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 남자가 갑자기 엉덩···.]
학교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1. 학교 정문과 가장 가까운 본관.
2. 전투 훈련용 경기장.
3. 이론 수업용 3층 건물.
4. 검지 가장 안쪽의 기숙사 세 개가 모인 쉼터.
전학생인 앙피가 쉽게 돌아다니기엔 다소 넓고 복잡한 구조였다. 이는 일외동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매점에서 박스를 사와라!’같은 얼토당토 않은 명령을 내린 것이다. 박스를 파는 곳은 단 한 곳. 그곳을 찾으려면 필히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지리를 익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깊은 뜻 따위 모르는 앙피에겐 그저 ‘무서운 사람의 귀찮은 부탁’이었다. 박스로 집을 지을 정도의 박스 성애자로 생각했다.
그리고 깊은 뜻도 앙피에겐 통하지 않았다.
“어... 그러면 매점은 본관 아니면 쉼터에 있으려나..”
앙피는 본관을 대충 훑어보고는 곧장 쉼터로 향했다. 경기장이나 수업용 건물에 매점을 두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운 좋게도 박스를 파는 매점은 앙피가 향한 쉼터에 있었다.
학교를 전부 둘러보라는 깊은 뜻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쉼터를 돌아다니며 각 기숙사의 환경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뭐, 이것도 앙피가 관심을 가진다면 말이다.
쉼터는 검지의 가장 안쪽에 있었는데 다시 말해 가장 깊은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높은 수압을 견디기 위해 쉼터 주변의 벽은 다른 곳보다 더 두꺼웠다.
그 탓인지 앙피는 쉼터의 공기까지 무겁게 느껴졌다. 단순한 착각일진 몰라도 쉼터가 편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특히 세 기숙사의 중앙엔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바닷속의 호수라니.
그래도 주변이 산책로와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단순히 보면 아름다운 쉼터였다.
앙피가 쉼터에 들어서자 많은 학생이 그를 주목했다. 산책하던 학생, 벤치의 학생, 너나 할 것 없이 전학생 앙피에게 관심이 쏠렸다.
앙피는 쏟아지는 시선이 어지러웠다. 그래서 가끔씩 저도 모르게 중지를 날려버렸다.
“쟤야?”
“맞아. 저 얼빵한 눈. 확실해.”
앙피가 산책로를 따라 걷자 학생들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이미 각 기숙사 대표들과 메이커 학생들이 앙피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덕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망에 가까운 눈빛이 보일 정도였으니.
왕궁에서 온 소환술사 소년.
용사를 꿈꾸는 이들에겐 당연히 탐나는 인재였다.
언젠가 같이 손을 잡고 마왕을 토벌할 동료의 후보로 제격이다.
만약 앙피를 구슬릴 수 있는 자라면 말이다.
앙피에게 마왕을 토벌하자고 하면 앙피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어... 아.... 그... 제가 왜요...?’
인류를 구하는 명예 같은 소리로 그를 설득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저기. 네가 그 앙피지? 친하게 지내자.”
그때 예쁘장한 여학생 하나가 냉큼 앙피에게 말을 걸었다.
앙피가 잘생기진 않았으니 아마 평범한 이유로 접근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역시나 친하게 지내자고 한 건 단순한 사탕발림이었다. 그녀는 앙피 자체엔 관심 없었다. 그녀가 말을 건 이유는 왕궁출신, 소환술사 등 친해져서 써먹을 구실이 많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앙피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있다.
여학생이 머릿속으로 온갖 행복회로를 돌리는 동안 앙피는 그녀의 악수를 무시하고 이미 저 멀리 걸어간 이후였다.
홀로 뻘쭘하게 남겨진 여학생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앙피는 저 멀리 도망갔다.
[길다가 갑자기 여학생이 말 검]은 앙피에게 불편한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도망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못 들은 척 도망가는 것이다.
앙피는 척척 걸어 어느덧 쉼터 입구와 기숙사 중간 지점까지 왔다.
호수를 절반쯤 도니 기숙사가 꽤 가까이 보였다.
‘... 어느 기숙사부터 가야 하지?’
그리고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
“여. 거기 지나가는 학생이여.”
웬 머리가 부스스한 남학생이 앙피를 멈춰 세웠다.
앙피는 당연히 못 들은 척 몸을 틀었지만 그 남학생은 굴하지 않고 계속 쫓아오며 말을 걸었다.
“야. 너. 조그만 친구. 안 들려? 야!”
앙피는 무언가에 깊게 생각하느라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연기를 했다.
아무 반응도 없는 앙피에게 남학생은 태평하게 계속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한번 보자···. 뭐야! 이름이 없네 너?”
남학생은 앙피의 검은 명찰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와! 언네임드다! 와!”
“앙피에요...”
“와! 언네임드! 와!”
남학생은 앙피의 존재에 흥미를 느꼈는지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카메라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반갑다. 언네임드! 난 기러기, 슈 기숙사야. 마음 같아선 당장 인터뷰를 하고 싶지만 지금은 바쁘니까 생략할게. 반갑다!”
기러기의 몰아치는 인사에 앙피는 얼떨결에 인사했다.
“ㅇ.. 안녕하세요.”
그리고 아직 고개를 들기도 전에 기러기는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찰칵!
급하게 고개를 드는 앙피의 일그러진 얼굴이 찍혔다.
“사진은 왜..”
“어. 인터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부탁 하나만 들어줘,”
기러기는 가방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앙피에게 넘겼다.
“ㅇ..아직 들어준다고 안 했는데요..”
“이거 슈 기숙사 대표한테 갖다줘. 중요한 거야 이거.”
“이게 뭔데요...?”
“중요한 거! 그것도 아주 중요한!”
기러기는 그 말만 남기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앙피는 그의 중요하다는 종이 뭉치를 든 채 덩그러니 남겨졌다.
‘... 그냥 호수에 버릴까.’
앙피는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 어차피 매점을 찾으려면 기숙사로 갈 거니까. 겸사겸사 들어주기로 했다.
앙피는 종이 뭉치를 낑낑 들고는 슈 기숙사로 향했다.
커다란 노랑 휘장이 있기도 하고 기숙사 건물 자체가 노란색으로 덕지덕지 치장되어 있어 누가 봐도 슈 기숙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앙피는 슈 기숙사 앞에 도착하자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이 종이 뭉치는 뭘까..?’
종이 뭉치의 맨 위 장엔 아까 그 남학생의 얼굴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 때문에 흥미가 생겼을 리는 없고 중간에 종이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글자가 잘려서 다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이 남자가 갑자기 엉덩···.]이라고 적혀있다. 무시하기엔 너무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하지만 전달해달라 부탁한 종이의 내용을 제멋대로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전달해야 할 우편을 중간에 뜯어보는 것을 어떻게 참겠는가.
앙피는 삐져나온 종이를 쓱 꺼내 들었다.
[이 남자가 갑자기 엉덩이를 흔든 이유]
종이는 다름 아닌 기사였다. 기러기가 손수 작성한 가십거리다.
그리고 세상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 내용은 단순히 춤을 추는 남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흥미가 팍 식은 앙피는 해당 기사를 호수에 던져버리고 기숙사의 문을 열었다.
슈 기숙사 내부 역시도 노란 벽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가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흔한 의자 하나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리고 복도도 전부 구불구불하게 생겼다. 모퉁이를 둥글게 깎아 각진 곳이 전혀 없었다. 이는 전부 슈 기숙사생들의 급한 성격이 반영된 것이었다.
어쨌든 슈 기숙사는 전체적으로 추상 미술을 현실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 슈 대표가 어딨으려나.’
앙피는 휑한 기숙사 안을 둘러봤다.
슈 대표인 파시는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낀 특이한 모습이기에 눈에 띌 게 뻔했다.
하지만 애초에 기숙사 입구로 오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앙피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천장이 뻥 뚫린 라운지가 나왔다. 다행히 학생도 몇몇 보였다.
학생들은 소파에 정갈하게 앉아 토론을 하고 있었다.
“아니지. 결국 배를 저어서 호수를 가로지르는 편이 빠르다니까?”
“아냐 아냐. 배를 탈 바에 뛰어서 돌아가는 게 빠르다니까?”
학생들은 쉼터를 나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슈 기숙사생들은 하나같이 무엇이든 빨리, 무엇이든 효율적인 방법을 원했다.
“그건 네가 배를 느리게 저어서 그런거고.”
“그건 네 뛰는 게 느려서 그런거고,”
파시의 행방을 물어보려던 앙피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렇게나 시끄러운 토론 사이로 끼어들 용기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앙피를 불러세웠다.
“야. 거기 너 이리 와봐.”
“ㅈ..저요?”
“아! 답답하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앙피는 종이 뭉치가 흩날리지 않게 조심히 뛰어갔다.
“네가 말해봐. 호수를 건너는 방법은 뭐가 더 빨라?”
“역시 배를 타고 가로지르는 거지!”
“언제 배를 준비해! 당연히 뛰어서 돌아가는 거 아냐!?”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앙피의 답변을 요구하며 으르렁댔다.
“... 그냥 호수에 다리를 놓으면 안 돼요..?”
“이 멍청아! 그럴 시간이 어딨냐!”
“...... 그럼 그냥 뛰어서 건너세요.”
어차피 본인과 상관없는 토론에 앙피는 성심성의껏 답해줄 필요를 못 느꼈다.
“호수 위를 뛰라고? 사람이 그 정도 점프력을 어떻게 만들어!”
“그럼 물 위를 뛰어요.”
앙피는 빨리 이 쓸데없는 토론을 끝내고 파시의 위치나 물어볼 생각이었다.
“오. 그건 가능할지도?”
“그래. 발 하나가 물에 가라앉기 전에 다른 쪽 발을 들어 올리면 돼!”
슈 기숙사생들은 이런 멍청한 방법이 뭐가 좋은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무식한 줄 알았다면 그냥 ‘호수를 다 마셔서 없애세요.’같은 소리나 할 걸 그랬다.
“그나저나 넌 처음 보는데 누구냐?”
“전학 왔어요... 지금은 파시 님을 찾고 있어요.”
앙피는 자세한 자기소개 따위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했다.
하지만 이 아카데미에서 전학생은 항상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어느 기숙사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급이 뭐냐.
이곳에 가장 높은 계급인 메이커인 학생은 고작 10명 남짓이다.
나머지는 전부 평민과 같은 설지거. 가장 낮은 계급인 개백은 애초에 아카데미에 올 수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거의 모든 학생은 설지거 계급이었고 전학생으로 메이커가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너 설마 메이커는 아니지?”
“네..”
“휴. 그럼 됐고. 어디서 왔냐 그럼? 설지거 출신이면 어차피 우리 동네 친구였을 거 같은데?”
“아... 왕궁에서요...?”
앙피는 시발 마을에서 왔다고 하려다가 급하게 틀었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저들이 말을 들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슈 기숙사생들은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왕궁 출신(?)인 앙피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끄럽던 녀석들이 조용해지다니, 역시 계급에 대한 태도가 뼈에 새겨진 모양이다.
설설 기는 학생들 덕에 앙피는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파시는 현재 수업 중이라고 한다.
정식 수업은 아니고 기숙사마다 저마다 특별수업을 진행한다.
‘내 수업은 매점 심부름이야...?’
글쎄, 매점 심부름이 아니라 학교 지리 익히기였다니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앙피는 터덜터덜 파시를 찾아 떠났다.
- 작가의말
선호작과 댓글, 추천 감사합니다.
+) 연참대전 시작이네요. 유후. 무사히 끝마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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