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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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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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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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Help Me, Please!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구워지고 있다.

공연을 마친 십여 명의 ‘돌체’ 단원들이 익은 고기와 술을 무섭게 먹어치웠다.

김영찬이 류지호가 따라 준 소주를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크으.


류지호가 빈 소주잔에 술을 따르는데, 김영찬이 입을 뗐다.


“나 아니어도 배우는 널리고 널렸는데, 왜 나여야 하지?”

“시나리오를 각색할 때 선배님이 떠올랐어요. TV에서 마임하시는 모습을 봤었거든요.”


물론 이전 삶에서.


“마임이라.....”

“선배님이 마임을 할 줄 아시기 때문에 꼭 모시고 싶었어요. 현재 좀비를 제대로 표현해줄 수 있는 배우는 마임하시는 분밖에 없을 것 같거든요.”


김영찬이 소주잔을 최경호를 향해 내밀었다.


챙.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형, 그렇다는데?”


김영찬의 물음에 최경호가 대답했다.


“다음 무대까지 조금 쉬려고 했는데, 류 감독 덕분에 쉴 일은 없겠네.”


류지호가 단언하며 말했다.


“선배님이 출연해주신다면 반은 성공입니다. 그리고 ‘마임’ 단원분들이 출연해주시면 완성이죠.”


김영찬과 최경호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낄낄거렸다.

비주류의 마임을 하고 있는 것에 인정받는 느낌.

기분이 좋을 수밖에.


“내가 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몰라?”


김영찬 배우는 내시나 겁쟁이, 소심하고 덜떨어진 인물을 주로 연기해오고 있지만, 마임 실력도 출중했다.


“당연히 알고 있어요. 그래서 뭐가 문제가 되나요?”

“야들아~”


김영찬이 부르자, 후배들이 일제히 먹고 마시는 걸 멈췄다.


“느그들, 좀비라고 아냐?”


벌떡!


단원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각자 개성 넘치게 좀비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퉁퉁퉁!


벽에 머리를 박는 단원.


으앙!


두 사람이 엉겨 붙어 서로의 목을 물기위해 으르렁 거리는 단원 두 명.


으으으.


다리 한쪽을 질질 끌며 절뚝거리며 실내를 배회하는 단원.

저마다 개성 넘치는 좀비를 흉내 냈다.

갑자기 술집 안이 마임 공연장이 되어버렸다.

한 단원이 전하영의 목을 물기라도 하려 듯 입을 벌리며 다가왔다.


꺄악!


전하영이 진저리를 치며 질색했다.


하하하.

호호호.


술집의 다른 손님들도 난데없이 벌어진 마임 퍼포먼스에 웃음을 터트렸다.


휘적휘적!


최경호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단원들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단원들이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김영찬이 소주잔을 번쩍 들어올렸다.

말이 필요 없다.

일제히 소주잔을 채워 들어올렸다.


“건배!”


일동 소주잔을 비웠다.

류지호와 전하영도 분위기에 휩쓸려 단숨에 소주잔을 비웠다.

류지호가 김영찬의 빈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가볍게 5일만 촬영하면 됩니다.”

“가벼운 연극 따위는 없어. 준비시간이 짧은 연극은 있어도.”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준비기간과 촬영 회차가 적은 단편영화 입니다.”


전하영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 선배님, 대본 받아보셨죠? 어때요?”


전하영의 주도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것은 류지호도 마찬가지다.

일반 시청자에게 김영찬은 감초역할을 맛깔나게 잘하는 탤런트다.

그런데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 김영찬은 꽤나 인정받는 조연 연기자다.

한 작품이라도 함께 작업한 PD들은 그에 대한 신뢰가 대단히 높았다.

구두닦이부터 대기업의 야비한 임원, 배신하는 폭력조직 간신배까지.

연기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 배우다.

특히 마임을 할 줄 알기 때문에 몸짓과 표정만으로도 시청자들의 감정을 동요시키는 연기력을 지닌 배우다.

그런 류지호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김영찬이 대단히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고평가다.


“좋았습니다. 좀비가 나와서 사람 놀래키고 겁주는 영화인 줄 알았지만, 꼼꼼히 읽어보니 제 착각이더군요. 근데 시나리오를 이렇게 자세하게 쓴 건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영화를 모르는 중학생이 소설과 착각하고 쓴 건 줄 알았지 뭡니까?”


드라마 대본과 연극 대본은 대사 위주로 쓴다.

영화 시나리오 역시 지문을 최소화해서 쓴다.

사실 대사 속 지문은 없을수록 좋다.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대사 속 지문이 많아지면 배우의 연기를 제한하게 되고, 연출자를 힘들고 짜증나게 만든다.

또한 대사는 간결하고 분명할수록 좋다.

일종에 시나리오 쓰기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시나리오의 일반 지문은 정교하고 자세할수록 좋았다.

이 당시 대본들은 일반 지문과 대사 속 지문 모두 간결했다.

촬영용 대본이 아니라, 읽히는 시나리오를 써야하기에 대사의 흐름을 방해하는 디테일한 묘사는 무조건 삼갔다.


“디테일한 묘사가 좋아서 그런가, 장면을 상상하며 읽으니 재미있었습니다. 제 역할도 대단히 매력적이었어요. 그런데 제 역할이 아버지이긴 하지만 좀비로 변하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좀비라는 걸 많이 본 적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탄생한 괴물인지 알 수 없어서 그 부분은 내가 잘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김영찬의 고충을 류지호가 모를 리가 없다.

당연히 좀비물은 마이너 중에서도 완전 마이너 장르다.

김영찬 뿐만 아니라, 한국관객들은 어색하게 느낄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25년 후, 충무로에서 만들어질 좀비영화를 두고도, 영화판에서는 망하네 마네 설왕설래가 촬영 전부터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개봉하고 대박을 친다.

관객들에게 좀비건 직립보행 거대 로봇이건 판타지 마법사건.

이미 일상적이 되니까.

오로지 영화 관계자들만 그것들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일상적인지 간과했던 것.

물론 영화 완성도가 형편없었다면, 그 영화는 대박은커녕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현재는 마이너 장르나 문화에 대한 대중의 친화력이 무척 떨어지는 시절이다.

그래서 류지호는 가능한 ‘B급 영화’, ‘좀비’ 등을 내세우지 않고 있다.

부성애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고 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선배님, 자녀가 있으신가요?”


류지호에 물음에 김영찬이 순간 히죽 웃었다.


“몇 살인가요?”

“큰애가 다섯 살, 작은 애가 세 살. 두 살 터울에 남매.”

“아빠 마음은 설명이 필요 없겠네요?”


김영찬이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20대 초반에 고생을 엄청 하셨다죠?”

“안 해 본 일이 없었지.”

“마임도 잘하시죠.”


그리고 류지호가 전하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딱이죠?”

“네. 딱이네요.”


류지호는 어떤 미사여구도 동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보내는 신뢰를 김영찬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김영찬은 어떻게든 이 배역을 소화할 자신이 있다.

류지호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프린트해 온 종이뭉치를 꺼냈다.

전하영에게 두 페이지짜리 문서를 건넸다.


“단원분들에게 전달해 주세요.”


5페이지짜리 문서는 김영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선배님과 후배분들이 출연을 망설이시는 것 같아 보여드리는 거예요.”


김영찬이 종이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좀비에 대한 기원부터, 지금까지 좀비가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 졌는지 또 이탈리아 영화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만들어지는지 대략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김영찬이 받아 본 나머지 3페이지에는 아빠가 좀비로 변하기 전까지의 삶이 기술되어 있다.

단원들과 김영찬이 약간 놀란 눈으로 류지호를 쳐다봤다.


“오늘은 질문을 받지 않을 겁니다. 제가 설명을 한다고 해도 다들 까먹을 것 같거든요.”

“......?”

“오늘 다들 취할 거 아니었어요?”


하하하.


단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김영찬을 제외하고 모두가 페이퍼를 가방이고 주머니 속이고 우겨넣었다.

그런 후 다시 회식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페이퍼를 버리는 사람이 없었다.

한결 풀어진 단원들의 표정과 미소를 짓고 있는 김영찬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류지호는 페이퍼를 챙겨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들에게 좋은 첫인상을 심어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제 배우들 만나러 다닌 게 몸에 붙기 시작했구나.’


<영정사진>을 찍을 때는 혼자 돌아다니고, 혼자서 거의 모든 걸 준비하다시피 했다.

이번은 달랐다.

WaW 픽처스라는 제작사가 있고, 제작부장도 있고, 촬영기사도 이미 세팅 되어있다.

제작비 걱정도 없다.

한결 여유도 생겼다.

이전 삶의 이십대와 비교하면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그 모든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영화감독의 길.

이번 삶에서 그 끝을 볼 작정이다.

더불어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역시 끝까지 가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탁.


김영찬이 읽고 있던 페이퍼를 덮었다.

자기 영화에 대한 확신.

나이가 무색하게 준비된 감독.

작은 부분에서도 배우와 소통하려는 자세.

류지호의 그런 모습은 김영찬에게도 큰 자극이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에게 뒤질 수는 없는 노릇.

영화건 드라마건.

매번 비슷한 배역.

기계적으로 하는 직업 연기.

연극무대 아니면 해볼 수 없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 슬쩍 피어올랐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 배역을 연출선생님에게 받았을 때처럼.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의욕이 생겼다.

김영찬이 장내를 슥 눈으로 훑었다.

인형극과 마임을 많이 해본 후배들.

마임으로는 한국에서 최고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최경호 선배.

이들과 함께라면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류 감독!”

“네, 선배님!”

“잘 부탁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류지호가 김영찬이 내민 손을 굳게 잡았다.


❉ ❉ ❉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다.

류지호는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함께 움직이는 전하영은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얼마만큼의 시간과 정성을 쏟을 작정일까.

그녀가 곁에서 지켜본 류지호는 미친 사람 같았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더니...’


강철 체력이 따로 없다.

김영찬과 좀비 연기를 할 배우들이 정해지자, 다음 수준은 아역 캐스팅이다.

이경재 캐스팅에 도움을 받았던 여의도 TMT를 바쁘게 오갔다.

류지호는 좀처럼 마음에 드는 아역을 찾지 못했다.

오늘도 세 명의 아역 오디션을 보기 위해 여의도 TMT에 와 있었다.

30분 일찍 도착한 탓에 빈 강의실에서 아역들을 기다렸다.


“망설여요? 설마 영화하는 걸 말하는 건 아니겠죠?”


류지호가 뜬금없는 전하영의 말에 의아한 물음을 던졌다.


“지금도 조금은 망설이는 중이에요.”

“망설임이라. 절박하지 않다면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긴 해요.”

“한창 혈기왕성한 류 대표가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않나...?”


전하영이 ‘또 애늙은이 같이 군다’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무모한 용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이 있어요. 조심해야 된다고 봐요. 나는 오히려 그 나이에는 더 신중해야 한다고 봐요. 평생의 삶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잖아요.”

“도전과 시도는 젊음의 특권이랍니다.”

“그걸 누가 정하는데요? 나이 먹은 사람은 도전도 시도도 하지 말아야 하나요?”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알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그런데요. 때로는 같잖은 충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방황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도전과 시도는 특권도 청춘의 상징도 아닌 것 같아요.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조금의 용기가 필요한.”


십대에 일가를 이루어 가고 있는 청년의 말이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알고 싶어지는 전하영이다.


“옆에서 보니까 내가 무모한 도전과 새로운 시도를 과감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죠? 아니에요. 얼마나 안전한 길로만 가고 있는데요. 운도 상당수 따라주고 있고.”

“내가 보기에 류 대표는 망설임이 없어요. 신중하기는 하지만.”

“몰라서 그래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의 길을 놓고 얼마나 망설였는지.”

“그런데 어떻게 결심을 하게 됐어요?”

“별거 없어요. 방송제를 준비하면서 콘티를 짜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 모든 짓이 즐겁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빌어먹게 재미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알게 된 순간부터 영화를 포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때려 죽여도 한다! 뭐, 그런 건 가요?”

“맞아죽으면 영화를 할 수 없으니까 때리면 피해야죠.”

“제발. 그런 재미없는 말장난은 하지 말아주세요.”


하하.


류지호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전 부장도 선택을 해야겠죠. 충무로에서 어떤 도전과 용감한 시도를 해야 할지.”

“대표님도 아니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영화판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일단 시작했다면 ‘적당히‘란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WaW 말아 먹으면요?”

“안 말아 먹어요.”

“와아! 내 실력을 믿어준다는 거네요?”

“당연하죠. 훨훨 날아보세요.”

“그러다 내가 딴 데로 날아가 버리면요?”

“스카우트 제의할 때 말했잖아요. 상관없다고.”

“쳇.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래....?”


자신감이 아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언젠가는 이전 삶처럼 전하영은 독립해야 한다.

그녀만의 통찰과 기획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기대할게요. 앞으로 전 피디 손에서 만들어지게 될 영화들을.....!'


❉ ❉ ❉


뽀얀 피부.

똘망똘망한 큰 눈망울.

동글동글하고 오밀조밀한 얼굴의 인형 같은 외모.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여자 아이를 향해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음료수 컵 들고 있어 봐.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아, 무심하다는 말을 모르겠구나?”

“알아요. 아무 생각도 없는 거잖아요.”


류지호의 주문에 새침하게 대답하는 여자아이.

마치 감정 없는 기계처럼 여자 아이가 컵을 들었다.


“.....!”


순식간에 바뀌는 여자 아이의 분위기와 표정에 전하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류지호도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말로 설명하지 않고 몸짓과 표정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경력이 없다면 아주 힘든 연기다.

성인 연기자도 즉석에서 몰입해 할 수 없는 표현.

류지호는 짧은 순간에 확 몰입하는 이 어린 여자아이의 재능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 조금은 무서웠다.

마치 미리 준비한 가면을 바꿔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남자 아역에 경재가 있다면 여자 아이는 희정이지.‘


아역배우 김희정.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는 이 녀석과 한 번도 함께 영화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다.

7살에 데뷔해 큰 눈망울과 귀여운 외모로 CF계의 요정이라 불린다.

자동차 광고에서 노란 우비를 입은 어린이로 나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TMT의 아역 매니지먼트 팀장이 오디션 없이 미팅만 하자고 했을 때 류지호는 기분이 상했다.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만나볼 아이가 김희정이란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단편영화에 김희정을 캐스팅할 수 없는 아이니까.

이미 CF스타다.

여러 드라마에 출연을 하고 있는 탑급 아역배우다.


“영화를 하고 싶어 해요. 우리 희정이가 조금 무서워하네요.”

“무서워한다고요? 희정이가 낯을 가리는 아이가 아닐 텐데....?”


류지호가 의아해 묻자, 엄마 대신 김희정이 대답했다.


“영화는 준비가 되면 하고 싶어요. 감독님~”


맹랑한 꼬마가 아닐 수 없다.


헛.


전하영이 헛웃음을 터트리려다가 황급히 참아냈다.


“희정아, 내가 하는 것도 영화인데?”

“단편영화는 대학생 오빠언니들이 찍는 시간이 짧은 영화잖아요. 어른들이 하는 영화를 하기 전에 조금 쉬운 걸로 하고 싶어요.”

“어떤 영화도 쉬운 영화는 없어.”

“그 쉬운 게 아닌데.... 엄마 뭐지?”


김희정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감독님, 쉬워서 하려는 게 아니라, 덜 힘든 것부터 차근차근 하면서 배우고 싶다는 말이에요. 오해가 없으셨으면 해요.”

“어머니는 시나리오 읽어보셨죠?”

“네.”

“그래도 시키시겠어요?”

“희정이가 재밌어 하네요.”


류지호가 김희정에게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좀비는 귀신의 집에서 나오는 귀신이나 도깨비보다 더 무섭게 생겼어.”

“다 가짜 아닌가요? 가짜 귀신은 안 무서워요.”


이렇게 말한 것은 열의가 있다는 것을 감독에게 강조하고 싶은 거다.


“귀신이 무서우면 배우를 못한대요. 방송국 PD 삼촌이 겁이 없어야 한댔어요.”


하하하.


류지호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방송국 PD가 배우는 겁먹지 말고 뻔뻔하게 연기를 해야한다고 했던 말을 귀신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 김희정이다.

류지호가 웃음을 멈추고, 표정을 수습했다.

김희정의 엄마에게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시겠어요? 희정이에게 정서적으로 안 좋을지도 몰라요.”


류지호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성인연기자도 감당하기 힘든 배역을 자녀에게 강요한 후 관리가 안 돼서 힘겨워 하던 아역들을 더러 보았다.

할리우드처럼 심리상담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계약조항도 없는 충무로다.

매우 선정적인 영화에 자녀를 출연시키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부모들.

꼭 부모들의 잘못만은 아닐지 모른다.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없는 시스템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미팅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류지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들로서는 당연했다.

감독이 별걸 다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김희정이 풀죽은 표정으로 류지호에게 물었다.


“연기 못하는 거예요?”

“감독님, 우리 희정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할 수 없지만...”


마음에 안들 리가 없다.

똘똘한 녀석이다.

어릴 적부터 싹수가 어마어마했던 꼬마다.

연기도 잘하고, 외모도 남녀노소 다 좋아할 만하다.

김영찬과 부녀로 묶어놓으면 좋은 그림이 될 것도 같고.

물론 좀비영화에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는 것은 논란거리가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아역이 담당했던 역할을 보면 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낯설고 불편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아역이 김희정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류지호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무겁게 입을 뗐다.


“대신 희정이가 충격이나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도록 모두가 신경을 써줘야 합니다.”


류지호는 김희정의 엄마뿐만 아니라 전하영에게도 신신당부했다.

이런 기우가 절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이를 세심하게 살펴야 할 어른으로서도 그렇고, 감독으로서도 배우의 컨디션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 ❉


주인공이 결정 됐다.

남은 스태프 구성에 박차를 가했다.

결과적으로 류지호의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류지호는 무술팀과 극단 ‘마임’의 콜라보레이션을 원했다.

헌데 원활한 소통이 되는 무술감독을 찾지 못했다.

만나 본 무술감독마다 좀비가 나오는 모든 장면에서 전권을 요구했다.

액션영화처럼 찍겠다고 했다.

류지호는 액션영화풍으로 찍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애초부터 액션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현재 충무로의 기술과 인력으로 성에 차는 장면을 구현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무술감독들은 극단 ‘마임’의 연기까지 본인들이 통제하고 싶어 했다.

막말로 ‘네까짓 것들이 뭘 알겠냐’ 투다.

류지호로서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서로 전문 분야가 다르다.

게다가 한국 무술감독들은 좀비의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이 원활하게 될 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극단 ‘마임’과 류지호 스스로 간단한 액션을 만들기로 했다.

또 다른 애로사항은 영화미술이다.

이전 삶에서 충무로에 프로덕션 디자이너 개념이 도입된 것은 대략 1998년 즈음.

영화미술 분야가 아트 디렉터란 명칭으로 본격화 되는 시기는 2000년이 넘어가서다.

현재 충무로 영화미술은 세트 디자인으로 한정 되어있다.

연출부가 소품을 담당하고, 데커레이션까지 수행했다.

시대극 소품의 경우 소품팀으로부터 조달 받아 연출부가 미술을 하는 방식이다.

세트 미술팀은 실내 세트 디자인을 담당하고, 목수들이 세트를 만들었다.

미술감독의 개념조차 잡히는 않은 상황이다.


“에휴.”


류지호는 콘티를 짜면서 한숨만 푹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전하영이 한소리 했다.


“답답하면 그냥 미국 가서 찍던가요.”

“지금 안 찍으면 내 마음과 열정이 식어버릴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언제 찍게 될지 몰라요.”

“단편영화 한 편 찍는데 할리우드 수준으로 찍고 싶어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런 충무로 시스템으로 작업하고 싶지 않아요. <영정사진>은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 치더라도 <Help Me, Please>부터 WaW의 영화 작업 프로세스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 겁니다.”

“방향 제시?”

“언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영화를 찍을 거냐는 거죠.”

“우리는 한국영화를 찍는 거지,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 게 아닙니다만.”

“할리우드 시스템을 따라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스태프들은 정도 있고, 낭만도 있어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신념도 있고요. 하지만 여전히 도제 시스템이라는 구시대 잔재 속에서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혁명가에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 안 해요. 하지만 우리만큼은 좀 더 체계가 잡히고, 투명하고 명확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작업을 통해 전 부장과 함께 고민해보려고 했던 겁니다.”

“....함께?”


전하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류지호를 쳐다봤다.


“수입배급은 박 상무님 중심으로 오 실장이 실무를 잘 해나갈 겁니다. 그 외에 한국영화에 투자도 해야 하고, 영화제작도 해야 하는데 그 모든 걸 내가 다 할 순 없잖아요.”


전하영은 바로 알아들었다.

자신이 머뭇거리는 사이 류지호의 행보는 훨씬 앞서나가고 있다.

망설이다가는 그를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워질 터.


“신 피디와 상의해보는 건 어때요? 누보-씨네와 공동작업을 해보는 거죠.”

“그쪽도 제작 경험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신 피디에게는 인맥이 있어요.”

“간섭받고 싶지 않아요.”

“역할을 나눠야죠.”

“나눌 역할이 없는데요? 기획, 투자, 제작, 배급. 우리가 뭐가 부족하죠?”

“충무로 사람들이 우릴 비웃고 있어요. 영화가 애들 장난이냐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남 야야기하길 참 좋아해요.”


류지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다.


“어떻게 하실래요?”

“신 피디하고 약속 잡아 주세요.”


작가의말

즐겁고 보람찬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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