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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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1nx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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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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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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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8)

DUMMY

로렌실 가문이 지켜온 발란디에에는 성이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었다. 천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성은 대군주 알페놀에게 격렬하게 저항한 대가로서 파괴당했다.


로렌실은 역사가 깊은 명망 있는 가문으로서 구성원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자긍심이 높았다. 하지만 가주 목이 달아나는 걸 보고도 그런 마음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자긍심이 높다고 한들 어찌 멸문과 바꾸겠는가.


종주에게 바치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자기반성이었을까? 이후로 로렌실은 성을 짓지 않았다. 대신 도시 중심에 거대한 저택을 지어서 보수와 증축을 반복해 왔다. 지금 이르러서는 말만 저택이지 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주아나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저택이었다. 70미터가 넘는 일자형 건물은 높이가 6층에 달했다. 층마다 10개가 넘는 창문이 달려 있어서 어느 방이 침실인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발란디에에 도착한 건 3일 전이었다. 그동안 부랑자인 양 저택 주변을 맴돌면서 정보를 얻었다. 경비병은 몇이나 되고, 순찰과 교대 시간은 언제이며, 정문은 어떨 때 열리는가까지 살폈다.


한데 대가문치고는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 저택을 둘러싼 담벼락도 높지 않아서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리하지 않은 것은 저택이 너무 커서였다.


로렌실 가주를 죽이는 일이었다. 아무리 복수심이 불탄다 해도 검을 맞대 이길 수 없는 존재에게 무턱대고 덤빌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주아나는 침실이라도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잘 때 암살을 노린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오늘로 끝이었다. 저녁 무렵 허기를 채우려고 시장 거리를 걷다가 병사로 보이는 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서였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수도행이라니.”


“황제가 죽었으니 별수 있나. 우리 같은 졸병들은 가주님이 가시면 따라가는 거지.”


“내일 출발이라 술도 못 마시잖아, 젠장.”


로렌실 가주가 수도로 간다면 도리안 가주도 올 터, 하지만 두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기회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수도로 가면 필시 황궁에 머물 터인데 황궁을 침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막연히 기다리자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 밤에 해야만 해.’


결정을 내린 주아나는 저택 부근 골목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막상 고요한 새벽이 되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망설임 없이 담을 넘게 해주었다.


관목과 조경수가 달빛을 받아 그려낸 그림자가 길을 안내했다. 주아나는 신발까지 벗어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다.


저택에 비하면 정원은 작은 편인지라 금세 모퉁이에 다다랐다. 비어있는 방을 찾아서 몰래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커다란 쥐새끼는 도대체 얼마나 용감하길래 여길 기어들어 온 거지.”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주아나는 검을 빼 들면서 몸을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쪼그려있었다.


“누구야?”


주아나가 속삭이듯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내가 물어야 하는 걸 네가 물으면 어쩌자는 거야.”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란스러웠다. 이 시간에 순찰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 확인했는데, 어째서. 그때 남자 가슴에 달린 배지가 반짝거렸다. 그제야 정복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주아나는 남자가 평범한 사병이 아님을 알아챘다. 사병들은 정복을 입지도 않을뿐더러, 새벽녘에 저런 자세로 정원을 지킬 리가 없었다.


‘소리치기 전에 제압해야 해.’


여전히 쪼그려있는 남자를 보면서 주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검 손잡이와 검집이 몸통에 가려져 일부만 보였다. 저걸 뽑기 전에 달려들어야 승산이 있었다.


남자가 주아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때, 주아나는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검을 뻗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남자는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꺾어서 피해버렸다. 이후 움직임은 보이지도 않았다. 목덜미를 잡혔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주아나는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커억, 컥···.”


커다란 충격이 덮쳐왔다. 머리가 어지러우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새우처럼 몸이 휘어진 채로 들어 올려지는데도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검을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곧장 배로 주먹이 박혀왔다.


“끄으윽···.”


좀 전에 받았던 충격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고통이었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물고문당하는 고통이 그러할까, 결국 검을 쥐고 있는 일조차 불가능해졌다.


남자는 주아나를 둘러멘 채로 떨어지는 검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저택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현관을 지키던 경비병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와셀님, 무슨 일이십니까?”


“뭘 좀 잡았다. 가주님께 내려와 보셔야겠다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경비병이 저택 내부로 들어가자, 와셀은 침입자를 돌길 한가운데 내려놨다. 검은 멀찍이 던져두었다. 이후 중앙 계단을 타고서 움직이는 불빛을 쳐다봤다. 그것이 다시 내려오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식을 전하러 갔던 경비병이 먼저 내려와 현관문을 잡아두었다. 곧이어 가주 아라네가 걸어 나왔다. 하얀 가운을 덮은 하늘색 장발이 치렁치렁했다.


“무슨 일인가?”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일으켜보게.”


와셀이 주아나 목덜미를 잡아 무릎을 꿇렸다.


“이런.”


얼굴을 확인한 아라네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잘근 눌렀다.


“아시는 자입니까?”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여기를 찾아왔군.”


짝, 와셀은 주아나가 고개를 숙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바닥으로 이마를 올려 쳤다. 자비 없는 손길에 목이 부러질 듯 꺾였다가 느리게 내려왔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시잖아, 고개를 들어라.”


주아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겨우 눈을 떴다. 머리가 울려대는 탓에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지만 점점 돌아오는 시야에 원수가 보이자 내면에서 무언가 요동쳤다.


“외···.”


뻐끔거리는 입에서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똑바로 말해라.”


와셀이 다시 손을 올리자, 아라네는 그것을 제지했다.


“두게.”


“왜···.”


주아나는 다른 의미로 복받쳐 올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수십 초가 흐르고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대체···대체, 왜 그랬어?”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온 거냐?”


아라네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우리한테···왜 그랬냐고, 우리 아버지를 왜 죽였어?”


주아나는 아라네를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상황이 그랬을 뿐이다. 너한테도 네 아버지한테도 악감정은 없었다. 물론 네 오빠한테도.”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릴 거야!!”


주아나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쳤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와셀이 목깃을 잡고 누르는 터라 일어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억눌릴수록 독기가 피어올랐다. 저자 눈을 보며 심장에 검을 꽂더라도 망설이지 않으리.


“차라리 에델렌을 떠나서 멀리 도망가지 그랬느냐.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여생을 보내면 될 것을, 굳이 찾아와선 기어코 죽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구나.”


아라네는 차분한 말투로 견책했다. 굳이 거북함을 숨기지도 않았다. 가족이 될지도 몰랐던 아이를 보는 일이 그에게도 유쾌하지 않은듯했다.


“당신한테 그러라고 시킨 게 누구야? 1황자야!?”


“그걸 알아도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원한에 몸부림치느니 차라리 모르고 가는 편이 훨씬 나을 거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주아나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누구냐고! 빨리 말해!”


또다시 몸부림이 거세지자, 와셀은 주아나가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억압했다.


“어떻게 할까요?”


와셀이 아라네를 보면서 물었다.


“저 애 아버지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어. 저 애 또한 우리 집안과 연을 맺을뻔했고. 비록 실은 끊어졌어도 내 손으로 직접 거둬주는 게 예의겠지. 저게 그 아이 검인가?”


아라네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검을 가리켜 물었다.


“맞습니다.”


“제 아비를 보고 온 모양이군.”


아라네는 그것이 누구 검인지를 알아차렸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풀어주고 검도 돌려주게. 움직이지 못하는 애를 죽이고 싶진 않네, 그건 불명예야. 잠깐 자네 검을 빌려야겠어.”


아라네가 시키는 대로 와셀은 주아나를 거칠게 잡아당겨 패대기친 다음, 발로 검을 밀어주었다. 그와 상반되게 모시는 자에게 가서는 더없이 공손하게 검을 건넸다.


주아나는 하늘에 촘촘하게 박혀있는 별을 보면서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복수조차 할 수 없는 무능함을 비웃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저 수많은 곳 중 어딘가에 가족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버지와 오빠 얼굴이 떠올랐다. 초상화로만 봤던 어머니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곧 모두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금방 갈게······아무 데도 가지 말고 기다려줘.’


주아나는 검으로 바닥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와셀에게 받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오거라,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마.”


아라네가 검을 늘어트린 채로 손짓했다. 주아나는 거미줄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처럼 달려 나갔다. 만약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에게 가는 길에 이자를 끌고 가리라 다짐하면서.


“죽어!”


심장을 꿰뚫고자 한 검이 허무하게 허공으로 치솟았다. 역으로 상대가 심장을 노렸다. 불가항력에 놓인 주아나는 원수 앞에서 비명까지 지르고 싶지는 않아서 눈을 감고 입술을 조였다.


“크윽···.”


신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주아나는 입을 닫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몸이 뒤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주아나가 눈을 떴다.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삐죽 튀어나온 검날 주변으로 피가 붉은 물감처럼 번져나갔다. 누구야? 누군데 거기 그러고 있어? 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왜? 주아나는 뒤로 넘어가는 내내 왜라는 의문만을 되풀이했다.


‘샌즈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바닥에 넘어진 주아나는 등으로 튀어나온 쇳덩이가 점차 짧아지는 광경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돌아선 상태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샌즈 본인이 뽑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상상조차 못 할 만큼 끔찍한 고통일 텐데도 아주 옅은 신음이 전부였다.


검날이 전부 뽑히자, 샌즈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쳤다. 그마저도 몇 걸음 못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주아나는 재빨리 그를 받쳐 안고 바닥에 뉘었다.


“흑흑, 샌즈···여긴 왜 왔어···.”


주아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차가운 뺨을 타고 흘러 늙고 마른 피부를 적셨다.


“···내가 멀리 가라고 적어놨잖아···흑흑···근데 이게 뭐야···.”


간헐적으로 왼쪽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주아나가 어떻게든 틀어막아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샌즈는 눈이 안 보이는 것인지 주아나를 살짝 벗어난 허공을 응시했다.


“아, 아··아가··씨, 도망··가세요. 얼······.”


그는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숨을 거뒀다. 감지도 못한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갔다. 주아나는 샌즈 머리를 끌어안고 목메어 오열했다.


“저자가 뛰어들었을 때 왜 말리셨습니까? 자칫 위험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와셀이 아라네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린 걸 살리려고 몸을 내던진 자였을 뿐이다. 숭고함을 더럽힐 순 없지.”


아라네는 돌덩이라도 짊어진 듯 무겁게 말했다. 눈은 여전히 주아나에게 가 있었다. 거대한 파도에 저항했더라면 지금 저기에 있는 게 다른 소년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주아나를 보는 일이 더욱 힘든 것일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고통을 끊어주는 게 소녀를 위한 최선인 양 아라네가 한 발짝 다가섰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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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화 달아나, 주아나 (6) 24.07.29 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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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화 달아나, 주아나 (2) 24.07.23 6 0 12쪽
10 10화 달아나, 주아나 (1) 24.07.22 6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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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8) 24.07.20 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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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화 주아나, 나의 주아나 (6) 24.07.18 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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