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과 산당의 저항 (4) / 9. 18 수정
발단은 생각 없던 김말손이가 송준길에게
“나으리 아까 들은 이야깃값은 소 한마리 줍시오.”
하며 으스대었던것이었다.
송준길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고 사람 좋은 표정으로 김말손에게 말했다.
“이보게 말손이 아니, 김서생, 그간 그대가 고생한것에 대우가 섭섭했던거 같네.
내 날이 밝는대로 쌀 여십여석을 줄 터이니 마음 푸시게.”
하니 김말손이 눈을 껌뻑거리며 멀뚱히 대답했다.
“나으리 요즘 누가 무겁기만 한 쌀을 씁디까. 무명이나 소 아니면 은자로 줍쇼.”
하니 어느새 주종관계가 몇 각만에 바뀐지라 송준길은 멍 하니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쌀을 준다고 해도 싫다니? 불태워진건 노비문서만이 아니라 그 관계였던가.
“내 어두웠네. 내일 은자로 줄 터이니 홀로 오게나.”
“예 나으리 내일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오겠습니다요.”
하며 김말손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는것이었다.
그를 지켜보는 송준길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당장 몽둥이로 말손이를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분노가 손에서 파르르 하고 떨쳐나왔다.
“아아, 어찌 덕을 알고 예가 있는 유자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을 하는지.”
하며 내면의 무언가를 애써 잠재우려 애쓰는 송준길이었다. 대신 그 화를 다른 가노들을 들볶는데 썼다.
이튿날, 해가 뜨기 전 부터, 송준길은 가노 여럿을 시켜 김말손을 환영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날 밤 일로 밤새 한 숨도 못잔 그였기에 눈은 시뻘겋고, 손은 연신 덜덜 떨고있으며,
입에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저잣거리 상말이 튀어나오던 터라 가노들은 송준길을 두려워하며 그가 닥달하는대로 재빨리 움직였다.
홀로 은자를 받으러 올 말손이를 위해 수상할정도로 친절한 장정 둘이 망태를 준비했고,
행여 이마저도 손이 모자랄 새라 아낙 셋이 그물과 몽둥이를 준비했다.
이쯤되면 말손이 귀 빠진날이라도 되는게 아닐 성 싶었지만,
송준길은 그저 면천한 김서생을 옛 식구로서 환영해주기 위함이라며 가노들을 다독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해가 중천에 걸릴랑 말랑 할 즈음에 말손이가 어디서 구했는지 비단옷까지 한 벌 빼입고는 송준길의 집 앞에 서서 이리오너라 하는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송준길과 가노 모두가 벙벙한 표정으로 대체 저 말손이가 뭘 하고 있는것인지, 아니 이제 김 서생이라 불러야 하는 자가 뭘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리오너라! 내 오늘 송가(宋家)에게서 은자 이백냥 받을것이 있어 이리 왔는데 어찌 아무도 나오질 않는겐가!”
그때 가노들은 송준길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걸 똑똑히 보았다.
***
얼마간 정신을 차린 그 앞에 김말손이 서서 능글맞게 웃고있었다.
“약조대로 나으리께 받을 은자 이백냥이 있어 왔는데 어찌 누워계십니까? 어서 일어나시지요.”
말손이를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송준길은 그 옆에서 잔뜩 긴장하여 덜덜 떨고있던 가노에게 있는 힘껏 쥐어짜 외쳤다.
“쳐라!!!!”
그 순간 뒤에 있던 아낙들이 말손이에게 그물을 던져 그를 당황하게 하더니, 덜덜 떨던 가노가 몽둥이를 건네받아 말손이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마-처음 쳤을땐 그래도 옛 식구라 살살 쳤을테지만 말손이가 내뱉은 말 때문에 식구라는 말은 잊어버렸다.
“이놈! 머리 벗겨진 최가 노비놈! 네가 양인을 능멸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이젠 몸 한 구석 남아있는 터럭조차 없을것이 왜이리 난리인것인가!”
라는 말을 듣고 이성이 온전히 남아있길 바란다는건 동서고금을 통틀어봐도 전무후무한 일이었을것이었다.
지엄하신 부처님께서 들으셨어도 그렇게 패지 말고 거꾸로 매달아서 패라 하였을 터.
땀이 송골송골 맺혀 반짝이는 머리의 주인은 사정없이 말손이를 내리쳤다.
아무튼 오늘이 그렇게 운수 좋은날 이라며 주변 이들에게 으스대던 김말손은 은자 이백냥 대신 몽둥이 이백여대를 얻어맞고 있으니
그 모습이 어디 강원도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말린 북어 패는것과 비슷하였다.
한 각도 안되는 시간동안 신명나게 얻어맞은 뒤, 거의 기절한뻔한 말손이는 광에 넣어진 채 제 신세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맷값 대신 받은 수수죽 한 사발과 물 한 동이가 그를 위로했다면 했을까.
시간이 얼마간 흘러, 근처 발걸음 소리가 들려 귀를 세워보니 말손이는 이내 아까 누구보다도 그를 후려쳤던 대머리 최가놈.. 아니 최 서방임을 알아차렸다.
“이보게 최 서방, 최 서방! 아까는 내가 잘못했네. 수수죽 한 사발만 더 주면 안되겠는가?”
“그런사람 없으니 조리 잘 하소.”
“아니 최 서방 우리 같이 십년을 한 솥밥 먹던 사이 아닌가. 어찌 이리 냉담하게 구는가!”
“어허 그런사람 없다고 하지 않소. 날 밝으면 나으리께서 처결할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소.”
하며 그를 쌩 하며 피해가니, 대체 말손은 그가 무얼 잘못했는지 억울할 따름이었다.
날이 밝으면 말손은 분명 관아로 끌려가 온갖 누명을 쓰고, 노비인 주제에 (자신이 면천되었음을 헷갈렸다.) 주인에게 으스대었으니 반상의 법도를 어겼다며 참형을 벗어나진 못하리라 생각하니 절로 몸서리가 처졌다.
그러다 문득 지난날 은자가 넉넉하여 경상땅 어딘가에서 세총통(細銃筒)하고 철흠자라는걸 몇개 샀던 기억이 났다.
붓 보다 작으나 총통은 총통인지라 그 위력을 무시할수 없다고 그걸 팔아먹은 자가 그랬지만 한 번도 쏴본적은 없었음에 그저 신기한 기물이로다 하며 은 부스러기를 주고 샀던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품 안을 뒤져보니 과연 세총통 다섯발과 철흠자 하나가 있어 아직 하늘은 그를 버리진 않은것 같았다.
허나 이걸 쓰려면 화승에 불을 당겨야 하거늘, 주변을 둘러봐도 광 안에 불씨 하나 찾을 수 없어 말손은 다시 낙담했다. 그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손이 있소?”
“최 서방!”
“여기, 수수죽 있소. 이제 그만 가겠소.”
“최 서방! 고맙네 정말 고맙네!”
“그래도 옛 정이라 생각하오.”
“고맙네 최서방··· 아까 대머리 지껄인것은 내 그러고···”
“아 그거 대머리 이야긴 하지 말래도!”
“미안하이. 안 그럼세. 다만 최 서방, 광이 너무 추운데 어찌 작은 화로 하나 넣어줄순 없겠는가?”
“아니 말손이, 광을 불태울 일 있소? 아까 너무 맞아서 정신이라도 나간건지.”
“아니 그러지 말고 이걸 좀 받아보게나.”
하여 말손이 반짝이는 은 부스러기를 쥐고 흔드니, 최 서방 역시 아까 대머리 어쩌고는 눈 녹듯 사라지고 괜히 측은지심만 드는지라,
예의가 바른 해동국 사람은 어쩔 수 없다며 맹자가 기립박수 칠 모습이었다.
“흠흠, 자네 많이 추워보이는군. 내 가서 타다 남은 화로라도 가져오겠소.”
하며 갓 불을 붙인 질화로 하나를 넣어주는데, 상수리나무 숯이 한가득 타고 있어 금새 광 안은 훈훈한 기운으로 가득찼다.
숯이 타들어가는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손은 품에서 세총통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다 품 안에 넣었다.
철흠자를 집게처럼 하여 총통을 잡고, 화승에 불을 당기면 얼마간 후에 방포가 된다.
작지만 총통이니 날이 밝으면 닥쳐올 고난 하나쯤은 피해 갈 수 있을터였다.
말손은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번을 생각했다.
다음날 저 멀리 수탉 우는 소리에 잠들어있던 말손이가 호다닥 꺠어났다.
질화로 안에 타고있던 숯들은 많은 수가 불씨를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그가 바람을 후 불자 불씨가 몇몇 살아났다.
이제부터는 절대 실수하면 안된다.
단 한번만 방포에 성공한다면, 말손이는 이제 탈출할 수 있으리라.
그 때, 바깥이 웅성웅성하더니 개운한 표정을 짓던 송준길이 외쳤다.
“광을 열어 말손이를 꺼내라!”
“예 나으리.”
하며 어젯밤 그에게 화로를 갖다 준 최 서방이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말손이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덜덜 떨며 송준길을 쳐다보았다.
“김 서생께 약조한 대로 은자 이백냥을 지금 드리리다.”
하며 몽둥이을 꺼내 말손의 머리를 후려치려는 순간 펑 퍼퍽! 소리가 나며 어깨가 뜨거워지는걸 느꼈다.
그리곤 땅과 하늘이 뒤바뀌었다.
“나으리!”
말손에게는 지금같은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첫번째 세총통부터 제대로 방포되어 제 손바닥만한 크기의 화살이 송준길의 어깨에 떡 하니 박혀 쓰러져 있었다.
철흠자를 벌려 총통을 버리고, 다른 총통을 끼워넣은 다음 불을 당겼다. 이제 이 광에서 탈출할 시간이었다.
“이 총이 굶주렸으니 피를 봐야 쓰겠단다! 모두 피해라! 모두 피해라!”
큰 소리로 외치며 동시에 광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직 대부분 가노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파악도 못하고 있는데, 몇몇 가노들은 김말손이가 들고있는게 총임을 알아차렸다.
“총통이다! 말손이가 총을 갖고있다! 모두 피하라!”
그리고 총에 맞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는것 또한 잘 알고 있기에 재빨리 몸을 날려 집안 곳곳으로 피했다.
그 덕분에 말손이는 탈출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총이다! 모두 피하라! 피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으니 피하라!”
말손은 재빨리 문 밖으로 도망가려다 자신을 쫒는 무리가 있어 그 쪽으로 다시 세총통 한 발을 방포했다.
-스스슷! 퍼펑!
이번 총통은 화약이 문제인지 아까만큼 폭발하진 않았지만 그를 쫒던 무리 중 하나가 장딴지를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다.
이번에도 명중한것 같았다.
연달아 이어진 세총통 방포에 가노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모두가 흩어져버렸다.
말손은 계획이 이렇게까지 성공할수 있구나 하며 대문을 빠져나갔다.
어제 송준길과 송시열의 대화를 간추려보면, 저들에게 약점은 의금부일것이었다.
충청도 회덕현에서 한양 도성까진 약 일주일 거리. 말손은 어떻게든 말을 사서라도 한양에 빨리 도달해야했다.
그래야만 김말손은 살아남을 수 있을것이었다.
***
안그래도 덕망있고 높은 경지의 유자라던 송가(宋家)가 난장판이 되었으니 친우였던 송시열과 그 제자, 송준길의 제자, 또 그 제자.. 그리고 근처 서원에서 정진하던 사내 등등이 모두 손에 몽둥이 하나씩은 들고 송준길을 찾아왔다.
“아니 동춘당! 이게 대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우암 내 면목없네. 스스로가 부끄러워 할 말이 없네.”
“총 방포하는 소리가 여러번 났다고 하던데 무슨일이길래 그런가?”
“가노 하나가 총통을 들고 와 모두를 겁박했네. 은자 이백냥을 요구했지만 자네가 옴을 알고 도망한것일세.”
“세상에 은자 이백냥 말인가?”
“공을 세워 얼마전 면천된 노비일세. 그런데 그게 중요한게 아닐세.”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면 뭐가 중요한것인가?”
“그 노비가 김씨노인일세!! 그가 의금부로 가서 모든 사실을 고변하면 우린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자 송시열이 아차 하는 눈빛으로 송준길을 바라보았고,
송준길은 확실히 말손이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 했다.
그들과 산당 요인들이 각 고을마다 매집하라고 지시한 쌀만 해도 벌써 수십만 석이 훌쩍 넘는다.
이 쌀들을, 대동법 시행 전 쌀값을 올리겠노라 기획한 것이 저 말손이에 의해 밝혀진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 너무나 자명한 터 였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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