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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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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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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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p Me, Please!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또 한 편의 영화가 있다.

<야망의 시절> 대본 사이에 끼어있던 10장짜리 단편영화 시나리오.

류지호의 <Help Me, Please>다.

학생작품인줄 알고 거절하려고 했다.

헌데 김인륜 선배가 한번 해보라고 넌지시 추천했다.

어린 감독이 영화를 영화답게 찍을 줄 안다고.


“근데 이놈은 시나리오를 무슨 소설처럼 써놨어?”


류지호의 이번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다.

대신 아주 사소한 디테일도 모두 시나리오 지문에 묘사했다.

심지어 좀비 아빠가 딸이 숨어있는 방문을 손으로 긁을 때의 손모양까지 묘사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저절로 장면이 떠오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묘사한 것이다.


“본능만 남은 좀비 아빠... 이거 참!“


이성과 감정이 없는 괴물에게 부성애라는 감정을 집어넣은 설정.

생소함을 넘어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배역이다.

물론 처음부터 좀비는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나?’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다.

게다가 16mm 단편영화를 단 한편 찍어 본 스무 살의 감독이다.

이십여 명의 배우와 스태프를 잘 이끌지도 의문이다.

그랬기에 김영찬이 부담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비록 감독이 찍은 영화도 봤고 김인륜 선배가 추천을 했다지만,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궁금했다.

어떻게 생겨 먹은 녀석인지.

결국 김영찬은 감독과 미팅을 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형, 뭐해? 술이나 한 잔 하러 갑시다!”


김영찬이 좌석에서 엉덩이를 떼며 소리쳤다.


잠시 후-


사무실에서 40대 남자가 걸어 나오며 한소리 했다.


“속 편하게 술 퍼마실 때냐?”

“속이 불편하니까 술로 살살 달래야지.”


김영찬은 극단 ‘마임’의 대표 최경호와 돌체 소극장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신포동 대포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연극의 미래를 걱정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자조했다.


❉ ❉ ❉


신사동 가온웨딩 스튜디오.

김영복이 <Help Me, Please>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멈칫.


김영복이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갔다.


“엔딩이 왜 두 개야?”


김영복이 시나리오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으며 류지호에게 물었다.


“아직 결정을 못했어. 형은 뭐가 괜찮아?”

“쯧. 영화감독이라는 놈이 우유부단해서는...”

“소정이와 동네사람들이 좀비들에게 습격 받는 걸로 끝내면 완결성이 생기긴 하는데, 비극이라 좀 그래. 엄마가 동네사람들하고 나타나는 건 소정이와 관객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는 한데 뒤에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찝찝하더라고. 간결하게 딱 안 떨어져.”


김영복은 이야기는 온전히 감독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촬영기사다.

그는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도 이동차 많이 쓸 거야?”

“아니.”

“에휴.”


김영복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번엔 데모찌(들고 찍기)구나.....?”

“올 핸드헬드(Hand-Held Shooting)!”

“뭐?”

“영화 전체를 핸드헬드로 찍을 거라고.”

“사람 잡을 일 있냐?”

“자신 없어?”


김영복이 발끈했다.


“누가 자신 없대?”

“좀비가 등장하는 게 비현실적이라 모니터링을 해보면 개연성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그래서 현장감을 살려야 할 필요가 있겠더라.”

“리얼리즘 영화는 아니지만 리얼리티를 살리는 영상 감을 원하는 구나?”

“맞아. 현장성을 관객에게 강제하려고. 좀비는 존재하지 않는 실재하지 않잖아.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처럼. 관객이 주인공이 겪고 있는 걸 옆에서 함께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켜야 할 것 같아.”

“공포영화 스타일이네.”

“근데 낮씬이야.”

“그럼 무서울 리가 없잖아?”

“안 무서운 영화야. 관객을 놀래 키는 장면 하나와 전체적으로 속도감으로 밀어붙여보려고.”

".....음.“

“그렇다고 너무 흔들어대면 관객들이 멀미 할 수도 있으니까 형은 최대한 안 흔들리도록 찍어야 해.”

“넌 왜 나한테 어려운 것만 시켜?”

“겨우 10분짜리 가지고 엄살은...”


김영복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원 씬 원 커트도 있냐?”

“오프닝 시퀀스.”

“또?”

“재밌는 게 뭔 줄 알아?”

“뭔데?”

“내가 상업영화판으로 가서 세편 이상의 의미 있는 영화가 쌓이면 매 영화마다 오프닝 시퀀스를 원 씬 원 커트로 찍는 게 류지호 감독의 시그니처 샷(씬)이 돼.”

“시그니처 샷이 뭔데?”

“응위쌈 감독 영화에 매번 비둘기가 등장하잖아. 리드 스콧 감독 영화에는 항상 천장에 달려있는 선풍기를 걸고 찍는 샷이 있어. 그런 것들이 그 감독의 독특한 서명 혹은 심볼이 되는 거지.”

“아직 입봉도 안 한 놈이 참 멀리까지 내다본다.”

“어쨌든! 아직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았는데, 2분 안팎이 되지 않을까 해.”

“에휴! 좀 평범한 영화 좀 찍어. 충무로에서도 너처럼 유난 안 떨어, 인마.”

“나 한편 밖에 안 찍었어. 이번이 두 번째야.”

“<영정사진>에서 워낙 고생을 했어야지. 한 세편은 찍은 기분이다.”

“달리 샷은 원 없이 연습했잖아.”

“나 연습시키려고 골질 했냐?”

“설마~”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전하영이 사무실로 들어와 김영복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김 기사님, 오랜만.”

“잘 지내죠?”


류지호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 네. 대표님!

“최 대리, 지금 인천으로 내려갑니다.”

-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류지호가 재킷을 챙겨 입었다.


“벌써 퇴근이야?”

“배우섭외 하러가.”

“아빠 역할?”

“김영찬씨라고, <무풍지역>에 나온 탤런트. 형도 같이 갈래?”


사무실을 나서는 류지호를 김영복이 따라 나섰다.


“난 됐어. 보은집에서 애들하고 술이나 푸련다.”

“현장 모니터 쓸 거야. 미술 감독도 쓸 거고.”

“아주 꼰대들이 싫어할 짓만 골라서 해라. 그러다가 싸가지 없다고 찍혀.”


영화현장에서 카메라 뷰파인더는 촬영기사와 감독만 볼 수 있는 절대 성역이다.

그걸 모니터에 연결해 개나 소나 보게 한다는 건 도제 시스템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젊은 촬영기사들이 현장 모니터의 장점을 몰라서 안 쓰는 게 아니다.

선배 촬영감독들이 싫어하니 눈치를 보는 것이다.

제작자는 비용이 발생하니 안 하는 것이고.

심지어 예술도 아니라고 무시하는 광고와 뮤직비디오 촬영현장에서는 사용하고 있음에도.

미술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기득권을 쥐고 있는 소수 영화인들에 의해 현장 모니터는 90년대 중반에 도입되고, 미술감독 개념은 90년대 후반에 도입되어 2000년으로 넘어가야 보편화 되었었다.

이전 삶에서 현장 모니터를 막 도입하던 시기에 촬영감독 협회에서 그런 시스템을 적극 사용하던 제작자의 영화를 보이콧하는 등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걸 류지호가 깨려 하고 있다.

현장 모니터를 포함해 촬영현장의 효율화 조치들이 5년만 앞당겨 진다면?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훨씬 일찍부터 꽃피울지도 몰랐다.


“곧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 군대도 가야하고. 그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잊히지 않을까?”

“너 도망가고 나면, 난 어떻게 하고?”

“형은 유성길 기사님 밑에서 계속 퍼스트 하다가 입봉 해. 괜히 딴 기사님들 밑으로 옮겨 다니며 줄서기 하지 말고.”


유성길 촬영기사도 제작자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인물이다.

촬영에 있어서는 절대 타협이 없고, 완벽주의자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럼에도 충무로에서 가장 선호하는 촬영기사 세손가락 안에 꼽힌다.

감독들이 선호하고, 실력이 뒷받침된다.

그걸로 끝이다.

호불호를 떠나 써야만 하는 것이다.

류지호가 보기에 김영복은 유성길 밑에서 실력을 쌓는 편이 좋았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유성길의 90년대 영화들은 하나하나가 걸작들이었다.

그의 밑에서 재능 있는 감독들을 경험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다보면 김영복은 류지호의 기억보다 훨씬 더 뛰어난 촬영감독이 될지도 몰랐다.


“어쩌다가 내가 너하고 친해져서...”

“하기 싫음 말고.”

“내가 안하면 충무로에서 이 영화 찍을 놈 없을 걸?”

“그럼 미국에서 불러오지 뭐.”

“나 입봉도 못하고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 아냐?”

“걱정 마. 형이 입봉할 때 쯤 되면 촬영감독협회 힘 못 써.”


도제 시스템에서는 촬영기사로 입봉 하기 위해 삼인의 현직 촬영기사로부터 추천을 받아야 하고, 최종적으로 촬영협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했다.

충분히 숙달된 퍼스트들을 걸러내 기사로 입봉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기존 촬영기사들의 기득권과 자기들 밥그릇을 지키려는 꼼수도 숨겨져 있다.

기획 프로듀서들이 흥행영화를 내놓기 시작하고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기존 기득권층의 힘이 급격하게 빠지게 된다.

협회 인증제 같은 충무로 도제 시대의 악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WaW 대표가 누구더라? 입봉 걱정을 왜 해?”

“참 재수 없는 대사인데, 내가 반박할 수가 없다.”

“형은 칼이나 잘 갈아놔. 칼집에서 칼을 뽑았을 때는 그냥 확...!”

“난 가늘고 기~일게 영화하고 싶어.”

“그렇게 마음먹고 영화하면 나중에 후회할 걸?”

“후회 안 해. 난 촬영장에서 죽을 거야.”

“안 멋있어. 민폐야.”

“자식이! 영화에는 신파도 잘 넣으면서 생각하는 건 왜 이리 퍽퍽해?”

“우리는 쓸쓸하게 지하방 같은 데서 죽지 맙시다. 정상에서 폼 나게 은퇴하자고.”

“입봉도 안 했는데 은퇴는...!”


류지호는 최대리가 운전하는 머큐리 세이블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Help Me, Please>의 제작부장을 맡기로 한 전하영과 함께.


❉ ❉ ✻


류지호의 머큐리 세이블이 경동거리로 들어섰다.

인천기독병원 앞 건물 입구에 멈췄다.

원래 얼음공장이었던 곳을 지난 70년대 초에 개조한 연극전용 소극장 ‘돌체’다.

처음엔 연극 소극장이 아니었다.

음악 살롱이었다.

초창기에는 관객들에게 500원씩 받고 요구르트를 하나씩 나눠줬는데, 통기타 포크 음악 공연을 하거나 모노드라마를 주로 보여줬다.

그러다가 1980년에 들어서며 ‘엘칸토’. ‘돌체’, ‘미추홀’ 등 십여 개의 극단이 창단하고, 본격적인 인천 연극의 르네상스가 열렸다.

84년에 ‘경동예술극장’이 생기고, 87년에는 신포시장 안에 ‘신포아트홀’이 개관했다.

계속해서 88년 ‘미추홀 소극장’, ‘배다리예술극장’.이 개관하며 인천에서 소극장 연극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인천 연극이 전성기는 십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신포아트홀’와 ‘경동예술극장’은 몇 번 드나들었다.

‘돌체’ 소극장은 처음 와봤다.

성큼성큼 입구로 향하는 전하영을 따라 류지호도 소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는 소극장 내부.

90여석 정도 되어보였다.

편안한 자세로 관람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구조다.

그 또한 소극장의 매력이랄 수도 있고.

경사진 관객석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객석의 1/3도 채우지 못했다.

류지호와 전하영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툭툭.


누군가 류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류지호가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대뜸 물었다.


“류지호 감독?”



김영찬 배우가 어둑한 뒷좌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류지호가 벌떡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바로 알아보네요? 내가 그 정도로 유명한 놈이 아닌데?”


유쾌한 그 말에 류지호는 풋- 웃고 말았다.

김영찬이 손을 내밀자, 류지호가 맞잡고 몇 번 흔들었다.


“이분은 전하영씨라고 이번 영화에 제작부장을 맡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김영찬이에요.”


류지호가 뭔가 말을 걸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연극이 시작되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시작할 모양이네. 류 감독?”

“네. 선배님.”

"연극 좋아해요?"

"전에는 자주 보러 다녔습니다."

“그래요? 그럼 공연 보고 이야기 할까요?”

"공연 끝나고 저녁 식사 함께 하시죠."


뎅!


종소리인지 효과음인지 모를 소리가 극장 안에 울렸다.

그리고 천천히 무대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암전되었다.

헛기침과 기침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오다가.


팟.


무대의 탑 라이트가 환하게 밝아졌다.

전하영이 잠시 빈 좌석이 많은 객석을 둘러보다가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신나 보이는 표정.

류지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


전하영이 보기에 류지호는 들떠있다고 해야 하나.

설레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약간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진정되자, 배우가 무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

연극이 시작되려 하자, 류지호를 관찰하던 전하영 역시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노인 분장을 한 남자 배우가 무대 앞으로 몇 발 걸어 나와 기웃거리기도 하고, 서성이기도 하면서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되었다.

김영찬은 양 손을 뒤쪽에 두고, 상체를 약간 뒤로 젖혔다.

그리고 연극을 감상하는 류지호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류지호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펴보려는 듯이.


❉ ❉ ❉


신문지로 박스를 만들어 뒤집어 쓴 배우들이 우스꽝스런 연기를 선보였다.


“푸하.”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전하영이 고개를 돌렸다.

류지호가 웃음을 참지 않고 낄낄거리고 있다.


“하하하.”


웃어야 하는 부분에서 웃고, 슬픈 부분에서 배우와 함께 눈물을 훌쩍이는 맛.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이 연극 관람의 재미다.


에휴.

킥킥.


류지호는 연극에 흠뻑 젖어있었다.

몇몇 관객이 그런 류지호를 돌아봤다.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고 탓하는 것 같았다.

연극을 관람할 때 배우들에게 방해가 될 까봐 웃음을 참는 관객이 더러 있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나치게 큰소리를 낸다면 같이 관람하는 관객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고, 배우의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껏 웃으라고 의도한 대목에서는 참을 필요가 없다.

특히 소극장에 경우는 더욱 더.

맨 앞좌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다보면 배우가 전날 과음한 사실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무의해진다.

류지호가 전하영의 귀에 소곤거렸다.


“전하영씨, 웃기면 웃어요. 괜히 참지 말고.”


흠칫.


전하영이 황급히 객석을 힐끗거렸다.

다행히 관객들은 배우들의 코믹 연기에 빠져들어 있다.

그녀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배우들에게 최고의 관객은 자신들의 연기에 함께 호흡해주고, 풍부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관객임을.

하지만 왠지 소극장에서는 최대한 정숙하고 배우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반응도 자제해야만 할 것 같았다.


“으악!”


배우가 있지도 않은 역도를 들다 팔이 빠졌다.

관객들을 향해 자신이 팔이 빠졌다는 걸 열심히 어필했다.

호들갑스럽게 잠시 난리를 피워도 빠진 팔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제법 리얼한 팔 빠진 연기에 관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하하하!”


조금 더 큰 소리로 웃는 류지호다.

그의 눈은 막 코믹연기를 끝낸 배우에게 꽂혀있다.

이 연극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고물상을 벗어난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매우 혼란스럽고 악의들이 충돌하는 세상으로 풍자되고, 가장 안전한 장소는 가족들이 머무는 고물상뿐이라는 설정이다.

가족의 일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손자는 매일 고물상에 널려있는 각종 물건들과 친구처럼 말을 걸고, 놀이를 벌인다.

이를테면 고물들을 의인화 시키거나 때로는 동물들을 등장시켜 마임을 선보이는 식이다.

방금 개와 고양이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마임을 펼친 두 배우의 연기는 조심스럽게 예의를 보이는 전하영마저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배역의 최경호가 선보인 동물 흉내는 한 술 더 떴다.

최경호는 극단 ‘마임’의 대표이자, 돌체 소극장을 운영 중인 대표다.

그는 당대 최고의 마임이스트다.

알에서 막 깨어 나온 공룡부터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모습을 묘사한 몸짓에 관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움직이는 팔, 다리의 몸짓과 익살스러운 표정이 말 한마디 없이 관객들의 웃음보를 열어젖혔다.

손자를 위해 펼치는 그의 마임은 왜 그가 현존 최고인지를 알려주었다.


“하하하!“


류지호가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박수로 열렬히 호응해주자, 덩달아 관객들도 조심스런 태도를 집어치우고 적극적인 리액션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경호는 더욱 신이 났다.

무대 위 배우들이 관객들의 성원에 힘을 받았다.

연극을 관람하는데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며 극을 만들어간다는 것.

관객이 비평가일 필요는 없다.


피식.


김영찬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감독이란 녀석, 마치 바람잡이 같잖아.’


김영찬은 마음껏 연극을 즐기는 류지호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관객의 호응은 배우에게 에너지가 되어, 더욱 매력적인 연기로 관객에게 보상을 한다.

또 그런 에너지가 젊은 배우를 성장시킨다.


뚝.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끝이 났다.

다음 막으로 바뀌었다.

잔잔한 정서적인 장면들이 펼쳐졌다.

류지호는 미동도 없이 연극에 집중했다.

그런 반응은 김영찬에게 당연한 것이다.

이 창작극은 꽤 재미있었으니까.

후배들의 연기도 나무할 데가 없었고.

다만 마지막 공연인데 만석을 채우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

김영찬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물고 다시 선후배들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재밌네.’


류지호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연극에 몰입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소극장 공연이다.

왜 이제야 연극 공연을 보러 왔는지 후회가 될 지경이다.


‘공연을 좀 보러 다닌 모양이네..’


김영찬은 느낄 수 있었다.

류지호가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감독 녀석은 웃긴 부분에서는 배를 잡고 웃었고, 슬픈 부분에서는 눈가를 연신 훔쳐댔다.

진짜 극에 몰입하고 즐겼다.

보통 감독 나부랭이, 딴따라 물 좀 먹었다 싶은 자들은 공연 내내 팔짱을 끼고 ‘어디 한 번 해봐라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태도를 취하곤 했다.

헌데 저 어린 감독은 그런 게 없다.


짝짝짝!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커튼콜을 했다.

일렬로 서 손을 붙잡고 인사하는 배우와 박수를 쳐주는 관객들.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연결되었던 어떤 감정의 교감이 정리되고,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류지호는 열연을 펼친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공짜로 본 게 미안해지네.”


박수를 치며 류지호가 미안함을 내비쳤다.

그러는 한편 머리 한쪽이 간질거렸다.

공연의 여운을 즐겨야 하는데,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소설, 만화, 연극, 뮤지컬, 방송, 영화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아직까지는 그런 좋은 환경이 아니다.

그런데다 10년, 20년이 지나면 영화산업만 엄청나게 커진다.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들

서로 상생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인 문화산업.

앞으로 WaW 픽처스가 나아갈 길.

뭔가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류지호는 다시 한 번 이곳에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영이 생각에 잠겨있는 류지호를 일깨웠다.


“무슨 생각해요?”

“연극판에도 뭘 좀 해볼게 없을까 해서요.”

“돈을 벌려면 이기적이 되어야 하지 않나? 돈 벌어서 자기 영화 찍고, 남은 걸로는 다 퍼주려고요?”

“제 밥그릇 챙길 정도가 되면 남의 밥그릇도 조금은 챙겨주려고요.”

“야, 우리 감독님 이타적이시네. 자선사업가셔.”

“아니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데....?”

“전혀 아닌 거 같은데요....?”

“맞아요. 이기적인 거. 내가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건.”

“나누려는 건?”

“천벌 받을까봐 그래요.”


류지호는 성인군자가 될 생각이 없다.

봉사활동과 이타적인 삶에 생애를 바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최소한의 염치.

남의 것을 빼앗아 내 배만 불린 것으로 인해 혹시 저주를 받지 않을까하는 공포.

과거로 회귀한 초자연적인 현상.

그 반대급부가 없으란 법도 없다.

제 욕심만 채우다가 혹여 초월적인 존재에게 미움이라도 받게 된다면?

과민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미움과 시기를 조금은 덜 받을지도 모르지.“


류지호가 이런저런 생각하는 하는 사이 극장이 텅 비었다.

류지호와 전하영만 덩그러니 객석에 앉아있다.

잠시 기다리니 방금 전 공연을 했던 배우들이 나타났다.


“공연 잘 봤습니다.”


대표로 최경호가 대답했다.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저기....!”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되요.”


김영찬을 편하게 해주려고 류지호가 먼저 선수 쳤다.


“음...”

“저도 인천출신이고, 신포고 다니다가 자퇴했어요.”

“그럼 말 놓을게요. 류 감독, 돈 잘 번다며?”

“김인륜 선배님이 그러세요?”

“기부도 좀 한다던데? 우리 애들도 배 곪고 불쌍한 놈들이야. 밥 좀 사.”


류지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지갑 넉넉하게 채워 왔습니다.”

“오늘 막공이었어.”

“쫑파티를 제게 덤터기 씌우실 작정이셨나 보네요?”

“이 애들 전부 캐스팅하려면 그 정도 투자는 해야지.”

“왠지 제가 손해를 보는 것 같긴 하지만. 흔쾌히 제가 쏘도록 하죠.”

“레쓰 고우!”


단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극장에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작가의말

보람찬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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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3.30 11:01
    No. 1

    잘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9 그믐달아래
    작성일
    22.03.30 11:05
    No. 2

    한 때 소극장 연극들도 즐거웠는데... 세월이 이렇고 내 생활도 팍팍해지니 추억으로만 남네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요리선생
    작성일
    22.03.30 12:39
    No. 3

    반드시 들어가는 상징적 시그니처 샷을 통해
    자신의 특징과 존재감을 표현하는 감독들도 있지만,
    반대로 절대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을 가진 감독도 있지요.
    가령 데이비드핀처 감독은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절대 사용하지 않았지요.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66 북두천군
    작성일
    22.03.30 13:48
    No. 4

    학교에서 단체로 갔던 소극장..이젠 내용은 잘 기억 안나는데 재미있었다는 건 기억납니다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04.01 19:59
    No. 5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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