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쌀을 팝니다 (2) / 9. 19 수정
충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영력사년이라···”
영섭도 그저 네 글자만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명이 완전히 멸한게 아닌 것인가.”
하니 영의정 김육이 영섭을 쳐다보며 말했다.
“삼년 전, 통제사 김응해가 표류해온 복건(福建)의 장사치 51인을 잡았던 적이 있사옵니다.”
“그 일이라면 소신도 기억이 납니다.”
하며 우의정 원두표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서승(徐勝). 복건 천주부 진강현 사람이다. 천하가 어지러워 북경과 남경이 모두 함락되고 숭정 황제도 붕어하였으며 복왕 또한 을유년 오월에 패하였다.
정지룡과 정지봉이 당왕을 황제로 옹립하여 도읍을 복건으로 정하고 융무(隆武)라 개원하였다.
천하는 심삼 성(省)인데, 오랑캐가 구 성을 함락하여 융무가 거느리는 바는 단지 절강(浙江)복건광동(廣東)광서(廣西) 등 4성뿐이다.
이자성은 청나라 병사에게 패하여 섬서(陝西)로 달아나다 죽었고, 그의 아들 이틈은 운남(雲南)사천(四川)의 목국공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의지하며
황제에게 죄를 청하니, 목국공을 조서로 불러 군사를 합쳐 중원을 도모토록 하고 틈의 죄를 용서하고 공을 세워 자속토록 허락하였다.
정지룡은 경비가 부족하다 하여 황제에게 청한 다음 우리들로 하여금 관은을 가지고 가서 통상하여 군량을 돕도록 하였다···.”
원두표의 말이 끝나자 영섭이 오랫동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것은, 영력 사년이라고 하는 것과 삼년전 서승이 진술한대로 용무제가 즉위한것은 서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자 김육이 맞장구쳤다.
“실로 그러합니다 전하. 소신 곰곰히 생각해본즉, 서승이 이야기 중 정지룡이라는 자는 명나라 태사가 맞는듯 하오나 정성공이라는 자는 당시 어떠한 언급이 없었사옵니다.
하여 영력 사년이나 정성공이라는 자가 주장하는 명나라 수군 도독이나 모두 허황된 이야기일것이옵니다.”
원두표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영의정의 말이 참으로 이치에 맞사옵니다. 명나라가 진즉 지난날 재조지은의 무게를 헤아려 상국을 도울 것을 명하였다면,
어찌 융무제의 인장이 있는 국서나 사신을 보내오지 않았겠사옵니까? 이는 천하가 몹시 어지러워 군왕을 자처하는 조조같은 자들이 활개하기 때문일것이옵니다.”
하니 영섭도 정신이 퍼뜩 드는게 있어 무심한 듯 이야기했다.
“병상 대방 박희재는 듣도록 하여라. 네가 만났다고 하는 정성공이라는 자는 군왕을 자처하며 떠도는 자이니 현혹되지 말고, 항시 경계하여 나라에 해를 끼쳐서는 안될 것이다.”
하며 영섭은 박희재에게 호랑이 가죽 한 장을 위로하며 내어주었으니, 박희재는 그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며 편전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
“이후 안해성(安海城) 사람 임동영이란 자가 또한 장사일로 복경에서 왜국으로 향해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임동영 홀로 부서진 배조각을 타고 사흘 동안 표류하다가 경상 좌수영 용당(龍堂)에 정박하였는데,
그가 하는 말 또한 서승과 비슷했으나 그 해에 융무제 또한 청군에 사로잡혀 옥사하고, 계왕인 주유량이 조경(肇慶)으로 피신하여 비로소 영력제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또한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반청복명이라는 구호를 걸고 영력제에게 맹세하여 위원후(威遠侯)에 봉해져 이 때부터 수군 도독이 되었다 하옵니다.”
하니 모두가 숨죽이며 김육의 이야기를 들었다.
“허면 낮에 있었던 박희재가 고했던 모든 것이 사실이었던 것인가?”
영섭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던것을 본 김육이 말했다.
“정황상 거짓으로 고하지는 않은듯 하옵니다. 임동영을 잡아 심문하며 통변할 적에 역관이 제게 고하길 명나라엔 두 황제가 있었다길래 직접 추궁하여 들은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영의정은 왜..아까 그것을.”
영섭이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판 자점 때문임을 전하께서도 아실것이옵니다.”
“분명 김자점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모두가 위험했을 것이옵니다.”
원두표도 김육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통상적이면서 기록에 남는 비변사 회의 이후, 영섭이 주관하는 또 다른 비변사 회의가 도성 모 처에서 진행중이었다.
영섭이 정말 믿을만한 관료로 지목한 이는 넷 - 영의정 김육, 우의정 원두표, 공조판서 신속, 병조판서 이완 을 데리고 어느곳에서도 들리지 않고, 기록되지 아니하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나누기엔 궁궐은 너무나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다.
특히 김자점. 영섭도 김자점이 친청파의 대표적인 인물임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어 개각을 진행할때 청나라 비위 맞추기 용으로 예조판서에 임했었다.
청나라로부터 이런저런 요구가 들어오면 잘 대하여 보내게끔 하거나 사신이 오면 접대하여 잘 돌아가게 하는데 이만한 인물이 없었음을,
그런 그가 명나라 수군 도독이 조선상인과 만나 책력을 건네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될까.
영섭의 몸이 다시금 청나라 기병이 이 나라를 치러 달려옴을 생각하니 절로 몸서리쳐졌다.
“허면 정성공이 들고 온 책력이 진실로 명나라 영력제의 것이라면 어찌 해야 우리 조선이 이를 현명하게 피해갈 수 있겠는가?”
영섭은 새로운 삶을 전쟁만 하다가 끝낼 수 없다며 생각하고는 말했다.
“정성공이라는 자가 참으로 영악한 것이, 영력제의 연호를 사용한 책력을 건네줌으로 영력의 연호가 이 조선땅에 알려진 것이니 이는 분명 지난날처럼 군신의 관계가 다시 이어짐을 꾀한것 아니겠사옵니까.”
김육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니 영섭도 뭐라고 말 할 수 없었다.
“만약, 책력을 불태우고, 박희재를 잡아 유폐하면 어떻겠습니까?”
공조판서 신속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었지만
“그랬다간 이번엔 명나라 수군이 전라도에 천병을 상륙시켜 쌀을 빼앗아 갈지도 모를일입니다.”
하며 병조판서 이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또,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금 호란이 발발할것인데, 북으로는 청나라 기병이요, 남으로는 명나라 수군이 동시에 양면으로 휘몰아치게 될 것입니다.”
침묵
영섭은 지난 생에 여러 많은 압박은 받아보았지만, 지금처럼 숨막히는 압박은 처음이었다.
그의 몸이 당시를 기억하는듯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호흡이 평온하지 못했다.
청나라는 명에게 주어질 쌀을 차단하려 애쓸것이요, 명은 이를 막으려 할 테니 전장은 여전히 조선일 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상상하니 등골이 송연해졌다.
지난날 육이오 사변 때 처럼 온 나라가 불길에 휩싸여 전쟁터가 될 터. 그렇게 되면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것은 무위로 돌아가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날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신속이 입을 열었다.
“근심은 오직 정성공과 영력제의 책력이 편전에 갑자기 닥치고 청나라 오랑캐가 북경 아래로 가득 찬 데에 있으며,
지난 임동영이란 자의 심문도 근거가 없는 일이 아니니 이것을 청국에 급히 알려 군사를 정비하며 해변을 튼튼히 할 수 있도록 허락받고,
또 우리가 청국을 섬기는 것이 정성공의 의심을 사 그가 분노하는 동시에 이미 명나라의 형세가 매우 확장되었으므로
지난날 재조지은을 망각한 죄를 말하고 치러 올 걱정이 있을 듯하니 사신을 정해 바다를 건너가서 성심을 보이는 것을 고려해보아야 할것이옵니다.
지난날 수원사는 유생 하나가 상소하여 스스로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청하였는데,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면 반드시 잇달아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니, 원두표가 말하기를
“청나라에 이를 알리는일은 앞으로 사행 때에 붙여 보낼 수 있을것이옵니다.
또한 정성공으로 말하면 그 아비 정지룡(鄭芝龍)이 처음에 명나라에 반역하였으니 우리에게는 적이 되는데, 어떻게 서로 사신을 왕래하겠사옵니까.”
하고, 김육이 말하기를
"저들은 이미 주유량을 함께 도우므로 의리로 거사하여 우리를 침범할 뜻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이제 사신을 보내어 통상하면 앉아서 십여만의 군사를 물리치는 것이 될 것이외다.”
그러자 원두표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정성공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고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넓디 넓은 바다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청국 땅에 잘못 배를 대면, 큰 화를 일으키게 되겠지요!
또 조정에 사람이 모자라더라도, 사신을 보낼만 하다면 어찌 한낱 유생이 스스로 청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지난날 수원사는 유생 그 자도 전하께옵서 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청한 것입니다."
그러자 김육이 받아쳤다.
"휘종(徽宗)흠종(欽宗) 때에 주변(朱弁)이 금(金)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스스로 청하여 사절의 임무를 다하고 돌아왔는데,
정성공이 있는 곳이 우리 나라에서 멀지 않다 하거니와 한 사신이 서로 교통하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니 병조판서 이완이 둘을 말렸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토록 굳이 다투는 겁니까?”
하여 이완이 영섭에게 아뢰길
“박희재의 소(疏)는 누설될까 두려우니, 궁중에 머물러 두고 정성공에게는 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김육도 원두표도 신속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곰곰히 생각하던 영섭은 눈을 감았다 뜨고는 말했다.
“그런데 정성공이 원하는것은 쌀을 조공바치라는 것이었지. 그게 맞는가?”
“황공하옵게도 맞사옵니다.”
김육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마 조공바치라는 것은 대국으로서 체면을 따질 수 없어 그러하였을 것이다. 아마 쌀을 팔아달라거나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겠지.”
산소호흡기만 겨우 붙어있는 명나라가 진정 옛 군신관계를 복원하려 했다면 나가사키가 아니라 직접 한성에 들어와 당당히 국서와 책력을 전달했을 것이다. 정성공이 저기에서 책력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관계의 복원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게 있을것이 뻔했다.
“신 등의 판단도 전하께옵서 생각하신것과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모두 영섭에게로 향했다.
“그 쌀을 꼭 우리 조선이 팔아야 할 것은 아니라는 뜻과 같을 수 있을것이다.”
그러자 김육이 의아하여 물었다.
“전하, 신 등 잘 납득되지 않사온데..”
“그대들은 지난날 대동칠조를 반포하여 나라에 상업을 중흥하여 권면함을 기억하는가?”
“예 전하.”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는가?”
“이상한 점이라 하심은..”
“의주 만상, 개성 송상, 전라 병상, 경상 내상 이렇게 네개상단에 통상을 맡겼지.”
그러자 눈치빠른 김육이 아하 하는 표정으로 영섭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강상(江商)아무런 통상을 맡은게 없었사옵니다!”
“그렇네. 지난 대동칠조에는 강상에 아무런 통상을 맡기지 아니했지.”
“그렇다는 것은..”
“지난번 송귀들로 하여금 몰수한 쌀을 강상에 맡겨 정성공에게 팔아볼까 하네.”
하니 김육을 비롯한 나머지 세명 모두 머리속에 번개가 내린 듯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원두표가 겨우 입을 열었다.
“헌데··· 강상 또한 조선인의 상단이라 청나라에서 이를 알고 추궁할 수도 있사옵니다.”
“설명이 부족했네. 강상은 맞지만, 조선인의 상단은 아닐세.”
“예?”
그 순간 밖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 영섭에게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옴을 알렸다.
“강상 대방 김득수와 초관 박연(朴延)이 주상전하 뵙기를 청하옵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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