?”

“걱정돼?”

“제가 방금 들은 어떤 가문의 비화는 파커가문에도 해당될 거 같은데요?”


파커 직계 가문의 자손은 남자 형제만 넷이다.

왕좌의 난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하하하. 파커 패밀리는 이미 아버지가 명예직으로 물러나면서 정리가 끝났어. 나도 큰 욕심이 없고. 물론 누구 때문에 계획에 없던 일이 수십 배가 늘어났지만.”


류지호가 제임스를 돌아보며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네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자들을 위한 토털서비스 말이다. 독립된 회사를 만드는 대신 G&P에서 사업을 진행하기로 했어. 덕분에 나와 캐서린의 부담이 커졌지.”

“G&P라는 두 가문의 이름값이 필요한 거군요?”

“일종의 보증이지. 파커와 그레이엄의 자금도 들어가 있으니 믿고 맡겨라.”


류지호가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내려는 듯 농담을 던졌다.


“유명한 투자은행의 최고경영자에서 부자들의 집사로 신분이 하락했네요.”

“중세시대에는 집사도 고위직이었단다.”

“지금은 20세기에요, 제임스.”

“하하하. 아무렴 어때? 내가 그 일을 좋아하면 그만이지.”

“맞아요. 좋아서 해야죠.”

“빨리 뉴욕으로 와서 정착해. 네 자리는 G&P 어디든 만들어 줄 테니까.”

“싫어요. 절대! 난 제임스처럼 일에 치어서 살고 싶지 않아요.”


분명 파커가족의 호의는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높은 그들의 기준과 기대치는 부담스러웠다.

매튜 그레이엄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평생을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싶지 않은 것이 류지호의 솔직한 심정이다.

미국대학 원서접수에서 뉴욕주의 대학은 다시 한 번 고민해 봐야겠다고.

류지호는 그런 생각을 했다.


❉ ❉ ❉


죠셉이 운전하는 BMW가 맨해튼 브리지(Manhattan Bridge)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들어섰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종이 정말 다양했다.

푸에르토리코, 이탈리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동양인까지.

블록을 지날 때마다 거주민들의 인종이 바뀌는 느낌이다.


“겁먹을 거 없어. 이 지역 모두가 우범지대는 아니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그렇지 저들을 색안경 끼고 볼 필요는 없어.”


죠셉 본인이 이 지역 출신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그런데.

브루클린 남쪽 지역에 위치한 잡화점.

빅 보이 델리(Big Boy Deli)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가게 안으로 매튜 그레이엄이 들어갔다.

사내 둘이 팔걸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성인잡지를 보고 있었는데, 덩치가 큰 남자가 형이었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동생이다.

동네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양아치 형제다.


“......!”


매튜 그레이엄이 남미계 점원과 눈을 맞췄다.

그런 후 주머니에서 돌돌 말려있는 달러 뭉치를 꺼냈다.

달러와 마약을 바꾼 매튜 그레이엄이 잡화점을 빠져나가려는데.

성인잡지를 보고 있던 형제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뭐하는 짓이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매튜 그레이엄이 점원을 향해 물었다.

점원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출입구를 호리호리한 사내가 막아섰다.


“맨해튼에서 왔나봐?”

“그런데?”

“돈 좀 나눠 쓸까?”

“물건 값으로 모두 지불해서 지금은 빈털터리야.”

“과연 그럴까?”

“장사 접고 싶어?”


매튜 그레이엄이 점원을 향해 소리쳤다.

경고라기보다는 긴장과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다.

점원은 대답대신 실실 웃는 자세를 일관했다.


덥석.


출입구를 막아섰던 사내가 매튜 그레이엄의 팔을 잡아 등 뒤로 꺾었다.


“놔! 이거 놓지 못해!”


매튜 그레이엄이 거칠게 반항을 해보았지만, 소용없다.

사내 둘에게 위협을 받으며 잡화점 뒷문을 빠져나갔다.

점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태연하게 카운터를 지켰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팔을 비틀고 있는 호리호리한 사내에게 매튜 그레이엄이 호기롭게 주먹을 날렸다.


휘익.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툭.


매튜의 힘없는 주먹질이 사내의 팔뚝에 가로막혔다.


“제, 제기랄!”


도망갈 곳이 없어진 매튜 그레이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덩치 큰 남자가 빈정거리는 투로 위협했다.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냥 가진 거 다 내놓지?”

“......!”

“새미, 녀석을 제압해.”

“알겠어, 형.”


새미라고 불린 호리호리한 사내가 매튜 그레이엄에게 달려들었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피폐해진 매튜 그레이엄으로서는 사내 둘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퍽퍽퍽.


두 형제에게 몸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난타 당했다.


“윽!”


어디 한 군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게 두들겨 맞는 순간에도 매튜 그레이엄의 손과 발은 쉬지 않고 휘둘러졌다.

조금 덜 얻어맞기 위한, 조금 더 살기 위한 처절한 동작일 뿐.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뒷골목에서 매튜 그레이엄이 형제에게 막 구타를 당할 타이밍에 잡화점으로 류지호와 죠셉이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류지호가 점원에게 걸음을 옮기는데, 뒷문 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죠셉?”

“젠장!”


죠셉이 홀스터에서 권총을 빼들어 점원을 겨눴다.

점원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이 새끼들! 미쳤어?!”

“손들어! 카운터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허튼 짓하면 쏜다!”


류지호가 뒷문으로 뛰쳐나갔다.


“지호! 함부로 움직이지 마!”


죠셉이 경고했지만, 류지호는 이미 뒷문을 빠져나간 후다.


꽝!


뒷문을 박차고 나온 류지호의 눈에 형제에게 구타당하는 매튜 그레이엄의 모습이 보였다.


“멈춰!”


류지호가 달려가 새미라고 불린 사내의 뒷목의 옷깃을 잡아 내팽개쳤다.


꽈당.


뒤로 벌렁 넘어진 새미가 벌떡 일어서서 류지호를 경계했다.

하지만 이내 류지호의 외모를 확인하고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품새가 영락없는 샌님이다.

게다가 어려 보인다.

가소로웠다.

류지호가 담장에 등을 기대고 있는 매튜 그레이엄의 앞을 막아섰다.


“맷, 괜찮아요?”

“끙. 몇 대 맞는다고 안 죽어.”


류지호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새미라는 남자가 급작스런 공격을 해왔다.

기습적인 공격임에도 류지호는 팔로 막으며 그의 배를 발로 찼다.


우당탕!


중심을 잃은 새미가 뒤로 벌렁 주저앉았다.


“원숭이 자식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새미의 형이 주머니에서 손을 넣었다.

류지호는 혹시나 권총을 꺼내지 않을까 긴장했다.

새미의 형이 두 개의 손잡이가 있는 접이식 나이프를 꺼냈다.

류지호는 주머니 나이프인 걸 확인하고 바짝 곤두섰던 긴장감에서 다소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휘리릭, 척.


새미의 형이 손목의 힘만으로 휘적휘적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접었다 폈다하며 기술을 뽐냈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침착했다.


꽈직!


류지호는 뒷문 옆에 세워놓은 걸레 밀대를 발로 몇 번 힘껏 걷어찼다.

걸레 자루를 부러뜨려 손에 단단히 쥐었다.


“그걸 들면 이길 것 같냐?”


류지호는 들고 있던 걸레 자루를 거꾸로 들었다.

부러지면서 갈라진 날카로운 나뭇조각이 흉흉한 이빨을 드러냈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이기면, 넌 오늘 죽는다.”

“이런 미친...!”


새미의 형은 말을 잇지 못했다.

류지호가 날카로운 마대 끝을 자신에게 겨누며 달려오고 있다.

단숨에 마대 자루 끝으로 자신의 눈을 찌를 기세다.


“헉!”


깜짝 놀란 새미의 형이 되는대로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휘둘렀다.


탁!


‘이 미친 자식이, 진짜 날 죽이려고 했어.’


새미의 형은 간담이 서늘했다.

그가 막지 못했다면 날카로운 나뭇조각이 목이나 얼굴을 꿰뚫었을 터.

반면 류지호는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다.

만약 상대가 막지 않았더라면 마대 자루를 즉각 멈췄을 것이다.

진짜 찌른다는 각오를 보여야 상대가 쉽게 허튼 짓을 벌이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다.

죠셉이 올 때까지 상대를 위협하며 시간을 끌면 된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새미의 형은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허공에 몇 번 휘둘러 위협을 하며 류지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허세다.

방금 전 마대자루에 찔릴 뻔했다는 공포감이 더 컸다.

자신과 동생은 갱단원도 아니고, 그저 양아치일 뿐이다.

마약쟁이에게 적당히 겁만 주고 주머니를 털어먹으려다가 괜히 미친놈을 잘못 건드린 것 같다.

정말 생사결전을 벌여야 할지도 몰랐다.


“칼 버려! 그러면 나도 이걸 버리겠다!”

“그걸 어떻게 믿어?”

“싫다면 끝장을 볼 수밖에.”


새미의 형 눈동자가 흔들렸다.

류지호는 그걸 놓치지 않고, 사나운 눈빛을 쏘아대며 그를 압박했다.

형제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


류지호와 새미의 형이 서로 노려보며 동시에 무기를 버렸다.


후우.


류지호가 슬쩍 심호흡을 고르는 타이밍에 형제가 동시에 주먹을 날렸다.


툭.


류지호가 왼팔을 들어 새미 형의 주먹을 막는 동시에 오른쪽에서 주먹을 날린 새미의 정강이에 로우킥을 날렸다.


퍽퍽퍽,


새미에게 연달아 로우킥을 먹여준 류지호가 태권도 스텝을 밟아 재빨리 사정거리에서 멀어졌다.

류지호는 새미의 형을 따돌리며 다리를 절뚝거리는 새미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한 놈을 먼저 제압해야 했다.

둘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간혹 위협적이지 않은 주먹은 몸으로 때웠다.

류지호는 다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집요하게 종아리만 공격했다.

태권도 겨루기 시합이 아니다.

괜히 동작이 큰 기술을 쓸 이유가 없다.


털썩.


류지호의 공격에 새미가 나가떨어지고, 새미의 형과 일대 일이 된 상황.


부우웅.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류지호는 함부로 발차기를 날리지 않았다.

어설픈 발차기를 날렸다가 상대에게 붙잡히면 상대적으로 육체능력이 떨어지는 류지호로서는 답이 없다.


덜컹!


죠셉이 뒷문을 열어젖히고, 모습을 드러냈다.


“형!”


새미가 기겁해서 형에게 소리쳤다.

죠셉이 들고 있는 권총을 발견한 것이다.


“제기랄!”


죠셉의 등장으로 잠시 한눈이 팔린 새미의 형.

류지호는 순식간의 새미 형의 품으로 파고들어 소매와 앞섶을 움켜잡았다.


꽝!


류지호가 그림 같은 업어치기를 선보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새미 형의 얼굴을 사커킥으로 차버리려고 할 때.


“그만! 그만 해. 지호!”


류지호는 죠셉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미가 양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잘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입 닥쳐!”


흉흉한 기세를 풀풀 날리는 죠셉의 말에 형제가 곧장 입을 닫았다.


“매튜를 데리고 차로 가 있어!”


류지호가 매튜를 부축해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으악. 악!


골목에서 형제의 비명이 들려왔다.


작가의말

100회 기념 연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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