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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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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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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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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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며칠 후.

전하영이 안경을 쓰고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자를 데리고 신사동 스튜디오로 찾아왔다.

눈꼬리가 처져서 순한 인상을 풍기는 30대 초반의 남자.

한국영화계에서 기획영화 시대를 열었으며 1990년대 꽤 논쟁적인 인물.

현재는 누보-씨네라는 영화기획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전하영의 남편이기도 했다.

바로 신강 프로듀서였다.


호로록.


세 사람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연출부를 하셨다고요?”

“방학 때 잠깐 쫒아 다녔어요. 무슨 깡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었죠. 실제로는 대학교 2학년 때 김수용 감독님 밑에서 연출부 막내 생활을 했어요. 영화 한편이 인생을 바꾼 거죠.”


분위기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신강 피디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 덕분에 대화 내내 차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 영화가 뭔데요?”

“하길종 감독님의 <바보들의 행진>이었죠.”

“저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에요.”

“영화가 사회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주죠.”


류지호는 1970년대를 살았던 젊은 세대의 꿈과 사랑, 고뇌, 좌절을 은유하는 영화적 예술성과 하길종 감독의 시선을 좋아했다.

반면에 신강 피디는 이 영화에서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젊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것에 주목했다.

그렇듯 신강 피디는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류 대표는 올해 스물이라면서.... 그 영화를 봤어요?”

“비디오로 봤어요.”

“우리 대표님은 열여덟 살에 단편영화를 찍어 국제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는데 뭘.”


전하영이 별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신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류지호에게 물었다.


“대표님이 찍은 단편영화 볼 수 있겠습니까?”

“신 피디님의 흥미를 끌지는 못할 거예요. 영화가 무난하고 일상적이거든요.”

“그렇다면 저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예?”

“일상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아니고요?”

“검열을 피해야 하니까요.”


신강 피디는 정치적 이슈를 피하면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기획하신 영화들은 사회성이 짙은 영화 아니었나요?”

“공습이라고 불릴 정도의 할리우드 메이저의 직배로 한국영화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영화계에서 저의 첫 미션은, 한국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고. 관객들이 보길 원하는 영화를 찾아서 흥행을 거두면, 한국영화계가 망하지 않고 내가 일할 터전도 없어지지 않을 거니까.”

“신 피디님도 할리우드 직배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영화인이라면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죠.”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신강 피디와 전하영이 뜸을 들이는 류지호를 쳐다봤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영화인들이 이번 기회에 새로운 충무로 지평을 고민해 봐야 하다고 생각해요. 영화법 탓, 제도 탓, 검열 탓, 외화수입 자유화 탓, 영세한 자본 탓, UPI 탓, 시나리오 탓, 감독 탓, 배우 탓만 들먹이며 스크린 쿼터에만 의존하고 외설영화만 양산해온 충무로 매너리즘의 과감한 청산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차분히 이야기하는 태도.

어느 때보다 설득력 있어 보였다.


“누보-씨네는 운영할 만 하세요? 제작을 하지 않고, 기획만 해서는 수익이 나지 않을 텐데.”


신강 피디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돈도 없고, 경험도 없는지라 모두가 안 된다고 했는데, 그냥 저질렀죠. 그래도 아직까지는 저희가 기획한 영화 성적이 나쁘지 않아서 버틸 만합니다.”

“모든 영화가 관객들이 좋아할 것이란 전제하에 만드는 건데, 왜 흥행하는 영화는 적은가에 대한 건, 아무리 분석해 봐도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관객이란 잠재 소비자들의 수요를 읽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명화는 촌스럽지 않듯, 코폴라의 <대부>는 유행타지 않는 영화에요. 어떤 영화들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재미가 있죠.”

“영화쟁이들이 궁극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영화가 그것이죠.”


전하영의 말에 어떤 각오가 느껴졌다.


“영화를 몇 편 기획할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돈을 내고 보러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앞으로 정말 영화를 잘 만들어야겠다라고 반성을 하게 됩니다.”

“신 피디같은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류지호가 신강 피디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WaW도 영화를 제작할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만들게 되겠죠.”


류지호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영화기획사라는 걸 차리긴 했는데, 애매한 포지션인 것 같더군요.”


신강 피디의 말에서 약간의 답답함이 섞여있었다.

류지호가 툭 질문을 던졌다.


“제작자는 창작자일까요, 사업가일까요?”

“단정 지을 수 없는 부분이군요.”

"그래도 분명한 건 있죠. 창작 마인드와 비즈니스 마인드를 동시에 갖고 있는 제작자가 경쟁력 있고 오래간다는 것.“


신강 피디와 전하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자의 마인드를 보면 결과가 어떨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한방에 해결하려는 사람은 곧 영화계를 떠날 사람이죠.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노하우를 축적하는 사람은 오래 버티고요. 그래서 결국 사람을 잘 지켜보는 게 제 일이 되더군요.“


신강 피디의 말은 충무로 제작자들의 격언이다.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 유명한 제작자가 한 말을 떠올렸다.


“좋은 제작자는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배우는 어떤 자세로 연기를 하는지 계속 눈여겨봐야 한다고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게 생각나네요."


짝!


전하영이 박수를 한 번 치고, 두 사람을 향해 입을 뗐다.


“자, 신변잡기는 그 정도에서 하고, 신 피디! 대표님께 본론을 꺼내 봐요.”


그녀의 말에 신강 피디가 느긋했던 자세를 고쳤다.


“저희가 영화를 하나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하영씨에게 대강의 이야기는 들었어요. 신혼부부의 이야기라고요?”

“맞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신혼부부들의 고민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같은 영화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로맨틱 섹시 코미디 쯤 되겠네요. 기존 한국영화의 신파요소를 빼고, 부모나 아이도 안 나오고, 오로지 남녀 두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출 생각입니다.”

“할리우드 유행을 따라가려는 건 아닙니까?”

“서로 영향 받지 않은 문화콘텐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정해졌어요?”

“제가 억지로 술도 먹이고 협박도 하면서 어르고 달래서 강제로 동의를 받아놨습니다.”

“책은 언제 쯤 볼 수 있을까요?”

“책을 쓰기 전에 인터뷰와 취재를 해야 합니다.”


한국영화계에서 시나리오를 흔히 ‘책’이라 부른다.

영화의 각본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스크린플레이(Screenplay)다.

할리우드에서는 이 용어보다 일반적으로 ‘스크립트(Script)’라는 말을 많은 쓰는 것과 같이 충무로 역시 시나리오라는 말보다 ‘책‘이란 표현을 주로 썼다.


“제게 어떤 도움을 원하세요?”

“일단 저희가 오천 명 이상의 신혼부부를 취재하려고 합니다.”

“가온웨딩 스튜디오의 고객들은 엄밀히 말해 예비부부에요. 차라리 결혼정보회사에 협조를 요청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병행하려고 합니다. 연애기간과 신혼기간이 어떻게 대비되고, 변화하는가를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강 피디가 본격적으로 기획영화를 내놓기 전에는 작가들이 여관방에 틀어 박혀 상상력으로만 시나리오를 썼다.

지금의 이 작업방식이 흔히 말하는 발과 땀으로 쓴 시나리오의 본격적인 시작점이라 할 수 있었다.


“철저하시군요.”

“상상을 현실로 만들려면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요.”

“가람이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신랑·신부를 소개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신강 피디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전하영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이 나섰다.


“아휴! 증말.... 대표님, 신 피디가 기획한 영화, 제작해볼 의향 없어요?”

“제작이라...”


류지호는 즉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런 영화는 잘못 건드리면 안 된다.

이 영화를 WaW 픽처스로 가져와 제작하면 좀 더 웰메이드하게 영화가 나올지도 모른다.

반면에 이전 삶처럼 피카디리 극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다.

솔직히 <신혼생활>의 성공은 제작사와 극장의 힘이 컸다.

피카디리의 모회사인 일영영화사의 창립 작품으로 엄청난 지원을 해준 것.

영화의 흥행을 위해 피카디리는 좋은 타이밍에 비교적 긴 기간을 걸어주었다.

극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류지호로서는 그런 지원을 해줄 수가 없다.

단관개봉의 한계다.


“일단 책 나온 다음에 그 문제는 의논하는 걸로 하죠. 기획개발 단계는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전하영이 볼멘소리를 했다.


“뭘 재고 따져요. 미국영화는 따지지 않고 잘만 사오는 구만.”

“오 실장이 계약한 영화들은 책, 감독, 캐스팅, 제작사, 배급사 모두 검증되었습니다만.”

“쳇!”


전하영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류지호는 건물 앞까지 나와 신강 피디를 배웅했다.

전하영이 넌지시 류지호에게 물었다.


“신 피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뚝심 있는 분이죠. 잘되실 겁니다.”

“대표님은 언제 쯤 영화를 찍을 생각이요?”

“여름 전에 찍어볼까 고민 중이에요.”

“단편 말고, 장편상업 영화요.”

“때 되면 찍겠죠.”

“시나리오 많이 써놨다면서요? 까 봐요. 우리가 읽어보고 리뷰 해줄게요.”

“0고라서 아직 누구에게 보여줄 정도는 안 돼요.”

“0고?”

“초고라고 불릴 정도가 아니라는 거죠. 메모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럼, 단편부터 줘 봐요. 기획실에서 낱낱이 분석해줄게요.”

“아, 네...”


류지호가 떨떠름하게 대답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할리우드와 충무로 모두에서 나름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류지호에게는 그들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딱 그만큼의 꿈이 있었다.

상처받고 주눅 들었던 이전 삶을 모두 털어내자, 재능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호기심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절박하게 꿈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런 게 있었다.

그런 것들이 류지호라는 영화쟁이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영화를 통해서, 별것 없던 그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만난 사람들, 한국과 미국의 영화사 그리고 단편영화 한편이 만들어낸 결과 덕분에 류지호는 전보다는 조금 더 큰 그릇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류지호가 자신의 자리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그런 류지호를 고우찬이 질린 눈으로 지켜봤다.

류지호가 고개를 들었다가 고우찬과 눈이 마주쳤다.


“왜?”

“보는 내가 다 머리가 아파서... 진짜 일 많다 너?”


류지호는 피식 웃었다.

사실 더 바쁜 것은 고우찬 본인이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스튜디오의 각종 잡다한 업무를 다 떠맡아 하고 있으니까.

구매부서가 따로 없다보니 비디오테이프를 사온다거나, 레자가죽 업체에서 앨범을 받아 온다거나 하는, 막말로 하면 잡부 역할을 하고 있다.

월급을 제법 두둑하게 받고 있다.

고우찬에게서 불평불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태권도 수련을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걱정이 있다면 입시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는 했다.

비록 고우찬은 복잡한 생각을 싫어해 어리석게 보이는 면이 있었지만, 뭔가에 꽂히면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진지했다.

고우찬이 태권도 수련을 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류지호가 자극을 받을 정도다.


탁.


류지호가 마지막 서류를 덮었다.


“이제 끝난 거야?”

“응. 일단은.”

“일단?”


류지호가 책상 한편에 쌓여있는 두꺼운 종이 뭉치들을 가방에 넣었다.

시놉시스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할리우드 영화 스크립트였다.

이동 중에 영화 시나리오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짬이 나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류지호와 고우찬이 스튜디오 건물 밖으로 나왔다.

최 대리가 머큐리 세이블의 운전석으로 향하던 고우찬을 저지했다.

고우찬은 하는 수 없이 류지호의 옆 자리에 탑승했다.

아쉬워하는 고우찬의 표정을 보고,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운전하고 싶어? 나중에 차키 줄까?”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술 먹고 운전하지 마. 절대! 음주운전하면 영원히 차키 안 줄 거니까.”

“지호야.”

“응?”

“내 자리를 빼앗긴 거 같아.”

“무슨 자리?”


고우찬은 입을 꾹 다물고, 운전하는 최 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섭섭했다.

자신은 친구의 든든한 보호자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경호원이 친구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우찬이 고개를 돌려 힐끗 류지호를 바라보았다.

류지호는 영어로 써진 종이에 붉은 펜으로 표시를 하며 읽고 있다.


“재미있냐?”

“나름.”

“학교 다닐 때부터 책만 읽더니 지겹지도 않냐?”

“이건 교과서가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야. 당연히 재미있을 수밖에.”

“다 영어던데. 이해하면서 보는 거야?”

“대충. 아리송한 건 모아뒀다가 오 실장에게 물어보고 있어.”


많은 돈을 받는 작가들의 글은 확실히 배울 것들이 많았다.

흔히 ‘대사발‘이라고 하는 것은 타고난 재능만 가지고는 안 되는 부분이다.

독서량, 다양한 인간군상과 교류하며 체득한 경험, 글을 다루는 기술까지.

영화 한편에서 수많은 캐릭터의 개성 하나하나를 만들어낸 뛰어난 작가들의 글.

그런 글들이 류지호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필요한 정보만 정확하게 담겨있는 시나리오를 읽고 해석하고 상상해 두었다가 비디오를 빌려서 보면서 새삼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영화를 재정립하고 있으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영화로 좀 더 다가가는 느낌이랄까.

비디오 대여점에서 몇 년간 점원으로 일했던 몇몇 세계적인 감독들도 그러했지 않았을까.

마치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이 선대고수가 남겨놓은 무공비급과 동굴 벽에 그어놓은 무수한 초식수련의 흔적을 탐구해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비디오 대여점이라는 세상의 온갖 영화비급들이 소장된 공간에서 선배 영화감독들의 영화를 다루는 초식들을 탐구해 그들은 자신만의 영화무공으로 재정립한 건 아닐까.

그만큼 영화가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쌓아놓은 선배들의 초식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무공을 창조하는 기초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 ❉ ❉


2년 만에 찾은 인천 실내체육관.

떡 벌어진 어깨에 탄탄한 체격, 190cm의 신장까지.

고우찬은 보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의 위풍당당함을 자랑했다.

그에 비해 류지호는 비교적 호리호리해 보이고, 미끈한 체격이다.

그 동안 키도 쑥쑥 자라 이전 삶의 키를 훌쩍 넘긴 179Cm가 되었다.


‘1Cm만...! 1Cm만!’


매일 주문을 외워보았지만, 반년 간 키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더 이상 자랄 것 같지 않다.

결국 타고나는 신체 부분에서 만큼은 ‘루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쫄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고우찬이 류지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격려했다.

오늘은 류지호가 태권도 3단 승단시험을 보는 날이다.

류지호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2단 주제에 어디서 코치질이야.”

“너 메달 따봤어?”

“잘났다! 고우찬....!”

“잘났지! 몰랐냐? 내가 인천 헤비급 대장이야.”


류지호는 무리 없이 승단심사에서 합격했다.

고등학생으로 돌아와 꾸준히 수련해서 태권도 3단이 되었다.

태권도가 취미이자 특기가 된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성취가 눈에 보이면 뭐든 더욱 열심히 하게 되는 법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도 답이 안 나오는 것.

늦게라도 삶이 달라지는 걸 확인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며칠 전, 전기대학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신포고 전교 1,2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김석민과 황재정은 나란히 서울대에 합격했다.

대한민국의 수재라는 수재는 다 몰리는 곳, 그곳이 서울대다.

서울대 수많은 학과 중에서도 성골 취급 받는 공대.

그 가운데서도 전자공학과.

김석민이 공돌이(?)로 진로를 바꿨다.

류지호의 충고를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황재정이 합격한 경영학과 역시 만만치 않다.

졸업 후 대기업 입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준우는 유학 대신 중앙대 사진학과를 선택했다.

고우찬은 간신히 용인대 태권도학과에 합격했다.

모두가 류지호가 살아봤던 이전 삶과 달라진 대학 진학이다.

반면에 다른 친구들은 이전 삶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찢어지기 아쉽지?”

“대낮부터 술 빨자고?”

“일단 신포동으로 나가보자.”


류지호는 승단심사 응원 온 친구들과 오랜만에 시내로 나갔다.

경동거리 쪽으로 향하는 류지호를 향해 황재정이 물었다.


“영화 보게?”


자신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애관극장과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인형극장이 나온다.


“잔말 말고 이 형님만 따라와라.”


경동거리에는 30여개의 양복점들이 모여 있다.

서울라사, 월드라사처럼 라사라는 이름이 붙은 양복점이 있고, 김테일러, 백양테일러 등의 테일러가 붙은 양복점 간판들이 거리 양쪽으로 죽 늘어서 있다.

류지호는 그 가운데 잉글랜드 양복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요.”


양복점 사장이 사인방을 반갑게 맞이했다.


“여기 세 친구들 양복 한 벌씩 맞춰주려고요.”

“세 명 다?”

“원단 재질하고 스타일부터 고를까요? 체촌부터 해요?”

“숨 넘어 가겠네. 일단 저기 앉아 있어봐.”


사인방이 한편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타 줄까?”

“네.”


사인방이 응접테이블 위에 놓인 남성잡지를 들춰봤다.

김준우는 잡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류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진짜로 양복 맞춰주려고?”

“전에 약속했잖아.”

“나도 양복 두 벌 있어.”

“알아. 그래도 이놈들하고 같이 맞춰. 졸업식에 입고 갈 양복, 내가 쏘는 거야.”


고우찬이 뻔뻔한 얼굴로 물었다.


“비싼 거 골라도 되지?”

“맘대로.”


양복점 사장이 커피 네 잔을 내왔다.


“자, 커피 들어요.”

“감사합니다.”

“학생?”

“고등학생이에요. 이번에 졸업합니다.”


류지호가 사인방을 대신해 대답했다.


“어른들 없이 학생들끼리 양복을 맞추러 왔어?”

“여기 친구들은 양복을 처음 맞춰 봐요. 사장님이 친절하게 설명 좀 해주세요.”


양복점 사장이 원단 샘플이 붙어있는 판을 가지고 왔다.

사소하게는 단추 색부터, 더 나아가 깃의 모양, 안감은 물론 전체 소재와 실루엣까지 남성수트의 모든 디테일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했다.

사인방이 저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원단을 고르고, 단추, 디자인 등을 선택했다.

그레이 컬러에 섬세한 핀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수트를 고른 김준우가 양복점 사장에게 말했다.


“저는 알마니 스타일로 해주세요.”

“알마니?”

“그게 무슨 스타일인데?”


고우찬과 황재정이 차례로 물었다.


“유명한 디자이너 조르지오 알마니 몰라? 이 촌놈들...”


김준우가 우쭐해서 잘난 척을 하려는 찰라,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박스스타일 재킷이 아니라, 허리가 들어간 스타일이야.”

“허리가 들어가? 그거 날라리들 입는 양복 아니냐?”


황재정이 질색을 하자, 류지호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내가 날라리냐?”


고우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그럼 지호 네가 입고 다니는 스타일이 알마니인가 하는 스타일이야?”

“알마니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슬림하게 몸에 착 붙는 스타일긴 해.”

“몸에 꽉 껴서 불편할 거 같은데?”

“안감을 어떻게 하고, 허리를 어떻게 잡아 주느냐에 따라 다른데... 다 떠나서 중요한 건 안 불편해. 너도 입어보면 알아.”


고우찬이 당당하게 사장에게 요구했다.


“사장님! 저는 지호가 입고 다니는 알마니 스타일이요!”


사장이 껄껄껄 웃고는 대답했다.


“내가 그 양반보다 더 끝내주는 양복 만들어 줄게.”

“커피 다 마셨어요. 저부터 치수 재주세요!”


고우찬이 벌떡 일어섰다.

사인방이 차례로 체촌을 마쳤다.

류지호가 보증금까지 걸고, 양복점을 나섰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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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2) +9 22.03.24 7,382 189 21쪽
116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1) +5 22.03.23 7,284 180 20쪽
115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2) +2 22.03.22 7,204 180 17쪽
114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1) +10 22.03.21 7,322 185 19쪽
113 야망이거나 사명감이거나. (2) +6 22.03.19 7,463 184 24쪽
112 야망이거나 사명감이거나. (1) +9 22.03.18 7,506 189 20쪽
111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5) +9 22.03.17 7,595 197 24쪽
110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4) +9 22.03.16 7,529 198 25쪽
109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3) +6 22.03.15 7,540 186 21쪽
108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2) +7 22.03.14 7,591 193 27쪽
107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1) +6 22.03.12 7,890 183 26쪽
106 Tri-Stella Pictures. (5) +6 22.03.11 7,639 195 22쪽
105 Tri-Stella Pictures. (4) +4 22.03.10 7,841 191 28쪽
104 Tri-Stella Pictures. (3) +6 22.03.09 7,765 190 20쪽
103 Tri-Stella Pictures. (2) +5 22.03.08 7,830 185 22쪽
102 Tri-Stella Pictures. (1) +8 22.03.07 8,062 196 22쪽
101 흐르는 강물처럼. (2) +10 22.03.05 8,001 200 27쪽
100 흐르는 강물처럼. (1) +13 22.03.05 7,855 185 23쪽
99 시카고 국제영화제. (2) +23 22.03.04 8,090 212 26쪽
98 시카고 국제영화제. (1) +8 22.03.03 8,091 181 23쪽
97 WaW는 젊은 회사다. (2) +4 22.03.02 7,937 202 24쪽
96 WaW는 젊은 회사다. (1) +5 22.03.01 8,059 19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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