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성왕십삼수의 전인.
“생각보다 너무 좋네요. 만화루 회원.”
“그렇게 좋습니까?”
야수문의 문주는 우람한 근육에 호피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그가 양귀비 꽃이 새겨진 금패를 자랑했다. 만화루에서 제공하는 회원권이었다.
야수문주의 자랑에 석관웅의 귀가 솔깃해졌다.
운길서당은 표면적인 서당 사업만으로도 제법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그놈의 체면이란 것 때문에 많은 돈을 운길서당 운영과 기부 활동 등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당이 버는 돈은 어쩔 수 없다지만······.’
문제는 뒷골목 중개역을 했을 때 생긴 수익이었다.
그 수입 제법 짭짤했지만, 섣불리 드러낼 수 없어 금고에 썩는 중이었다.
“그야 돈은 돈대로 세탁하고 만화루의 기녀도 안을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야수문주가 허허 웃으며 답했다.
만화루가 사업을 바꾼 뒤 호기심 많은 이가 돈을 투자했다.
야수문주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고, 먼저 투자한 그는 금패를 받았다.
그리고 두어 달 지난 지금 대부분이 만족하고 있었다.
돈은 깨끗이 세탁됐고, 회원들에게 제공되는 만화루 이용권도 수준이 높았다.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 대놓고 만화루에 투자하기에는······.”
명색이 서당의 훈장인데 기루에 돈을 투자할 순 없었다.
야수문주가 눈을 반짝였다.
“아! 모르셨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만화루에서는 기녀 사회복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복귀 사업이요?”
석관웅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기녀로 팔려 왔거나 은퇴한 기녀들이 다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지원 사업이라고 합니다. 뭐 말이야 그렇지만, 이 또한 다양한 투자자를 모으기 위한 사업이겠죠.”
석관웅이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야수문주의 말처럼 모양새가 좋았다. 하층민을 구제한다는 뜻을 내세우면 체면을 구기지 않았고, 투자자로 당당히 만화루를 찾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만화루가 고급화 정책을 펼치면서 애들이······ 아우!”
야수문주가 뭐가 그리 좋은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만화루가 그리 좋다고?’
군침이 돌았다.
성인군자라고 고자가 아니었다. 그도 귀가 있으니 만화루가 어떻게 바뀌었고, 얼마나 수질이 좋아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투자란 말이지······.’
석관웅이 희게 웃었다.
***
“허어, 이거 참······.”
남궁적이 말은 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남궁린이 완치되면서 남궁적의 권법 지도도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과연 이걸 재능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걸까?」
최근 남궁적은 감탄보다는 경악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이젠 비무를 통해 권법을 가다듬다 보니 그도 내 수준이 자신에 근접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의 경지가 나보다 낮다고 볼 수 없구나. 이거 열다섯 소년에게 나의 부족함을 깨달았으니, 이를 복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남궁적의 씁쓸한 감정이 전해졌다.
‘아니, 그야 당신의 깨달음을 잘 먹었으니 그런 건데······.’
마음을 읽는 것이 단순히 언어화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상태의 상념을 그대로 받는 것이었다.
이해라는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초식의 숙련도와 내공만 받쳐준다면 나는 언제라도 남궁적과 같은 수준의 성왕십삼수를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비무를 해 온 남궁적도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덕분에 남궁적의 주먹이 묘하게 매서웠다.
「이걸······ 무공을 빼앗겼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남궁적이 배우고 가르치는 권법은 엄연히 육합권법이었고, 펼치는 초식도 육합권법에 담긴 초식이었다.
남궁적이 한참을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너, 남궁세가에 올 생각은 없더냐?”
“죄송하지만 저는 당문에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독을 먹인 은혜? 아니면 그대로 방치된 은혜더냐? 그 정도는 남궁세가에서도 해 줄 수 있다.”
남궁적이 내 사정을 훤히 꿰뚫곤 농을 던졌다.
나도 웃으며 반박했다.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은혜요. 그걸 남궁세가에서 어찌 대신해 주겠습니까?”
“최근 서당에 다닌다더니 혀가 잘 돌아가는구나. 어디 주먹도 그런지 다시 볼까?”
남궁적이 자세를 취하자 나는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나는 재빠르게 남궁린 근처로 피했다.
“쳇! 약삭빠르긴.”
남궁적이 혀를 찼다.
이젠 병색을 완전히 떨쳐버린 남궁린이 깎은 과일을 내밀었다.
“드셔보시겠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나는 날름 받아먹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치료도 끝났는데 언제까지 당가타에 계실 건가요?”
남궁적에게서 성왕십삼수도 빼먹을 만큼 빼먹었고, 당연해를 처리했기에 남궁린의 정보가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남궁린이 너무하다는 듯 훌쩍였다.
“제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연기는 어설프네. 아니, 그것도 계산한 건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궁린도 남궁린이었지만, 남궁적이 더 문제였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남궁적이 적극적으로 나서 독려했다.
‘아니, 벌써 발목 잡힐 일 있나?’
이제 겨우 열다섯, 조만간 열여섯을 앞두고 있었다.
앞길이 창창한 십대이거늘 남궁린과 엮여 남궁세가에 납치되듯 데릴사위로 살 생각이 없었다.
‘당문에서 자유도 얻었고.’
최근 당연강은 연무장을 나와 당중월 가주를 돕고 있었다.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너무하세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아뇨, 그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남궁세가에서도 걱정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녀의 연기를 대충 넘겼다.
남궁린이 볼을 부풀렸다. 머리가 좋은 여자인데 애교는 영 빵점이었다.
전혀 귀엽지 않았다.
“다음 오대세가 회합은 호북성에서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또 보죠.”
호북성은 구파 중에는 무당파가, 오대세가에서는 제갈세가가 있었다.
제갈세가가 지난번에 치욕을 맛봤으니 이를 만회하고자 단단히 준비할 것이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나랑 상관없지만.’
당문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소가주인 당연강이었다.
지금처럼 기대도 눈치도 안 받는 게 제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과거 시험 공부는 어떤가요?”
남궁린이 화제를 돌렸다.
“과거 시험이요? 동시 준비 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듣고 있어요.”
입당 시험이 준수하니 기초반을 지나 바로 시험 대비반으로 들어갔다.
운길서당이 과거 시험 전문이다 보니, 수업 내용도 전년도 문제 유형을 분석해 문제를 내고 푸는 방식의 반복이었다.
‘뭐 강사의 공부를 모두 삼켰으니 어려울 것도 없고.’
능력 덕에 굳이 서당을 가지 않아도 됐지만, 당연강의 눈칫밥에 주에 두 번은 서당을 찾아 공부하는 시늉 정도는 하고 있었다.
남궁린이 고개를 주억거리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 일은요?”
「사천 뒷골목이 시끄럽던데 괜찮을까?」
인피면구를 준비해 준 남궁린이었기에 내가 가짜 신분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잘 돼 가고 있죠. 조금 더 빨아먹고 수확할 생각이에요.”
사천에서도 이름난 사파인 백룡회와 창수파, 야수문이 걸려들었다. 그들이 야금야금 투자금액을 올리고 있으니 때를 봐 가짜 신분과 함께 털어낼 생각이었다.
남궁린이 걱정을 보였다.
“위험하지 않나요? 혹시 그들이 나선다면 남궁세가가······.”
“하하! 남궁 누이, 제가 누구 아들인지 잊으신 거예요?”
당문 안에서는 몰라도 밖에서 감히 독왕의 자식을 건드릴 놈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체가 드러난다고 해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
남궁적이 남궁린을 잠자리에 보내고 다시 연무장으로 나왔다.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밤하늘 아래 당연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허,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군. 조카가 반할 만해.’
얼굴만 보면 소녀인지 헷갈릴 정도로 고왔다. 그러나 지난 반년 동안 수련을 거듭하면서 몸은 다부져 갔고, 키도 훌쩍 컸다.
그러나 당연우의 본질은 외모보다 뛰어난 오성에 있었다.
남궁적은 당연우 앞에서 성왕십삼수를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지만, 당연우가 간혹 보이는 투로에는 분명 그것이 보였다.
남궁적은 그가 성왕십삼수를 알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나 더 궁금한 건 어떤 성왕심삽수를 보여 주는지였다.
“당 공자, 부른 이유는 알고 있겠지?”
“······내일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모른 척하긴.’
당연우의 내숭에 남궁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길게 설전을 벌일 필요가 없지. 당 공자, 성왕십삼수를 보여 줄 수 있겠나?”
당연우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연무장에서 홀로 성왕십삼수를 펼쳐 보였다.
남궁적이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초식들이 당연우의 작은 몸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잘라 붙여놓은 듯 똑같군.’
당연우가 보인 성왕십삼수는 너무 완벽해서 남궁적이 어디 하나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성왕십삼수를 모두 펼쳐 보이곤 숨을 골랐다.
“허허, 당 공자의 수준이 나와 다를 바 없으니, 내 더 가르쳐 줄 것은 없군.”
허탈하면서도 기쁜,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웃음이었다.
당연우는 그런 남궁적을 조용히 지켜봤다.
한참을 웃던 남궁적이 입을 열었다.
“성왕십삼수는 남궁세가의 무공이네. 우리 세가 사람들은 권법에 크게 관심이 없어 배우는 사람이 없다네. 허허. 나 같이 별종을 제외하고 말이지.”
남궁적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배우는 사람이 없는 무공은 결국 사장되고 실전될 것이다.
남궁적이 굳게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당 공자가 성왕십삼수를 배운 것을 탓할 수 없지. 대신······ 후일이라도 기회가 닿는다면, 우리 세가에 다시 돌려주길 바라네.”
당연우를 향한 남궁적은 말투까지 바뀌었다. 더는 당연우를 어린 소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문파의 무공을 훔치는 행위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이를 남궁적은 묵인하겠다고 한 것이다.
단순히 남궁세가와 당문 간의 문제라거나, 아니면 이를 빌미로 당연우를 남궁세가에 끌고 가는 등의 일은 하지 않았다.
“허허, 이것이 조카를 살려준 내 보답이라네.”
“······.”
그리고 이에 당연우는 말없이 포권을 취해 감사를 표했다.
남궁적이 연무장을 떠날 때까지 당연우의 고개는 올라가지 않았다.
***
이른 오전부터 만화루를 찾은 손님이 있었다.
청백색의 비단옷과 머리에는 커다란 관을 쓴 석관웅이었다.
“어······ 그러니까 저희 복지사업에 투자하시겠다고요?”
“흠흠! 이전부터 기녀들에게 관심이 많았소.”
석관웅이 자기가 말하고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물건처럼 쓰고 버려지는 그녀들의 고달픈 삶이 늘 걱정이었소.”
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한 석관웅이 괜스레 창피한지 얼굴을 붉혔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만화루 투자담당자는 석관웅 같은 투자자들을 많이 만나봤던 터라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상급자를 불렀다.
석관웅은 사무실 안쪽을 들어가는 담당자의 엉덩이를 노려봤다.
‘아니, 만화루는 사무직원도 기녀를 쓰나? 몸이······ 죽이네.’
속내와 다르게 표정만큼은 근엄했다.
잠시 기다리니 일전에 지하 투자설명회에서 목소리를 높인 금민재라는 사내가 나왔다.
“이거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석관웅 훈장님이시죠?”
그가 환하게 웃으며 석관웅을 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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