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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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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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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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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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어서 영화만 찍으려고?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어느덧 3월 하고도 중순이다.

가온웨딩 스튜디오의 업무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인천 집으로 학수고대하던 우편물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 대학의 합격통보 우편이다.

미국의 6개 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다.

그 가운데 영화과로 최상위권을 다투는 USC(남캘리포니아 대학)와 뉴욕대, 컬럼비아 대학은 불합격했다.

동부 보스턴의 에머슨 대학, 캘리포니아주의 채프만 대학과 UCLA(캘리포니아주립대) 세 곳에서 합격통보를 받았다.

합격 통보를 받은 대학 모두 미국에서 영화과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들이다.

UCLA의 경우, 유학생 혹은 미국 내의 다른 주 출신 학생들은 캘리포니아 거주자 보다 약 두 배에 가까운 등록비 및 수업비를 내야했다.

학비는 류지호에게 고려대상이 아니다.

원하는 대학 가운데 한곳에 합격했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


‘이런 날을 위해서 돈을 벌고 있는 거니까....’


류지호는 이전의 삶과 완전 다른 이십대 초입에 들어섰다.

인생은 노력하지 않으면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아 가고 있다.

물론 한국의 대학에서도 죽을 만큼 노력하면.

인생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류지호의 머릿속은 여느 십대처럼 하얀 여백이 많은 도화지가 아니다.

덧칠해져 있는 생각의 틀.

50년을 살며 굳어진 세상을 보는 시야.

사고와 가치관 부분에서 여백이 거의 없다.

따라서 환경을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

사고와 시야를 더욱 깊게 그리고 넓히기 위해서.

넓어진 세계, 그리고 환경.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성취를 이뤄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적응력, 순발력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갖추는 것이 좋다.


‘다 때가 있는 법.’


이십대 초반이란 기간은 긴 인생을 놓고 보면 시간을 투자해야 할 시기.

여전히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무수히 많았고, 스스로의 그릇도 계속해서 키워야만 했다.


따르릉!


미국으로 출국하려던 류지호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 단편영화 <영정사진>을 연출한 류지호 감독님이십니까?

“제가 류지호입니다.”

- 축하드립니다. 명성단편영화제에 출품하신 <영정사진>이 본선 수상자 후보에 오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4월 첫 주 일요일에 명성예술재단에서 개최하는 명성단편영화제 시상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4월 첫 주요?”

- 남산에 위치한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시상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명성예술재단은 신명성이란 원로배우가 설립한 재단이다.

신명성은 현재까지 총 294편의 한국영화에서 주인공 및 조연으로 활약한 충무로의 대표적인 영화배우이자 한국영화배우 협회장이다.

명동의 명보극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1981년에 재단법인 명성예술문화재단을 창립, 장학사업과 영화단체 행사지원 등의 기여사업을 해오다가 올해부터 단편영화제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단편영화제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금관단편영화제(나중에 서울독립영화제), 부산 동백문화예술영화제 정도가 있을 뿐이었고, 해외영화제 출품 시 은근히 검열까지 받았다.

오동석은 <영정사진>을 국내 단편영화제에도 출품을 했다.

작년 12월에 금관단편영화제가 열렸는데, <영정사진>이 장려상을 수상했다.

류지호가 미국에 체류 중인 관계로 김영복이 대리 수상한 바가 있다.

참고로 <영정사진>은 시카고 국제영화제 수상 덕분에 해외의 국제영화제 단편비경쟁부문에 초청이 많이 들어왔다.

오동석이 그 가운데 몇 군데를 추려 프린트를 보내기도 했다.

초청받은 해외영화제에 모두 참석한다면 반년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류지호는 그럴 수 없다.

벌여놓은 사업도 챙겨야 했고, 대학수업을 받기 전까지 준비할 것도 많았다.

명성단편영화제도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헌데 수상이 유력하다는 영화제 측 관계자의 말과 약간의 협박성(?) 충고로 인해 시상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하는 수 없이 출국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 ✻ ✻


오랜만에 류지호가 남산에 위치한 영화진흥공사를 방문했다.

명성단편영화제 때문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곳의 심사위원과 관계자들은 류지호로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명성단편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류지호도 익히 아는 충무로 대선배들이다.

솔직히 임선택, 안선호, 유성길, 정일영 같은 대선배 영화인들이 시상식에 참석했을 줄은 꿈에 몰랐다.

그저 조촐한 청소년 단편시상식으로 사진 몇 방 찍으면 끝일 줄 알았다.

한국영화의 거두들이 참석해 직접 시상을 할 줄이야.


‘기분이 참 묘하네....’


류지호는 반사적으로 지나치는 원로영화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든 원로영화인들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의바르게 보여서 나쁠 것이 없다.

시상식이 열리는 시사실 입구에 김영복이 마중을 나와 있다.

류지호는 반 년 만에 만나는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영복이형!”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아주 잘. 안에 박인철씨하고 김수희씨도 와 있다. 경재도 어머니하고 함께 왔고.”

“김인륜 선배님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못 오신다네.”


김영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사실 안으로 들어간 류지호가 배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입니다.”

“시카고는 잘 다녀왔어요?”

“감독님... 영화 안 찍어요? 텔레비전 드라마는 재미없어요.”


박인철, 김수희, 이경재가 저 마다 반가움을 드러냈다.

류지호는 진행요원의 안내를 받아 시상대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에 앉았다.

무대 한 편에 마련된 단상에 서있던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 아, 아! 알려드립니다. 모든 내빈들께서는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요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참석자들을 좌석으로 안내했다.

장내가 정리되자,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전형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짝짝짝!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축사들이 모두 끝이 났다.

시상식에 앞서 심사위원장인 영화평론가 송현익이 심사기준을 설명했다.


- 비디오, 8mm, 16mm를 망라하여 총 76편의 단편영화가 출품되어 그 가운데 본선 스무 편의 영화를 선정했습니다. 심사위원 여덟 분이 한 달 간 숙고 끝에 장려작품상 세 편, 우수작품상 두 편, 대상 한 편을 최종적으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분들이 작품 전개방식 및 표현방식, 작품의 주제와 동기의 독창성과 그 수준, 작품의 구성 및 배우의 연기자세의 진지함, 카메라, 조명 등 기술적인 활용 방식 등을 종합적으로 심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 주제가 주는 의미의 일관성이란 측면에 큰 의의를 두었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소 장황하게 영화제 심사기준을 설명한 후에 장려작품상 세 편이 발표되었다.


- 두 번째 우수작품상은 <영정사진>의 류지호군.


대상은 중앙대 영화과 학생이 수상했다.

학생 실습작품치고 상당한 수준이었다.

실험성도 돋보여 심사위원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만했다.


찰칵.


영화제 관계자들과 기념 촬영하는 것으로 시상식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리고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영화잡지 ‘스크린’ 기자와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류지호의 <영정사진>에 관해서는 주로 호연을 펼친 김인륜 배우와 아역 이경재가 조명을 받았다.

수상자 가운데 류지호가 가장 나이가 어렸다.

때문에 충무로 스태프와 중견연기자의 도움으로 완성도 있는 영화를 뽑아낸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강했다.

대상을 받은 중앙대 영화과 학생이 류지호에게 물었다.


“<영정사진>은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상 받지 않았어요?”

“청소년 드라마 부문에서 받았어요.”

“대상은 놓쳤지만, 호평일색이었다던데?”


류지호가 겸양을 떨었다.


“호평까지는 아니고. 영화제 데일리 뉴스 기자분이 리뷰를 좋게 써주셨죠.”


두 사람의 대화를 참석자 대부분이 들었다.

대상 수상자의 말 한 마디로 류지호는 충무로 스태프와 중견연기자의 힘으로 완성도 있는 영화를 뽑아낸 운 좋은 고등학생에서 해외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촉망받는 단편영화 감독으로 돌변했다.

물론 처음으로 영화를 연출했기 때문에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럼에도 성장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더욱 미래가 기대된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었다.

김영복이 넌지시 물었다.


“대상도 받을 수 있었는데... 안 아쉬워?”


류지호가 농담으로 응수했다.


“형이 너무 프로냄새 나게 잘 찍어서 그래. 좀 적당히 아마추어스럽게 찍지 그랬어?”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당시는 사회운동가적인 주제의식을 드러내거나, 영상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도를 맘껏 드러낸 실험적인 작품이 더욱 주목을 받았다.

1994년 즈음부터 서울단편영화제가 시작되고, 영화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재능과 개성을 겸비한 젊은 영화학도들의 단편작품들이 쏟아지며 그런 분위기에서 탈피하게 된다.

류지호도 좀 더 단편영화답고, 실험적인 영화를 찍을 수도 있었다.

그런 영화는 학교에서 찍는 것으로 미뤄두었다.

지금은 이야기가 있는 영화가 재밌고, 장르영화가 더욱 끌릴 뿐이다.

비록 단편영화를 찍을 정도의 짬도 나지 않을 정도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지호야, 나랑 협회에 가보자. 소개 시켜줄 분이 계셔.”

“누군데?”

“내 오야지.”

“유성길 기사님?”

“응.”


김영복은 류지호를 데리고 촬영감독협회 사무실로 향했다.

협회 사무실에서 유성길 촬영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작은 키에 날카로운 인상의 유성길은 사진기자와 촬영기사를 병행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작년 <우묵배미의 불륜>을 촬영하면서 사진 기자 생활을 완전히 접고, 본격적으로 본업인 영화 촬영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유성길은 향후 10년간 충무로의 걸출한 작가주의 감독들의 걸작을 촬영하며 명실 공히 ‘한국 뉴웨이브의 아버지’로 후배들에게 기억되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류지호라고 합니다.”


유성길이 인사를 받는 대신 툭하고 한 마디 던졌다.


“영화 잘 찍었어.”

“감사합니다!”

“네 영화가 왜 대상을 못 받았는지 아냐?”

“대상감이 아니라고 보신 거겠죠.”

“안정적이야. 네 나이 때 찍는 영화는 조금은 거칠고 뾰족한 게 있어야 하는데, 네 영화는 둥글둥글해. 마치 상업영화처럼.”

“특별히 모방된 완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맞아. 네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영화가 없긴 했어. 우리는 대상 받은 놈 영화의 독창적인 미숙함을 더욱 높이 봤다.”

“저 또한 배우는 단계에 있습니다. 아직 미숙합니다.”

“카메라와 인물이 영화 내내 움직이는 것 또한 좋은 시도였다. 충무로 감독들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걸 무서워해. 자신이 통제할 수 없으니까.”

“감정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걸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격렬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영복이형하고 속도 고민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카메라가 움직이고, 인물이 움직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은 칭찬해 주마. 영복이도 인물의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 태가 그림에서 보였고.”


김영복이 쑥스러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유성길은 조수들에게 살갑게 구는 성격이 아니다.

평상시에는 무표정, 촬영현장에서는 굉장히 예민하면서 성격 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당연히 칭찬에도 인색했다.


‘와아, 이 양반에게 이런 칭찬을 듣게 되다니...’


류지호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다.

유성길은 좀처럼 감독을 칭찬하지 않는다.

그의 눈높이가 하길종 감독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러브콜도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영화를 찍은 하길종 감독은 매우 지적인 감독이었다.

그런 천재적인 감독에게 영향을 받았으니, 유성길이 웬만한 감독이 성에 찰리가 없다.

한편으로 유성길의 화술은 묘하게 답답했다.

툭툭 던지듯 말해 놓고, 반응에 따라 설명을 해주는.

어찌 보면 도제 시스템 스승들의 전형적인 말투라고 할까.


“너 돈 많다며?”

“일찍 돈을 벌기 시작하긴 했습니다.”

“나도 영화판 일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아 다른 일로 벌어먹고 살았다. 감독이라고 다르지 않지. 충무로 일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지.”


류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눈 팔지 말고, 온 열정을 다 바쳐 영화에 몰두하라고 충고를 할 줄 알았다.

헌데.


“현실이 시궁창인 주제에 그 머릿속에서 좋은 영화가 나오겠냐? 처자식 벌어먹이려면 남과 타협해야 하고, 결국 자신과도 타협해 버린다. 그러다보면 누구 영화도 아닌 개떡 같은 영화가 나온다. 자수성가한 놈이 뭐가 부끄러워? 지가 능력이 돼서 돈 벌어서 영화를 찍으면 좋은 거지.”

“제 나이에 자수성가는 좀 그렇습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35mm 찍어.”

“네?”

“영복이한테 이야기 들어보니, 현장적응연습은 안 해도 되겠더라.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바로 35mm 작업하라고.”

“아, 네!”

“네가 찍은 영화는 색감도 좋았고, 조명으로 조형미를 만들어낸 것도 좋았다. 하지만 다음에 단편영화를 찍게 된다면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들을 공부한 후에 찍어봐.”

“<제7의 봉인>의 잉마르 베리만이요?”

“그 양반은 많은 영화감독의 스승이지.”

“저도 그 감독의 작품 세 편 정도 봤습니다.”

“눈이 있으니까 당연히 보았겠지. 보지만 말고 배우란 말이야.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촬영한 닉비스트가 절제된 색감과 단순한 실루엣으로 어떻게 영화의 핵심으로 다가가려고 했는지.”

“과시적인 현란함보다 묵직한 한방 한방을 가지란 말씀이세요?”

“이런 엉뚱한 놈 보게. 간단하게!”

“예?”

“촬영이 뭐냐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인물의 영혼을 잡아내는 거라고 말한다. 감독이란 작자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려하고, 촬영하는 나는 그걸 관객에게 단순하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감독은 이야기만 쓸 줄 알면 반쪽이야. 촬영도 알아야 하고, 미술도 알아야 돼.”


유성길 기사가 덧붙였다.


“너는 재능이 있는 아이고, 나는 선배로서 네 재능을 좀 더 분발시키고 키워줄 의무가 있다. 잔소리가 길었지만 영화 많이 봐. 그리고 많이 찍어봐.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는 순간부터는 실전이니까.”

“칭찬과 격려가 절 참 아프게 하네요. 기사님...”


류지호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류지호와 김영복이 촬영감독협회를 빠져나왔다.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양반이 아닌데. 지호 네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김영복의 말은 류지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유성길 기사가 이야기한 한 마디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간단하게...”


❉ ❉ ❉


유성길 촬영기사와의 짧은 만남을 계기로 류지호가 출국을 미뤘다.

뭔가 자극되는 것이 있었다.

그 동안 써놓은 시나리오들을 모조리 꺼내 읽어보았다.

일단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걸러냈다.

역동적이고, 좀 더 장르영화적인 시나리오만 추려냈다.

유성길 촬영기사의 가르침에 반항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현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푸는 법을 고민해 볼 참이다.

이전 삶에서 영화는 지겹도록 많이 봤다.

그저 영화를 많이 보고 필사하는 것은 류지호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영화를 분해하고, 분석한 후에 대가들의 영화와 비교하며 무엇이 다른지, 왜 다른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유익했다.


“이걸 10분으로 압축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류지호가 단편 시나리오 하나를 놓고 고민에 휩싸였다.

워킹 타이틀 <518번지>.

예전 심지에서 음악을 듣고 떠올랐던 이미지들.

그 속에 국가권력의 폭력을 은유하는 이야기를 버무린 장르물이다.

다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러닝타임도 20분이 훌쩍 넘어 중편에 가까운 시나리오다.

그런 시나리오에 손을 댔다.

다소 장황한 이야기를 압축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1학년생 소정이는 인천에서도 대표적인 달동네 수도국산 비탈에 살고 있다.

수도국산 달동네 주민들은 재개발과 관련해 용역업체와 대치중이다.

이 달동네 518번지에 좀비가 출몰한다.

점점 좀비가 되어가는 소정의 아빠는 딸의 안전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빠는 딸에게 눈에 잘 띄는 노란색 책가방과 글자가 써진 흰색 천이 매달린 막대기를 쥐어주고 방안에 가둬둔다.

군화발이 달동네에 들어선다.

그들은 상부로부터 좀비와 마을 주민 모두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총성이 울리고, 괴물의 비명도 함께 메아리치는 518번지.

순간 달동네가 정적이 휩싸인다.

좀비로 변한 소정의 아빠가 느릿하게 희뿌연 연막을 뚫고 나온다.

소정 아빠에게 쏟아지는 총알 세례.

군인들이 땅바닥에서 꿈틀대는 소정 아빠를 확인사살까지 한다.

부스럭.

다시 긴장하는 군인들.

그들 시야에 들어오는 책가방을 매고 서있는 소정.

소정의 책가방에는 막대기가 꽂혀있고, 흰색 셔츠가 바람에 나부낀다.

좀비로 변하기 전 아빠가 소정에게 신신당부했던 것.

첫째 책가방을 매고 있을 것.

둘째 책가방에 꽂아둔 막대기의 셔츠를 절대 버리거나 훼손하지 말 것.

셋째 두 물건을 반드시 지니고 있을 것.

군인들은 소정의 처리를 놓고 옥신각신한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사살해야 한다는 쪽.

반대로 민간인에게 사격할 수 없다는 쪽.

그런데 한 병사가 소정의 가방에 꽂혀있는 막대를 꺼내 가져온다.

흰색 셔츠에 크레용으로 쓰여 있는 글.

‘쏘지 마세요. 저는 사람입니다.’

이어 연막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달동네 주민들.

주민들은 지치고 무장을 하고 있지만, 좀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다.

그때 소정이 손가락으로 달동네 골목 쪽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좀비들이 몰려들고 있다.

군인들과 좀비와의 전투가 벌어진다.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가만 있으라’라는 말을 남겨두고 후퇴한다.

주민 한 명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흰색 셔츠를 달아나는 군인들을 향해 흔들어댄다.

‘살려주세요. 우리는 괴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좀비가 달동네 주민들을 덮치는 순간 영화가 끝이 난다.


류지호는 씻고 누워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중해야 돼.’


이대로 영화를 찍을 수도 있다.

류지호가 평범한 스무 살의 영화감독이 꿈인 학생이라면 고민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찍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작업을 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민감한 주제.

한국의 일반관객에게 낯설고 불편한 좀비 장르.

개연성 문제.

지난 <영정사진>에 비해서 대폭 늘어날 제작비.

특수분장과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들.

좀비를 연기해야 할 배우 섭외.


‘독창적인 미숙....!’


학생이니까 가능한 평가다.

류지호는 지금까지 십대의 신분으로 여러 성과들을 거두었다.


‘거칠고 뾰족한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면 그렇게 하면 돼.’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단기간에 근사한 결과를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영화가 완성되면 문제점과 아쉬움이 눈에 크게 띄게 마련이다.

그런 것들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곧바로 깨달아지지 않는다.

류지호가 할 수 있는 일은 꾸준히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수 백편 쓴다고 영화가 늘지 않는다.

공상과 고민을 수없이 한다고 해서 영화에 대한 철학이 깊어지지 않는다.

영화를 찍어보며 탐구하고 반성하고 성장하고.

그렇게 영화 필모그래피가 한 편 한 편 쌓아 가다보면, 그것들이 류지호에게 가야할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위대한 감독들도 단편영화를 찍으며 그렇게 대가로 가는 초입에 들어섰으니까.

이번 작업이 영화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전환점임을 직감했다.

류지호는 기대 반, 설렘 반.

밤잠을 설치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 ❉ ❉


지이잉- 탁!


복사기가 쉼 없이 돌아갔다.

류지호가 10페이지 분량의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복사하고 있다.

표지에 박혀있는 영화 제목.

<Help me>.

시나리오를 챙긴 류지호가 WaW 픽처스 사무실로 들어갔다.

모두 외근 중이라 사무실은 비어있다.

류지호는 책상을 일일이 돌며 시나리오와 함께 음료수를 하나씩 놓았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심재우가 뒤따라 들어왔다.


“미국은 언제 가려고 이러고 여유를 부려?”

“가을학기 입학이라 단편영화 한 편 찍고 갈 여유가 될 것 같아요.”


심재우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또 찍어?”

“일 년에 한 편씩은 찍어야죠.”

“돈도 안 되는 건 뭐 하러 고생스럽게 찍어? 돈 벌어서 영화만 찍게?”

“하하하. <영정사진> 제작비는 얼추 회수했어요.”


오동석이 열심히 해외 필름마켓에서 세일즈에 나선 결과다.


“지호야, 이리 와서 앉아봐라.”


류지호가 심재우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애들은 어떻게 할까?”

“누구요?”

“네 친구들.”

“....음.”


류지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준우는 지금처럼 놔두세요. 봉사활동도 다니고, 상우형님 쫒아 다니면서 사진도 찍게요. 우찬이는 자주 와요?”

“오면 뭐 해. 박 팀장하고 최 대리만 졸졸 쫒아 다니는데.”

“내버려 두세요. 격투기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게 있겠죠. 재정이는 주말마다 사무실 출근하죠? 와서 뭐 해요?”

“장부나 서류 보여 달라고 해서 하루 종일 보고 가는 날도 있고, 나 따라다니는 날도 있고 그래.”

“친구들도 가온웨딩 주주에요. 창업멤버고요. 과장들이 재정이 무시하지 못하게 외삼촌이 잘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재정이가 관심 가지는 일이나 업무가 있으면 시켜보시고요.”

“재정이는 서울대 다니잖아. 내가 막 부려먹어도 돼?”

“서울대 학생이어도 이제 스무 살이잖아요. 학교에서 배울 게 있고, 현장에서 배울 게 있는 법이죠. 청소도 시키고, 커피 심부름도 시키세요. 단 담배 심부름 같은 건 절대 안 되요.”

“재정이도 담배 피우지 않냐?”

“사무실 청소나 손님 커피 심부름은 업무에 연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담배 심부름은 달라요. 직장 상사가 집안 어른도 아니고, 사적인 걸로 심부름 보내는 건 아니라고 봐요. 업무 외에 심부름은 서로 삼가자는 말이에요.”

“너무 삭막하지 않냐? 우리 조카가 미국 물 먹더니 양식이야 아주?”

“우리 가온웨딩은 한식, 양식 퓨전으로 하자구요.”

“그래. 알겠다.”


심재우가 흔쾌히 대답했다.

황재정이 간혹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 피곤한 타입이긴 하다.

똑똑한 녀석이고 지적하는 부분도 틀린 말도 별로 없기에 대견하게 여기고 있다.

심재우로서는 부하 직원처럼 편하게 일을 시킬 수 있다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사무실이 비좁다는 말은 안 나와요?”

“다닥다닥 붙어서 일하다보면 직원들 간에 정도 더 빨리 쌓이고, 끈끈해 지지 뭘.”

“조금만 참아 달라고 해주세요. 가을에는 영화사가 방을 뺄 거예요.”

“방을 빼? 영화사 망했냐?”

“이사 간다고요.”


심재우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버럭 화를 냈다.


“놀랐잖아 인마!”

“WaW도 지금 사무실로는 안 될 거 같아요. 가온웨딩이 옮길 수 없으니 WaW가 나가는 게 맞겠죠.”

“거기는 수입이 없잖아. 어떻게 하려고?”

“<시네마 천국> 개봉하고, 비디오 판권하고 TV판권 팔면 돈이 조금 들어와요. 그걸로 사무실 세팅부터 하려고요.”

“그래. 영화 쪽 일이야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니 왈가왈부 하지 않으마.”

“제가 없어도 가온웨딩 잘 부탁해요. 외삼촌.”

“가온웨딩은 걱정 말고,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와라.”


그렇게 말하는 외삼촌이 꽤나 든든했다.

실제로 래리 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류지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두 번째 단편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말

활기찬 한 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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