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무릎을 굽히지 않고 제자리에서 뛰기
남도의 말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산책로를 지나가던 아카데미생들이 빤히 바라보고 갔다.
‘이 사람은 동아리가 뭔지 모르는구나...’
앙피는 잠시 쿠케 고기를 앞니로 캉캉 씹으며 생각했다.
“금방 지었죠.”
“아.. 그렇지 않소. 예전에 지었다네.”
‘금방 만들었네.’
“어쨌든 그대는 무릎을 굽히지 않고 제자리에서 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소!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소!?”
“제가 그런 거에... 재능이요...?”
“그렇소. 그 작은 체구. 근육 하나 없이 가벼운 몸. 그대라면 분명 세계 제일의 무릎을 굽히지 않고 제자리에서 뛰는 사람이 될 것이오!”
남도가 앙피의 몸 여기저기를 꾹꾹 만졌다. 솔직히 아직도 무슨 동아리인지 이해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앙피는 관심이 생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오랫동안 혼자 지낸 탓에 판단력이 흐려진 게 분명하다.
“좋소. 진작에 좀 받지, 사람 좃빠지게 질문을 이렇게나 해대고···.”
앙피는 중얼거리는 남도를 따라 다시 별관으로 갔다.
이전엔 칙칙한 교실만 가득 있던 별관이 이제는 동아리실도 잔뜩 생겼다. 물론 그게 뭔지 모르는 용사 아카데미생들은 교실과 다를 바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남도는 별관 가장 구석의 동아리실로 앙피를 데려갔다.
“여기가 우리 [지존 마법사들의 영웅일대기를 위한 준비생 모임]의 동아리실이오.”
이름이 하도 긴 탓에 동아리실엔 ‘지존 마’까지만 적혀있었다. 앙피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쿠케 가슴살을 손에 덜렁 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꺅. 남도 왔어?”
안에는 남도와 마찬가지로 호리호리한 여자 하나가 있었다. 얼굴이 동글동글하니 귀엽게 생긴 그녀는 교복도 단정히 입고 있었다.
“옆에는 누구야?”
“우리 동아리의 새 부원이오.”
“뭐? 갑자기?”
그녀는 맹한 앙피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앙피 손에 들린 쿠케 가슴살을 낚아챘다.
앙피는 그녀가 주먹을 휘두르는 줄 알고 잔뜩 쫄아 쿠케 가슴살을 순순히 넘겨주었다. 어차피 딱딱해서 먹지도 못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단숨에 쿠케 가슴살을 씹어 먹었다.
“쩝쩝- 이 맛없는 건 왜 들고 있냐. 반가워. 난 우리앙이야.”
우리앙이란 여학생이 저 딱딱한 쿠케 고기를 으적으적 먹으며 말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앙피는 뺏긴 게 아쉽다고 느꼈다.
‘근데 저거 침 잔뜩 묻었는데...’
“전 앙피에요..”
“그래그래. 우리 지존마에 온 걸 환영해.”
여학생이 넉살 좋게 인사했다. 왜 이런 이상한 동아리에 들어왔는지 의심될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근데.. 지존 마법사들의 용사데뷔를 위한 준비생 모임 아니었어요...?”
“아? 그런 이름이었어? 동아리실 앞에는 지존마라고 적혀있길래.”
아무래도 우리앙도 동아리라는 게 뭔지 모르고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용사데뷔가 아니라 영웅일대기라네.”
‘아. 맞다 그랬지...?’
“아... 발음이 안 좋으셔서 잘못 들었나 봐요...”
앙피가 태연히 책임을 전가했다.
“외우기 힘들면 그냥 지존마라 부르기로 하지. 그보다 우리앙. 우리 동아리가 할 활동이 정해졌소.”
“... 역시 아까 지은···.”
“꺅 정말? 뭔데뭔데?”
“무릎을 굽히지 않고 제자리에서 뛰기.”
남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동아리실엔 잠깐의 정적이 돌았다.
“ㅇ..와. 멋지다~”
‘동아리는 원래 이런 걸 하나?’
우리앙도 동아리가 뭔지 잘 몰랐기에 어찌어찌 받아들이는 추세였다.
하지만 정적은 또 찾아왔다.
남도와 우리앙이 아무 말도 없이 빤히 서 있었다. 원래라면 새 부원이 대화의 물꼬라도 트려는 시도라도 했을 텐데 하필 새 부원이 앙피였다.
그래서 앙피 대신 이 정적을 설명하자면, 뭘 해야 할지 몰라서다.
동아리 활동이 정해지기 전까지 동아리실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야 남도는 기숙사 대표여서 강제로 동아리를 만들어야 했고 우리앙은 남도만 보고 가입했으니까.
“우리 이제 뭐 해? 아까 그 발꿈치..? 그거 하면 되나?”
결국 우리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앙피, 자네가 동아리에 대해 좀 아는 듯한데 의견 없소?”
“아.... 사실 저도 잘 몰라서요... 대신 전문가를 알아요..!”
“전문가? 동아리에도 전문가가 있어? 누군데?”
잠시 후 앙피가 친숙한 얼굴 하나를 데려왔다.
“후후후. 반갑군.”
미세하게 살이 더 빠진 나영웅이었다.
“아...”
앙피가 나영웅을 데려오자 우리앙이 떨떠름해 보였다. 전문가라는 기대에는 충족하지 못한 비주얼인가 보다.
“나영웅 님. 한국에서 동아리도 했다고 했죠..?”
“암. 이 몸은 밴드 동아리였다네.”
놀랍게도 정말 드럼 담당이었다. 공연 경력은 전혀 없긴 하지만.
“아 일단 소개를.... 해야 하나...?”
앙피가 셋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됐네. 남도 군과 우리앙 양 아닌가. 같은 기숙사라 다 아는 사이네.”
불편한 인사 타임은 생략이구나. 앙피는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래서. 동아리는 뭘 해야 하냐고?”
“그렇소. 앙피가 그대가 전문가라고 했소. 전문가가 아니라 좆문가면 당장 내쫓을 줄 아시오.”
“후후후. 전문가라. 좋은 호칭이군.”
나영웅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동아리 활동. 분명 한국에도 동아리는 많았다. 하지만 뭐랄까. 한국의 동아리는 이상과는 조금 달랐다.
나영웅 그도 밴드 애니메이션을 보고 기세 좋게 밴드 동아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연은커녕 연습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열심히 부원들을 설득해봐도 돌아오는 건
‘성적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였다.
나영웅은 그런 동아리 활동을 이런 이세계에서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조금 더 만화다운, 어쩌면 나영웅이 정말로 원했던 동아리 활동을 알려주고자 했다.
“우선 동아리명이 먼저겠군. 후후후. 역시 동아리명은 여러 의미가 담기게···.”
“그거 이미 지존마로 결정 났어.”
“그럼 직책을 정해야겠군!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일반부원을 나눈다!”
나영웅이 평소보다 많이 들떠 보였다.
아마 애니메이션으로만 보던 상황을 직접 겪어서 신이 난 모양이다.
“회장은 당연히 우리 남도지.”
우리앙이 이때다 싶었는지 남도에게 찰싹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남도도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높아 보이는 회장직을 탐냈다.
“그렇소!”
“그렇다면 부회장이 문제군.”
“ㅈ... 전 하기 싫어요...”
앙피는 당연하게도 높은 지위는 회피했다. 책임을 지는 일엔 자신이 없었으니까. 근데 그래봤자 고작 3명이 전부인 동아리 주제에.
우리앙도 부회장은 탐탁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그런 높은 직책은 외모도 중요하다고. 자신은 지금 살이 좀 쪄서 안 된다고 한다. 제삼자로선 그냥 귀여운 볼살 수준이었지만.
“난 싫어. 볼살만 좀 빼면 그때 할게.”
“... 살 뺀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는데...”
앙피가 살이 조금 빠진 나영웅을 슬쩍 쳐다봤다.
“그럼 다른 부원들을 불러보게. 그들 중에 시키면 되겠군.”
설마 나영웅도 동아리 부원이 고작 3명밖에 안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동아리 부원 부족으로 폐부 위기. 같은 클리셰는 없다는 소린가?’
“후후후. 어쩔 수 없나. 원한다면 이 몸이 특별히 부회장을 맡아주지.”
“이예~ 부회장~ 멋.. 지진 않지만 부회장 최고~”
다음으로는 동아리 부실 꾸미기였다.
지금처럼 평범한 교실과 같으면 절대 동아리실이 아니라는 나영웅의 강력한 주장에 동아리실을 꾸미기 시작했다.
“동아리 이름이 뭐라고 했는가?”
“지존마. [지존 마법사들의 영웅일대기를 위한 준비생 모임]이라는 뜻이오.”
“그렇다면 마법, 영웅의 느낌이 팍팍 나게 판타지스럽게 꾸미면 되겠군.”
“판타지가 무슨 뜻이오?”
“너네.”
“예?”
나영웅의 멋진 지휘로 동아리실은 금방 특색이 잡혔다.
창문엔 암막 커튼을 쳐 바깥과 단절시켰다. 그리고 물약, 지팡이, 로브(교복 망토)같이 마법의 느낌이 팍팍 나는 소품을 잔뜩 진열했다.
판타지 느낌이 잘 나는 그림(교장실에서 가져왔다)도 걸어주고 인테리어의 꽃인 조명도 잘 달아준다.
마지막으로 책상도 마법진 느낌이 나게 중앙에 동그랗게 배치해주면 완성이다.
동아리실은 판타지 오타쿠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잘 탈바꿈했다.
완성된 동아리실에 나영웅은 눈물을 머금었다.
“후흐흑. 아름다운 동아리실이군.”
“그런가.. 시발 마을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찐하게 감동한 나영웅과 달리 원래 이런 것만 보고 자란 나머지 셋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다른 동아리실보다 특별해진 건 확실하니 자부심은 생겼다.
“조금 힘들긴 한데 완성하니 좋긴 하오! 더 할 건 없소?”
“깃발. 깃발을 만들지.”
나영웅도 이건 조금 오바인가 싶었지만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모임을 위한 상징적인 깃발. 오타쿠가 이걸 어떻게 참아.
깃발은 교장의 허락을 받고 가져와야 한다고 하여 남도가 직접 교장을 만나러 갔다.
그 사이 나머지 셋은 동그랗게 모인 책상에 둘러앉았다.
“그나저나 우리앙 양은 남도 군 어디가 좋은가?”
나영웅은 ‘동아리 부원 간의 사랑’이라는 좋은 소재를 대화 주제로 던졌다.
사실 우리앙이 남도를 졸졸 쫓아다니는 건 헤라 기숙사생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얼굴...?”
“에이. 그런 기생오라비 내 타입 아니야.”
우리앙이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았다. 역시 아직 젊어서인지 연애와 남자에 관심이 많았다.
‘얼굴이 아니라면...’
앙피는 남도를 떠올려 봤다. 하지만 얼굴 빼면 뭐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욕설이 취향인 건가?
앙피랑 나영웅이 더 질문해주지 않자 우리앙이 입이 간지러운지 먼저 말을 했다. 그녀는 두 볼을 발그레 밝히며 말했다.
“몸이야 몸.”
“역시 그렇군. 남도 군의 몸은 대단하긴 하지.”
“몸...?”
앙피는 자신의 몸을 빤히 바라봤다. 남도가 본인과 다를 바 없지 않냐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남도의 하늘하늘한 옷 너머엔 엄청난 게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남도가 깃발을 이고 들어왔다.
10M는 되어 보이는 깃발을 거뜬히 들고 있는 남도의 윗옷이 살짝 풀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단단하다 못해 딱딱해 보이는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남도가 대표로 있는 헤라 기숙사는 ‘힘’의 기숙사였단 걸. 실압근을 넘어선 실전 봉인 근육 수준이었다.
괴랄한 근육을 숨기고 있던 남도는 여전히 기생오라비 같은 웃음을 지으며 깃발을 내려놨다.
그렇게 지존마의 깃발의 디자인을 짜고 그림을 그려나가며 나영웅의 망상은 최대를 찍었다.
“그래. 이 깃발이 아카데미 최정상에 걸리는 걸세! 곧 열리는 축제에도 부스를 열고 방학이 되면 동아리 여행도 가고!”
나영웅은 잔뜩 흥분한 채 깃발을 끌어안았다. 그가 고대하던 동아리의 꿈이 이뤄지는 것만 같았다.
“맞다. 그러고 보니 무슨 동아리인지 안 물어봤군. 지존마는 뭘 하는 동아리인가?”
올 게 와버렸다.
“무릎을 굽히지 않고 제자리에서 뛰기.”
“...”
그렇게 나영웅은 동아리를 떠났다. 이때까지 보지 못한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떠나며 비어버린 부회장 자리는 자연스레 더 고참인 우리앙이 차지했다.
덕분에 지존마의 일반부원은 앙피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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