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아나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J1nx666
작품등록일 :
2024.07.11 19:03
최근연재일 :
2024.08.06 18:46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146
추천수 :
1
글자수 :
118,740

작성
24.07.29 20:58
조회
7
추천
0
글자
12쪽

15화 달아나, 주아나 (6)

DUMMY

주아나가 돌아왔을 때 실리아는 무덤에서 깨어난 시체를 본 듯한 얼굴이었다. 훗날 그녀가 말하길 나갔다가 돌아온 건 주아나가 처음이라 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그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었다.


주아나는 그날 저녁부터 다른 건물로 옮겨져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곳은 노예들이 먹고 자는 숙소였고, 실리아와 한방으로 배정된 건 우연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숙소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 자유도 보장되었다. 물론 맡겨진 일을 모두 했을 때의 얘기였다. 그런데 주아나는 그것에서 예외가 되어있었다. 아무런 일이 배당되지 않으니 먹고 자는 일이 반복됐다. 실리아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면서 궁금해했다.


어느 날 밤, 문뜩 사라진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 애들은 어디로 갔어?”


실리아가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두고서 던진 질문이었다. 실리아는 누운 채로 턱을 들어서 머리맡에 난 창문을 내다보았다. 주아나도 똑같이 따라 했다.


“저 위.”


눈과 손이 가리키는 곳은 유별나게 높이 솟은 첨탑 꼭대기였다.


“저기로 가서 어떻게 됐는데?”


실리아는 잠시 주저하더니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도 몰라. 하지만 그 애들은 이제 여기 없어.”


여기 없어, 라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일 건 뻔했다. 무거워진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실리아가 과거를 들려줬다. 그건 부모를 일찍 여의고 동생을 홀로 키우던 굳센 소녀의 이야기였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동생이 쓰러졌어. 그래서 동생을 업고 치료소란 치료소는 전부 돌아다녔지. 하지만 어느 한 곳도 동생이 왜 그런지, 병명이 뭔지를 모르는 거야. 그러면서 진료비 명목으로 돈은 받더라고, 결국 가진 돈은 금방 바닥났어. 동생을 집에 남겨두고 돈을 융통해 보려고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그런 걸 해주는 곳은 없었어. 그때는 정말로 눈앞이 깜깜했어. 부모님만 살아계셨더라도······.”


실리아는 손가락으로 눈물 몇 방울을 훑어낸 다음 다시 말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도움을 주겠다면서 접근했어.”


“누가?”


“모르겠어. 근데 내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동생을 낫게 해줄 수 있다고 했어.”


주아나는 호의가 의심스러웠지만, 우선은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남자는 내가 타지로 가서 몇 년만 일을 해주면 동생을 치료도 해주고 돌아올 때까지 안전하게 돌봐주겠다고 했어. 당시 나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그래서 동생을 업은 채로 남자를 따라갔지. 남자는 에르기누스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전으로 나를 안내했어. 사제가 직접 나와서 걱정하지 말라면서 안심까지 시켜 줬어. 몇 년만 고생하면 다시 동생을 볼 수 있으니까, 동생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남자를 따라갔어. 몇 날 며칠을 마차를 타고 이동했어. 그리고 어느 항구에 도착했지. 많은 사람이 있어서 의심하지 않고 배를 탔어. 그렇게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남자가 널 속인 거 아니야?”


“응, 그런 것 같아. 처음에는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차츰 괜찮아졌어. 동생이 건강해졌을 테니까, 언젠가 돌아가면 볼 수 있을 테니까.”


실리아 목소리에 담긴 희망이 주아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남겨진 사명이 너무 커서일까, 현실은 절망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그나마 공감되는 건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뿐이었다.


주아나는 라드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금발에 자신과 같은 산호색 눈동자를 가진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오빠를···. 실리아가 누인 몸을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주아나를 가리켰다.


“그래서 널 봤을 때는 정말로 깜짝 놀랐어.”


“나를 봤을 때? 왜?”


주아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동생이랑 너무 닮아서.”


“언니라고 불러줘?”


“아니야, 너 편한 대로 불러. 나도 그게 편하거든.”


이후로도 실리아를 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소중한 걸 모조리 빼앗긴 자가 마음을 주고 정을 나누는 걸 거부하듯, 주아나 또한 같은 이유였다. 거리를 두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실리아는 너무 상냥하고 다정했다.


주아나가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는 이유를 또 한 번 감옥 마차에 타면서 알게 됐다.


멀찌감치서 숨어 지켜보는 실리아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체했다. 인사라는 것이 오로지 ‘다녀올게.’만이 아님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맑디맑은 하늘에 새들이 멍 자국처럼 찍힌 늦은 오후, 주아나는 또다시 경기장에 올랐다. 천막 아래에서 느긋하게 음료와 술을 마시는 파란 문신의 마족들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그만큼 더운 날씨였다.


경기장 가운데 선 주아나는 숨을 크게 내뱉은 뒤 정면을 응시했다. 상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큰 키에 비해서 체격은 다소 마른 남자였다. 어깨에 걸친 대검은 무게가 상당해 보였는데,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보아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게 분명했다.


“■■■님의 ■■ 대 그로지안님의 ■■■■!”


시끌벅적했던 관중석이 일순 고요해졌다. 주아나는 진행자가 하는 말을 아주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실리아에게 마족어를 틈틈이 배워온 덕분이었다. 다음 외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살아 나갈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


남자는 느긋하게 다가와 여덟 걸음 정도를 두고서 멈춰 섰다. 얼굴과 팔에 난 상처들이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걸 대변했다.


“난 주아나야, 당신은 이름이 뭐지?”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주아나가 저번처럼 물었다.


“알아서 뭐 하게?”


남자는 그딴 걸 왜 묻냐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건―.”


“왜 가슴에 간직이라도 하려고?”


거칠게 몰아붙이는 말투에 주아나는 입만 뻐끔거렸다. 거기서 이어지는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어린년이 어쭙잖은 짓거리를 하네. 주제 파악하고 정신 똑바로 차려, 이년아. 여기는 사지고, 나는 널 죽일 투견이야. 네 이름 같은 건 똥만큼도 관심 없고, 뒤질 년한테 내 이름을 알려줘서 부정 탈 맘도 없어. 그러니까 그 작은 주둥이 닥치고 검이나 들어.”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주아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도저도 아닌 마음으로 이곳에 올라섰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살아있음을 저주하면서도 죽지는 못하는, 까마득한 복수에는 눈을 돌려온, 그런 자신을 어쩌지 못해 우연이라도 만난 상대가 대신 죽여주길 바랐던 거였다. 그래서 이름이니, 고향이니 떠들어댄 거다.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가.


“저 징그러운 족속들이―.”


넋이 나가 있던 주아나는 남자가 내뱉은 혼잣말에 정신을 차리고 검을 세웠다.


“원하는 건, 쇼라고!”


남자는 큼지막한 보폭으로 달려와 대검을 사선으로 내려쳤다. 막아볼 테면 막아봐라는 듯한 큰 동작이었다. 주아나가 검을 비스듬히 올려 들었다. 막고 흘려낸 다음 접근한 몸에 검을 찔러넣을 생각이었다.


챙!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이 오른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렸다. 균형을 잃어 방어조차 불가능한 순간, 샌들을 신은 발이 가슴을 가격해왔다.


“아악···.”


단단한 흙바닥에 등과 뒤통수가 쾅 하고 세게 부딪혔다. 순간 주위가 캄캄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불길한 감각이 신경을 자극했다. 주아나는 즉시 몸을 굴렸다.


찰나로 목이 있던 자리에 대검이 떨어졌다. 주아나는 구르는 걸로도 부족해, 뒤로 기어서 거리를 벌렸다. 지금이라도 몰아치자면 충분했을 텐데, 어째선지 남자는 공격을 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어나서 알게 되었다.


“이거 다리 병신이었네.”


남자는 주아나 다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롱보다는 품평에 가까운 어투였다.


“네깟 자식을 상대하는 데는 한쪽 다리로도 충분해!”


주아나가 독주를 마시고 시비 거는 사람처럼 반박했다. 감정적으로 구는 게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전부를 무시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가 센 년일세.”


남자는 기분이 상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어 대검을 붕붕 돌리면서 돌격해왔다. 동작이 워낙 커서 기습적이랄 것도 없었지만, 기세가 주아나를 짓눌렀다.


뒤로 피하자니 검날이 길고, 숙이자니 다리가 문제였다. 결정을 못 내리자 불쑥 본능이 튀어나왔다. 왼발이 뒤로 물러지고 상체가 낮아졌다. 이어서 수직으로 세워진 검 면을 왼손이 떠받쳤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음, 번쩍 튀는 불꽃,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오른발이 지면에서 붕 하고 떠올랐다. 체격, 힘, 무기, 모든 차이를 감안하고라도 왼발이 견뎌주지 못한 게 더 큰 문제였다.


주아나는 몇 미터를 날아가는 걸로 모자라 굴렁쇠처럼 데굴데굴 구르다 벽에 부딪혔다.


“■■! ■■! ■■!”


“■■! ■■! ■■!”


슬슬 끝이 보이기 때문일까, 관중석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지금껏 이어진 죽음의 향연으로도 광기가 바닥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양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도는 남자는 악마로부터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


“케엑케엑···.”


주아나는 뼈다귀라도 걸린 양 기침을 해대면서 벽을 짚고 일어섰다. 질질 짜거나, 울고 소리치는 것만 보았던 마족들은 색다른 광경 때문인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열광했다.


“■■■! ■■■! ■■■!”


“■■■! ■■■! ■■■!”


알아듣지 못할 단어가 반복됐다. 그것이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닥쳐···닥쳐···닥쳐···.’


주아나는 등을 벽에 기대고 숨을 골랐다. 도대체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부 놓아버리면 편해질 수 있을 텐데···손이 검을 놓으려 하질 않으니 포기조차 안 되었다. 결국 맞서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런 식으로 몇 명을 죽였을까? 저 남자는.’


여전히 환호를 유도하고 있는 남자가 길든 짐승처럼 느껴졌다. 저딴 인간에게 죄악감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남자를 죽이는 일이 마치 정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떨군 시선으로 구름처럼 피어오른 흙먼지를 보였다.


‘나약하게···굴지 마.’


“흐아!”


기합 소리가 들렸다. 주아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검이 자신을 겨냥해 찔러왔다. 즉시 몸을 숙여 양손으로 흙을 한가득 퍼서 전방으로 뿌렸다. 노란 먼지구름이 일시적으로 두 사람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기진맥진해 보이는 주아나가 피하지 못 하리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지척에 다다른 순간, 먼지구름 안에서 무언가 반짝했다. 그걸 본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콰직! 대검이 돌벽을 가르고 한마디 넘게 박혔다. 또 다른 검은 목을 베고 들어가 중간쯤에 멈춰선 상태였다. 주아나가 힘이 부족하여 남자의 목뼈까지는 잘라내지 못한 것이었다.


쿵, 주아나는 손잡이를 놓지 않은 반동으로 반 바퀴를 돌아 땅바닥에 떨어졌다.


“윽.”


등에 느껴지는 통증은 별것 아니었지만, 벽을 지렛대 삼아 힘을 주었던 왼 발목은 끔찍이도 아팠다. 누운 상태로 한참 동안 이를 꽉 물고 버텨야만 했다.


고통이 수그러들어 일어났을 때까지도 남자 손은 허공을 배회 중이었다. 거기서 십여 초가 흐르고서야 자기 검 위로 늘어졌다. 발밑에 웅덩이처럼 고여가는 핏물에서 레몬처럼 시큼한 냄새가 났다.


주아나는 환희로 가득 찬 관중석을 올려다보며, 어쩌면 악마가 되는 발화점은 미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주아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 21화 사막양 (2) 24.08.06 3 0 12쪽
20 20화 사막양 (1) 24.08.05 3 0 11쪽
19 19화 달아나, 주아나 (10) 24.08.03 6 0 12쪽
18 18화 달아나, 주아나 (9) 24.08.01 8 0 13쪽
17 17화 달아나, 주아나 (8) 24.07.31 6 0 12쪽
16 16화 달아나, 주아나 (7) 24.07.30 8 0 12쪽
» 15화 달아나, 주아나 (6) 24.07.29 8 0 12쪽
14 14화 달아나, 주아나 (5) 24.07.27 9 0 13쪽
13 13화 달아나, 주아나 (4) 24.07.26 8 0 12쪽
12 12화 달아나, 주아나 (3) 24.07.24 6 0 12쪽
11 11화 달아나, 주아나 (2) 24.07.23 5 0 12쪽
10 10화 달아나, 주아나 (1) 24.07.22 6 0 14쪽
9 9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9) 24.07.21 6 0 12쪽
8 8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8) 24.07.20 7 0 12쪽
7 7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7) 24.07.19 7 0 14쪽
6 6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6) 24.07.18 7 0 12쪽
5 5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5) 24.07.16 6 0 14쪽
4 4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4) 24.07.15 6 0 12쪽
3 3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3) 24.07.14 6 0 14쪽
2 2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2) 24.07.13 8 0 13쪽
1 1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1) 24.07.11 18 1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