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천하제일권.
“당 공자, 도대체 무슨 암기를 던진 거요?”
팽기웅이 빛이 폭사된 지부장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철암당 특제 섬광탄이었다.
“마땅한 이름을 붙이진 않았는데······ 어마어마한 빛과 소리가 터지는 벽력탄이라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그래서 귀와 눈을 보호하라 했던가······.”
팽기웅과 모용경준은 내 조언에 따라 내공으로 시력과 청력을 보호했다.
간접적으로도 폭사된 빛과 소음은 상당했다.
‘아무런 대비 없이 마주한 백료강에게는 큰 타격이 갔을 거야.’
임시 철암당주로 있으며 개발한 암기 중 하나였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료강이 검에 기댄 채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회복력이 어느 정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면으로 마주했으니 실명을 피하긴 어렵겠죠.”
섬광탄이란 걸 알았다면 모를까? 백료강은 세침이라도 튀어나오는 장치가 달린 암기라고만 생각했다.
덕분에 세침을 막고자 더욱 안력을 돋았고 그대로 시력과 청력을 잃었다.
“허어, 빛과 소리의 암기란 말이지.”
팽기웅이 방 안 상황을 보고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당중일의 기억에 따르면 백료강은 14인객 안에서도 무공이 뛰어난 축에 속한 이로 절정에 근접한 고수였다.
후기지수인 팽기웅이나 모용경준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침묵하고 있었다.
“비살상 암기란 말이지. 산공독만 생각했는데 그것참······.”
놀란 팽기웅이 나직이 혀를 찼다.
백료강은 석상처럼 멈춰 서 있었지만 기감은 있는 대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팽팽하게 부푼 풍선과도 같아 그의 기감에 들어오면 언제라도 벨 준비가 돼 있었다.
“고수는······ 눈과 귀가 막혀도 싸울 방법이 있나 보네요.”
팽기웅이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기를 주변에 퍼트려 사물을 인식하는 거지. 어지간한 고수는 흉내조차 낼 수 없지만.”
“그러면 이대로 놔두면 내공을 다 쓰고 쓰러지지 않을까요?”
“글쎄? 생각보다 내공 소모가 크진 않아. 검기나 검강처럼 내공을 계속 뿜어내는 건 아니거든. 차라리 체력이 좀 소모될까?”
“그러면 며칠 동안 저 상태로 서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품에서 비침을 꺼내 들었다.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백료강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겠지.”
팽기웅 역시 도를 뽑으며 말했다. 모용경준도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백료강의 혈루검은 어떤 검인가요?”
나는 모용경준에게 물었다.
그가 드물게 입을 열었다.
“혈루검은 매화검법을 기반으로 한 마검이다. 어떻게 사람을 베어낼지 고민이 묻어나는 검이라더군.”
말처럼 혈루검은 철저히 사람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살인검이다.
탐명검과 다른 점이라면 탐명검이 단숨에 적을 죽이고자 하는 살기가 담겨 있다면, 혈루검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최대한 많이 벨 수 있게끔 하는 검이었다.
‘결국 미친놈의 무공이란 말이지.’
“그래서 이대로 무림맹 고수를 부를까? 아니면······.”
팽기웅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꺼낸 비침을 들어 보였다.
“혈루검이 어떤 무공인지 한 번쯤 확인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팽기웅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때 모용경준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허어, 이거 참······ 당가의 아이가 대단하군.”
무림맹주는 제갈지의 보고에 감탄을 토했다.
당연우는 가는 족족 14인객의 객주들을 잡아내고 있었다.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객주를 하나 더 잡았단 말이지?”
“독특한 암기를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고수에게도 통하는 그런 암기를 개발했단 말인가?”
독과 암기가 천시되는 이유는 일정 경지 이상에 이르면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었다.
고수의 순발력과 동체시력을 뚫을만한 암기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그만한 암기술의 실력이 있다면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백료강을 제압한 무공은 추혼비접이란 당문의 절기이긴 하지만······ 그전에 그의 시각과 청각을 멀게 한 암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갈지가 내민 보고서에는 팽기웅과 모용준경, 그리고 당연우의 첨언도 담겨 있었다.
맹주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말로 끝낼 녀석이 아니야.”
“······부르실 생각이십니까?”
무림맹주는 정파 무림의 하늘이었다. 일개 후기지수를 직접 만나 치하하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제갈지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후기지수를 맹주가 너무 고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너무 성급한 생각이셔.’
그런 마음과 다르게 맹주를 잘 보필하고 이끄는 것이 군사의 역할이었다.
“전담 시종에게 이야기해 면담 일정을 잡아두겠습니다.”
“허허, 그럴 필요까진 없지만 군사의 뜻이 그렇다면 내 얼굴 한 번 봐야지.”
능구렁이처럼 말하는 맹주의 모습에 제갈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노회한 고수는 무공만 천하제일이었으면 좋겠지만, 세 치 혀도 만만치 않았다.
적어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자기 뜻대로 휘두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뭐 그렇기에 당금 무림맹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겠지.’
제갈지는 맹주의 뜻에 따라 당연우 소환 명령서를 작성했다.
“그건 그렇고 사파연합의 동태는 어떤가?”
“그것은······.”
제갈지가 표정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
백료강을 무림맹 섬서 지부 무사에게 넘겼을 때 한 장의 서찰이 도착했다.
“무림맹주님의 호출······이라고?”
팽기웅이 내게 떨어진 명령서를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도대체 이 애 정체가 뭐야?」
굳이 읽지 않아도 놀란 팽기웅의 마음이 보였다.
나는 명령서를 다시 남궁호에게 건네며 투덜거렸다.
“제가 무림맹 소속도 아니고 명령서는 뭔가요? 맹주가 치매라도 걸린 거 아니에요?”
사천당문은 무림맹 소속이 아니다. 상호협력하는 지원 문파일 뿐이지 수직관계가 아니었다.
게다가 14인객의 일로 무림맹에 도움을 주는 입장이었다. 오라가라 명령서를 받을 입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섬서성에서 맹주가 있는 하남성을 찍고 다시 섬서성으로 가라고요? 그 무슨 뻘짓이래요?”
섬서성 전형문과 하남성 무림맹 사이의 거리가 하루 이틀 거리도 아니었다.
남궁호가 진땀을 뺐다.
“아니, 그래도 무림 어르신의 지엄한······.”
“지엄하긴 개뿔. 소환 명령이 아니라 초대장을 보냈어야죠.”
내가 투덜거리자 남궁호가 명령서를 자세히 훑어보며 이야기했다.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자리에 계신 분이 아닐 테니, 이 명령서는 제갈지 군사님이 보낸 게 아닐까?”
“또 제갈이에요? 젠장 콱! 중독 사건 때 내버려 두는 건데······.”
“제갈지 군사님도 별다른 생각이 없으셨을 거야. 당 소협이 참게.”
남궁호가 내 기분을 달래는 것을 보아 나는 투덜거리는 걸 멈추고 잇속을 생각했다.
이미 객주를 둘이나 잡은 이상 14인객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들이 사라져주는 편이 좋았다.
‘작은형과 당중수 삼촌 문제도 있고.’
무림맹주는 단순히 무림맹이라는 연합의 맹주일 뿐 아니라 정파 무림의 맹주였다.
그를 만나서 뭘 빼먹을지 골몰했다.
‘돈은 만화루로 풍족하고, 무공은 오다가다 주울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단 말이지?’
그렇다고 책임까지 함께하는 감투도 원치 않았다.
‘무림맹이 감춰둔 영약이라도 달라고 할까?’
가장 무난한 보상을 떠올리며 나는 툴툴거리는 시늉을 했다.
“치, 남궁 형 때문에 제가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한껏 생색을 낸 뒤 전형문을 다시 찾았다.
무림맹주든 제갈 군사든 일단 뒤처리는 하고 가야 했다.
***
“아미파는?”
청명해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미의 현정은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호정문의 최고 장로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청명해에게 무지갯빛 비늘이 검을 건넸다.
청명해가 검을 뽑자 낭창거리며 검날을 춤을 추었다.
“이건······ 호정육검의 애검이 맞군요.”
그제야 그가 미소를 지었다.
현정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청명해가 검을 멀뚱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백료강, 그 버러지 같은 인간이 실패했어요. 기껏 살인마를 사람답게 만들어 데려왔더니······.”
말하다 감정이 격해진 청명해가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마기에 객주들은 질겁했다.
‘마인이다.’
‘청명해는 마공을 익혔어!’
그런 객주들의 시선을 느낀 청명해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장내를 짓누르던 마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제가 당연우, 그 아이를 잘못 봤어요. 죄송해요.”
청명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객주들이 부족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가 나이에 비해 너무 뛰어났던 거예요. 그러니 척살령을 내리겠어요.”
끝 모를 살기가 청명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멈추고 반드시 그를 죽여주세요.”
***
명령서라고 하지만 시일을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기린 모두 명문 세가 출신이라 여비는 풍족했다.
나는 밤에는 반드시 최고급 객잔에서 쉬고, 들리는 고을의 맛집은 탐방했다.
덕분에 무림맹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예상 일정보다 이십여 일 더 걸렸다.
“연락한 지가 언젠데 왜 이렇게 늦었나?”
무림맹에 접수원에게 기별하자 제갈 군사가 뛰쳐나왔다.
“예? 제가 뭐가 급하다고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나 역시 불퉁하게 답했다.
“당 공자!”
남궁호가 펄쩍 뛰며 내 팔을 잡았다.
제갈 군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긴 한숨을 토해냈다.
“자네가 당연우인가? 하아, 그래 알았다.”
「하, 당문의 싸가지는 뭐······.」
제갈 군사는 나를 보며 당중월과 그 형제들을 떠올렸다.
같은 세대인 제갈지는 그들에게 크게 당한 게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숙부들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개차반이었던 거야?’
현재 근엄한 태도의 당중월이나 딸 바보 당중수의 젊은 시절의 행태가 어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지금도 삐딱한 당중화나 당중일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그렇다고 굳이 제갈지의 기억을 돌아보고픈 마음도 없었다.
“안으로 들지. 맹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내 뒤를 다른 오기린이 따라오자 제갈 군사가 엄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당 공자만이네.”
딱 잘라 말하자 찔끔한 남궁호가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쫄래쫄래 제갈 군사의 뒤를 쫓아 맹주전에 이르렀다.
맹주전은 무림맹 내부에 자리한 작은 정원이었다.
‘업무는 집무실에 보고, 여기는 취미 공간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골이 장대하고 가슴이 떡 벌어진 것이 역발산기개세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다만 작은 눈에 토실한 볼살까지 얼굴만은 이웃집의 푸근한 아저씨와 닮아 있었다.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아······ 저자가 절대고수. 무림맹주로구나.’
나는 침을 꿀떡 삼켰다.
이렇게 마음이 전혀 읽히지 않는 이를 만난 건 당중월 이후로 처음이었다.
‘태극분열심공이 자리를 잡은 뒤 절정고수도 표층 심리나마 읽을 수 있게 됐는데······.’
그보다 한 수 위인 절대고수를 만나며 다시 한번 벽을 느꼈다.
맹주의 작은 눈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괴물이란 건 저런 걸 말하는 걸 거야.’
눈앞의 거인을 마주하고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당중월을 통해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경험해본 바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에 피부가 짜릿했다.
‘능력에만 의존하는 얼뜨기가 아니란 말이지.’
입술을 핥으며 나는 정파 무림의 거인, 권성 권오탁 앞에 섰다.
“무림 말학 당연우가 맹주님께 인사드립니다.”
“허허, 환영하네. 나는 무림맹에서 한직을 맡고 있는 권 모라고 하네.”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성난 파도와도 같은 기세가 폭사했다.
‘아니, 이런 개 같은 노친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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