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드루이드의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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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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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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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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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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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DUMMY

1화. 숲지기 일족, 그리고 대드루이드 미하엘



축복받은 은색 숲 기눙가프의 중앙.


“드디어!”

“200년 전 맺혔던 열매가 드디어 완숙의 단계에 이르렀네요.”

“곧 태어나겠지요?”

“그럼요. 두어 달? 최대로 잡아도 두 달이면 후대를 볼 수 있어요.”


삼삼오오 모여 지절대는 소리가 숲으로 퍼졌다.

조곤조곤한 음색은 제각각일지라도 외양은 비슷했다. 은색 머리카락과 은색 눈.

연하거나 진하거나 색의 농도 차이와 기장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그러했다. 딱 봐도 형제 아니면 적어도 무리일 것 같은 이들은 들떠 있었다.

하나인 양 비슷한 온도의 열감이 고이는 곳에 있는 건 한 그루의 나무였다.


“아아. 어머니 나무의 축복이.”

“저희 숲지기를 늘상 굽어살펴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어머니 나무시여.”

“위대한 어머니시여.”


찬탄과 경외가 지고지순하게 쏟아지는 마가목 나무.

나무는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를 지녔다. 무려 성인 열댓 명이 감싸도 남아돌 만큼 광막하게 거대했다.

그 위압적인 거대함만이 시선을 잡아 끄랴. 마가목은 흠결 하나 없이 온통 새하얬다.

나뭇가지, 이파리, 꽃 할 거 없이 전부 하얘서 뭐랄까.

수려 하다거나 신비롭다 같은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신성함을 진하게 풍겼다.

달의 여신이 혼돈한 대지를 두 발로 굳건히 디딘 채, 눈을 감고 정화의 숨결을 퍼트리며 스스로 나무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니 신의 자애에 우러르고 경애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맹종하는 것만이 엘브로아 일족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머니가 일군 기눙가프를 수호하며 일정한 주기마다 숲을 정화하는 것이 사명이 되었고. 하여 엘브로아에게 있어 후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참엔 열매가 다섯이니 태어날 이도 다섯이겠네요.”

“크기가 머리통만 한 것으로 보아, 자질이 꽤 뛰어나겠어요.”

“이 또한 어머니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 아니겠습니까.”


귀한 후대를 향한 관심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았다.


“아. 어린 것들을 빨리 보고 싶네요.”

“저도요. 저 중에 내 제자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러게요. 어머니께서 인연의 실을 얽어주셨기를 간절히 바라야겠네요.”


기대와 기다림이 교차하는 분위기는 화사했다.

소소한 연회를 다양한 과일과 과실주로 즐기는 무리 속, 외따로 동떨어진 남자가 있었다.

백발에 가까운 옅은 은발과 은안.

색의 흐릿함과 별개로 그는 누구보다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자연스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으나, 무심한 그도 수다 삼매경인 무리도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흡사 서로 간에 불의 바다라도 놓인 양. 넘을 수 없는 가시덤불이라도 촘촘히 박힌 양 데면데면했다.

그를 개의치 않고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홀로 있었다. 멍하니 마가목 나무만 바라보면서.

그러다 돌연 남자가 고개를 틀어 숲의 외곽 쪽을 직시했다. 가뜩이나 옅어 하얗게 보이기까지 하는 동공이 순간 공막과 뒤섞였다.

그때,


“······미하엘.”


무리의 상석에 있던 이가 지척으로 와 그를 불렀다.

낮은 소리의 진폭에도 무언가를 방해받았다는 듯 남자, 아니 미하엘의 눈살이 잘게 찌푸려졌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의 변화였을 뿐이다.

미하엘은 평소처럼 자신을 부른 남자를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노른.”

“또 혼자 있는 겐가?”

“귀찮게 구는 자가 없으니 이게 편합니다.”

“그래도 연회인데 미하엘 너 혼자 둘 순 없지. 같이 포도주나 마시세,”

“아, 포도주는 이따 마시는 것이 좋겠군요. 연회가 끝나고 수장인 그대에게 청할 것이 있으니.”



***



연회가 파한 새벽,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는 둘이었다.


“불허한다.”


비집을 틈도 없겠다 싶게 단호한 누군가.

서른 초반의 남자, 아니 노른은 양반다리를 풀고 천천히 일어섰다. 격하지 않았다. 미하엘이 건넬 청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여 노른의 움직임은 정적이되 유약하지 않았다.

그가 흐르는 물처럼 고요히 일어선 후였다. 사분사분한 바람이 어깨를 덮는 그의 짙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명확한 실체가 없는 것이 바람일 진데, 민들레 같은 형태로 나부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노른은 바람의 친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제 의사를 재차 피력했다.


“몇 번을 청해도 요청을 불허한다, 미하엘.”


바르숨이라니······.

노른은 정면의, 방만하게 널브러진 이를 직시했다.

저게 앉아있는 건지 누운 건지. 헷갈리는 꼴을 한 이, 미하엘은 별다른 표정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녀석이 청한 바르숨.

쉽게 풀자면 영면을 뜻한다.

열매로 맺힌 탄생처럼 어머니 나무로 돌아가 깊은 잠에 빠지는, 죽음의 다른 말이다.

그를 제가 허락할 리 만무했다.

미하엘 역시 어떤 답변을 들을지 예상한 모양이다. 어조가 단조로운 것을 보면 말이다.


“바르숨은 숲지기라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지 않나.”

“그렇긴 하나, 대드루이드는 예외일세.”

“작금은 아니라도 후일, 나도 노른 너도 돌아가야지. 어머니 나무로. 생의 시작점으로.”

“······.”

“아, 그 시기를 정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고.”

“그놈의 자유.”

“이 늙은이의 소원이라니까.”

“나와 동갑이면서 그놈의 늙은이 소리는 허구한 날.”

“쳇.”

“다시 한번 말하지. 일족의 수장으로서 명하겠네. 미하엘, 너의 바르숨을 불허한다.”

“하여간 고집하고는.”

“너도 만만치 않아. 우리가 이 주제로 몇 번이나 실랑이하는지 알고 있나?”

“글쎄.”


역시나.

무심한 미하엘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달리 노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봄볕이 따사롭던 200년 전 미하엘이 바르숨을 처음 청했다.

친우의 성정을 알기에 예상했었다. 올 게 왔구나 싶으면서도 어찌나 섭섭하고 당황스럽던지.

노른은 미간을 찌푸리며 미하엘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초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마가목 나무로.


통상적으로 만물은 시간이 쌓이면 낡고 퇴색된다. 당연한 이치일 진데, 마가목 나무는 언제나 수려하고 고결했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고.

하여 시작의 궤적에 영원토록 고여버린 시간 같기도 했다.

그 단편을 부여받았기 때문일까.

마가목에서 태어난 엘브로아 일족은 한정된 무한성을 누린다.

특별한 굴곡이 없는 한 대략 2,000년 정도의 시간을 살므로.

그날 동안 엘브로아는 수호자로 산다. 물론 열매가 익을대로 익으면 다음을 기약하며 저물듯 그들은 1,500년을 넘기고부터는 바르숨을 청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숲지기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나······.


“보아하니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것 같군, 미하엘.”


노른은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수장으로서 어느 때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 평정심이다. 감정적 동요를 내보여선 안 되나 예외가 있다.


“그렇다면 형제이자 친우로서 부탁함세. 바르숨을 유예해주게.”

“치사하게.”

“······.”

“저 불리하면 매번 우려먹는다니까. 그런데도, 그 수법을 알면서도 한번을 이기질 못하는 나도 참.”


미하엘은 결과마저 예측한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긍의 의미였다.

아니, 정확히는 체념이려나.

뜻을 강제로 꺾은 노른이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이기적인 욕심인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숲을 지탱하는 한 축인 대드루이드가 필요해서다.


공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대외적인 명분은 그렇지만 사적으로는······.

미하엘이 바르숨에 들면 저는 혼자 남는다.

수장만은 수명을 꽉꽉 채우고 떠나야 하기 때문.

남들이 보기에는 별 시답잖은 이유일 것이다.

안다. 어리광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고집을 부리는 까닭은······ 미하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게 있어서다.

그것은 탄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와 미하엘이 열매로 맺힌 해, 그해의 열매가 두 개뿐이던 그때부터.

인간적인 표현으로 둘은 쌍생이나 다름없다. 거기서 비롯된 유대감은 노른이라는 개체를 구성하는 가장 큰 뼈대였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파생될 예정된 고독이 자꾸만 상실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하엘을 붙들 수 있는 건 없다. 애초부터 일족은 그에게 족쇄가 되지 못하기에.


‘하아.’


노른은 차오르는 한숨을 밀어 넣었다.

일족에게 애착이 없으면서도 미하엘은 형제로서 청을 하면 그게 무엇이든 결국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다. 무엇이든 지지해주었고.


‘······그런 녀석이 내 곁에 없었던 적은.’



***



노른은 성역(聖域)을 떠나는 미하엘의 뒤태를 물끄러미 보았다.


‘······1년의 유예기간이라.’


유예는 보류일 뿐이라서 헤어짐은 확정이었다. 그 사이 형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울적한 노른의 뒤편.


“흥. 하여간 대드루이드님은 항상······.”


열 살 남짓한 아이 서넛이 노른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수장을 보필하는 권속이다. 원래라면 노른 가까이 있어야 하는 이들인데, 미하엘이 있을 땐 무서워서 숨어있다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무례해! 수장님을 대하는 대드루이드님의 태도가 너무······.”

“맞아. 건성이야, 건성! 불경하게!”

“봤지? 아까도 막 이렇게 드러누우셔선.”


남자아이 하나가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미하엘이 했던 자세를 고대로 따라 하는 거였다.

건들건들 허우적대는 몸짓을 다른 아이들도 따라 하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속내만큼 입담이 거침없었다.

수장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미하엘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 만큼 말이다.


“근데 희한하지 않아? 일족들과 다 같이 있을 모여 있을 땐 꼬박꼬박 수장님께 존댓말 하시잖아.”

“그러니까. 둘만 있을 땐 반말, 모여 있을 땐 존댓말.”

“어어? 앞과 뒤가 다른 건 가식인데.”

“가식은 나쁜 거라고 하셨어, 수장님이.”


거침없는 규탄의 장에 가만히 듣고 있던 노른이 풀쑥 끼어들었다.


“······도리어 난 미하엘의 반말이 기껍구나.”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미를 파악해보려고 조막만 한 머리통들이 몹시 분주했다. 이만하면 풀이해줄 법한데 노른은 첨언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의 머리통을 쓰다듬을 뿐.


‘반말은 곧 날 편히 여긴다는 뜻이니.’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미하엘.

그런 녀석의 반말은 곧, 친근함의 다른 표현이었다.

유대였으며 아직은 이곳에 매여있다는 표식이라 노른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로 인해 사실은 저 또한 숨통이 트였다.

수장으로서의 짐을 함께 짊어질 친우가 곁에 있고, 녀석 앞에서만큼은 저도 지기로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


노른은 아이들의 머리통에서 거둔 손을 결실의 끝물인 열매로 뻗었다.

손길은 어딘가 안타까워하기도 더없이 냉랭하기도 했다. 해석하기 어려운 이중성이 미묘하게 손아귀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알아채지 못한 아이들은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조잘거렸다.


“칫. 수장님은 너무 무르세요.”

“솔직히 대드루이드님은 숲지기 같지 않으세요. 숲을 수호하지 않으시고, 숲의 생태 연구도 잘 안 하시고.”

“선대 대드루이드님들과 비교되게 너무 게을러요.”“맞아요. 하나뿐인 대드루이드면서.”

“게다가 맺혔을 때 땅에 끌리는 바위 크기였다면서요.”

“그런 크기는 역사상 몇 없었다고 하셨잖아요?”

“응응. 보통 그 크기면 수장님이 된다고 배웠잖아.”

“그렇게 능력이 대단하신데 왜 맨날 빈둥빈둥 잠만?”


열매의 크기는 심안(心眼)의 깊이와 맞닿아 있다.

가지고 싶다고 함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미하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이들이 보기에는 태만했다.


“게으르기만 하면 다행이게?”

“참석 필수인 대연회조차 잘 참여 안 하시잖아.”

“오늘처럼 참석해도 뭐 살갑지도 않으시고.”

“어쩌다 대드루이드님을 마주하면······ 그분의 미간 주름이.”

“나는 말이야. 그분의 막 무심하고 가느다란 눈을 슬쩍 보기만 해도 한기가······, 으윽!”


아이들이 양팔을 문지르자 노른은 다시금 작은 머리통을 어루만졌다.

존경받아 마땅한 이의 뒷담을 가만히 듣고만 있는 건, 아이들이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사리 분별을 할 줄도 알아, 반드시 저와 있을 때만 드물게 떠든다.

다만, 애정 어린 불평이라도 이쯤에선 미하엘을 두둔할 필요가 있었다.


“찌푸리는 건 너희 때문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하지 않든. 미하엘은 보기보다 다정한 녀석이란다.”

“어휴. 수장님의 저 콩깍지는······.”

“참이래도. 너희가 헤아리는 세계와 미하엘이 헤아리는 세계가 달라서 그렇단다. 하여 항시 힘겨울 수밖에 없지. 그 표정 또한 거기서 기인한 거고.”

“에이. 심안이 깊으신 수장님은 우리한테 안 그러시잖아요.”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굳건한 믿음이 쉽사리 깨질 리가.

노른은 더 첨삭하지 않고 복잡다단한 눈길을 남쪽으로 돌렸다. 남쪽은 미하엘의 영역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기눙가프에서 가장 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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