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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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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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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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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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p Me, Please!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의 방으로 전하영이 찾아왔다.


“대표님, 회의해요!”

“무슨 회의요?”

“단편영화 회의.”

“왜요?”

“왜긴 왜에요. WaW의 첫 번째 영화를 찍는 중차대한 일이잖아요!”

“두 번째에요. <영정사진>이 첫 번째 영화였습니다만.”


류지호의 말에서 약간의 귀찮음이 묻어났다.


“아무튼! 이 영화 연습하려고 찍는 거예요?”

“아니요.”

“웨딩비디오처럼 소장용으로 찍어요?”

“당연히 아니죠.”

“그럼, 모니터링을 거쳐야죠.”


류지호가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곧이어 WaW 픽처스 기획홍보실 사인방이 다이어리를 한 권씩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전하영이 먼저 입을 뗐다.


“시나리오 잘 봤어요.”

“고마워요.”


류지호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저는 잔인하지 않아 좋았어요. B급 호러영화는 도끼로 사람 머리를 찍고, 팔을 꺾고, 다리를 분지르는 소름이 쫙 끼치는 폭력을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Help Me, Please>에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잔인한 장면이 없었어요.”


막내 심선미의 말을 맏언니 송미선이 받았다.


“괴물에 대한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영화에 등장하지.”

“국가 공권력의 폭력? 마치 518을 연상시키는?”


김주은이 송미선에게 물었다.


“노골적이지. 하필 동네 번지수가 518이고, 군복도 얼룩무늬라고 지문에 묘사했으니까.”

“B급 영화 풍으로 풀기에 그런 면에서 좋잖아. 풍자와 해학의 미덕.”

“풍자는 있어도 해학은 잘 모르겠는데?”

“미국 관객과 우리 관객의 정서가 달라. 한국에서는 납득하지 못할 거야.”

“우리에게도 아주 낯설지는 않지. 마이키 잭슨의 ‘스릴러’ 뮤직비디오에 좀비가 나오잖아.”

“마이키 잭슨은 보름달 뜨고 늑대인간으로 변신하지 않았나?”

“무덤 지나가면서 좀비로 변할 걸?”


류지호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가만히 그녀들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이전 삶에서 느꼈던 답답함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프로듀서나 투자회사 직원들은 이미 반쯤 전문가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관객의 눈높이라고 부득불 주장했다.

자신들이 관객 모두를 대변하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고, 끝까지 듣고 나면 허무해진다.

왜냐하면 관객들을 대변했다는 의견의 대부분은 개인의 영화 취향이거나 자신의 지식자랑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너무 촌스럽고 싸구려야.”


당연했다.

이 영화는 1968년에 만들어진 흑백영화이면서, 자동차 극장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초저예산 공포영화였다.

영화를 기획할 시점부터 싸구려 티를 팍팍 내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다.


“<시체들의 새벽> 같은 경우는 사회학, 심리학 교과서 같은 영화야. 7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불황의 늪 속에서 노동자들의 우울증과 그걸 폭력으로 표출한 시대상을 잘 풍자하고 있지.”


향후 20여 년이 지나면 소위 B급 정서라는 게 대중들에게 친숙해진다.

현재는 B급 영화에 대한 영화인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열렬한 추종자가 되거나.

싸구려로 매도하며 심지어 혐오하거나.

그런 면에서 기획홍보실 직원들이 좀비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 두 편을(아직까지는) 봤다는 것에 기특한 마음이 들긴 했다.


“좀비라는 괴물이 왜 등장하는지. 개연성이 담보되지 않잖아요. 관객들이 이런 설정을 납득할 수 있을까요?”


송미선이 류지호를 향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류지호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삭였다.

모니터링에 있어서 때로는 단순 감상만 들은 것보다 못할 때가 있다.

감독의 시나리오가 낱낱이 까발려졌다는 것에 어떤 희열을 느끼려는 사람들인가?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 이런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꼬투리를 잡아 감독에게 창피를 주려고 했다면 오산이다.


“단편영화는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며 여백도 많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 낡고 오래된 묘비석이 보이는 걸로 시작합니다. 이 동네가 과거에 공동묘지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영화 엔딩에 밝혀지는 좀비에 감염된 인간의 정체에 반전을 줌으로 해서 한 번 더 이야기를 꼬았습니다. 조지 로메로 감독이 좀비 바이러스를 자본주의 메커니즘과 거기서 재생산된 개인주의 같은 관념을 상징했다면. 나는 독재와 대중 세뇌라는 7~80년의 한국사회의 관념을 상징했습니다. 조지 로메로 감독이 좀비는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 좀비 사냥꾼인 직업군인을 중산층이라고 은유했다면 나는 그걸 뒤집은 겁니다.”


류지호는 말하다보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감독 본인이 자신의 영화를 해석해 주는 건 정말 재미없는 짓이다.

헌데 투자자와 프로듀서들은 이런 것들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인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것도 본인들이 납득할 때까지.


“고작 달동네에서 벌어진 소동에 군대가 투입되는 건 오버 아닌가요?

“도시에 괴물이 나타나면 충분히 국가비상상황입니다. 군인이 출동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치 빠른 관객들은 좀비가 누군가를 물어뜯는 장면이 보이는 순간, 더 큰 기대감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무장헬기와 장갑차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동네의 번지수가 518을 떠올리게 해요. 조금 부담스러워요.”

“번지수는 단 한 커트에, 그것도 주인공 너머로 잠깐 스치고 지나갈 겁니다. 이 또한 눈치 빠른 관객만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시나리오를 읽은 관객이거나.”

“전작에 비해서 톤 앤 매너가 너무 튀지 않나요?“

“한 작품 안에서 튀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만.“

“이 시나리오를 10분에 담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류지호의 시큰둥한 태도가 전하영을 자극시켰을까?


“대표님, 이 자리에 있는 저희도 설득을 못 시키는데 관객에게 어떻게 공감을 얻으려고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이전 삶에서 기획실 출신과 프로듀서 그리고 제작자에게 지겹게 듣던 말이다.

열 편 가운데 세 편이 성공하기 힘든 것이 영화 흥행이다.

자신들만이 정답을 가지고 있고, 감독은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편협하다고 생각한다면 좋은 제작자가 될 수 없다.

관객을 설득하기 전에 자신부터 설득해보라.

얼마나 오만한 발상인가.

여기까지다.

전형적인 시나리오 회의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 뻔했다.


“자, 여러분. 단편이잖아요. 단편영화는 자유로움과 감독의 자의식을 마음껏 드러내야 하는 거 잖아요. 대안 없는 지적질은 도움도 안 될뿐더러 의미도 없어요.”

“저희는 대표님을 도와주려는 거지 간섭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하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왜 이 영화에 정치적 배경과 설정에만 주목하죠? 좀비라는 설정과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는 장치들이 이 영화 전체를 잡아먹었다면 나는 여러분의 말을 귀담아 듣겠어요.”

“열린 사고방식의 감독인지 알았는데, 대표님도 꼰대 감독들하고 다를 게 없네요.”


송미선의 말에 약간의 빈정거림이 담겼다.


허.


류지호는 어이가 없어 헛바람을 내뱉었다.

시나리오를 읽어준 건 고마웠다.

오랜만에 추억도 되살아나고 기분 좋게 시나리오 회의를 하려고 했다.

왜 이들에게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할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게다가 핵심은 건드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지엽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류지호는 회의가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소정이와 좀비로 변한 아빠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감독의 연민이 안 느껴져요.”


류지호가 고민했던 부분을 전하영이 찔러왔다.


“<파업전야에서>,<상계동네 올림픽>과 같은 영화와 <Help Me, Please>가 다른 지점입니다. 나는 대중상업영화를 할 생각이고, 관객을 선동하거나 계몽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작과 똑같이 보편적인 주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가족애 혹은 부성애.”

“......!”

“좀비라는 괴물이 영화에 등장하지만 부성애라는, 좀비 바이러스도 어쩔 수 없는 본능? 감정? 그것만 간단하게! 오로지 그것만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괴물이 되어서까지 딸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아버지의 마음이요. 그 외에 것들은 장식이거나 포장일 뿐입니다.”


네 명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영이 음료수가 담긴 컵을 호로록 마시며 류지호를 곁눈질 했다.

그녀가 류지호를 보고 있으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안정’이다.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여유.

한마디로 중심이 잡혀있다는 말이다.

518을 건드리고, 비주류 장르인 호러물을 찍는다고 해서 치기가 엿보이느냐?

보이지 않았다.

안정적이다.

도리어 젊은 감독들이 질색하는 신파가 들어가 있다.

본래 저 나이에는 가끔은 무모해지고, 어쩔 때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용감해져야 하고, 저돌적으로 부딪쳐야 하는데.

류지호라는 사람은 어떤 균형감이 있다.

그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른 법이니까.

류지호는 어린 나이지만 잘 나가는 사람이다.

남 눈치 볼 필요가 없으니 자아가 굉장히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전하영은 안정감이 어쩌면 류지호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감이란 결국 그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는 청춘?

이른 나이에 자신의 틀을 규정하게 될지도 몰랐다.

전하영이 류지호의 말투를 장난스럽게 흉내 내며 물었다.


“이미 비주류 장르에 도전한 것만으로 독립영화스럽습니다만?”

“독립영화 아닙니다. 상업장편영화라면 도전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하려는 작업은 어떤 시도를 해도 자유로운 단편영화에요. 단편에서 도전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심선미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왜 하필 좀비였나요?”

“좀비면 안 될 이유가 있나요?”

“왜 지옥도가 하필 달동네에서 벌어지냐고요.”

“부자동네에 괴물이 출몰하고, 지옥이 열리는 이야기를 읽었거나 본적이 있나요?”

“.......?”

“내 반문에 답이 들어있다고 생각해요. 왜 항상 지옥도가 펼쳐지는 곳에는 소정이 가족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요? 그런 재앙이 벌어질 빌미를 만든 건 항상 따로 있는데.”


할리우드 감독들이 항상 포켓에 지니고 다니는 책 ‘시학’.

‘시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공은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인 동시에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객 자신과 같은 처지의 주인공은 자연스럽게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그리고 관객은 주인공의 아픔에 공감하며 연민을 보낸다.

공포심 또한 똑같은 일이 관객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을 때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어도 그다지 별스러운 내용이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공식’이 이미 그것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착한 주인공의 행복한 시절, 불현듯 찾아드는 불행, 밝혀지는 음모, 계속되는 위기일발의 상황, 통쾌한 해소에 이르기까지.

소위 ‘할리우드 영화 공식‘은 철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괜히 할리우드 영화감독과 작가들이 포켓에 쏙 들어가는 ‘시학’ 미니책자를 필수품처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거창하게 의미를 확장하자면, 부성애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정이 확장되지는 않을까 싶어요. 그 감정의 시작점이 부성애, 모성애는 아닐까 싶은 거죠. 누군가를 대신해 혹은 대표해서 희생한다는 건 숭고한 거잖아요.”

“518을 풍자하려는 건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대표님.... 엔딩은 바꾸심 안 돼요?”

“비관적인가요?”

“해피엔딩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희망적인 메시지라도. 소정이가 구출된다던가...”

“....음.”


심선미의 제안을 들은 류지호가 멈칫했다.

이번 영화는 조금은 거칠고 도전적으로 굴어볼 작정이다.

이 땅의 작은 지옥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까....

하지만.


“저는 영화가 불특정 다수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희망적 매체라고 생각해요. 관객에게 잔인한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아.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다.

뾰족하다는 것이 단순히 비극인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 진데.

과거, 현재, 미래의 비극적인 사건들.

그 기억들이 뒤섞여 류지호를 착각에 빠뜨렸던 모양이다.


[아들아, 아무리 처한 현실이 힘들어도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란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준 말이다.

이어 류지호의 머릿속에 영화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좀비영화라는 특정한 장르에 매몰되었던 류지호의 머릿속에서 <Help Me, Please>가 다시 분해되었다가 조립되기를 반복했다.


“대표님!”


전하영의 부름에 류지호의 이성이 현실로 돌아왔다.


“고민해 볼게요. 엔딩은.”


시큰둥했던 류지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방금 전까지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이전 삶에서 무수히 경험했던 짜증나는 모니터링 회의로 흘러가고 있었기에.

하지만 심선미와의 마지막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다소 막연했던 이미지들이 새롭게 구성되며 뇌를 자극하는 느낌.

잠시나마 들뜨기도 했다.

심선미가 송미선에게 물었다.


“대표님이 지금 엔딩을 바꿀 생각이 있다는 거라고 말한 거지 언니?”


류지호가 송미선 대신 대답했다.


“헤어졌던 엄마와 재회를 하게 될지, 혹은 다른 구원자가 나타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엔딩은 바뀔 것 같아요.”


네 여인이 류지호에게 마음이 바뀐 이유를 묻는 시선을 보내왔다.


“내가 선미씨와의 대화로 영감을 받았으니까요.”

“우리는요?”


전하영이 미간을 슬쩍 찌푸린 채 물었다.


“여러분은 지적과 질문만 했잖아요. 그게 무슨 시나리오 모니터링 회의에요? 감독 청문회지.”

“영화사 대표가 자기 돈으로 자기 하고 싶은 영화를 찍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내가 오만해 보이죠?”


전하영을 제외하고 세 여인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내가 왜 돈을 열심히 버는 줄 아세요? 내 돈으로 영화를 찍으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하면 자본에 타협할 일도, 비겁하게 스스로에게 타협할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영화 제작비를 대는 지방흥행업자들의 요구에 맞춰 맥락 없는 노출씬을 찍지 않아도 되고, 돈 버는 영화를 찍겠다고 남의 영화를 베끼는 비겁한 짓을 할 필요도 없어요. 자본가, 제작자, 영화판 기득권들에게 강압적인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고, 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거죠. 졸작이건 수작이건 평작이건 상관이 없이... 그렇게 영화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 말은 충무로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감독님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하영의 말에 세 여인이 똑같은 생각인지 새삼스런 눈으로 류지호를 쳐다봤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류지호는 쓸데없는 말이 이어질 것 같아 서둘러 해산을 명했다.

세 여인이 WaW 픽처스 사무실로 돌아가고, 전하영만 홀로 남았다.


“더 할 말이라도...?”

“제작부장 해보실래요?”

“이번에 찍을 단편영화에서요?”


전하영이 뜻밖의 제안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언젠가 실무를 경험해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단편영화지만 35mm 카메라로 작업할 예정이고, 촬영 회차만 적지 모든 작업은 충무로 영화 시스템으로 진행할 생각이에요.”

“매사 신중하다가 이럴 때는 또 즉흥적이셔, 우리 대표님은....”


전하영이 난감해 투덜거렸다.


“전에 경험해 본 충무로 제작부 일. 여성에게 참 가혹하죠?”

“빌어먹게도 그랬어요.”

“그렇다고 그 빌어먹을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녀에게는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영화 프로듀서가 되겠다는 빌어먹을 꿈.


“24회차도 아니고 겨우 5회차. 3억도 아니고 겨우 3천만 원 예산의 단편영화일 뿐이에요.”


참 쉽게도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말하는 류지호가 어색하지 않았다.

어떤 역경이 닥쳐도 이 청년은 ‘그게 뭐 대수라고‘ 라고 할 것 같았다.


“해보세요. 작은 영화부터.”


전하영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시네마 천국> 개봉은 어떻게 하고요?”

“5월 말이면 작업 끝나요. 박 상무님에게서 아직까지 극장 잡았다는 말씀이 없는 걸 보면 빨라도 6~7월일걸요.”


류지호는 아집만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이상만 늘어놓는 껍데기가 아니다.

그는 저렇게 말해도 되는 사람이다.

확신을 가지고 말할 때는 결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 아직 모르겠네요. 현장 일은 분명 재미있어요. 흥미도 있고요.”

“그런데 왜? 그럼 하면 되잖아요.”

“그냥하면 된다. 맞는 말이에요. 그냥 하면 되죠. 근데, 전 그냥 할 용기가 안 나네요. 아직까지는.”

“내 현장에는 양아치는 일절 들이지 않아요. 다들 젊은 사람들 위주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더 해요. 기사들은 체면 때문에... 아녜요.”


류지호는 더 듣지 않아도 그녀가 경험했던 것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영화판의 여성 스태프는 극소수다.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풍토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이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질이 안 좋은 남성 스태프들이 여성스태프에게 수작을 부리는 경우도 간혹 발생하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전하영은 현장에서 많은 남자 스태프들의 구애에 시달렸을 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안 듣고 안 봐도 뻔했다.


“피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의 하려던 말을 용케 눈치 챈 것 같았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해요?”

“충분히 고민해보세요. 다만 제작부원으로 경험하는 것, 제작부장으로 경험하는 것, 자신이 직접 기획한 영화를 제작자로 경험하는 것이 전부 다르다는 걸 알아두세요.”

“쳇. 남편에게도 듣지 않는 잔소리를 우리 대표님한테서 듣게 될 줄이야....”


전하영이 귀엽게(?)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 ❉ ❉


어둑한 소극장 객석에 서른 중후반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기운 없이 앉아 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언뜻 보면 꽤 준수한 얼굴이긴 했다.

지금 당장 신포동으로 나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꽤 많은 사람들이 알아볼 얼굴이다.

1973년에 MBS 공채 6기로 발탁되어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어 대중에게 친숙한 연기자다.

주인공은 항상 그의 동기인 임재무와 유연촌의 몫이었다.

그에게 부여되는 배역은 주로 광대, 주방장, 구두닦이, 나팔수, 내시, 장사꾼 같은 것들.

그럼에도 그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진 역할에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였다.

단 한 번도 주인공을 욕심내거나 역할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차라리 조연 역할들에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다.

그 배역들은 그가 살면서 무수히 겪어본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가 바보스럽게 웃으면 반푼이 같았다.

촐싹대면 코미디언처럼 보이도 했다.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대면 배신을 밥 먹듯이 할 것 같은 간신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다양한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연기력.

연기에 대한 열정을 지닌 남자.

연극배우이자, 팬터마임이면서 탤런트.

김영찬 배우.

1971년에 처음 연극을 하기 시작했으니 곧 연기인생 20년을 맞이한다.

그런 김영찬이 오랜만에 고향인 인천에 내려와 있다.

한통의 전화 때문이다.

KBC 드라마 한 편과 영화 한 편의 제의를 받고 있었다.

인천에서 연극하는 선배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 영찬아, 형 이번에 극단 문 닫는다.

“형들이 극단 문을 다 닫아 버리면 애들은 어디서 연극을 하라고?”

- 힘들다. 인천 앞 바다에 돌매달고 풍덩 빠져죽고 싶은 심정이야.


김영찬이라고 왜 모를까.

80년대 뜨겁게 타올랐던 인천 연극의 르네상스 불꽃은 어는 덧 사그라지고 있었다.

동인천과 신포동 일대에 흩어져 있던 대 여섯 곳의 소극장들.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해 현재는 이곳 돌체를 포함해 단 두 곳만 남았다.

인천 연극인들이 무대를 올릴 수 있는 극장들이 경영난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김영찬은 안타까웠다.

어쩔 도리가 없다.

시대가 그런 걸 어떻게 할까.

소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영화관으로 간다.

집에서 비디오를 빌려 본다.

월미도로, 서울로, 자연농원으로, 광성월드로 놀러간다.

70~90석 규모의 어두침침한 소극장의 불편한 좌석.

영화에 비해 어렵고 진지하고 불친절하기까지 한 연극.

이제 연극은 영화에 비하면 확실하게 비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내 첫 연극이 뭐였지?’


19년 전 처음으로 맡았던 배역을 잊을 리가 없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노예, 럭키.

2페이지가 넘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대사를 못 외워서, 선배들에게 무수히 빠따를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낄낄.”


김영찬이 키득거렸다.

엉망이었던 첫 무대는 잊고 싶지만, 절대 잊히지 않는 낙인이 되어버렸다.

모두에게 그렇다.

미숙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이 절로 나오는 즐거운 추억이 되기도 한다.

김영찬은 고등학교 시절 배우를 하겠다고 가출을 했었다.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를 하겠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막노동판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헌혈로 용돈을 벌고,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했었다.

그 시절 오로지 먹고 살아야 해서 했던 수많은 경험들. 공채 탤런트가 되어 배역을 소화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후우.


김영찬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과거를 돌아보는 걸 멈췄다.

그리고 옆에 놓여있는 대본 두 개를 양손에 각각 쥐었다.

왼손에는 영화 대본 <칙칙이는 챔피온>.

오른손에는 KBC 드라마 <야망의 시절>의 대본이다.

한 번에 목돈이 들어오는 건 당연히 영화다.

경일건설 사장의 실제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 예정인 <야망의 시절>은 8개월짜리 드라마다.

8개월 간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온다는 의미다.


“가께모찌(두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동시에 작업하는) 뛰겠다고 하면 <야망의 시절> 피디가 곧바로 다른 배우로 교체 하겠지.”


둘 다 캐릭터 강한 조연이다.

매번 해오던 대로 촐싹대고, 살살거리는 인물.


“작년에 일을 좀 해서 올해는 연극 한 편 해보고 싶었는데, 글렀네.”


김영찬이 연극 무대에 설 때는 거의 차비만 받았다.

그마저도 후배들 밥 사 먹이고, 술 사 먹이면 남아나질 않았다.

도리어 마이너스다.

연극하는 놈치고 술고래 아닌 놈이 없었고, 얻어먹는 걸 부끄러워하는 놈이 없다.

결국 자비까지 들여 녀석들을 먹여야 했다.

자신도 한 때 그렇게 살아왔기에 선배가 된 입장에서 당연한 처사다.


“이 놈은 또 어쩌나?”


김영찬이 종이를 눈앞으로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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