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035.
속성.
스킬이나 몬스터들에는 속성이 존재했다.
불은 물에 물은 땅에 땅은 바람에, 바람은 다시 불에 약한 네 가지 규칙.
현대인식으로 말하자면 상성인 속성에 데미지가 200%, 역상성이면 50%, 상성이 아닌 경우 100% 데미지를 줄 수 있다고 하면 대충 맞을 거다.
그리고 서로 상성이자 모든 속성을 상대로 150%의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게 바로 빛과 어둠.
내가 지닌 소환수들로 보자면 흑우는 토속, 달묘는 암속, 삐용이는 광속에 해당했다.
흑우는 토속이기 때문에 바람 속성, 즉 풍속성 적에게 데미지를 덜 주고 더 받게 된다.
이런 속성 상성을 토대로 적에 따라 유효한 소환수를 꺼내는 게 소환사들의 기본 전법이었다.
“음머!!”
“라끼아아아악!!”
쿠웅!!
거대한 공룡 라라우리우스가 또 한 마리 쓰러졌다.
라라우리우스의 속성은 풍속성.
흑우의 역상성인 속성이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압도적 힘 앞에는 의미가 없어지기도 했다.
상성에는 속성뿐 아니라 능력도 연관이 있긴 한데, 당장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퀘스트 클리어! 축하합니다!]
[이제 17계층으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최단 시간 클리어! 기록 갱신 선물을 확인해주세요!]
<<월드 공지 : 검은 탑(용산)에서 16층 클리어 SSS등급을 달성했습니다.>>
[SSS등급 달성 보상으로 스페샬 타워 코인이 추가로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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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수고했어.”
“삐용!”
“음머.”
“거부욱.”
“뀨! 뀨뀻!!”
달묘만 반응이 달랐다.
살짝 다급해 보이는 몸짓.
“달묘 왜? 사람이 온다고?”
“뀨!”
13층 이전에 필사적으로 숨어다닌 건 미노타우르스를 어떻게 테이밍 했냐는 질문에 근본적으로 답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지금은 가급적 사람하고 안 마주쳤으면- 정도지 만나도 소환사입니다. 하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달묘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다가 쓰러졌다.
“괜찮으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챙기며 남자가 쓰러진 쪽으로 달려갔다.
*
“괜찮으세요?!”
주민혁은 다급하게 달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쓰러진 남자, 이승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예전에 연기한 게 녹슬지 않았어.’
승결의 길드에서 받은 잠복조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 슈퍼 뉴비로 추정되는 인물을 찾아낼 것.
둘, 가능한 다른 길드에 알리지 않고 제 길드에 포섭할 것.
라라우리우스의 피를 일부러 뒤집어쓰고 다친 플레이어를 연기중인 승결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일단 잡아다가 끌고 가면 되겠지.’
저 소환사가 라라우리우스를 쓰러뜨리자 월드 공지가 떴다.
더 따질 것도 없이 슈퍼 뉴비가 분명했다.
왜 피해 다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포획 보수만 받으면 뒷 일은 알 바 아니었기 때문에.
‘앞으로 세 걸음. 둘, 하나.’
레벨 차이가 현격했다.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입부터 막으면 저 소환수들은 무용지물.
22레벨인 승결의 움직임을 상대는 따라올 수 없었다.
딱!!!
“악!!!”
엄청나게 단단하고 동시에 말랑한 무언가가 이승결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
“달묘?!”
내가 쓰러진 남자에게 도달하기 직전, 달묘가 달려들어 떡매로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뭐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들린 건 너무나도 기운찬 남자의 비명 소리였다.
“뀨!”
달묘는 인상을 쓰며 남자를 가리켰다.
왼발로 바닥을 탕탕 치면서.
“에이 시발. 이렇게 된 거!”
온몸에 피를 흘리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빠른 속도로 나를 덮쳤다.
피하기도 힘든 속도를 보아 육탄계 각성자였다.
그 순간이었다.
뻐억!!
“으억!?”
달묘의 떡매 망치가 다시 한번 불을 뿜었다.
“어우, 아우, 어···.”
“···죽은 거 아냐?”
“뀨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달묘.
“삐! 뀨, 삐이, 뀨잇!”
“잠시만 기다려 봐. 소환 해제, 중갑이.”
팟!
“소환 츄러리.”
퍼엉.
“러리 통역.”
“한다, 톤역!”
“삐! 뀨, 삐이, 뀨잇!”
“츄럴, [피가 전부 라라우리우스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꿈틀 거리면서 재빠르게 움직이길래 후려치고 봤죠!] 츄럴.”
“아하.”
“[처음에는 적당히 쳤는데 계속 움직이길래 조금 더 세게 팼답니다.]”
“그랬구나.”
남자는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을 뿐.
“뀨! 뀨뀨잇 뀨뀻!”
“츄럴, [떡매 망치의 강도를 조절해 죽을 만큼 아프지만 결코 죽지 않는 강도로 팼으니 안심하세요. 주인님!] 츄럴.”
“그런 것도 되는구나.”
“뀻!”
칭찬을 바라는 듯 우쭐거리며 가슴팍을 내민 달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기분 좋은 듯 달묘의 머리와 꼬리가 살랑 살랑 움직였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나는 쓰러진 남자를 보며 말했다.
다른 각성자들과 마주쳐도 상관없지만 월드 공지 직후에 나타난 데다가 이 남자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거 같다.
그렇다고 내가 이 사람을 협박하거나 입을 틀어 막기엔 좀 저항감이 일었다.
일단 왜 나한테 이런 수작을 부렸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게 공격이라면 그 대가를, 아니라면 무슨 이유인지 들어보고 처분을 결정해야지.
“별 수 없네.”
오늘 자주 부르는 거 같지만 이런 일에 한해선 나보다 훨씬 잘 할 거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
“잘 불러주셨어요! 민혁씨!”
“자꾸 불러서 미안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부르시는 건데, 하루에 백 번도 괜찮답니다.”
“하하.”
좀 더 뻔뻔해도 되겠지만 계약했다고 마구잡이로 쥐고 흔드는 건 성격상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듯 했다.
“이 자인가요? 감히 주, 민혁씨를 해치려 했다는 쓰레기가?”
설유라는 조금 격앙된 거 같았다.
“말씀만하세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잘게 다져서 태평양 상어밥으로 던질까요? 아니면 시멘트에 묻어 버릴까요. 아, 죄송해요. 제가 흥분했네요.”
“음, 네. 그러신 거 같아요. 일단 진정하세요.”
“네. 말씀대로예요. 목적과 배후를 먼저 밝히고 일가 친척까지 전부 고통에 빠뜨려야 했는데 너무 쉽게 보내려고 했네요.”
그 정도 죽일 죄는 아닌 거 같은데.
원래도 살짝 극단적인 느낌의 사람이었지만 주종 계약 이후 대상이 내가 되면 좀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아뇨, 일단 말하신 거처럼 목적부터 알아내죠. 그걸 듣고 제가 정할게요.”
“아, 네. 지당한 말씀. 제가 너무 앞서갔네요.”
“저 신경 써서 하신 말일 테니까 신경 안 써요.”
“민혁씨···.”
그때 남자의 의식이 돌아온 듯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
“깨어나려나 보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민혁씨, 심문은 안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네?”
설유라의 말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녀를 바라봤다.
실을 늘어뜨린 채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내가 봐온 어떤 것과도 다른 표정을 띄고 있었다.
음침하다고 해야 할지 위험하다고 해야 할지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하면 안 됩니다? 정보만 알아내셔야 해요.”
“염려 마세요. 상처 같은 거 없게 잘 할게요.”
더 보고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그 방에서 나왔다.
“마스터는요?”
“심문하겠다고 해서요.”
“서 계시는 것도 그러실 테니 마스터의 집무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차가운 인상의 이 여성은 부관이라고 들었다.
이름이, 혜리였나.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1층, 시작의 마을에 위치한 군청 길드의 본부 건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왜 있는지 의문인 지하실이었는데, 꽤나 익숙해 보이는 게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려나.
아무튼 혜리씨의 안내를 받고 설유라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차를 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사무적으로 대하고 문을 닫은 혜리였지만 아까는 난리였다.
‘마스터, 그 남자 분은?’
‘인사해. 내가 모시는 분이야. 성함은 주민혁님.’
‘···마스터가 모시는 분이라구요?’
여자한테 그렇게 차갑고 분노 어린 시선을 받은 건 난생 처음이었다.
혜리라는 여성은 부모의 원수를 보는 것 보다 더 엄한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설유라의 부관이라는 입장 탓에 특별히 다른 말은 안 나왔지만 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생각을 환기시켰다.
설유라의 집무실은 천장이 굉장히 높았고, 크기 역시 넉넉했다.
여기라면 건물이 무너지거나 하진 않겠지.
“소환, 흑우.”
“무.”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할 건 없고 좀 대기하고 있자.”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으로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을 때였다.
“다녀왔습니다.”
“빠르시네요.”
“후훗, 저한테 걸리면 금방이죠.”
사람도 조종할 수 있다는 인형사가 실로 뭘 했을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적당히 하라고 했으니 죽이거나 하진 않겠지.
“그래서 뭐라던가요?”
“민혁씨 추측대로 길드 연합의 구성원이었어요. 월드 공지 뜬 거 보고 확신했고 잡아서 자기들 길드로 데려갈 생각이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거라면 공격이라기 보단 회유? 이 경우엔 납치인가.”
“그렇죠. 어딘지도 알아냈어요. 스타 폴즈라고 하는 별 볼일 없는 길드랍니다.”
“스타 폴즈.”
분명 23위 정도 하는 위치에 있는 길드 이름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전원 고기 밥으로 만들까요?”
“아뇨,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고. 아, 그러고보니 저 사람은 어떻게 된 건가요?”
“멀쩡히 살려뒀답니다. 기억을 조금 주물렀을 뿐.”
“기억을 주물렀다니···.”
“민혁씨가 가장 곤란한 건 슈퍼 뉴비가 누군지 특정 되어서 방해 받는 일 아닌가요?”
“그렇죠.”
“그 부분은 확실하게 처리했습니다. 염려 마세요.”
이 정도로 듬직한 말은 근래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죠?”
“네.”
설유라는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 같아선 반쯤, 아니 그냥 죽이고 싶었는데. 라고 하듯 음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건 탑 등반이지 살인이 아니니까.
목숨을 노렸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겠지만, 이정도까진 허용 범위였다.
“그렇지만 저 자를 그냥 풀어주면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길 수 있어요.”
설유라의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저한테 맡겨 주시지 않으실래요?”
“그러죠.”
“감사합니다.”
위험한 느낌을 잔뜩 머금은 채.
아주 환한 미소를 띄며 그녀는 말했다.
**
그리고 며칠 뒤.
간만에 수아씨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네요. 수아씨.”
[오빠,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요?”
[길드 연합이 쪼개진 거요.]
“···네?”
수아씨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랬다.
갑작스럽게 스타 폴즈를 주축으로 길드 연합 내부에서 몇 개의 길드가 슈퍼 뉴비 탐색을 중지하겠다고 선언.
[어차피 우리 같은 군소 길드에 그런 대어가 들어오겠냐-라는 말부터 다들 먹고 살 걱정 안 하냐, 벌써 업무 멈춘 게 한달째다. 같은 멀쩡한 소릴 했대요.]
“으음, 그렇군요.”
[상식적인 말이긴 한데, 연합의 길마들이 다들 슈퍼 뉴비만 데려오면 다 잘 풀릴 거라는 꽃밭에 빠져서 그 사달을 벌이고 있던 거 치곤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그래서 계속 하겠다파와 때려쳐라파가 나뉘어서 지금 쪼개졌다고 하네요.]
이게 설유라구나.
나는 기껏해야 스타 폴즈에 엄중 경고할 줄 알았더니 아예 연합을 박살내고 있네.
[오빠가 한 거예요?]
“아뇨. 저는 별로 한 거 없어요.”
[···그렇구나. 아참, 오빠 조만간 한 번 찾아 뵈어도 될까요? 삐용이도 보고 싶구. 드릴 것도 있어서요.]
“네, 괜찮아요.”
[타워 안이랑 밖, 어디가 편하세요?]
“안에서 뵐까요? 시간은 적당히 미리 말씀만 해주시면 괜찮을 거 같아요.”
[알았어요! 연락 드릴게요!]
통화 종료.
탑 등반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연락을 받거나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원래는 0이었으니까, 퍼센티지로 따질 수는 없지만 체감상으로는 10000% 정도.
살짝 피로감을 느꼈다.
“이럴 때는 역시 그거지.”
“우르륵?”
“인벤토리.”
타워의 것에 해당하는 물품을 넣고 뺄 수 있는 아공간.
나는 그 중에서 특출나게 빛나는 동전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스페샬 타워 코인이 제법 낭낭하게 모였다.
가챠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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