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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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1nx666
작품등록일 :
2024.07.1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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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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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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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4)

DUMMY

황자가 목검 손잡이를 빙그르르 돌려 날이 아닌 면을 세웠다.


“신앙심이든 존경심이든 전부 폭력 안에서 꽃잎을 맺지.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야. 왜 그런지 알아?”


무력감에 굴복한 주아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황자는 자기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미천한 것들일수록 그런 게 결여되어 있거든, 바로 너처럼.”


황자가 망설임 없이 목검을 내리쳤다. 주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팔로 머리를 감쌌다. 공기가 저항하며 내뱉는 숨결에 소름이 돋았다. 어떠한 고통이 찾아오든 끔찍이도 아플 터였다.


하지만 팔뚝에서 느껴진 건 날카로운 통증이 아닌 작은 두드림이었다. 위협으로 끝내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도 같이 들었다.


실눈을 뜨고 확인해보니, 살짝 비켜나간 목검이 보였다. 그때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시는 겁니까!”


훈련장에 들어선 라드가 성난 얼굴로 달려왔다. 움직일 때마다 꽉 쥔 오른 주먹에서 으스러진 돌가루가 새어 나왔다.


라드는 모래판에 올라오자마자 곧장 주아나부터 감쌌다. 등을 토닥이면서도 눈만은 확실하게 황자를 노려봤다. 그것이 따가웠는지 황자가 자기에게는 잘못은 없다는 듯 손바닥을 치켜세워 으쓱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라드가 소리쳤다.


“네 동생에게 버릇을 교육하던 것뿐이야, 진정하라고. 죽이려던 게 아니었으니까.”


황자의 능청스러움이 라드를 더욱 화나게 했다.


“쓰러진 아이를 공격하는 게 버릇을 고치는 겁니까.”


황자는 대답 없이 몸을 돌린 뒤 넓은 보폭으로 다섯 걸음만큼 멀어진 다음 돌아섰다.


“내가 말했잖아, 교육이라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랫사람을 일깨워줄 의무도 있는 거다.”


그는 교육이라는 부분까지는 짜증스럽게 말하고 뒤로는 선생처럼 말했다. 라드가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랑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안 그래도 찢어진 황자의 눈이 더욱 가늘어지더니 입술 사이로 딱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진심인데 너는 왜 그걸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아무리 황자라는 지위를 가졌대도 대가문의 자식에게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권리를 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그게 불만이면 네 동생처럼 건방이라도 떨어보던가.”


분노와 멸시가 마찰하던 그때였다.


“형님, 그만두세요.”


소리도 없이 나타난 2황자가 중재에 나섰다. 제 형과 달리 몸집은 작고 순한 얼굴에는 둥근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열여섯 살임에도 변성기가 오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흐르는 샘물처럼 가늘었다.


“닥쳐, 키실.”


그러나 1황자 가멜린은 핏줄에게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 사이 라드는 재빠르게 주아나를 안아 올려 아래쪽 돌의자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려.”


“오빠, 하지 마.”


주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매를 붙잡았다. 라드는 동생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언제나 따뜻했던 손이 지금은 차갑게만 느껴졌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불안을 달래주는 나긋한 목소리에 주아나는 결국 손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라드가 벽면 거치대에서 목검 한 자루를 꺼내어 다시 모래 위로 올라섰다. 파동치던 눈빛이 어느샌가 차분해져 있었다.


1황자 가멜린은 눈을 가리는 빨간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긴 다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여덟 살 때부터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어. 조건과 환경은 세상 어느 인간보다 특별했지, 굳이 안 배울 이유가 없었던 거야. 심지어 재능까지 있었어. 저런 머저리와 다르게 말이다.”


가멜린의 곁눈질은 동생 키실을 경멸한 다음 되돌아갔다.


“스승이란 작자들은 실력은 좋은 데 반해 하나같이 명예와 의무를 들먹였어. 심지어 겸손이나 선의를 중시하라는 자도 있더군. 항상 따분한 얘기만 중얼중얼······.”


가멜린은 청록색 눈동자로 비릿한 미소를 보이곤 말을 이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전부 쓸데없는 내용이었고 딱히 관심도 없었지. 그런데 그중에 딱 하나만은 궁금하더라고. 제국 제일의 검은 카소에 있다. 스승이고 기사고 전부 똑같이 지껄이더군. 심지어 여섯별에게 카소와 맞서 이길 수 있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 의문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여기 남아서 피를 가렵게 했어.”


가멜린이 손가락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 둥글게 돌려댔다. 라드는 전부 듣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가멜린은 대답 대신 껑충 뛰어서 목검을 내려쳤다. 딱, 맞물린 목검 사이로 장난감을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은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몸에서는 지독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동생이 보는 앞에서 네 팔을 부러트리면 가려움이 사라질까 그대로일까?”


“그런 고민은 멀쩡하게 서 계실 때나 하시죠.”


라드가 지지 않고 맞받아치며 그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가슴을 겨냥해 목검을 휘둘렀다. 가멜린은 두 발짝 물러나고도 모자랐는지 상체를 눕혀 피했다.


균형이 무너진 상태이니 당연하게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예측을 깨고서 돌연 시야가 닿지 않는 하단에서 공격이 올라왔다.


모랫바닥을 쓸면서 올라온 목검이 라드의 사타구니를 지나 명치와 턱을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주아나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가 오빠가 멀쩡한 걸 알고서 안심했다.


춤을 추듯 몇 바퀴를 돌아 처음 자리로 돌아간 가멜린은 자기 실력에 심취한 것처럼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후 모래 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는 대부분 가멜린 것이었다. 주아나에게 했듯이 마구잡이식으로 공격해댔다.


사납게 이어지는 일격만 보면 황자에게 크게 유리한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전부 막히고 있어 유효한 공격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라드는 반격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여유까지 보였다.


가멜린은 그걸 무시라고 받아들였는지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공격을 멈추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건방 떠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입에서 새 나오는 음성은 달아오른 열기로 바스러진 듯 거칠 게 변해있었다.


황제인 아버지조차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으며 만인을 개미쯤으로 여기는 자애주의자에게 라드는 고작해야 정원에서 꿈틀대는 벌레 한 마리에 불과할 것이었다.


가멜린은 적개심을 풀풀 풍기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천장을 향해 치솟은 목검이 갑자기 네 갈래로 늘어났다. 그건 검을 쓰는 자라면 한 번쯤 이름은 들어봤을 어느 기사의 기술이었다.


어느 게 진짜이고 어느 게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라드는 침착하게 목검을 네 번 내질렀다. 하나 부딪히는 소리는 단 하나, 그 결과로 가멜린이 멀찌감치 밀려나 착지했다.


주아나는 등만 보이는 위치라 검의 경로만 어렴풋이 보았을 뿐, 어떻게 공격을 파훼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았을까? 주아나가 반대편에 선 자들을 훑어봤다. 호위 기사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었고 여섯별이라 불리는 다섯 기사마저도 잠깐이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2황자만이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하, 재밌네.”


가멜린의 관자놀이로 핏줄이 두드러지며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든 말든 라드는 초연하게 서 있었다. 이제는 반대로 황자가 자극받았다.


“팔 한 짝으로는 모자라겠다 너.”


격양해진 음성을 신호 삼아 가멜린은 다시금 공격해왔다. 내뱉은 말을 지키려는 듯이 노리는 것은 왼팔이었다.


라드가 몸을 틀어 공격을 쳐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았다. 목검이 있어야 할 자리로 잔상만이 남아 수증기처럼 흩어졌다. 마나가 만든 허상이었다.


진짜 가멜린은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목검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두르며 웃고 있다니, 팔이 부러지는 것보다 좀 더 많은 걸 앗아가더라도 아이고 실수라며 능글맞게 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가멜린은 계속해서 웃지 못했다. 무더운 여름날에 잠깐씩 불어오는 그런 바람이었을까, 눈을 한번 깜빡이자 코앞에 라드가 서 있었다.


가멜린은 움찔하여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른쪽 손목이 겨드랑이에 끼어져 있는 탓이었다. 팔에 실었던 힘이 손목으로 몰리면서 시큼한 통증을 일으켰다. 그 순간 복부로 발이 날아들었다.


뒤로 세 바퀴를 넘게 구른 가멜린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주먹으로 바닥을 짚었다. 눈앞으로 목검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와 함께 키실이 호들갑을 떨면서 달려왔다.


“형님! 괜찮으세요?”


“저리 꺼져. 너부터 죽여버리기 전에.”


가멜린의 얼굴은 달아오르다 못해 징그러울 정도로 붉어졌다. 키실은 포식자처럼 사납게 변한 눈을 마주하고는 겁을 먹은 양 슬금슬금 물러났다.


“괜찮으십니까?”


라드가 뒤늦게 걱정되었는지 한발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감정에 치우쳐서 좀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걸 후회하는 듯했다.


훈련장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침을 꿀떡하고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가멜린이 아무 말 없이 목검을 쥐고 일어섰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손에서 피어난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환영처럼 목검을 뒤덮었다. 강렬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쩍쩍 갈라졌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을 품는 걸 넘어서 누군가를 진짜로 죽이겠다는 의지에 발현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까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가만히 있지 말고 좀 말려봐요.”


라드는 호위 기사 쪽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섯별이라 불리는 기사들을 향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질 않았다. 그저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연히 다른 호위 기사도 눈치만 봐댔다.


가멜린이 기어코 목검을 세웠다. 만약 이대로 똑같이 힘을 사용한다면 둘 중 한 명은 크게 다치거나 심하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뒤편에 앉은 주아나한테도 여파가 미칠 터였다. 라드는 전쟁터 한가운데 내던져진 신병처럼 얼굴이 굳어버렸다.


충돌이 일어나기 직전 입구로 라노스가 들어섰다.


“황자님 거기까지만 하시죠.”


라노스가 천천히 걸어왔고 가멜린은 그보다 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싫다면?”


분노로 응축된 눈은 이글거렸고 비틀린 입술은 겨울바람보다 차갑게 읊조렸다.


“억지로라도 막아야겠죠.”


“당신이? 나를?”


가멜린이 조소를 내뿌렸다.


“그래야 한다면요.”


라노스의 굵직한 목소리가 실내 공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가멜린은 한동안 노려보다가 살기 어린 기운을 거두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얼굴에 번졌던 붉은 기와 핏줄은 모두 사라졌지만, 대신에 다른 것들이 서려 있었다.


“주인이 죽고 나서야 움직일 참이냐.”


가멜린이 라노스를 무시하고 지나쳐 여섯별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답답하긴. 돌아간다.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가멜린은 들으라는 듯이 큼지막하게 말하고는 쌩하니 나가버렸다.


“아버지!”


주아나가 달려와 라노스 품에 안겨들었다. 울음은 터트리지 않았지만, 머리를 파묻고 어리광을 피웠다.


“휴우.”


라드가 긴 숨을 내쉴 때였다. 아직 남아있었던 키실은 목소리와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꺼냈다.


“형님은 아마도 이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그건 충고입니까? 아니면 경고입니까?”


“재미난 걸 보여준 보답이라고 해두죠.”


질문을 한 것은 라노스인데 어째선지 키실은 라드를 보면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까딱거린 뒤 제형을 따라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가멜린···키실···.”


라노스는 딸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두 황자의 이름을 되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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