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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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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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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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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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사인방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포동을 걸었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와 친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싸돌아다니던 곳이다.

사소한 것부터 별의 별 황당한 사건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추억을 쌓았었다.

이번에서는 추억이 많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한때 류지호는 친구들과의 추억이 너무 없어 불안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웨딩비디오 사업을 시작했다.

친구들과 함께 할 수는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사인방 친구들이 사업에 있어서 큰 공헌이 없음에도 주식을 나눠주고, 배당금도 챙겨주고, 오늘처럼 양복도 사주고.


‘젠장, 우정을 돈으로 산 건 아니겠지?’


비교적 건전하게 학창시절을 보낸 사인방이다.

스무 살 현재 사인방은 개천에서 용 난 것이나 마찬가지.

동네 불량배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뒷골목을 전전해야 할 고우찬은 어엿한 대학생이 될 예정이다.

운동권 학생 코스프레를 하며 온갖 데모마다 쫓아다녔던 황재정은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다.

부모님의 재산으로 한량처럼 살았던 김준우는 사진작가라는 진로를 확고히 했다.


‘우정이 단단해진 것보다 친구들의 인생이 좋은 쪽으로 바뀐 게 더 값진 거겠지?’


사인방이 매일 어울려 다니며 음주가무의 추억을 쌓아 그것으로 먼 훗날 소주잔을 기울이며 추억팔이 소재를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한 것이 훨씬 유익했다.

류지호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고우찬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근데, 왜 우리가 신포동을 걷고 있는 거냐?”


김준우가 말을 받았다.


“앞으로 또 언제 오겠냐?”

“그러네. 우리 이제 4년 동안 찢어져야 되는 거네.”


고우찬의 아쉬움에 단박에 토를 다는 황재정이다.


“찢어지긴 뭘 찢어져? 무조건 주말에는 스튜디오로 출근해.”

“나는 힘들어. 운동부가 얼마나 군기가 센데!”

“그럼 재수해서 군기 없는 과를 다시 들어가!”

“미쳤냐? 나보고 학력고사를 또 보라고? 못 해! 아니 안 해!”


고우찬이 치를 떨었다.

황재정은 단호했다.


“그럼 닥치고, 주말마다 올라와.”


류지호가 나서서 정리했다.


“괜찮아. 우리 없다고 스튜디오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입시 때문에 신경을 못 썼다고 변명하기 싫고, 대학생활 때문에 피치 못했다고 변명하는 것도 싫어.


김준우가 우려를 드러냈다.


“공부는 언제하고? 딴 학교도 아니고 넌 서울대 다녀야 돼.”

“공부는 평상시에 하는 거야.”

“지랄한다. 서울대라고 뻐기기는. 재수 없는 놈...!”


고우찬의 거친 말에도 누구하나 신경 쓰는 친구는 없었다.

하루 이틀 겪어본 것도 아니고, 고우찬은 원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고 보는 성격이니까.


“여권 미리 만들어놔.”


옥신각신하던 친구들의 시선이 류지호에게 몰렸다.


“미국으로 여행가자.”

“이 놈은 사업을 벌려놓고, 놀 생각만 해.”

“노는 게 아니라 견문을 넓히려는 거야.”

“주둥이만 살아서는...

“싫어? 그럼 재정이는 빠지는 걸로....”

“누가 싫데?”

“그럼 시비 걸지 말지?”

“흥!”


황재정이 성큼성큼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야! 어디 가?”

“추워 죽겠어. 가까운 커피숍에나 들어가자.”


사인방이 신포동에 올 때면 들르는 단골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와 커피숍의 온기로 몸을 녹이는데, 류지호가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우리 졸업여행 갈까?”

“어디로?”

“어디든지!”

“부산 갈까?”

“속초는 어때?”

“제주도는?”

“부모님도 아직 제주도 못 보내드렸는데, 우리끼리 가면 좀 그렇지 않겠냐?”

“모시고 가면 되지.”

“그렇게 되면 졸업여행이 아니라 가족여행이 되는 거잖아.”

“아, 그렇구나.”


류지호가 말을 던져놓자, 친구들이 저마다 의견을 쏟아냈다.


“그냥 내키는 대로 갈래?”

“내키는 대로?”

“계획 세우지 말고 그냥 떠나는 거야.”

“그러다가 부산까지 가는데 한 달 걸리는 거 아냐?”

“자가용 타고 갈 건데?”

“진짜?”

“기차 여행 할래?”

“아니!”

“야! 자가용 두고 왜 기차를 타!”

“운전은 내가 할게!”


그렇게 즉흥적으로 졸업여행이 결정됐다.

이틀 후.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사인방이 주안 스튜디오에 모였다.

모두 가방을 챙겨왔는데, 고우찬만 빈 몸이다.


“넌 왜 가방이 없어?”

“있어야 돼?”

“수건하고, 속옷은 챙겨왔어야지.”

“수건은 그냥 돌려 써. 그리고 겨우 3일인데 이빨 안 닦고, 속옷 안 갈아입는다고 큰일 나냐?”

“으으. 드러워.”


김준우가 질색했다.


“속옷 안 갈아입고 다니냐?”

“겨울에 빨래하려면 얼마나 손 시린데.”

“저리 가. 새꺄!”


황재정이 재빨리 고우찬에게서 떨어졌다.


“깔끔한 척 하기는... 우리 동네는 다 이렇게 살어.”

“목욕은 자주 하냐?”

“매일 운동하는데 당연하지.”

“아, 그렇지.....”

“우찬이 그만 놀리고, 이리 모여 봐.”


류지호가 지도를 펼쳐 놓은 테이블로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내키는 대로 간다고 해도 진짜 발길 닿는 대로 갈 순 없잖아. 대충 큰 일정은 짜보자.”


그렇게 사인방이 머리를 맞대고 전국일주 일정을 짰다.

인천을 출발해 춘천 - 설악산 - 대포항 - 울진 - 영덕 - 포항 - 부산 - 통영 - 남해 - 목포 - 남원 - 공주 - 천안 -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을 짰다.


“여기를 다 돌아볼 수 있을까?”

“3박 4일로는 안 되겠는데?”

“무전여행도 아니고, 자가용 타고 가는 거니까 얼추 돌지 싶은데?”

“남자는 직진이야. 일단 가자! 고고!”


고우찬이 차키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먼저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김준우가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며 물었다.


“우찬이 운전 잘 해?”

“제법 해.”

“믿어도 돼?”

“운전도 깡이 있어야 잘 하니까, 우찬이도 잘하지 않을까?”

“운전은 운전대에 앉아 있는 시간만큼 잘할 걸. 무조건 운전을 많이 해 봐야 늘더라.”

“그래도 난 지호가 운전했으면 좋겠어. 우찬이는 좀 덜렁대잖아.”


김준우의 불안감과 상관없이 사인방은 인천의 주안을 출발해 전국일주를 떠났다.

첫날은 강원도 춘천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미시령을 넘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미시령을 넘어 설악산에서 하루를 묵었다.

밤에는 호기롭게 대포항으로 나갔다.

겨울 그리고 밤바다.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휘이잉.


칼바람!

매서운 바닷바람 때문에 도저히 밤바다의 흥취를 느낄 수 없었다.

횟집에서 회를 뜨고, 슈퍼에서 소주를 몇 병 사 설악산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문득 야밤에 대포항에 나가면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오징어잡이배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너무 추워 포기했다.

매일 밤 술파티.

첫날부터 사인방은 부어라마셔라 숙소에 처박혀서 밤새 소주를 마셔댔다.

낭만이고 뭐고 쥐뿔도 없는 남자들의 여행이다.

류지호는 친구들과 추억이 별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와서 옛일을 떠올리며 수다를 떨다보니 별 일이 다 있었다.


히죽.


류지호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호 저 놈, 술 취했나봐, 아까부터 실실 웃어.”

“얼굴은 멀쩡한데?”

“준우 네 얼굴에서 불 나. 얼른 가서 끄고 와.”


하하하.


사인방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밤새 이어질 것 같은 술자리는 잔소리꾼 황재정에 의해 정리되었다.

취기가 올라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던 사인방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잠이 들 때까지 사인방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고맙다 친구들아~”

“취했으면 자라.”

“민아랑 키스는 했냐?”

“당연하지. 한 스무 번은 넘을 걸?”

“그걸 세고 앉았냐?”


평소 표현하지 않던 말도 서슴없이 하고, 내밀한 이야기도 털어놨다.


2일차.


속초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갔다.

차창 너머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탁 트인 동해바다가 사인방의 가슴을 뻥 뚫어놓았다.


이야호!


사인방의 입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운전하던 류지호가 슬그머니 카세트테이프를 카오디오에 넣었다.

사인방은 ‘고래사냥’을 목청껏 따라 불렀다.

동해시를 지나 삼척을 통과할 때 펼쳐진 바다와 해안도로는 정말 아름다웠다.

흥이 오른 류지호가 ‘여행을 떠나요’를 불렀다가 노래가 발매되기 전임을 확인하고, 다시 ‘고래사냥’만 주구장창 불러댔다.

간간이 확인한 백미러에 박 팀장과 최 대리가 탄 렌트카가 보였지만, 류지호는 무시했다.

경호원들도 사인방의 여행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았다.

울진으로 들어와 망양휴게소에 차를 주차했다.

주차장도 작고, 아직까지는 전망대도 없는 소박한 휴게소다.

하지만 저 너머로 펼쳐진 동해바다는 진짜다.

쪽빛이라고 해야 할까.

푸르고 맑은 바다는 바닥까지 비치는 듯 했다.

인천 짠물 출신 사인방은 한동안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그런 정적 속에서 김준우의 셔터 누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사인방은 망양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 좀 담가볼래?”

“사내 네 놈이 무슨 온천이야?”

“여행까지 와서 애늙은이 태 낼 거야?”

“겨울은 해가 짧아. 빨리 차에 타라.”

“날도 추운데, 뜨끈한 온천에 몸 담그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데...”

“류지호! 빨랑 안 오냐!”


사인방은 계속해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 포항을 거쳐 부산에 다다랐다.

해운대 근처에 숙소를 잡고, 부산 투어에 나섰다.

강원도에 있다가 부산으로 내려오니 굳었던 몸이 한결 풀리는 것 같았다.

오후 내내 부산 곳곳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놀기도 했다.

은근히 즉석만남을 기대했다.

신통치 않았다.

김준우가 나서고 류지호가 화려한 말발(?)을 뽐내면 가능도 했건만, 다들 시큰둥해 적당히 분위기만 보다가 빠져나왔다.

대신 술판을 벌였다.

입시준비로 1년간 자제했던 음주를 한방에 해결하려는 듯 황재정과 김준우는 부어라마셔라 자제라는 게 없었다.

결국 김준우가 나가 떨어졌다.

말술을 자랑했던 황재정 역시 맥을 추지 못했다.

고우찬이 술에 취한 김준우를 등에 업었다.


“술도 마실 줄 아는 놈이 잘 마신다고. 니들 어디 가서 고삐리 때부터 술 먹었다고 자랑하지 마. 쪽팔리게 소주 한 병에 뻗어 버리냐?”

“우웩!”

“야! 등에 토하면 죽는다!”


고우찬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업고 있는 김준우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김준우를 여관방에 눕혀놓고, 나머지 세 친구가 밖으로 다시 나왔다.

셋은 가까운 생맥주집에서 500cc를 시켜 2차 술자리를 가졌다.

황재정이 꿀꺽꿀꺽 생맥주를 목구멍 안으로 넘기고, 입을 열었다.


“미국에 영화사를 차렸다고?”

“차린 건 아니고, 파커 가족이 인수해서 나한테 맡겼어.”

“유명한 데야?”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라고 알아? 흰색 페가수스를 로고로 쓰는 영화사인데.”

“뭐 만든 영화사인데?”

“제작한 영화중에 유명한 건 알란 파커 감독의 <버디> 정도, 원래 케이블 TV 프로그램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코크 컴퍼니 알지? 그 회사가 콜롬비아스 인수하면서 코크 컴퍼니가 트라이-스텔라 지분을 가졌었거든. 그때 영화배급 쪽으로 확장했다나봐. 그리고 캐롤코 영화사의 <람보>를 배급하면서 확 커졌어.”

“엄청 큰 영화사 아냐?”

“엄청 크지는 않고, 빚만 잔뜩 지고 있는 영화사라고 할 수 있지.”

“그게 네 거라고?”

“온전히 내 건 아니야.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다 떠나서 할리우드 영화사를 네가 먹은 거잖아? 제비 다리 고쳐준 흥부냐? 제비가 무슨 박씨를 물어다 줬기에 그런 영화사를 다 먹냐?”

“박씨를 물어다 준건지, 박 터질지는 두고 봐야지.”


황재정은 믿기지 않았다.

실제로 류지호가 처음 제안해서 시작한 웨딩비디오 사업은 성공을 거뒀다.

불과 이 년 만에 매출과 순이익이 대폭 상승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충무로에 영화사를 만들었다.

올해부터는 극장에 영화를 배급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할리우드의 영화사까지 손에 넣었단다.

류지호는 친구들에게 절대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지금 이야기 한 것들 모두 사실임이 틀림없다.

아니다.

친구 놈은 꼴에 겸손 떠는 성격이라서, 최소한으로 이야기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도대체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호 이 새끼....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영화하는 놈.”

“.....”

“내가 뉴욕에서 뭐라고 불리는지 아냐?”

“별명?”

“응. 별명.”

“원숭이나 바나나 아니면 칭크 뭐 그런 거냐?”

“럭키보이.”

“복덩어리 쯤 되는 거냐?”

“좀 달라, 뉘앙스가. 운 좋은 꼬마 정도로 부르는 것 같더라.”


고우찬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새끼들이....! 배가 아파서 뒷다마 까는 거야? 꼬마는 시벌....”

“괜찮아. 곧 그들도 알게 될 거거든.”

“뭘?”

“걔들이 비웃고 조롱했던 아시아에서 온 애송이가 알고 보니 기적의 사나이였다는 걸.”


푸하하하!


황재정이 배를 잡고 웃어 재꼈다.


“그게 뭐야. 븅신아! 낯간지럽게시리.....!”


고우찬이 호프잔을 류지호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멋지기만 하구만.”


챙!


류지호와 고우찬이 호프잔을 부딪쳤다.

황재정도 합세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할리우드 영화사도 대박을 친다면 지호 네 말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무조건 믿는다, 내가.”


고우찬이 입가에 묻은 맥주를 슥 손바닥으로 훑으며 물었다.


“미국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믿을 만 해?”

“믿을 만큼만 믿어야지. 신뢰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잖아?”


황재정이 충고했다.


“친절하게 군다고 헤벌레 하지 말고.”

“진짜 좋은 사람들도 많아.”

“웃으면서 다가오는 사람이 속에 비수를 품고 있다고 했어. 친절하게 군다고 순진하게 넘어가지 말고.”

“나도 알아 자샤~ 걱정 붙들어 매.”


3일째는 부산을 떠나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통영으로 향했다.

미래에는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이다.

동해바다와는 또 다른 남해바다만의 바다색깔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통영항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겨울이라도 쉴 틈 없는 고깃배와 어부들이 포구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좀 더 포구를 돌아보려 해도 바닷바람이 매서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친절한 어르신의 추천으로 관해정을 찾아갔다.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전망.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이 일품이다.


“벌써 내려가려고?”

“예.”

“조금 기다렸다가 해넘이 보고 내려가. 장관이야.”

“아, 네.”


관광객으로 보이는 노부부의 충고에 사인방은 해가 질 때까지 관해정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다 저 멀리로 석양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하늘이 불타는 것 같지 않냐?”

“멋지네.”

“인천 앞바다 일몰하고 또 다르구나.”


찰칵찰칵!


김준우가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관해정에서 내려온 사인방을 밤길을 달려 여수로 들어갔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짓는 사인방이다.

3박 4일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그냥 몇 군데 도시만 들러서 차에서 내리지 말고 구경하면서 가자.”

“일찍 인천에 간다고 특별히 할 일도 없잖아.”


사인방이 아쉬운 마음에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험!"


황재정의 큰기침에 사인방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가온은 계속 웨딩비디오만 찍는 거야?"

"자본 축척이 되어야 뭔 사업이든 확장 해보지. 아직은 그래."

“일반 장사보다 웨딩사업이 수익관리가 더 어려운 이유가 뭘까?”

“성수기와 비수기가 나뉜다는 거겠지?”

“맞아. 바로 들쑥날쑥한 수익에 비해서 고정지출은 그대로 지속된다는 점이이야. 내가 두 시즌을 경험해 보니까, 예식장은 비수기에는 거의 수입이 제로에 가까운 게 현실이더라. 성수기에 엄청 벌어서 비수기를 때울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거지.”

“호오...”


류지호가 황재정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나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인방 역시 음식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며 은근히 황재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웨딩사업 중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일으키는 건 예식장인데, 그렇다 보니 규모와 시설을 중요시 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더라. 내가 운영하는 예식장이 경쟁업장보다 인테리어와 규모면에서 뒤떨어지면 과감하게 많은 돈을 들여서 재투자를 하지.”


류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을 두세 번 반복하면 그 동안 벌었던 돈은 온데간데없고 까딱하면 빛만 늘어날 사업체만 남게 될 수도 있다는 거야.”


김준우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건 예식장 운영을 잘 못해서 그런 거 아닐까?”


류지호가 대신 대답했다.


“몇 년 전부터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캠페인을 해. 실제로 둘이나 하나를 낳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고. 언젠가는 결혼할 인구가 줄어들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어. 예식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데 결혼할 사람은 줄어. 그리고 결혼시즌은 일 년에 6개월이야. 거기에 윤달이 끼어있는 해에는 우리처럼 웨딩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힘들어지겠지.”


황재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류지호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웨딩사업은 성수기를 보고 경영해서는 안 돼. 비수기를 염두에 두고 보수적으로 운영을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보니까 웨딩사업은 수익관리보다 고정지출을 어떻게 관리하고 감당하느냐가 관건이겠더라. 웨딩사업이 고수익이지만 1년으로 따지면 절반만 장사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성수기에 남는 고수익들은 고스란히 비수기의 운영경비로 쓰겠더라고. 그 대부분은 인건비고.”


류지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법대, 상대, 의대는 대학 중에서도 최고의 점수를 자랑하는 곳이다.

거기에 서울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수재라는 수재는 다 몰리는 곳이 그곳이니까.

서울대에 합격한 싸가지가 조금 부족한 황재정이 꽤 유능한 인재의 싹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류지호로서는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예식장 사업 해보고 싶어?“

“결혼비디오만 가지고는 매출에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그건 예식장도 마찬가지 아냐?”

“한계가 있는 것들을 여러 개 가지 쳐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루트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어.”


김준우가 다시 대화에 가담했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처럼?”

“문어발식 확장이 꼭 나쁜 게 아냐. 우리나라 재벌들이 개념은 국에 말아먹고 쓸데없이 중복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성은 고려하지 않고 일단 갖고 보자는 식으로 덤비니까 그렇지.”


류지호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우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

“모르겠어.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준우 너나 지호처럼 내 인생을 다 던져 해야 할 게 뭘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아냐?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야. 누가 알려줄 수 있겠어.”


류지호가 한 발 물러섰다.


“평소에는 다 아는 것처럼 잘도 충고질 하면서 발을 빼고 그래....”


고우찬이 끼어들었다.


“서울대 합격했다고 다 끝났냐? 이제 시작일걸?”

“우찬이가 오랜 만에 옳은 말 했네. 자신의 진로를 일찍 정해 달리는 사람도 있고, 조금 늦게 결정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조바심 내지 마.”

“인생에서 빠르고 늦은 건 없지.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건 매한가지니까.”


고우찬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놈이 또 잘나가다가 삐딱선을 타고 지랄이야. 지호랑 비교하지 마. 나처럼 포기하면, 사는 게 편해.”


김준우가 친구들을 격려했다.


“저 놈은 뭐 다 잘하냐? 재정이 넌 남들이 다 수재라는데 왜 혼자 궁상을 떨고 난리야. 우찬이는 태권도 해서 금메달도 땄잖아. 니들도 남들이 보면 평범한 놈들 아니거든.”


류지호가 말을 보탰다.


“꿈꾸는데 돈 드는 거 아니잖아. 우리 꿈도 크게 꾸고, 야망도 크게 가져보자.”


졸업여행이라는 것이 학창시절을 추억하고, 앞으로 펼쳐질 대학이나 사회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풀어내기도 부족한 시간이다.

그런데 황재정에게는 많이 달랐다.

고등학교라는 안전장치가 사라지고 진짜 생존경쟁의 초원으로 나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여유 같은 거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서두른 사인방이 목포로 향했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류지호가 불쑥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틀었다.


“그쪽은 남원으로 가는 길이야.”

“바다는 지겨워. 산 좀 보자.”

“눈 온다!”


쿵!


머큐리 세이블이 시골길 고랑에 빠졌다.

눈이 내리는 것에 한눈이 팔렸던 류지호가 미처 고랑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사인방은 힘을 합쳐 고랑에서 머큐리 세이블을 빼냈다.

차가 고랑에 빠진 걸 신호로 사인방의 복귀 길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갑자기 내린 폭설 때문에 차안에 고립된 채 몇 시간을 보내야 했고, 길을 잃어 반나절을 내장산 인근을 빙빙 돌아야 했다.

수시로 지도책을 꺼내 현재위치를 확인하고, 행인들에게 물어보며 길을 찾았다.

심지어 시외버스 뒤꽁무니를 쫒아가며 도시를 찾아 헤맸다.

결국 경호원들도 류지호를 잃어버렸다.

겨우 정읍에 도착해 여관방을 잡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 부모님을 안심시킨 사인방이었다.


“또!”


다음날도 류지호는 내키는 대로 길을 잡았다.

생전 처음 가본 시골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눈 덮인 설원에서 눈싸움을 빙자한 이종격투기를 벌이기도 했다.

류지호는 이틀을 더 계획 없이 차를 몰았다.

3박 4일 일정으로 나선 여행길이 일주일을 넘겼다.

공주에 다다를 즈음 사인방이 폭발했다.

이미 사인방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재미있었던 순간도 있었다.

잠시뿐이었다.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냐? 소소한 일탈이야 일탈...”

“일탈이 아니라 미아가 된 거잖아!”


결국 류지호는 핸들을 고우찬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후부터는 인천으로 길을 잡았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라고 말했어.”

“누가?”

“있어 그런 게.”


2007년 폐간되는 시사화보 잡지 ‘LIFE‘의 모토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주인공 월터 미티가 겪었던 스펙타클한 모험과 비교가 안 될 소소한 모험이었지만, 류지호는 십대의 마지막 여행에서 친구들과 충분히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또한 빠른 시일 내에 친구들을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친구들이 좀 더 크고 명확한 목표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작가의말

한 주 잘 마무리 하시고, 즐겁게 주말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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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99 요리선생
    작성일
    22.03.25 11:12
    No. 1

    '월터의 상상...' 영화에
    인상 깊었다는 분들이 상당 계시지요.
    위 모토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며
    자주 인용되는 문구인데
    그런데 실제 라이프지의 모토와는 상당히 달리
    간략히 재편집된 것이라 더군요.

    1936년 라이프지의 발간사는 (일부 발췌분)
    ------
    인생을 보기 위하여,
    세계를 보기 위하여
    대사건의 증인이 되고
    가난한 자와 거만한 자의 거동을 관찰하자.
    기이한 물건들, 기계, 군대, 집단,
    정글과 달에 걸린 그림자를 보자.
    수천 킬로미터씩 떨어진 먼 곳의 일들,
    벽뒤 방속에 숨겨진 일들,
    위험해질 일들,
    남성에 의해 사랑받는 여자들,
    또 수 많은 어린이들을 보자.
    보고, 보는 것을 즐거워하자.
    보고 또 놀라자.
    보고 또 배우자.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바람으로
    작성일
    22.03.25 11:33
    No. 2

    잘 보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3.25 11:43
    No. 3

    잘 보고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03.25 16:19
    No. 4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세레스틴
    작성일
    22.06.18 08:08
    No. 5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은 없지만 경호원까지 못 따라갈 정도면 어느 정도라는건지.. ㅎㅎ;;;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52 열혈거사님
    작성일
    23.08.16 13:17
    No. 6

    설정 오류인듯한데 설악산에서 숙박하는데 경포대에서 술을 마시는건 이상합니다 소설 배경 당시는 길도 안좋이 속초와 강릉은 2시간 거리였습니다. 동명항이나 대포항 정도에서 술 마시는게 흐름상 맞을듯합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4 트뤼포
    작성일
    23.08.19 12:56
    No. 7

    대포항으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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