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몰이 (2) / 일부 수정
임시로 설치한 군막을 슬쩍 걷어 멀리 의주성을 바라본 범문정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열흘 넘게 조선땅에는 발도 붙이지도 못한 채 멀리서 의주성만 지켜보고 있는 것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호위 겸 따라붙은 군사들은 벌써 며칠째 반응이 없는 조선에 분노하며 차라리 근처 마을을 덮쳐 약탈이나 하자고 작당했지만,
범문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저 강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근처 들판에서 사냥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누가 보면 나라의 중차대한 사안을 협상하러 오는 사절이 아닌 그저 유희거리 삼아 나온 무리나 다를 바 없었다.
“저기 대인..”
한창 처량한 감상을 정리하고 시구 한 수를 읊으려는 찰나, 범문정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자가 있었다.
“도사. 무슨 일인가?”
범문정의 호위 군사를 맡은 도사 하나가 주뼛거리며 범문정에게 물었다.
“대인, 조선에는 언제 갈 수 있습니까?”
“저들이 성문을 열어야 가지 않겠는가. 저들의 왕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니..”
“그렇습니까. 저.. 다른 건 아니고 조만간 군량이 바닥을 보일듯 하여..”
“그게 무슨 말인가? 분명 심양성을 거쳐오며 보급을 새로 할 적에 군량을 한 달 치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예 분명 그러했지만, 오늘 남은 군량을 점검했는데 절반 이상이 흙과 모래가 섞인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대인! 이렇게 꼭 나흘 뒤면 더 이상 군사들이 먹을게 없습니다. 저기 의주성에 들어가 군량을 바치라 하면 해결이 되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당장 오늘에라도 심양으로 돌아가야 군량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있나..!”
범문정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그는 국가와 국가간의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지, 이런 군사들이 먹고 자는 사소한 일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일 따위는 관직과 품계상 그가 관여할 일도 아니고, 책임질 일도 아니다. 그저 호위 군사의 대장인 모 도사를 불러다 문제 없는가? 하면 그래 잘 해내게나 하는 위치일 뿐.
그랬기에 갑작스레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위치가 되자 범문정은 평정심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디서 군량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 그전에 군사를 한성까지 모두 데려가야 하는가? 여기에서 저들을 물러야 하는가?
잠시 고민하던 범문정은 한숨을 쉬었다.
“도사. 군사를 수습하여 심양으로 돌아가게.”
“예? 대인! 하지만!”
“저 조선 놈들이 언제 폐하의 서신을 받들지도 모르는데, 하염없이 군량만 축낼 수는 없는 일. 나와 짐꾼 몇이 있으면 될 일이니 어서 돌아가게.”
“제가 받들은 군령은 대인을 한성까지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반드시 책임을 묻겠지. 조선놈들이 군사는 절대 진입해서는 안됨을 주장하여, 불가피하게 돌아왔다는 서찰을 써줄 터이니 이를 심양성에 가져가게.”
하며 범문정이 글을 써서 도사에게 건네주니 그는 감동한 듯 고개를 꾸벅 숙이며 몇번이고 고마움을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 군사들은 총 서너자루와 화약 조금, 장작과 군량을 넉넉히 두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여기 남아있는 이들을 달포는 너끈히 먹일 수 있을 터.
“조선엔 언제 들어갈 수 있으려나..”
밤하늘에 한가득 펼쳐진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그는 조선에서 해야 할 일을 되짚었다.
하늘의 별만큼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고,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을 만큼 각각의 일은 아득하기만 했다.
황제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 밤을 회상하며 범문정은 물끄러미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타이시. 남경이 함락당한 지금, 조선과 더 불필요한 마찰은 없어야 하오.”
“폐하. 이럴 때 일수록 후방의 안전을 공고히 해야 합니다.”
“지난번에 그대가 그랬지. 남경이 함락당한다면 장강의 남쪽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즉시 조선을 쳐야 한다고. 그런데 저 질기고도 질긴 명나라 놈들이 장강을 건너 읍성을 공격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폐하···”
순치제와 범문정의 예상과는 달리 명 영력제 주유량은 장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하지 않았다. 오삼계를 직접 처형한 이후, 복명 멸청의 의기가 끓어넘치던 운남의 군사들을 모두 데려다 장강을 넘어버렸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신속한 진군에 다소 방심해 있던 읍성들이 차례로 넘어가버렸다. 아직은 청나라에 충성하는 군사들과 관료들이 있어 전선이 붕괴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라는 벌통을 건드린게 큰 실수였다.
“아오바이 그 놈의 무리수만 아니었어도..!”
“폐하. 그렇다면 제가 조선으로 건너가 화의를 주선해 보겠습니다.”
“화의를? 조선이 받아들이겠는가?”
그러자 범문정이 자세를 고쳐 앉고는 순치제에게 절 하며 말했다.
“···..저들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순치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야겠지.. 그런데 뭘 내주어야 하겠는가?”
“저들이 삼전도라 불렀던 곳에서 병자년 화약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뽑는 정도라면···”
“!!”
범문정의 말에 순치제는 동요했다.
“그대는 지금 태종폐하께서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을 부정하자는 것인가? 그 비석이 세워진 의미를 그대가 진정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사실상 조선과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이전으로 관계를 조정하자는 이야기에 순치제는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범문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 그 정도 조건이 아니라면 적이 당장이라도 심양으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의정대신 아오바이의 원정군은 제법 경력있는 정예였으나 조선에서 완전히 전멸했는데, 적이 압록강을 넘어온다면··· 그 곳에 있는 아국의 군사들로는 막아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으으음!”
순치제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죽어서 선대 황제폐하들을 뵙지 못할 것이다.”
“폐하! 지금은 온전히 사직을 보호하시는데 전념하소서···.”
큰 절을 올리며 절절한 목소리로 범문정이 고하자 순치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범문정이 군막 안으로 들어오려는 때, 짐꾼 하나가 불을 피우고는 익숙한 솜씨로 화로 하나에 숯을 채워 범문정의 군막에 넣으니 금방 안이 훈훈해졌다.
어떻게든 조선과 화의를 성공해야 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모 따위는 얼마든지 감내 할 수 있었다. 조선 왕을 만나 칙서를 전달하여 약조만 받아낸다면···
그는 불길을 잠시 바라보며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빌었다.
***
이튿날 아침, 의주성에서 큰 소리가 들려와 범문정이 나아가보니, 처음 그를 상대했던 의주 부윤이라는 자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대국의 사신께서는 어서 강을 건너오시오! 전하께서 한성으로 모셔오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어제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초라한 행색에 성으로 건너오라는 것은 굴욕이나 다름없었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범문정과 짐꾼들이 강을 건너자, 맡은편에 있던 의주부윤 홍처후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대국의 사신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송구합니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그런데 분명 따르던 군사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어찌하여 사신과 짐꾼 몇 만 오셨습니까?”
통변을 통해 전해들은 범문정이 얼굴을 붉혔다.
“그..그거야 군사를 물려 서로간에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함이오만.”
“역시 사신께서는 심려가 깊으십니다. 먼 길을 걸음하셨는데다 군막에서 오래 지내셨을터. 의주성에서 며칠 정양하고 한성으로 가심은 어떠하신지요.”
홍처후가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범문정에게 말하니, 범문정도 감히 대국의 사신에게 이 무슨 추태나며 쏘아붙이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보단 이들의 비위를 맞춰주는게 나을 터였다.
“···.벌써 시일이 많이 지체되었소. 필요한 물목을 꾸려 즉시 한성으로 가야하는데, 길 밝은 자를 안내꾼으로 붙여주길 청하오. 내일은 한성으로 가야하오.”
“사신께서 그리 하다면 그리 모시겠습니다. 오면서 보아하니 말이 많이 야위었는데 말을 교체하심은 어떠신지요. 조선 말은 몸집은 작지만 오랫동안 잘 달릴 수 있으니 한성까지 가는데 무리 없을 것입니다.”
홍처후가 따뜻한 위로의 목소리로 권유하자, 범문정은 그 것까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마부꾼도 필요할 터. 우리 성에 얼마전에 강 건너온 파계승 하나가 있는데 마부꾼으로 쓸만 합니다. 하여 그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부윤의 환대에 감사하오.”
“더 좋은 상황에서 뵈었다면 좋았겠지만..”
홍처후가 말 끝을 흐리자, 범문정은 그 의미를 알고서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훗날 모든 난리가 평정이 된다면, 부윤을 북경에 있는 자가에 초대하겠소. 그 날에 오늘 못 한 이야기를 합시다.”
“고대하겠습니다 대인.”
하며 범문정이 동헌으로 들어가자, 홍처후는 영섭이 보내준 어찰 대로 정성껏 사신을 접대하되, 접촉하여 대담은 나누지 말라 함을 기억하고는 물러났다.
당장 내일 사신이 한성으로 출발한다. 급히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니 그는 아전들을 불러모아 필요한 물목들과, 얼마전 강을 건너왔다는 파계승 하나를 불러오라 지시했다.
이튿날 홍처후의 환송을 받으며 한성으로 출발하는 길에,
범문정은 의주 부윤이 붙여준 이 거대한 몸집의 승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온몸이 단단한 근육질이었고, 머리와 눈썹은 모조리 밀어버려 그 모습이 야차와도 같았다.
그 시대 사람들 처럼 온몸이 햇볕에 그을려 갈색이다 못해 검정에 가까운 피부색에,
군데 군데 숨길 수 없는 흉터와 긁힌 자국들이 있어 대체 무얼 하며 살다온 사람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키는 육 척이 훨씬 넘어 범문정이 말을 타고 있음에도 옆에서 가던 그가 더 커보였다.
그 순간 승려가 유창한 청국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인. 한성까지는 먼 길인데 가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듣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청나라 말을 하는가? 재미난 이야기? 좋다. 차피 적적하던 차인데 들어나 보자꾸나.”
그러자 거대한 승려가 눈빛을 바꾸더니 음습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대인께서는 지난날 송나라때 금나라에 끌려가 간 쓸개를 모두 내놓아, 손발이 되도록 빌어 살아남았다는 손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음? 처음 듣는구나.”
“그가 어찌나 비위가 좋아 아첨에 뛰어나서 금나라의 여럿 관리들 조차 세 치 혀로 넘어가게 하니 그는 금나라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지요. 그런 그를 훗날 사람들이 그를 가르켜 너는 비위가 좋아 아첨을 잘 하니 건강히 오래오래 살겠구나(壽而康. 수이강) 하였다는 이야기지요.”
순간 범문정은 이 승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싶어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거대한 몸집과 터져나갈듯한 근육에 절로 마음이 풀어지는 터라, 수십년 전 일을 이 사람이 어찌 알겠냐 하며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간신같은 자로구나. 동서 고금 그런 자들이 어디 한 둘이겠느냐만.”
하며 범문정은 잠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이 이름모를 거한이 말한 손적이나 자신이나 결국 강한 상대에게 숙여 영달을 꾀하지 않았나.
스스로도 명나라의 관료로서 강대해지던 후금에 투항을 하고, 손적이라는 자도 그랬지만 뭐 어떠한가? 강한 자에게 스스로를 보여 능력을 펼치는 것 또한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일.
“참으로 그렇습니다 대인.”
“일개 마부꾼이 송나라의 오래된 이야기를 아는 것이 신기하구나. 혹 그대의 이름이 어찌 되는가? 성도 있느냐?”
그러자 그 몸집이 거대한 승려는 쑥스러운듯 답했다.
“속세를 떠난 승려가 옛 이름을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다만 송씨 성을 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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