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드루이드의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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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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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작품등록일 :
2024.08.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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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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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DUMMY

4화. 앞으로 1년(1)



인간 아이를 절벽산 입구에 두고 온 후였다.


“걷기 귀찮네.”


미하엘은 뒷짐을 쥐고 기눙가프의 초입에서 멈추어 섰다.

목표가 있던 아까와 달리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였다. 무척 단순한 여정인데, 만릿길이라도 되는 양 멀어 보였다.

두 발로 직접 움직이는 것이 귀찮다면······.


“음. 어디······.”


대신할 것을 찾으면 될 터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한낮은 정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로 인해 하얀 종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묽게 번지는 그림자가 더욱 선명했다.

짙은 차콜의 그림자를 잡아채기 위해 미하엘은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낮고 느른한 장음이 입술 새로 미끄러지자 창공을 가르던 그림자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퍼덕거리는 날갯짓이 점차 가까워졌다.

멋스러운 잿빛 날개 한쪽만 해도 웬만한 교목 크기라.

후우웅!

인위적으로 생성된 거센 바람이 허공을 헤집어댔다.

뿌연 먼지바람을 날름거리며 지상에 착지하는 날것. 그것은 머리통의 뿔만 하얗고 다른 곳은 잿빛인 흰머리 시체매였다.

시체매는 이름 그대로 시체라면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새였다. 대식가에 포악함으로도 으뜸이라 하늘의 제왕이다.

감히 길들일 수 없는 마조(魔鳥)가 대드루이드를 향해 몸을 한껏 낮췄다.

키잉-

복종의 뜻을 내비치자 미하엘은 느긋하게 시체매의 등에 올라탔다.


“날 데려다주려무나.”


다소 건조한 부탁이 연이었다.

말투가 어떻든 태도가 어떻든 중요한 것은 강제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기실 자연체인 숲지기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굴종시킬 수 있다. 상대의 의지를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다는 의미.

능력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숲지기들은 누군가를 강제로 복속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권유와 청을 할 뿐이다.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완전한 합의를 얻어낼 수 있으며,

상대와 교류함으로써 완전한 힘을 끌어낼 수 있으며,

상대가 감복함으로써 완전한 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거였다.


키이이잉-

흰머리 시체매는 미하엘의 뜻에 따라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흠. 그동안 슈메링이 말한 것을 해치워 볼까?”


영역을 돌보는 것 말이다.

계획 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행동에 옮겼다.

여태껏 그리 살았다.

숲을 거닐다 눕고 싶으면 아무 데나 드러눕고, 먹음직스러운 과실이 있으면 실컷 따고 그렇게.

무엇을 하든 거칠 것이 없었다.

어떤 포악한 마물도 독이 든 과실도 숲지기를 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여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 그게 미하엘이었다.


“······.”


영역을 돌보는 흉내를 얼마간 냈을까.

힘찬 날갯짓에 비해 흔들림이 전혀 없는 탓이리라. 금방 싫증이 난 미하엘은 졸음이란 핑계를 합리화했다.

흰머리 시체매의 몸통이 워낙 커서 편안하기가 침대에 버금갔다. 해서 저항하기 어려웠다. 포장을 끝낸 미하엘은 제집처럼 몸을 누였다.


“그나저나 슈메링이 또 잔소리하겠네.”


가물거리는 동공 사이로 수놓아진 별이 무작위로 들이쳤다.

흘러버린 시간은 기다림의 무게이기도 했다. 그러니······.



***



“어찌 이리 늦으셨어요?”


주인을 기다리던 슈메테르링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별일 없었을 게 자명한데도 제가 곁에 없었을 시간을 가늠하기 위함이리라. 그녀는 미하엘을 꼼꼼히 살폈다.

아무래도 인간의 영역과 겹친 곳에 갔다는 것이 걸려서였다.


“별일 없으셨어요?”

“딱히. 귀찮은 것 빼곤.”

“인간 아이는요?”

“곱게 두고 왔지. 에르네스토로 향하는 길목에.”

“슈마이켈이 아니라요?”

“본래는 그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트리폴리움의 꽃송이 넷이 만발해서.”

“방향을 트신 거예요?”


에르네스토로 이어지는 구릉지가 군생지인 트리폴리움.

어려운 이름 대신 행운초라 불리는 소담한 노란 꽃은 행운을 불러온다는 미신을 가졌다.

한줄기에 뭉쳐있는 네 개의 꽃봉오리, 그중 하나만 피어도 대운이거늘 무려 네 개가 만개했다.

아이에게 어느 쪽이 길할지 빤하지 않은가.


“필시 길한 징조이긴 한데 괜찮을까요? 에르네스토는 워낙 한갓져서.”

“알아서 살길 찾겠지.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미하엘은 무심히 답했다.

관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태도에 슈메테르링 역시 더는 입에 담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인간의 행방이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말수 적은 제 주인과 대화할 거리가 생기자 물고 늘어진 것뿐이다.

조금 더 말을 나누고 싶은데 어쩐다?

슈메테르링이 고민하는 사이, 미하엘은 길게 늘어진 눈가리개를 문질렀다.


“아. 새로이 피어난 생물이나 마물종의 변화는 없더구나.”

“······주인님!”

“마땅한 일을 하였을 뿐이니 끈적하게 쳐다보지 말고.”

“이런 사소한 일로 제가 왜 끈적해지는 건데요? 그게 다 주인님이 게을러터져서잖아요.”

“에구구. 새로운 바가지가 이리 또.”

“꼼꼼히 살피셨지요? 금방 싫증 내고 주무시지는 않았고요?”

“전혀.”

“영 못 미더운데.”


슈메테르링은 샛눈으로 뻔뻔한 미하엘의 안색을 따져보았다.

의심스러운 척은 하고 있지만, 그녀는 잘 안다.

원체 엉덩이가 무거운 양반이라서 그렇지 한번 작심하면 기어이 끝을 본다. 집요하고 치밀하다.

오히려 그런 성정 탓에 시작을 잘 안 하는 걸지도.


“할 일도 끝냈겠다, 편히 자야겠어.”

“으휴. 며칠 만이에요!”


슈메테르링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천 년이건 만 년이건 고여있는 기눙가프에서 변화랄 게 있으랴. 매양 똑같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살아있는 시체와 다름없어서 할 일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오로지 주인인 미하엘을 위해!

그렇게 어거지로 찾아낸 것을 해치워버렸으니 더는 미하엘을 말릴 도리가 없었다.

즐거움이라고는 흔적도 비치지 않는 주인의 저 메마른 등 좀 보라지.


‘부디, 주인님을 기쁘게 할 변화가 생기기를.’


슈메테르링은 간절하게 바랐다.

당장 내일 주인이 바르숨에 들어도 좋다. 그가 영면에 들면 저 또한 주인의 심장에 스며 잠들 테지만 차라리 작금보다 나을 터.

다만······ 주인의 환한 미소를 한 번만, 단 한 번만 보고 싶었다.

주인과 함께 살아온 기나긴 세월 동안 미소 쪼가리 몇 번 본 게 다다. 그래선지 더 보고 싶어졌다.

가져본 적 없는 탓에 슈메테르링의 막연한 소원은 그것이 되었다.

주인이 환히 웃는 모습 보기.

영면에 들기 전 이루어졌으면 하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



매양 똑같은 시간이 흐른 수일 후.


“허. 미궁 나비의 질 나쁜 수작질에 걸린 건가?”


잠에서 깬 미하엘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눈앞에 더 꼬질꼬질해진 인간 아이가 서 있었다. 버리고 버려도 되돌아오는 것이 악몽과 유사했다.

깨어날 수 없는 악몽과.

미궁 나비의 분진을 덮어쓰면 헤매게 되는 그런 악몽 말이다. 자력으로는 탈출할 수 없어 누군가가 미궁 나비를 죽여야만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애초에 선택을 잘못했어.”


삐쩍 마른 목줄기를 꺾어버렸어야 했다.

그러면 오늘과 같은 사태를 맞이하지 않았을 터이다. 드문 후회를 짓씹은 미하엘은 시선을 숲의 중앙에 두었다.

어머니 나무가 있는 곳.

이제 와 뜻에 반하는 짓을 행한들 신벌(神罰)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어머니 나무는 숲지기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었고, 어떤 것도 강제하지 않았다. 더없는 은총만을 베풀어 줄 뿐.

신의 대자대비에 기대어 꼴리는 대로 해도 되나······.


‘저것을 살리고 싶은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미하엘은 되도록 유한 마음을 품었다.

그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사, 살려주세요.”


농아(聾啞)처럼 굴던 인간 아이가 더듬더듬 내뱉었다.


“호오?”


뜻밖의 전개에도 미하엘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단지 저것이 살려달라 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부했다.

목숨을 아무 때나 취할 수 있는 제게 구걸하는 걸까.

아니면 어린 것을 이곳에 버린 자들에게서 구해달라는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폐······ 끼치지 않을게요.”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아이의 의지였다.

꼬질이의 붉은 눈이 타오를 것처럼 미하엘을 직시했다.

그간의 태도로 미루어 의욕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간을 본 거였다. 눈을 마주쳐도 되나, 말을 해도 되나 그런 것들을.


“맹랑한 것.”


감히 저를 시험했단 말이지?

화를 내야 하지만 미하엘의 마음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누차 말했듯 늙은이라서 그렇다. 오래 묵은데다 죽을 날을 받아놔서 그런지 융통성이 망망대해처럼 넓어졌다.

늙어가는 것의 유일한 장점이랄 수 있다.

거기다······.


“이리된 거, 1년만 데리고 있어야겠다.”


미하엘의 뜻밖의 결정에 놀란 슈메테르링이 되물었다.


“1년이요?”

“그때면 마침 디베르텐테의 시기니 말이다.”

“아아. 그러네요. 숲지기님들이 300년에 한 번씩 인간계로 외유하시는.”

“그때, 누구에게든 저것을 맡기면 되겠지.”


그리된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엄두는 못 낼 것이다.

다 계산이 서서 결정이 쉬웠다.

자신만만한 미하엘에게 슈메테르링이 고려치 않은 것을 콕콕 집었다.


“한데 주인님, 인간 아이를 키우는 게 과연 쉬울까요?”

“꽃도 나무도 이곳에선 알아서 자란다. 저것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다 치더라도 학업은요?”

“학업?”

“아카데미를 보내고 그런다고 하셨잖아요. 일부에 해당하는 거긴 하지만.”

“그런 건 1년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으음.”

“되었다. 정히 신경 쓰이면,”

“기,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저, 혼자서도 뭐든 잘해요.”


화상이 심한 왼쪽 눈을 가린 아이가 필사적으로 끼어들었다.

살길이 생기자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태도는 그랬지만 적안은 메마르고 공허한 채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

미하엘은 눈가리개 끝을 비비다가 대화를 강제로 끝맺었다.


“내가 그리 정했으니 왈가왈부를 허하지 않겠다.”

“······성심껏 봉행하겠나이다.”


미하엘이 강경하자 슈메테르링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정 걸리적거리면 죽여버리면 된다.

인간 목숨 하나 거뒀다고 제 주인이 분노하거나 저를 내치지 않을 테니 근심을 사서 할 필요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슈메테르링이 생각에 잠긴 틈, 미하엘의 삐딱한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꼬질이는 꼬질이답게 더러웠다.

땟국물에 핏물까지 엉켜 기괴하고 음산하기까지 한 터라,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할 지경이었다.


“잠깐 맡는 거라도 이젠 내 것이니.”


각설이 같은 몰골은 면해야지 않을까 싶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미하엘은 아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느릿한 손길에조차 아이는 움찔했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용기는 가상했으나 그러면 뭐 할꼬.

아이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뚱이를 가누지 못했다.


“순환하라. (گردش، دوران، چرخش، چرخ)”


미하엘의 손끝에서 움트는 싹처럼 피어나는 고어, 그것은 치유 마법이었다.

경건한 글자들이 스며들자, 아이의 떨리던 몸도 진정되고 떨어져 나간 살점들도 아물었다.

특히 화상에 의해 실명해 버린 왼쪽 눈이 복원됐다. 실로 기적이었다. 신이 아니면 행하지 못할 재생에 아이의 입이 벌어졌다.


“시, 신이세요?”

“그저 한낱 숲지기일 뿐이다.”

“숲지기······.”


아이는 심장에 아로새길 것처럼 같을 말을 되뇌었다.

어찌 된 까닭인지 남자의 뒤에서 광채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너무도 신성했다. 그리고 너무도 눈이 부셨다.

아마도 그는 유희를 나온 신이 아닐까.


‘······설령 신이 아니라도 대마법사인 건 확실해!’


멀끔해진 왼쪽 눈을 연거푸 감았다가 뜬 아이는 의심 없이 단언했다.

어떤 의사도 단박에 고치지 못할 상처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그들이라면 가능하다.

전설이나 동화책에 종종 등장하는 여신의 사자인 대마법사라면.


달이라는 천으로 짠 듯한 은발과 은안.

성별은 시대마다 달라져도 외양의 묘사만큼은 변한 적이 없다. 꼭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처럼.

대마법사는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는 멋진 용사이다. 또한, 몇 없는 마법사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이다.

아이 역시 수많은 책 속 대마법사를 보며 꿈을 꾸었더랬다.


‘상상하던 것과 조금 다르지만······.’


아이는 허공을 보는 척 남자를 흘끗 곁눈질했다.

이실직고하자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달랐다. 상냥하고 인자한 노인 대신 잘생기고 예쁜 아저씨일 줄은.


‘그래도 이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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