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비비의 (진짜) 말할 수 없는 비밀
암울한 이야기가 끝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카힐이 튼 뜨거운 물 때문인지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와 숨이 막힌다.
심지어 앙피까지도 동정심을 느낄 뻔했다.
“아... 네...”
‘중간부터 귀에 물이 들어가서 잘 못 들었어.’
그렇다고 진짜 느끼진 않았지만.
그래도 카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 마음이 동요하긴 했다. 정말 이곳이, 왼섬이 소환수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앙피는 나영웅을 다시 소환했다. 혹여나 다른 소환수가 소환되면 어쩌지, 같은 걱정은 이제 들지도 않았다.
‘다시 소환술은 쓰지 않겠다.’라는 약속은 ‘나영웅 님은 이미 소환했던 분이니까 무효야.’로 퉁쳤다.
“헉. 헉.”
쫄쫄이 같은 목욕옷을 입고 서울에 떨어졌던 나영웅은 결국 트럭에 치여 다시 돌아왔다. 천하의 나영웅도 평온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나영웅에게도 이곳을 떠나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늘었다.
“나. 이야기 못 들었네. 다시 해주게.”
나영웅이 말투가 조금 이상해져 버벅댔다.
“... 저희가 이야기한 걸 어떻게...”
“전개상 당연히 하지 않았겠는가. 빨리 나에게도 이야기를.”
결국 카힐은 같은 이야기를 다시 말해주었다. 하지만 막상 또 말하긴 귀찮은지 “마계, 등. 뜨거움, 고아, 마왕, 노예.” 하며 대충 설명해주었지만, 나영웅은 용케도 다 알아들었다.
역시, 이세계물 덕후인 그에겐 쉬운 추리인가.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군.”
‘뭐야 이 새끼. 이걸 알아들어?’
“뭘. 그래봤자 고작 5살이었는데.”
“바보 같군. 같은 5살이더라도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다른 걸세.
어른의 지능으로 5살까지 살다니. 정말 끔찍했겠군.”
“너···.”
“후후. 울어도 된다네.”
“괜찮다고. 임마! 자꾸 억즙 타이밍 만들래?”
나영웅은 ‘이런 나를 이해해주다니.’ 같은 감동 스토리를 원했지만, 카힐이 그런 뻔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지.
한편 앙피는 귀에 들어간 물을 빼려 머리를 탈탈 털어댔다.
‘으.. 귀 먹먹해.’
“그럼 비비 님은···.”
앙피가 말을 하다 말고 귀를 후벼댔다.
“그어어?”
“비비 양은 어디서 왔는지 묻는군.”
“우어어어어...”
비비가 절반밖에 없는 뇌를 열심히 굴렸다.
그리고는 이번엔 비비가 수도꼭지로 가서 차가운 물을 틀었다.
“후후. 비비 양은 차가운 아스팔트와 같은 곳에서 태어났군.”
아니다. 그냥 카힐이 했던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 했다.
비비는 오히려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것도 그녀가 아직 좀비가 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
우어어어어. 끄어어.
쿠에에엙? 쿠엙. 으어!
워···.
***
“뭐라는 거예요..?”
“몰라. 야, 돼지. 비비 말 좀 해석해봐.”
“후후후. 귀에 물이 들어가서 잘 안 들리는군.”
“너 머리도 안 젖었잖아. 병신아.”
나영웅이 급하게 목욕물에 머리를 넣었다 뺐다.
쏴아- 챠르르. 그의 머리가 물에 젖어 곱슬이 풀렸다.
그는 젖은 앞머리로 한 쪽 눈이 가려진 채 답했다.
“뭐라 했는가? 잘 안 들리는군.”
‘후후후. 지금 나. 멋있나.’
나영웅은 지금 자신이 꽤나 멋진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 중이다. 실상은 그냥 오랜만에 샤워한 백수 같은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카힐은 물을 흠뻑 뿌렸다. 제2전쟁이 일어날뻔했지만, 나영웅의 기분이 좋았던 관계로 발발되지 않았다.
이번엔 올백 머리가 된 나영웅을 향해 카힐이 물었다.
“그럼 이번엔 니 이야기나 해봐.”
어느새 비비의 이야기는 뒷전이 되었다. 여전히 떠들고는 있었지만, 아무도 못 알아듣는 걸 알아채고는 조용히 이야기를 멈췄다.
나영웅을 대신해 비비의 말을 몇 개 통역해주자면, [아포칼립스, 꿈, 감염]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건 언젠가 그녀가 다시 말할 것이다.
‘후후. 내 이야기라···.’
나영웅은 큼큼 목을 풀며 탕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의 큰 나뭇잎 하나를 꺾어 탕 위로 떠내 보냈다.
나뭇잎이 마치 배처럼 출렁거리며 앙피를 향해 헤엄쳤다.
카힐과 비비를 의식한 퍼포먼스였다.
“내 인생은 마치 사나운 파도 속 돛단배와 같았다네.”
***
내가 처음으로 이세계의 존재를 알았던 게 벌써 7년 전이라네. 내가 지금 스물둘이니 딱 중학교 시절이군.
우연히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 하나를 발견했지.
그 책의 이름은 무제. 알아듣겠나? 책 제목이 없었다는 말이라네.
본래 도서관 책이라면 대여용 바코드가 붙어있을 텐데 그 책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 표지도 그저 깊디깊은 심연과 같은 검은 색.
나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그 책을 펼쳤지. 그리고는 마주하게 된 거야. 바로, 이 세계를.
책 너머엔 이 세계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이더군. 그건 마치 책처럼 생긴 창문과 같았어.
나는 신비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책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지.
그 순간!
파지직 거리는 전류가 온몸을 뒤덮고는 그대로 기절했네. 이 몸도 견디기 힘든 전류였네.
“..원래 사람은 전류를 못···.”
몇 시간 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홀로 눈을 떳을 때 난 직감했다네.
난 이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나에게 천둥과 같은 힘이 끓어오르고 암흑과도 같은 욕망이 흘러넘쳤지.
나는 평범함을 연기하며 뒤에선 각종 괴물과 악당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야. 잠시만. 네가 살던 곳 존나 평화로운 거 아니었냐?”
그거야 내가 모두를 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너 시발 지금 지어내는 거지.”
아니라네.
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구하고 신과 같은 능력들로 마왕을 잡았지.
“야이씨. 마왕 살아있다니까? 이 새끼 거짓말 쳐 계속! 나 안 들어.”
ㅈ...잠시만. 지금부터 중요한데.
“꺼져.”
***
나영웅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한국의 같은 크루원들은 그래도 흥미진진하게 들어줬었는데.
“...망상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수단일 뿐이에요.”
앙피의 일침을 뒤로하고 이제 슬슬 목욕탕에서 나가기로 했다.
하도 오랫동안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인지 온몸이 퉁퉁 불고 손발이 쭈글쭈글해졌다.
그 때문인지 이르하라에게 단단히 혼이 났다.
“이렇게나 퉁퉁 불면 평상시의 치수를 잴 수 없잖습니까! 더러운 것보다 안 좋습니다!”
“흐엥...”
그래도 여차저차 치수를 다 재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날. 어째서인지 앙피는 숙면을 취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누구의 시야도 공유받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의 시야를 공유받을 예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깊은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앙피는 오랜만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으.. 그래도 몸은 무겁네.’
앙피는 자신을 깔아 누운 카힐을 겨우 밀어내고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그를 따라 하나둘 일어난 앙피 일행은 간단한 아침을 먹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이르하라에게 건네받은 교복으로 갈아입고 왕궁의 로비에 섰다.
막상 교복을 입으니 다들 어려 보였다. 특히 카힐이 10년은 젊어진 듯한 모습이다. 물론 실제론 15살이긴 하지만.
카힐은 긴 치마가 거슬리는지 투덜거렸다. 지금까지 꽉 끼는 짧은 원피스만 입었다 보니 이런 치렁치렁한 치마는 영 불편한 모양이다.
반면 나영웅의 요상한 몸매에 딱 맞는 교복은 대단했다. 20대의 어리숙한 성장도 가리는 교복을 보니 이르하라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긴 한가 보다.
“어머. 벌써 다 준비했니?”
나르여앙이 늦은 아침을 먹고 마중을 나왔다. 앙피의 영향인가 왠지 게을러진 모습이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단 앙피부터 끌어안았다.
“이르하라. 애들 준비는 다 해줬어?”
“네, 여왕님. 여분의 교복과 필요한 준비물들을 가방에 전부 넣었습니다.”
“그래. 다음에 볼 땐 다섯 개의 인장 다 모아오렴. 난 해야 할 게 있어서 이만~.
앙피. 혹시 가기 싫어지면 내 방으로 와. 알았지?”
나르여앙은 앙피에게 볼을 잔뜩 부비적대고는 사라졌다.
그녀 대신 이르하라와 피죠가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나르여앙은 특별히 왕국 마차도 빌려주었는데 굳이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체면을 차리는 이가 앙피 일행 중엔 없었으니까.
왕국 마크가 대놓고 있고 대마법사의 마법도 걸려있는 마차라 동승자가 필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가한 피죠가 검지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절대 이르하라가 바빠서 그가 대신 온 게 아니다.
“그나저나, 자네들 [명문 영웅육성과마왕퇴치그리고가문의재건 아카데미]에 대해선 조금이라도 알고 있나?”
“응. 이름이 거추장스러워.”
“맞아요..”
“그것조차 [명문···. 아카데미]의 실태를 보여주는 거라네. 잘 듣게. 검지까지는 조금 걸리니, 그때까지 내 설명을 해주지.”
“아...”
뭐 이것저것 머리 아픈 설명은 많았지만, 어차피 직접 경험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앙피의 여정은 네번째 손가락으로 접어든다.
가자, 앙피.
명문 영웅육성과마왕···. 뭐시기 아카데미로 출발이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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