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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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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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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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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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국제영화제.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월요일 아침이다.

류지호는 새벽에 일어나 평상시처럼 용연태권도장에서 수련을 끝내고, 출근길에 올랐다.


부우웅!


머큐리 세이블이 경인고속도로를 달렸다.


“바람아 하아~ 멈추어다오~ 바람아~”


류지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화창한 가을하늘.

뭔가 기분 좋은 일이 마구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들게 했다.

신사동 스튜디오 앞에 차를 주차하고 사무실로 올라가자, 심재우와 양주연, 래리가 류지호를 맞이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류지호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하자 심재우가 WaW 사무실을 가리켰다.


“영화사 직원들 다 출근 했더라.”

“벌써요?”


류지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다.

통상 영화 관련 업체들 출근시간은 오전 10시.

지금 이 시간에 출근해 있을 리가 없다.

류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WaW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건호 상무와 오동석, 전하영 실장이 한창 책상을 정리하고 있다.

낯선 여자 3명이 돕고 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류지호의 인사에 간부 셋이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어서 와요.”

"굿 모닝!“


류지호가 기존의 간부 셋과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요?”


직급이 높은 박건호가 그의 말을 받았다.


“첫날이라 분위기도 익힐 겸 일찍 모였습니다. 내일부터는 10시에 출근할 겁니다.”

“대표님, 여기 친구들은 저와 함께 일하던 아이들이에요.”


전하영이 새롭게 등장한 여자 3명을 소개했다.

조금 마른 듯한 몸매에 단발머리 새침데기 여성은 송미선, 김주은은 약간 굴곡진 몸매에 살짝 웨이브 진 긴머리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받은 여성은 아담한 키에 귀염상의 심선미다.

셋 모두 20대 중반의 나이로 홍보마케팅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반갑습니다. 류지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송미선이에요.”

“김주은이에요.”

“심선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세 여성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눈 류지호가 전하영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눈으로 물었다.

사전에 언질 없이 직원들을 들였기 때문이다.


“당장 월급 안주셔도 되요. 영화 개봉할 때 계약하는 걸로 아이들하고 이야기 끝냈어요.”

“우리가 사온 영화는 내년에 개봉할 텐데 그때까지 어떻게 하려고요?”

“연말에 개봉하는 영화 한 편을 홍보하기로 했어요.”


류지호는 다른 영화사 작품 홍보는 생각도 안했다.

벌써부터 일감을 따놓았으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상무님은 제 방을 함께 쓰도록 해요.”

“노땅이 함께 있으면 젊은 처자들이 불편할 테니,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류지호는 책상 하나를 빼 자신의 집무실로 옮겼다.

박건호의 자리를 만들고, WaW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아기자기한 물품과 벽에 걸어둔 영문포스터들 때문인지 삭막한 풍경은 면하게 되었다.

류지호는 사무실 문가에 서서 WaW의 기둥이 되어줄 세 사람을 바라봤다.

WaW의 삼각별(Tri-star).

박건호, 오동석, 전하영.

아직 첫발도 내딛지 않은 영화사업에서 향후 WaW의 별이자 충무로의 별이 될 세 사람을 품었다.

저들과 함께라면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류지호가 전하영에게 물었다.


"조금 비좁지요?"

"여기보다 더 작은 공간에서도 일했는걸요."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고생스럽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근사한 사무실로 옮겨드릴게요. 그리고 전 PD님 부사수들도 정식으로 채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다들 저녁에 약속들 없으면 같이 저녁 먹어요.”


류지호는 직원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새로 합류한 여직원들이 능력이 얼마나 될지, 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

전하영이 WaW로 옮길 때 함께 움직이는 걸 보면 적어도 의리는 있는 사람들일 터.

모자란 능력은 세 명의 수뇌부가 잘 이끌어줄 것이다.


“무슨 생각하세요?”


박건호 상무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표정이다.


“우리 대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지?”

“밀어주는 스폰이라도 있는 모양이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저 나이에 이렇듯 자금과 사업이 탄탄할 수 있어?”

“글쎄요?”

“미국에서 투자금도 받아왔다면서?”


오동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 끝에 박건호 상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스무 살 도 안 된 나이에 이만한 수완이라... 스폰이 있든 자기가 직접 일궜든 대단한 건 대단한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놈은 난놈이다 싶어서. 지금껏 보여준 것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나름 라인이 있는 것 같고. 본인의 능력도 있어 보이고.”

“류 대표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에 와 있지.”

“그건 그렇습니다. 근데 상무님.”

“응?“

“나이는 어려도 엄연히 대표인데 이놈 저놈은 아니지 않나요?”

“내가 대표한테 얼마나 깍듯한데.”

“그렇죠. 상무님은 부하직원들에게도 쉽게 말을 안 놓으시니까.”

“패기도 넘치고, 수완까지 갖췄어. 이런 사람이 고삐가 풀리면 무섭지. 묶어 둘 수 없다면 가까이서 잘 이끌 수밖에...”


박건호와 오동석의 대화를 들은 네 여성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으로 웃었다.

WaW는 젊은 회사다.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볼 여지가 많을 것이다.

저마다 미래를 그리며 희망에 부풀었을 때 전하영이 업무지시를 내렸다.


“자, 먼저 <시네마 천국>하고 <인어공주> 대본부터 읽어보자.”


자본금 1억 원의 외화수입배급 회사 WaW에서 첫 업무가 시작됐다.


❉ ❉ ❉


WaW의 직원들이 첫 출근한 오후.


따르릉!


WaW 사무실로 국제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받는 오동석은 당장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 환호성을 터트릴 기세다.


“감사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오동석이 두 팔을 번쩍 추켜올렸다.

전하영이 오동석이 수선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시카고영화제요?”

“대표님 영화가 시카고국제영화제 단편부문 본선 상영작으로 선정되었어.”

“예?”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오동석이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시카고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진출소식을 들은 류지호는 담담했다.

뛸 듯이 기뻐할 것이라 예상했던 오동석의 기대를 무색하게 하는 행동이다.


“안 기쁘십니까?”

“기쁘죠.”

“근데...?”

"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스무 편의 경쟁작 중 하나로 뽑힌 것뿐이잖아요.“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로 귄위를 인정받는 국제영화제란 말입니다. 본선에 올라간 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아, 그랬습니까?”


류지호로서는 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으로 선정된 것에 특별한 감흥이 없다.

물론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동석처럼 방방 뛰며 좋아할 정도는 아니다.

비록 삼류감독일지언정 장편상업영화 세편을 연출했던 류지호다.

단편영화로 대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본선에 오른 것만 가지고 설레발치기에는 무안한 노릇이다.


“그래도 함께 작업한 스태프들에게 면이 좀 서겠네요.”

“아직 네 군데가 더 남았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제 개막은 언제죠?”

“10월 13일입니다.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오 실장, 전 PD 두 사람도 함께 가죠.”

“필름마켓이 열리는 영화제가 아닙니다만.”

“영화를 사러가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화를 보고 오자는 겁니다. 젊은 감독들의 개성 넘치는 영화를 봐두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아메리칸필름마켓부터 일정을 한 번 짜보세요.”

“알겠습니다.”


이후로 <영정사진>은 11월에 개최되는 마이애미 국제 단편영화제와 인터필름베를린국제단편영화제에도 초청을 받았다.


“두 영화제는 오 실장이 출장을 다녀오세요.”

“맡겨두십시오. 제가 <영정사진>을 반드시 팔고 오겠습니다. 유럽의 몇 개 나라에만 팔아도 제작비는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잘 갖춰져 있어 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들의 거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비록 저렴한 가격에서 거래되지만, 단편영화 감독들에게는 단비 같은 돈줄이다.

오동석이 넌지시 물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선댄스와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에 초청되지 못한 거요?”

“네.”

“<영정사진>이 그쪽에서 원하는 영화 스타일과 맞지 않잖아요.”


류지호는 두 영화제의 결과를 쉽게 받아들였다,

두 영화제가 지향하는 성격에 <영정사진>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WaW 사무실 식구들뿐만 아니라 가온웨딩 스튜디오 직원들 사이에서 영화제 초청이 단연 화제였다.

전하영과 홍보팀 여직원들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성화를 부렸다.

류지호는 하는 수 없이 ‘길’ 시사실을 다시 빌려 직원들에게 영화를 보여줬다.

그리고 네 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무려 2시간에 걸쳐 비평을 들어야만 했다.

영화에 대해 어찌나 조목조목 따져 물어대는지.

류지호는 마치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 받는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재우가 결재서류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2시간을 훌쩍 넘겨 네 여자에게 시달렸을 터.


“래리씨는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는 거냐?”


결재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류지호에게 심재우가 물었다.


“미국에서 복귀지시가 있을 때까지 한국에 머물러야 할 걸요?”

“참 탐난단 말이야.”

“뭐가요?”

“래리씨가 탐나. 가온에 눌러 앉히면 분명 총괄이사로써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텐데 말이야.”

“외삼촌보다 직급도 권한도 많아질 텐데도요?”

“뭐 어때? 유능한 사람이 회사를 위해 일하면 좋은 거지.”

“래리가 총괄이사 자리를 맡아준다면 가온이 망하지 않는 이상 정년퇴임 때까지 열심히 부려먹어 줄 텐데...”

“하하하! 정년퇴임 때까지? 말 그대로 평생직장이네.”

“그렇죠. 평생직장.”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지 직장인들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곧 평생직장이었다.

그런데 외환위기로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외화위기 이후로 그런 개념은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심재우 역시 계속해서 대유자동차에 다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류지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데 심재우가 계속 말을 걸었다.


“래리가 사람이 딱딱해서 그렇지 참 능력이 있는데, 가온에 눌러 앉힐 방법이 없을까?”

“연봉 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에휴.”


돈 이야기가 나오자 심재우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가온은 래리의 월급을 감당하기 힘들다.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투자회사의 팀장을 하던 사람이다.

그 수준으로 연봉을 맞추려면 답도 없다.


“돈 이야기 하면 기운 빠지지만, 그 사람도 우리 사정을 잘 아는데 좀 깎아달라고 하면 안 될까?”

“래리가 핏줄만 한국인이지 사고방식은 미국인이에요. 회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내가 넌지시 운을 한 번 때 볼까?”

“제가 몇 번 제의해 봤는데 콧방귀만 뀌더라고요. 놔두세요.”


심재우가 그래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업무부담이 커요? 사람을 더 채용할까요?”

“내가 재무나 그쪽은 잘 몰라서... 신 변호사 사무실에 우리 장부를 통째로 맡기는 것 같아 맘이 좀 그렇다.”

“원래 회계감사는 외부회사에 맡기잖아요. 내년에는 총무, 영업, 운영 등 좀 더 체계적으로 분리해서 조직을 꾸리는 걸로 해요.”

“그래야지. 올해 결산을 해 봐야 투자와 인력충원을 생각해 볼 테지.”

“조금만 고생해주세요. 내년은 올해하고 또 다를 거니까.”

“요새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러. 내년에도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

“글쎄요. 나중에는 지금이 그리워질 걸요?”


류지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 ❉


10월에 접어들면서 류지호는 모든 일을 접었다.

미국의 대학입학을 위해 필수적인 SAT가 10월 중순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은 미국에서 볼 생각이다.

영화제 참석과 더불어 겸사겸사 파커가도 방문 할 겸 뉴욕에서 시험을 보기로 했다.

이미 시험등록증을 교부받았고, 시험장도 배정을 받은 상태다.

마음은 절반이상 WaW의 미래에 대한 고민에 있었지만, 류지호는 SAT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출국 전 마지막 일주일 정도는 아예 회사업무에서 손을 떼고, 그간 틈틈이 준비해 온 SAT 시험을 재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 오동석과 전하영이 먼저 미국으로 넘어갔다.

예년보다 조금 일찍 개최된 아메리칸필름마켓을 돌아보고 추후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일정을 조율했다.


“왠지 허전하네....”


류지호가 뉴욕 존 F 캐네디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에 처음 올 때는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신효정과 함께 왔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홀로 움직였다.

이제 미국에서 류지호는 미성년자가 아니다.

술, 담배 등 몇 가지에 있어서는 제약을 받지만, 혼인신고도 할 수 있는 연령이 됐다.

한국에서는 비즈니스를 함에 여전히 불편한 점이 있지만, 미국에서만큼은 부모의 동의를 일일이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재산권 등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큰 족쇄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공항청사를 빠져나온 그는 낯익은 흑인남자를 발견했다.


“죠셉!”

“오랜만이야. 지호.”


죠셉은 캐딜락 리무진 대신 검정색 BMW 750i V12를 타고 왔다.


“그 동안 별 일 없었지?”

“별 일 있으면 안 돼. 파커가에 사건이 터지기라도 바란 거야?”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농담을 섞어가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죠셉은 유쾌한 남자이긴 했지만 수다스럽지는 않았다.

몇 달간 파커가의 저택에는 몇 번의 연회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파커가의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인 브래드가 현관 앞에 나와 류지호를 맞이했다.


“브래드, 오랜만이에요.”

“환영합니다.”

“지내는 동안 잘 부탁해요.”

“불편한 것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 낯이 익은 저택고용인들이 눈인사를 보내왔다.

류지호는 미소로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지난 번 지내던 방으로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전에 업무를 보던 방은 공부방으로 꾸며놨으니 그곳에서 시험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류지호가 캐리어를 끌고 자신이 머물 방으로 들어갔다.

올 초에 왔을 때와 모든 것이 똑같게 세팅된 것 같았다.

집사 브래드가 류지호가 낯설고 생소하지 않도록 배려한 모양이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류지호는 넓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시 후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지호.”

“...응?”


류지호가 눈을 떴다.

브래드가 예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침대 가에 서있다.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류지호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 어둠이 깔려있다.

류지호는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파커가의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레오나가 윌리엄의 품에서 뛰어내려 쪼르르 달려왔다.


“큰오빠!”

“하하하. 레오나.”


류지호가 레오나를 번쩍 안아들고, 어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윌리엄을 시작으로 제임스, 캐서린과 가볍게 포옹을 하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윌리엄이 류지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미스 신은 함께 오지 않은 것이냐?”

“그녀는 제 비서가 아니잖아요.”


캐서린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혼자 미국에 오는 게 겁나지 않았어?”

“겁날게 뭐가 있어요. 미국 할아버지 집에 오는 건데.”

“호호호. 할아버지 집?”

“1등석을 타고 오진 않았지만, 할아버지 집에 오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왔어요.”

“그래도 수행원과 함께 다니도록 해. 래리와 함께 오던가.”

“래리도 한국에서 할 일이 많아요. 그를 하루라도 빨리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면 열심히 부려먹어야 해서 저를 따라다닐 시간이 없어요.”

“시카고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고 했지?”

“운이 좋았어요.”

“칸에서 영화 두 편을 샀다며?”

“유능한 직원을 영입했어요.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두 편을 살 수 있었어요.”

“할리우드 영화를 사지 그랬어?”

“할리우드 메이저는 한국에 영화를 팔지 않고, 직접 배급할 계획인가 봐요.”


담소를 나누는 사이 브래드가 저녁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류지호와 파커가 사람들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나갔다.

레오나를 재우고 늦은 시간까지 류지호와 파커가 사람들이 회포를 풀었다.


✻ ✻ ✻


다음 날부터 류지호는 공부방에 틀어박혀 SAT 공부에 온 정신을 쏟았다.

SAT시험을 5일 앞 둔 날, 캐서린이 프린스턴 리뷰의 교사 한 명을 데려왔다.

프린스턴 리뷰(The princeton review)는 81년 미국에서 설립된 교육서비스기업이다.

교사는 엠마라 이름의 뚱뚱한 30대 후반의 백인여성이었다.

그녀는 SAT 전문입시강사였다.

81년부터 88년까지 SAT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해 뽑아온 예상시험 유형과 다양한 문제 풀이 요령들을 류지호에게 가르쳤다.

마치 대한민국의 족집게 과외를 연상시키는 벼락치기 수업이었다.

어쨌든 교재만으로 독학을 했던 류지호에게 엠마의 수업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가을은 SAT 시험 보는 계절이야. 첫 시험은 이미 지난 9월에 치렀어. 보통 새 학년이 시작되고 실시되는 첫 시험은 11학년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시험에 응시하지. 여름 내내 시험 준비를 했기 때문에 12월이나 그 다음 해에 보는 것 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에서야.”


또 하나의 이유는 AP(Advanced Placement. 고등학생이 대학학사 제도에 참여하는 것) 과목을 많이 수강하기에 공부에 대한 부담이 크기 때문에 공부 양이 더 많아 지기 전인 학기 초에 시험을 치루는 것이 유익하다는 계산에서였다.

어쨌든 미국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려면 SAT를 공부해야 한다.

물론 다른 대학들 역시 SAT 점수를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SAT 점수가 총점 1600점에 1400점은 넘어야 아이비리그 합격이 가능해.”

“제 목표 점수에요.”


류지호가 보는 SATⅠ 시험은 독해(Critical Reading), 작문(Writing), 수학(Math)으로 구성되어 있다.

SATⅠ은 한국의 대입 학력고사처럼 많은 과목을 치르는 것이 아니다.

수학이 비교적 쉬운 편이다.

문제풀이의 난이도보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한국에서 공부 좀 하는 학생들에겐 실질적으로 고난도의 영어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류지호는 영어가 많이 서툴렀던 1학년 때부터 다양한 영어잡지를 읽어왔다.

토플학원에 다니면서 하루에 최소 100여 개의 단어를 외우곤 했다.

돌아보니 SATⅠ 시험 준비용 어휘 서적을 3권 정도 외운 것 같았다.

시험시간은 3시간 45분이 소요된다.

모든 시험이 그렇듯 상당한 집중력과 지구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평소 충분한 대비가 없으면 결코 좋은 점수를 기대할 수 없다.


“최고득점은 힘들어도 꽤 좋은 점수를 기대해도 될 것 같아.”

“고마워요. 엠마.”


시험 날 아침이 밝았다.

새벽같이 캐서린이 저택으로 찾아왔다.

마치 학부모처럼 류지호를 챙겨줬다.

류지호는 태권도 수련 대신 가벼운 조깅으로 체력적인 부분을 점검하고, 단전호흡으로 맑은 정신과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아침식사는 간단하면서도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을 준비 했다.

파커가문 모든 구성원들이 류지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 위해 시종일관 밝은 표정과 몸짓을 보였다.


“제가 할 수 있어요.”

“긴장하면 꼭 빠트리는 게 있어.”


캐서린이 가방까지 챙겨줬다.

어머니인 심영숙이 챙겨주면 좋았겠지만 그녀는 한국에 있다.

어제 전화 통화를 하며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역력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류지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런 한편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면 실력 이상을 발휘해야 한다고 류지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류지호는 윌리엄과 캐서린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떠났다.

죠셉이 운전하는 BMW가 퀸즈의 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수많은 차량들로 이른 아침부터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북새통이다.

일부 부모는 주변에 주차를 한 뒤 시험이 끝날 때까지 자녀를 기다리고 있을 태세다.

학교에 도착하니 7시30분.

주차장에는 류지호보다 먼저 도착을 해서 기다리는 차가 수십 대가 있었다.

류지호는 Admission ticket(시험등록 확인 티켓, 출입증)을 꺼내 확인했다.

티켓에는 시험장 입장이 7시 30분부터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험장인 고등학교 실내체육관은 40분이 되어서야 열렸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해.”

“긴장한 거로 보여?”

“전혀. 지호는 손쉽게 문제를 풀고 나올 거라고 난 믿어.”

“고마워.”


죠셉의 응원을 받으며 류지호가 실내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 한편에 부착되어 있는 시험 응시자들의 명단표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300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학생들이 시험에 응시한 것 같다.

김 씨 성 응시자들이 눈에 띤 것도 흥미로웠다.

그늘 진 화단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한인 어머니들의 대화도 귀에 들려왔다.

주로 자녀의 과외활동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내체육관 입구에서 티켓과 여권을 제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백여 개의 긴 테이블이 놓여있는 드넓은 농구코트가 펼쳐졌다.

고등학교 실내체육관이 인천실내체육관 수준이다.


‘허 참나... 무슨 고등학교 농구장 시설이 이렇게 으리으리하냐...?.’


류지호는 미리 화장실에 다녀왔다.

시험 중간 휴식시간이 짧기 때문이었다.

류지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 명이 앉아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긴 테이블이다.

가방에서 계산기, 연필, 시계, 물병을 꺼내 올려놓고, 허리를 쭉 편 상태에서 단전호흡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빈자리들이 수험생들로 채워졌다.

서로 간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 규칙이었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시험을 대비했다.

8시 30분이 되자, 시험이 시작되었다.

만점이니 고득점이니.

류지호에게 그런 허황된 기대는 없었다.

그저 목표했던 1400점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말

즐겁고 보람 찬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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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Help Me, Please! (3) +4 22.03.31 7,024 169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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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돈 벌어서 영화만 찍으려고? +6 22.03.28 7,282 19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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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3) +7 22.03.25 7,207 183 23쪽
117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2) +9 22.03.24 7,382 189 21쪽
116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1) +5 22.03.23 7,285 180 20쪽
115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2) +2 22.03.22 7,205 180 17쪽
114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1) +10 22.03.21 7,323 185 19쪽
113 야망이거나 사명감이거나. (2) +6 22.03.19 7,464 184 24쪽
112 야망이거나 사명감이거나. (1) +9 22.03.18 7,507 189 20쪽
111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5) +9 22.03.17 7,596 197 24쪽
110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4) +9 22.03.16 7,530 198 25쪽
109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3) +6 22.03.15 7,541 186 21쪽
108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2) +7 22.03.14 7,592 193 27쪽
107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1) +6 22.03.12 7,890 183 26쪽
106 Tri-Stella Pictures. (5) +6 22.03.11 7,640 195 22쪽
105 Tri-Stella Pictures. (4) +4 22.03.10 7,842 191 28쪽
104 Tri-Stella Pictures. (3) +6 22.03.09 7,766 190 20쪽
103 Tri-Stella Pictures. (2) +5 22.03.08 7,830 185 22쪽
102 Tri-Stella Pictures. (1) +8 22.03.07 8,062 196 22쪽
101 흐르는 강물처럼. (2) +10 22.03.05 8,001 200 27쪽
100 흐르는 강물처럼. (1) +13 22.03.05 7,856 185 23쪽
99 시카고 국제영화제. (2) +23 22.03.04 8,090 212 26쪽
» 시카고 국제영화제. (1) +8 22.03.03 8,092 181 23쪽
97 WaW는 젊은 회사다. (2) +4 22.03.02 7,938 202 24쪽
96 WaW는 젊은 회사다. (1) +5 22.03.01 8,059 19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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