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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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틀
작품등록일 :
2024.03.0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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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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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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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책

DUMMY

“출판사는 협동조합 시스템이고, 독립 출판의 개념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출판사의 규모를 키우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정창식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 아래에 머물 거라는 대답이었다. 그의 선의에 이 정도 보답은 해야 한다.


“작가의 경제 규모가 커져야 한다. 그게 우리의 목표고요.”


임프린트 개념의 계열사.

독립된 경영이라 연 매출 기준치도 없다.


“그런데 이미 넘긴 모양새입니다. 만약 기준치가 있다면 말이에요.”

“정창식 대표님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박용구의 지분을 올렸고, 정종현은 번역료에 약간의 보너스가 전부였는데 인센티브를 준다.

거기에 수필 원고를 준 현이숙에겐 원고료를 주었고, 섭섭지 않게 보너스를 주었다. 그 또한 억대다. 그렇게 주고도 회사에 50억이 남았다고 했다.


물론, 이건 매우 많이, 엄청 많이 팔렸기 때문에 가능한 액수다.

3쇄 정도로 끝났다면 해외에서 들어올 돈은 제로다. 그러면 번역료에 박용구가 받았던 계약 성사 건당 금액이 훨씬 더 유용한 돈이 된다. 그러니 이건 매우 특수한 경우다.

이렇게까지 잘 될 줄 몰랐고.


“이건 워낙 단위 수가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출판계의 반발이 예상되는데요.”


나는 여기서 현이숙과 홍선화를 다시 예로 들었다. 아직 정산되지 않은 나조희의 수필집은 예를 들 수 없어서 뺐다.


계산된 숫자와 판매 부수를 들은 기자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시집이 1쇄에서 끝나는 게 90%이고, 소설 또한 2쇄를 다 팔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팔리는 책은 10% 정도고요.”

“현이숙 시인의 시를 심준구 작가님이 열몇 편을 버리셨어요. 들어갈 자리 없는 시는 버리고, 새로 쓰라고 하셨죠.”

“어머······, 현이숙 님의 시를요?”

“우리는 팔리는 책 10%를 제작하기로 한 겁니다. 등단은 절대 만능이 아닙니다. 등단 후에 작가들은 견제받지 않습니다. 등단하기 위해 한 작품을 서른 번도 넘게 고치면서 등단 후엔 제 손 떠난 작품은 비평가의 몫으로 넘겨 주례사 비평 줄줄이 받아서 출판하죠.”


손 기자는 이제야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아차린 듯했다. 한 줌 권력을 쥐고 창작에 게으르거나 치열하게 임하지 않는 이들은 각성하라는 뜻.


“언제나 팔리는 책 10%는 있어 왔고, 그 책들을 낼 거라는 뜻인데. 그 원고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나요?”


손미강 기자는 불가능한 게 아니냐는 투로 물었다.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표정에 기대어 말의 수위를 높였다.


“스터디하면 됩니다. 재미있나? 이야기가 완성됐나? 주인공이 매력적인가? 문장이 느슨하진 않나? 시는 행갈이를 제대로 한 건가? 리듬감을 잃진 않았나? 산문시의 경우엔 장황하진 않나? 우리는 등단 10년이건 20년이건 독자의 눈으로 읽습니다. 꼭꼭 씹어 먹는 거죠.”

“현이숙 시인님이 그걸 받아들이셨군요.”


기자는 뒷이야기에 눈을 빛내며 물었다.


“홍선화 시인도 받아들이셨고, 나조희 시인님이 수필을 쓰셨는데요, 에세이집 처음 넘긴 원고에서 50%를 버리고 새로 쓰셨습니다. 새로 쓴 거에서 다시 원고를 몇 개 버렸고, 몇 개는 수정했습니다. 안 팔리면 죽여 버릴 거라며 고치셨는데요, 고친 원고를 책으로 올린 걸 보고는 고개 끄덕이셨습니다. 그 책이 지금 에세이 부문 1위입니다. 서점에 깔린 지 열흘 약간 넘었는데 말이죠.”


대 작가들이 수정한다.

주례사 비평을 거절한다.

작가들의 경제 파이를 키워서 작품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사실 이게 유토피아인데.


작가가 넘기는 원고에 출판사 편집팀은 고맙습니다. 하며 넙죽 받아서 출판해 왔다. 주례사 비평으로 원고의 빈틈을 메우면서.

그래서 안 팔리는 것이다.

시 원고만 해도 몇 개는 좋고, 몇 개는 힘들고, 몇 개는 스킵한다. 소설은 읽다가 지루한 구간에 들어가면 훌쩍 페이지를 넘긴다. 아니면 그 부분에서 책장을 덮는다.


그런 상태로 출간하지 말자는 거지.

견제받아서 독자 중심의 책으로 만들자는 거지. 결국 책을 사서 읽을 사람은 편집부가 아니라 독자들이니까.


주례사 비평으로 아무리 원고를 포장해 놓아도 독자들은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는다. 아니, 주례사 비평조차 스킵한다.

문학상엔 거품이 껴있어도 상 받은 거란 말에 읽어준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니까, 한 권 읽었을 때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은 위안을 받는다. 해서 재미없어도 읽는다.

아, 이런 게 상 받는구나, 하면서.


정말 재미있어서 읽는 독서는 번역 소설에서 이루어진다. 신간 안내만 뜨면 오픈런이 이루어지는 작가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해서 우리는 추리, SF, 판타지, 무협, 미스터리, 로맨스까지 전 장르를 문학의 카테고리에 넣기로 했다.


“책 만 권을 판 건 똑같은데, 받는 돈의 차이는 다르군요.”

“과정이 다르니까요. 우리는 견제받고, 귀를 열어둔 작가와만 작업합니다. 여러 차례 고칠 땐 정말 싸우기도 했거든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이건 고치면 안 된다, 버리면 안 된다, 사정도 했고요.”

“결과가 좋으니 다 좋지만, 안 팔리는 작가는 어떡합니까? 팔릴 거라고 확신하고 냈는데 안 팔릴 수도 있습니다. 독자들의 선택은 약속된 게 아니니까요.”

“네. 우리가 보는 시각과 독자들의 선택이 매번 맞아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당연히요.”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재미있다고 판단했고, 좋은 원고라고 판단했는데도 안 팔린다.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럴 땐 왜 안 팔렸는지 우리는 분석할 거고, 그 분석을 놓고 다음 원고를 진행할 겁니다.”


물론 창작 지원금을 회사 자체에서 줄 계획이지만 이걸 언론에 말할 이유란 없다.


“안 팔릴 줄 알면서 이건 좋은 책이니까 만든다. 저희는 그렇게 안 할 겁니다. 팔리는 책을 만듦으로써 작가들에게 인세 요율을 계속 올릴 예정입니다.”

“이 인터뷰의 여파는 꽤 셀 듯합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잘 써주세요. 아참 그리고요.”


나는 신춘문예 당선자 중에서 정형문의 연락처를 물었다.

그의 비평이 눈에 들어왔다고. 함께 일해 보고 싶다고, 제안을 바로 넣고 싶다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기자는 바로 담당 기자에게 전화하더니 그의 연락처를 넘겨주었다.


“신인이 등단하자마자 캐스팅되는군요.”

“잘 쓰면 눈에 띄는 거니까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인터뷰 중간에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그 이름을 보고는 안 받을 수 없었다.


“네, 선생님!”


방원선이 전화를 걸어왔다.


[내 원고는 늙었나? 안 쳐줘?]

“아닙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요.”


협동조합 시스템을 완성한 다음에 부탁할 작가들이 있다. 그 가운데 방원선이 1순위고.


팔겠다고 만들었는데 안 팔리는 책이 나올 수도 있다. 그에 대비한 예비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정창식이 내준 자본으로는 철저하게 책 만드는 데만 쓴다.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건 철저하게 우리가 팔아서 만든 돈으로 지급한다. 그게 우리의 철칙이었다.


남의 돈 함부로 쓰지 않는 것.

남의 돈으로 인심 쓰지 않는 것.


[내가 중편 하나에 단편 세 개를 묶어서 책을 낼 셈인데, 단편 하나를 다음 달에 소설 웹진에 싣고, 그다음 달이면 원고가 자유의 몸이 된다우.]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 중편이 연작의 마지막 소설이다. 훗날엔 연작 네 편을 묶어서 두 권짜리 소설로 만드는데 그게 텔레비전으로 가서 미니시리즈로 제작되고, 책은 50쇄를 넘게 찍는다.


지난 생, 양윤정을 빼고 나면 100쇄를 찍은 작품 두 개를 빼고 모든 작품을 골고루 많이 판 작가가 방원선이다. 수필도 기막히게 쓴다.


그거 다 가지고 와야 하는데, 방원선에겐 팔린 만큼 주되 미리 선인세를 주는 것으로 대우하고 싶었다.


이게 굉장히 손쉽게 마련되는 바람에 이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안 그래도 새해 정초 분위기만 조금 가라앉으면 그때 돈 들고 가서 인사하려고 했다.


“저희가 다음 주쯤에 선생님 동네로 가겠습니다. 저희하고 같이 식사하세요.”

[저희라고 함은 그 아름다운 청년이 포함되는 거유?]


방원선이 아직 심준구를 못 봤다. 아니, 우리를 전부 못 봤다. 나만 봤다. 현이숙과 홍선화, 나조희와 백선희와는 이따금 보는 사이이고.


“네, 선생님. 저희 네 명이 한 팀인데요. 최나영, 심준구, 김부건, 저, 이렇게 네 명이 다 같이 가겠습니다. 저희, 인사드려야 하거든요.”

[나, 최나영 작가 글 좋아한다우. 사람이 있어서 좋고, 글에 힘을 빼고 써서 더 좋다우. 그 작가는 글맛을 알아.]

“고맙습니다. 다음에 보면 지금 하신 말씀 꼭 다시 해주세요. 누나가 기뻐서 울지도 몰라요.”

[저런. 울려야겠네. 우는 건 정화에 좋거든.]

“네, 맞습니다. 선생님.”

[일하던 중이지? 다음 주는 종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 언제든 건너오우.]

“네. 연락드리고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방원선 선생님. 여섯 글자에 나영이 양 주먹을 쥐고 침묵의 포효를 했다.


작가들의 스승이다.

그녀를 보러 간다는 말에 최나영은 발까지 동동 굴렀다.


“작가님들에게 방원선 선생님은 스타인가 봐요?”

“스승이시죠. 원고 주신다고, 가지러 오라시는군요.”

“방원선 선생님 원고도 수정하시나요?”

“필요하다면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기자는 우리 사무실을 사진 찍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내 모습을 몇 컷, 자연스러운 상태로 찍더니 무언가를 더 바랐다.


“인터뷰를 보강해 줄 한 컷을 넣고 싶어서요. 이 한 컷이 글보다 강할 거 같습니다.”

“우리가 다들 사진 포즈에 약해서요.”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서 평소처럼 일하시면 됩니다. 이 한 컷만 찍게 해주십시오. 그냥 일하세요. 제가 알아서 찍겠습니다.”


사진 기자는 우리 4명이 평소처럼 앉아서 일하는 모습을 찍었고, 4명이 앉은 공간이 얼마나 협소한지, 생생하게 드러나도록 의자 위에 올라가서 내려찍었다.


“앞으로 더 확장을 안 한다는 말씀이시죠?”

“해외 팀이 옆집으로 들어올 겁니다. 여기서 버스로 세 정거장 떨어져 있는데요, 돈 벌자마자 옆집을 구했습니다. 3월에 합체합니다. 이게 우리의 디폴트입니다.”


이 인터뷰 기사는 비교적 상세하게 나갔다. 우리가 사무실로 쓰는 작은 공간. 거기에 4명이 등지고 앉아서 각자 글을 쓰다가 몸 돌리면 회의 테이블이 되는 열악한 공간이지만 우리 중 누구도 불편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여 우리의 공유 작업실 개념으로 쓰면서 더 많은 돈을 작가들에게 돌린다.


이게 화제가 되었다.

내가 받은 인세까지. 손미강 기자는 비교적 상세하게 썼고 헤드라인과 바디카피를 꽤 영리하게 사용하여 배치했다.


↳북미 베스트셀러 1위래. 미친 거냐고. 우리나라 작가 책이. 국뽕 찬다.


↳한국으로 정산돼서 들어온 돈만 백억 대면 얼마를 판 거야? 이거 실화임?


↳백억 대면 백억으로 잡아도 우도윤이 받은 돈은 50억. 오왕. 책 한 권으로 이렇게까지 버는 게 맞나? 에바 아닌가?


↳↳조앤 K. 롤링은 책 한 권 시리즈로 8천억을 벌었는데 그것도 에바냐? 우리나라가 계속 에바였던 거.


↳더 팔아라~~~ 솔직히 철학 몰랐는데 소설 보면서 철학을 접하니까 쉽고 좋더라. 이렇게 쓴 작가 없잖아. 내 기준 센스 최고!


↳일단 흥미진진하고 잼있음. 갸륵한 날들 드라마도 다시 보기 하세요. 잼있음요.


↳한 방에 재벌! ㄷㄷㄷ


↳출판사는 원고를 조금 더 대중의 눈으로 보면서 만들고, 팔리는 책들로 만들면 인세를 조금 더 올릴 수 있는 구조라네.


↳잼없는 책들 너무 많지. 진지하면서도 깊게 들어간 문장도 재미있는 거 많거든.


나는 기사와 댓글을 꼼꼼하게 읽었다.


“이 기사가 출판계에 변화를 이끌어 내면 좋겠다. 권수로 일단 밀어붙여야 출판 권력을 쥔다고 생각하는 거, 그걸 버려야 해.”

“형, 소고기?”

“콜이지.”


대답과 함께 일어선다. 지금은 끼니 때가 아닌데도.


“내가. 참.”

“뭐야? 간 본 거야? 소고기 저금이야.”


다시 앉는 심준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제대로 말할 땐 매서운 사람이 또 먹는 거 앞에선 저리 돌변하는데 보면 제 생긴 것과 하는 일을 상쇄할 도구로 언어 행위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도희가 철 안 든 척하고 연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가끔 헛갈린다는 거.


방원선에게 가기 전까지 나는 단편 한 편을 완성하기로 했다.


이어 쓰는 소설, <비행>이다.


『시장엔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좌판마다 땀 냄새와 물비린내가 뒤엉켜 돌아다녔다.


“낙지 한 코 주세요. 오늘 들어온 거죠?”

“어제 들어온 놈들은 너미 뱃속에 있을 것이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새댁도 들어 알제? 여그 뒤에 윤호 빌라 사는 여자 얘기 말여어. 닭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자녀.”


엄마 장례를 치르고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경찰차가 도시 변두리의 삶에 등장했었다. 이 동네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경찰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나 역시도 눈과 귀를 모아 무슨 일인가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었다.


야채 코너에서 생선 코너로 서명지가 건네졌다. 그 서명지는 곧바로 내 앞에 들이밀어졌다.


한 사람의 목숨을 놓고 벌어지는 구명운동이었다.


종이 몇 장이 아래에 덧붙여 있는 것으로 봐서 시장 보러 나온 동네 여자들이란 여자는 모두 서명의 대상인 듯했다.

망연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들고 서 있다가 나는 아기를 업고 내 옆에 선 여자에게 종이를 쥐여줬다.


“썼어도 또 써어. 한 장에 스무 명씩 우선에 백 장이 목푠게로, 또 써도 돼야. 이 애기엄마도 또 쓸텨. 돈 냄서 말여. 돈 낼 때 쓰고 물건 받아가는 겨. 이것이 현재 우리의 시스템이여.”


생선은 부랴부랴 종이를 낚아채며 다시 나에게 서명지를 들이밀었다. 서명하기 전에는 낙지를 담은 비닐봉지를 건네줄 것 같지 않았다.


“빨리 써. 우리들은 남편, 자식이 뭐야? 친척 이름까지 모조리 서명했어.”


야채가 콩나물 위에 청양고추를 넣고 흙 당근을 다른 비닐에 넣어 건네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 여자 꺼내 와야 혀어. 칠 년을 모신 시조몬디, 얼매나 지극 정성으로 모신지는 시장만 아나? 온 동네가 다 아는디. 어쯔케 재수가 읎어도 그래 읎대애. 산목숨 그냥 죽일겨? 살려야제. 죽은 목숨은 죽었다 치고 산 사람은 어떻게라도 살려야제.”


낙지의 엉킨 다리들보다 더 형편없이 엉킨 머리를 귀밑으로 넘기며 생선은 서명할 것을 채근했다. 그러고 보니 좌판마다 종이들이 오갔다. 이야깃거리가 생긴 시장은 어느 때보다 시장다웠다.


나는 슬로비디오 화면을 틀어놓기라도 한 듯 천천히 빈칸을 채워 나가며 이름과 주소와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적은 뒤 사인을 마쳤다. 그러자 종이는 이내 옆의 아기를 업은 여자에게 건네졌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는 살인이었다. 살인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죽음은 다시 생의 우물 위로 길어 올리어지지 않으므로.

내키지 않는 사인을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엄마의 흔적이 채는 것을 느꼈다.


코너를 돌 때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는 얘기들이 귀에 담겼다.


산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처럼 호기심은 기세등등하게 물이 올라 있다. 어떤 여자들은 아예 시장 보따리를 내려놓고 모여 서서 소문을 분석하고 있었다.


비행의 말들이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사람들 사이를 비행하고 있었다.


진작 죽었어야지. 아, 그럼. 진작 죽었어야지. 구십 넘게 살았으면 죽을 만도 하구만 뭐. 그 여자 작년에 효부상 받았다면서요? 아이구 말 말어. 시엄마가 매눌애한테 제 시엄마 떠맡긴 거 아니우. 어쨌든 산 사람은······ 괘앵, 편해지겠. 괘······앵, 네.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부풀리는 얘기들이 굉음처럼 귀에 꽂힐 때마다 어질 머리가 일었다. 그때 인근 비행장으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말들은 잠시 삼켜졌다.

나는 그 순간을 이용해 시장통을 빠져나왔다. 겨우 구토가 멎었다.


나는 잔혹한 호기심을 품었다. 야구방망이로 내려치던 순간에 정말 티끌만큼의 살의가 없었을까. 혹은 적의가.

시할머니의 머리를 향해 내려치던 손자며느리의 살기등등한 얼굴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손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되는 대로 시장을 본 뒤에 저녁 해를 밟으며 친정으로 향했다. 눅눅한 바람이 골목마다 고여 있었다. 비가 더 올 것 같은 바람이었다. 기우뚱하게 내려앉은 해거름만큼이나 걸음이 기우뚱거렸다.』


비행이 의심되는, 밖으로 도는 남편.

비행하는 말들을 덮은 비행기의 굉음.


여기에 나는 하나의 비행을 더 얹는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가정의 달 5월입니다.

독자님들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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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역대급 제안 +1 24.05.04 347 19 14쪽
82 시시한 논쟁 +1 24.05.04 304 16 14쪽
81 어떤 예감 +3 24.05.03 345 25 16쪽
80 아버지의 구두 +1 24.05.03 326 17 14쪽
79 우리의 역할 +3 24.05.02 347 25 15쪽
78 생의 결정 +1 24.05.02 342 21 13쪽
77 세배 +9 24.05.01 366 21 14쪽
» 팔리는 책 +1 24.05.01 362 21 17쪽
75 비행 +2 24.04.30 380 26 13쪽
74 재벌 형 24.04.30 359 20 13쪽
73 문학상보다 셀러 +4 24.04.29 397 23 14쪽
72 조금 더 +1 24.04.29 373 17 14쪽
71 포스트 모더니즘 +4 24.04.28 404 23 15쪽
70 안전한 동거 24.04.28 412 15 13쪽
69 임프린트 +3 24.04.27 435 24 14쪽
68 끝났는데 끝난 줄 모르고 +1 24.04.27 406 15 13쪽
67 퇴고 +1 24.04.26 445 26 14쪽
66 작가의 삶이 무너지면 +2 24.04.26 417 19 15쪽
65 친절한 독서를 위해 +2 24.04.26 432 15 14쪽
64 고마운 제안 +3 24.04.25 486 20 14쪽
63 절필&낙향 +2 24.04.25 480 2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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