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흑막이 칼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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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dos
작품등록일 :
2023.11.29 17:12
최근연재일 :
2024.01.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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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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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각비사(1)

DUMMY

치렁치렁한 산발.

강철로 벼린 듯한 날카로운 눈빛.


신전흥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어리지만, 윗줄의 고수가 확실하다. 그리고 젊은 고수는 이쪽에 명백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설마 고죽방의······?’


신전흥이 노심초사하며 섭선을 꺼내 들려는 찰나, 안유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신 대협, 괜찮습니다.”


안유가 마부석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검수를 향해 휘적휘적 다가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입니다. 혈랑.”


검수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너,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그래, 오랜만이지. 한나절은 족히 지났으니까.”

“간밤에는 무탈하셨습니까?”

“되려 이쪽이 묻고 싶군. 뭐? 죽어주셔야겠습니다? 난 네놈이 죽어버린 줄 알았다! 여태껏 여기서 기다리면서 말이다!”

“작별이 여간 어렵지 않더군요. 또 사내로서 약조를 지켜야 했던지라······. 우선 마차에 오르시죠. 아침 공기가 차갑습니다.”

“이······.”


혈랑은 툴툴거리면서도 고분고분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는 얼마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

“······.”


안유가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두 분, 계속 이렇게 계실 겁니까? 이참에 통성명이라도 하시지요.”


신전흥이 두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소. 신전흥이오. 유유선이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고 있소이다.”

“혈랑 위지현.”

“······.”


적막한 분위기.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안유가 운을 띄워야 할 것 같았다.


“혈랑 위지현 대협은 아주 대단한 검수이십니다. 무려, 그 고죽방주님의 사제이시지요.”

“······뭐? 그럼 고죽방의······.”

“혈랑. 신전흥 대협은 깨나 친숙하시지 않습니까?”


혈랑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숱하게 들었지. 기필코 ‘모셔와야’ 한다고, 사형과 부방주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했으니까.”


쿠구구구!


신전흥이 공력을 끌어올리며 기세를 흩뿌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덧 새하얀 섭선이 들려 있었다.


“······한 번쯤 묻고 싶었소. 대체 무슨 연유로 ‘우리’를 쫓는지 말이야.”


위지현도 기세를 끌어올리며 검병(劍柄)을 움켜쥐었다.


“‘우리’라. 흑의협과 당신만을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군. 사형의 짐작대로야. 강호지이(江湖志異)의 나머지 권(卷)은 필시 어떤 세력이······.”


짝!


안유가 손뼉을 마주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거기까지.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악연은 대정산에 전부 묻어놓고 오지 않았습니까.”

“악연은 모르겠고 시체는 무더기로 묻은 기억이 있군.”

“······부디 주 공자가 그 부근을 파헤치지 않길 바랄 뿐이네.”

“아무튼, 그렇게 돼서 우린 한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니 가히 큰일을 도모해볼 만합니다.”


신전흥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큰일······이라니? 그럼 지금까지는 대체 뭐였나?”

“작은 일이었지요. 자, 들어보십시오.”


안유가 신전흥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 대협의 목적은 세 가지. 고죽방의 이목을 집중시켜 다른 동료들의 안위를 보장하고, 가능하다면 추격의 내막을 파악한 뒤, 목련서각으로 돌아가는 것. 맞습니까?”

“······그렇지.”


이번에는 위지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혈랑의 목적은 두 가지. 고죽방의, 사형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고 스승님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맞습니까?”

“내 직접 확인할 요량이니······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위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그런데 왜 이쪽은 대협이고 나는 혈랑이냐? 나이와 배분을 따져보면······.”

“적당한 거리감이라고나 할까요. 같은 검류를 익혔으나 사제는 아니고, 남이라 하기에는 손발이 잘 맞으니······ 참 애매합니다.”

“아니······.”


짝!


안유가 또다시 손뼉을 마주쳤다.


“그리고 저는 오랜 연으로 인해 두 분을 돕고자 합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 셋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겠더군요.”

“······괜히 불안해지는군.”

“흑의협,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안유의 미소가 짙어졌다.


“고죽방. 고죽방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입니다. 꽁꽁 싸매고, 싸맨 채로 흉계를 꾸미니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

“······.”

“부숴버립시다.”


신전흥과 위지현의 눈이 마주쳤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아예 부숴버리면 저간의 내막이 드러나겠지요. 걱정거리도 깔끔하게 사라지고······. 제가 배를 몰겠습니다. 함께 끝까지 가보시죠.”


마차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단호한 출발이었다.


***


‘신전흥은 몰라도 위지현이 조금 의외로군. 생각보다 싹싹하잖아?’


마차를 몰던 안유가 빙그레 웃었다.


언젠가부터 뒤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골목 끝에선 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소. 그자는 빙글거리며 내가 함정에 빠졌노라고 말하더군.”

“밑도 끝도 없군. 용케도 믿었어.”

“반쯤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소.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지. ‘우리’에 대해 너무나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신전흥과 위지현.

두 사람은 안유를 씹어대며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쌓아가고 있었다.


안유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다.


‘기왕 한배를 탔으니 마음을 터놓고 지내면 더 좋겠지. 회귀 전에는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이 지금은, 하하. 썩 보기 좋은데.’


“내가 몇 번이나 전음을 보냈는데도 흑의협은 묵묵부답이더군. 어찌나 답답하던지······.”

“원래 그렇소.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요.”


대화는 이어질수록, 매끄러워졌다.


위지현은 다소 까칠하면서도 딱딱한 사내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이기 나름. 위지현은 또한 고고하면서도 솔직한 사내이기도 했다.


신전흥은 문사였으나 마냥 책벌레보다는 이렇듯 호방한 사내를 더 좋아했다.


위지현 또한 견문이 넓고 넉살 좋게 다가오는 신전흥에게 적잖은 호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곧 내밀한 속사정까지 터놓고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스승님께선 그렇게 사라지셨소. 너무나도 갑작스러웠지. 나와 사형은 한동안 기다리다가 하산한 다음 강호를 주유하기 시작했소. 그러다가 장사 땅에서······.”


위지현의 말투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평소 사형과 부방주 이외의 사람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변화였다.


신전흥은 변죽을 울리며, 함께 침음하며 이야기를 듣다가 담담히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우리’는, 내가 몸담은 곳은 목련서각(木蓮書閣)이라고 하오.”

“목련서각? 과문하여 들어본 적은 없지만······ 평범한 책방은 아닌 것 같군.”

“우리는 기서(奇書)를 보관하고 또 모으고 있소. 아주 오랫동안, 비밀리에. 그 역사가 백 년 가까이 되었지.”

“······백 년. 까마득하군. 그 정마대전이 백 년쯤 전의 일이니······.”

“바로 그 정마대전이 목련서각이 발족한 이유요.”


신전흥의 얼굴에 어떤 결의 같은 것이 어렸다.


오래된 이야기를 곱씹으며 새삼 자신의 숙원과 사명을 상기한 탓이었다.


한낱 담소에 그칠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위지현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반면 안유는 언제나처럼 싱긋 웃고만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그로서는 비사(祕史) 아닌 비사였다.


“다들 알다시피 백 년 전의 정마대전은 중원 무림의 승리로 끝났소. 그러나 온전한 승리는 아니었지.”

“누군가가 그러더군. 중원 무림은 이긴 게 아니라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마교의 무공은 중원의 무학과 궤를 달리한다고 하던가. 기괴하면서 지극히 패도적이라 많은 협객이 초개처럼 죽어 나갔다지. 전대 고수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확실히 우리가 졌을 것이오.”


신전흥이 침음하며 말을 이었다.


“살아남았을 뿐이라.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오. 당대의 영웅들 또한 그리 생각했겠지. 운이 좋았다,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했으나 먼 훗날의 일은 두려워했소.”

“······.”

“언젠가 마교가 부흥하여 또다시 쳐들어왔을 때, 절치부심한 마교를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중원 무림이 존속할 수 있을까? 정마대전을 거치며 전망은 점차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었소.”

“······.”

“전황이 나아져도 상황은 궁핍해져만 갔소. 많은 비급이 유실되고 문파의 허리나 마찬가지인 중진 고수들이 쓸려나가니 수많은 무맥(武脈)이 끊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오. 전통과 무학의 단절, 선배 고수들은 이것을 가장 경계했소. 그래서 대전의 종반 무렵, 결심한 거요.”

“설마.”


신전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극비리에 가능한 많은 비급을, 가능한 많은 무학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소. 각 문파의 절학을 비롯해 후대에 전해져야 할 모든 무공을······. 설령 중원 무림이 무너지더라도, 마교가 득세하게 되더라도 무맥이 이어지는 한 중원 무림은 끝난 게 아니오.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남겨둔 안배인 셈이지.”


위지현의 얼굴에 은은한 경악이 어렸다.


“그런 비사가······ 있었을 줄이야.”

“당대 무림맹의 수뇌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던 계획이었소. 맹주와 그의 수하들을 비롯해 몇몇 믿을 만한 고수들만이 동참했지.”

“내 이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소.”

“그러리라 믿소. 선배 고수들도 그리했겠지. 그러나······.”


신전흥이 침중한 눈빛으로 위지현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영원한 비밀은 없는 듯싶소.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그러하군.”

“그건 무슨 말이오?”

“고죽방의 함정은 필요 이상으로 넓고 깊었소. 고작 강호지이 한 권을 얻기 위해서라기엔 너무나도······.”

“······.”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사형은, 고죽방주는 비단 강호지이만이 목적이 아닐지도 모르겠소. 어쨌든 우리 서각은 당신의 스승님과는 전혀 무관하오.”

“······음, 확실히 그런 것 같군. 듣고 보니 나 또한 의심이 깊어지기만 할 뿐이오.”


위지현이 검병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스승님의 실종에, 사형의 갑작스러운 변모······ 역시 사형 주위를 얼쩡거리는 그자들을 족쳐봐야 하는 건가.”

“그자들?”

“찾아오는 건 한 놈뿐이지만 절대 일개 개인은 아니오.”


위지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고죽방을 결성하기 전부터, 아마도 하산 직후로 기억하오, 그자가 찾아와 막대한 자금과 정보를 대기 시작했소. 산중에서 검만 휘두르던 사형이 대체 무슨 기반이 있었겠소. 그 수상하기 짝이 없는 기반을 바탕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게지.”


꽈득.


위지현이 검병을 세게 붙잡았다.


“밀월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소. 당신들이 포위망을 돌파한 후부터는 더욱 뻔질나게 드나들더군.”

“그자는 어떤 사람이오?”

“아무것도 모르오. 나이도, 무공 수위도, 내력도, 그뿐 아니라 용모조차도······. 놈은 항상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소. 꼭 누구처럼······.”


잠자코 듣고 있던 안유가 고개를 돌려보며 말했다.


“가면이라. 참 음침한 취향이군요.”

“······흑의협.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복면과 가면은 다르지요. 복면은 비밀스럽지만 가면은 어딘지 음험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나 수상한 사람이요, 전력으로 그렇게 말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대체 무슨 차이······.”

“다릅니다. 확실히.”


위지현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도무지 말재간으로는 저놈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찌 됐건.”


위지현이 품속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소. 한번 사귀어 봄 직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시오.”

“선물?”


신전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짝 가늘어졌던 눈은 이내 화등잔만큼이나 커졌다.


“우, 우와아아앗······?”


신전흥은 위지현의 품속에서 나온 물건을 보고 펄쩍 뛰어올랐다. 위지현이 보란 듯이 안유를 노려보았다.


“누구 덕분에 땀 좀 흘리긴 했지만, 그저 헛일은 아니었군.”

“이, 이, 이, 이건······?”

“부방주가 고이 품고 있길래 혹시 몰라 챙겨놨소.”


그것은 고색창연한 한 권의 기서였다. 겉장에는 웅혼한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강호지이(江湖志異).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바로 그 서책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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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불귀산장(2) 24.01.01 475 1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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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각비사(3) +1 23.12.29 626 12 13쪽
24 서각비사(2) 23.12.28 620 16 13쪽
» 서각비사(1) +1 23.12.27 697 10 13쪽
22 일망타진(5) +1 23.12.26 691 12 16쪽
21 일망타진(4) 23.12.25 679 10 13쪽
20 일망타진(3) 23.12.22 709 13 13쪽
19 일망타진(2) 23.12.21 695 12 13쪽
18 일망타진(1) 23.12.20 712 13 13쪽
17 대호채의 기연(5) 23.12.19 727 19 14쪽
16 대호채의 기연(4) 23.12.18 684 14 13쪽
15 대호채의 기연(3) 23.12.15 694 15 13쪽
14 대호채의 기연(2) +1 23.12.14 754 14 13쪽
13 대호채의 기연(1) 23.12.13 776 14 12쪽
12 백학무관(5) 23.12.12 717 15 13쪽
11 백학무관(4) 23.12.11 732 10 13쪽
10 백학무관(3) 23.12.08 755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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