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드루이드의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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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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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작품등록일 :
2024.08.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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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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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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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2화.

DUMMY

12화. 수장과 만나다



“후.”


니콜라이는 화덕 앞에 쪼그려 숲의 공기를 비강에 한껏 머금었다.

개운했다.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산뜻해서 한 몸인 듯 달고 있던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썩은 나뭇잎 마냥 한 편에 눌어붙어 있던 감정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며칠 전의 대성통곡이 뜻하지 않은 효과를 불러온 셈이다.

오롯하게 긍정뿐이라기에는 민망한 구석도 몇 할쯤은 있지만······.


“킁.”

“라이, 니콜라이.”


슈메테르링이 파우더 블루빛 드레스 자락을 흔들며 다가왔다.

과한 다정함에 소름이 끼쳐서 니콜라이는 화덕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껍질에 숨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선 살랑대는 드레스만 흘끗 보았다.

최고급 비단으로 짠 옷은 단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옷이네?’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한데, 슈메테르링의 드레스는 가슴 부분이 U자로 파이고 리본이 촘촘하게 달린 요즘 옷이었다.

유행을 선도한다는 수도의 귀부인들이나 입을 법한.

수도승과 비슷한 옷만 걸치는 미하엘과 달랐음에도 오늘에서야 알아챘다.

예쁜 옷이야 입을 수 있다. 입을 수 있긴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숲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하지도 않는데 유행을 알 수 있나?


“니, 콜, 라, 이.”

“······으응?”


코앞에서 뿜어지는 입김에 니콜라이는 또다시 움칠했다.

슈메테르링이 허리를 굽힌 채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생각에 빠져 대꾸하지 않자 심통이 난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물었는 줄 알아? 응?”

“······.”

“어휴. 주인님 본 적 있어?”

“아뇨. 며칠째 코빼기도 못 봤어요.”

“그으래?”

“또 어디서 주무시고 계신 거 아니에요?”

“흐응. 그럴지도 모르지만······.”


히죽대는 슈메테르링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영락없이 놀림거리를 찾은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며칠 전 라이 네가 주인님의 소맷자락을,”

“우악!”


감자 캐는 것도 아니고, 불쑥 튀어나온 흑역사에 니콜라이가 괴성을 질러도 슈메테르링을 막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제 소맷자락을 죽죽 당기며 그때를 똑같이 재현해냈다.


“막 이렇게 붙들고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가출하셨잖아.”

“가출까지는······.”

“주인님이 당황하시는 거 진짜 오랜만에 봤어. 몇백 년만인지. 라이 넌 정말 대단해.”

“끙. 그만 놀려요.”

“놀리는 거 아닌데. 이건 감탄이고 찬사야.”


슈메테르링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열정적인 소리에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여실하게 드러났다. 환희에 젖은 얼굴은 반질반질했고 그녀를 두른 넝쿨의 꽃들은 만발했다.

자체 발광 그 자체였다.

목숨 걸고 솔직해지자면 미하엘은 제가 아니라 슈메테르링 때문에 가출했다. 그것이 올바른 진실이다.

그녀가 자꾸 그때를 우려먹으며 잠을 방해하자, 수도원이 싫으면 수도승이 떠나는 거라며 미하엘이 나가버렸더랬다.


“라이.”

“예?”

“그때처럼만 해. 그때처럼 주인님을 편하게 대해.”

“그랬다간 분명 쫓겨나게 될걸요.”

“왜에?”

“제가 한 번 더 울면 주인님의 가출이 몇백 년으로 늘어날 것 같아요. 그럼 누나가 절 쫓아낼 거예요.”


니콜라이의 단언에 슈메테르링이 깔깔거리며 폭소했다.

화통한 웃음으로 시인하고선 움찔한 니콜라이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다들 거리감의 기준이 제멋대로였다. 자신들이 다가올 땐 허용 범위가 무한이다가 반대가 되면 철벽을 세운다.

하나같이 누구를 닮았는지.


“이것도 분명해. 라이 네가 혼나서 울 일은 없을 거라는 거.”

“설마요.”

“정말이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진실만을 말했어.”


슈메테르링이 춤을 추듯 한 바퀴 돌았다.

느릿한 회전을 따라 집과 마당 곳곳에 그녀의 시선이 잠깐잠깐 머물렀다. 추억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주인님은 퍽 상냥하셔. 제 그늘에 둔 자들에 한해서는 한계선이 무한대야.”

“······.”

“시험해 봐도 좋아. 온갖 씨앗을 모아둔 방을 마구 헤집을지라도, 마당을 전부 파헤치고 더럽힐지라도, 설령 집에 불을 질러도 화내지 않으실 거야.”

“그것도 설마요.”

“못 믿겠으면 하나라도 시도해 봐.”


니콜라이는 잠자코 슈메테르링의 확언들을 곱씹어 보았다.

여러 각도로 검토한 결과, 아무래도 그녀의 경험담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묘하게 구체적이라서다.


“다 해보신 거죠? 저한테 말한 것들.”

“칫. 눈치가 빨라선.”

“정말 집에 불까지 질렀어요?”

“고의는 아녔어. 막 터지기가 되고 넘치는 힘을 감당 못 해서 그만······.”


오랜 세월에 걸쳐 씨앗을 모아둔 방을 폭파할 뻔했단다.

속죄하기 위해 땅을 가꾸고 씨앗을 얻으려다 분화구 닮은 구덩이들만 생성해냈고.


“만약 저였으면 누나를······.”

“그러니까. 별 사고를 다 쳤는데도 주인님은 ‘괜찮다.’라고만 하셨어.”


까마득한 옛일에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슈메테르링의 얼굴에서 화창함이 걷히자, 니콜라이는 그간 품고 있던 의문 하나를 꺼냈다.


“좋은 분인 건 알겠는데······. 왜 저와 친해지길 바라는 거예요?”

“······.”

“그런 느낌을 계속 받았어요.”

“······너라면 혹, 주인님을 웃게 할 수 있을까 해서. 흘려넘길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해서.”


급격히 어둑해진 슈메테르링의 얼굴이 기괴해 보였다.

신의 목소리를 듣길 간절히 바라고 바라다 돌아버린 구도자 같다고 해야 하나. 절박하고 음울한 집착은 한없이 순수하고 어두웠다.


“마냥 받아준다는 것은 그저 흘려보내 버리는 것과 같으니까. 심장에 담기지 않는 거니까.”

“······.”

“이대로 주인님이 바르숨에 들면 날 잊겠지?”

“바르숨이요?”

“영면에 드는 걸 말해.”

“아, 죽으면 끝 아닌가요? 스틱스를 건너면 안 잊고 싶어도······.”

“바르숨은 그저 맞물린 순환일 뿐이야. 죽음은 다음으로, 생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


대화하다 보면 머릿속이 빙빙 꼬인다.

개념이나 인식 자체가 달라서 그런지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어렵다. 이해도 잘 안될뿐더러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금 더 크면 달라질까.

열 살쯤? 아니면 성인으로 인정받는 열일곱 살쯤?

니콜라이의 어물거림에 슈메테르링이 그늘진 안색을 걷었다. 살포시 미소를 짓고선 그녀는 또다시 홀로 춤을 췄다.

드레스가 마치 포말 이는 바다와 같다. 잠잠하지 않고 끝없이 풍랑 치는 그런 바다와.


“풋. 라이 너 또, 심각해졌다.”

“그야 누나가······.”

“주인님의 가출은 염려하지 마. 어차피 내일이면 돌아오실 수밖에 없어.”

“내일이요? 내일 무슨 일이 있는데······, 아!”


니콜라이는 깜빡 잊고 있던 중요한 소식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었지?

어떤 사람일까?



***



“······크다.”


니콜라이는 고개를 등판에 닿을 만큼 뒤로 젖혔다.

체구에서부터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이 실제 한다면 저럴 것 같다.

6피트 4인치(193cm) 정도 되는 신장에 짙은 은발과 은안. 떡 벌어진 어깨와 당당한 보폭이 그야말로 산중의 왕이었다.

······저 사람이 엘브로아 일족의 수장.


“이놈이야?”


남자가 허리를 숙여 니콜라이를 뜯어보았다.

온화한 눈빛과 미소, 거기에 말투마저 갓 구운 빵처럼 따끈한데······ 왜, 뒷골이 쭈뼛 서는지 모르겠다.

굶주린 사자를 만난 재수 없는 토끼가 된 것 같았다.


“연약하군.”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 나무의 축복이 깃든 엘브로아의 수장님을 뵙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댔다. 니콜라이는 힘껏 미하엘의 소매를 쥐고 예의를 갖췄다. 방패막이가 있어서 덜 무서웠다.


“요놈 맹랑하네?”

“맹랑하지.”


남의 편만 들어 망할 주인이 된 미하엘이 동조했다.

암구호인가?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노른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니콜라이를 빤히 보았다. 시선을 잘만 맞춘다.

모든 엘브로아 일족이 미하엘 같지 않나 보다.

눈가리개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미하엘과는 눈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는 빗겨본다. 언제나 시선이 엇갈려서 엘브로아 일족의 특징이라고 단정 지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미하엘 님만?

밀어뒀던 의구심이 솟구친 순간, 노른이 미하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일단 가세. 미하엘 네가 담근 포도주 마시며 이야기 나누게.”


노른의 주도하에 마당에선 술판이 벌어졌다.

편히 앉은 건 노른과 미하엘뿐이고 사이에 낀 니콜라이는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불편해도 티를 못 냈다.

미하엘의 뒤편에 서 있는 슈메테르링이 딱딱했다.

처음 보는 표정과 기색에 덩달아 긴장이 끌어올려져 죽을 맛이었다. 수장에 대해 편히 말해서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이런 사이면 언질이라도 좀 해주지.’


오갈 데 없는 원망까지 씀풍씀풍 솟을 때였다.

노른이 포도주를 들이켜며 비어있는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찌하여 그리 불편하게 있어? 미하엘의 터지기면 내 곁붙이나 다름없다고 누차 말하였는데. 이리 오게.”

“서 있는 지금이 편합니다.”

“융통성이라곤 없어. 아니 그런가? 미하엘 널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날 안 닮아 천만다행이지.”

“네가 어때서? 현명하고 진중하고 사려 깊고 팔방미인이지 않나.”


······팔불출이었다.

갓 낳은 새끼를 물고 빠는 어미 개와 비슷했다. 형제라고 하더니 구제 못 할 콩깍지가 너무 깊이 박혔다.

푼수 같은 모습에 긴장감이 느슨해진 찰나였다.

마치 때를 노린 것처럼 니콜라이와 노른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한 봄볕의 기운에도 뼈가 시렸다.


“그나저나 니콜라이라······. 연약한 부스러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군.”

“당사자 맘에 들면 그만이지 무얼.”


이 중에 만사태평한 건 미하엘이 유일했다.

술을 마시는 건지 조는 건지,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고 있다. 쇠심줄보다 질기고 무딘 신경줄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승리자라니. 미하엘 너에게 딱 하나 없는 것이 바로 이름짓기인 거 아는가? 슈메테르링만 해도 그렇네.”

“슈메링은 또 왜?”

“대지에 뿌리박힌 꽃의 정령에게 ‘나비’라는 뜻은 놀림일 뿐일세.”


노른의 눈빛이 게슴츠레해졌다. 금화를 실은 상선을 발견한 해적 같다. 원하는 바가 따로 있는 듯싶다.

그게 무엇인지 니콜라이로선 짐작할 수 없었지만, 슈메테르링은 아닌 모양이다. 그녀의 수려한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뭐 별수 있나. 더 따지는 것은 월권이니 네 체면이나 세워야겠네.”

“······.”

“입방정 떨지 못하도록 나에게도 별호를 지어주게.”


노른이 속셈을 드러내자 슈메테르링이 ‘어쩜 포기를 안 해.’라고 웅얼거렸다.


“수장님, 저의 주인님을 곤란에 빠트리지 마셔요.”

“곤란에 빠트리다니?”

“주인님께서 제게 약조하셨답니다. 특별한 이름은 오직 슈메테르링, 저만이 얻는 특권이라고요. 대드루이드로서 부여한 그것을 영원히 누구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요.”


슈메테르링이 한 자 한 자 힘주었다.

절대 숟가락 얹도록 두지 않겠다는 쐐기박기라 노른의 동공마저 가늘어졌다.

이거······.

웃긴 비유지만 그거 같다. 막내를 두고 다투는 첫째와 둘째. 미하엘을 막내라 하자니 거북스럽지만 어쨌든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거다.

그러니 노른 입장에선 이름을 부여받은 슈메테르링이 거슬릴 수밖에 없다.


“흥. 별호 따위야.”


피식 웃은 노른이 대놓고 미하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접촉을 꺼려도 형제인 자신만은 예외라는 것을 과시하는 거였다. 그가 계속 미하엘에게 치대자 보다 못한 슈메테르링이 노른의 팔을 치우려 시도했다.

물론 헛손질할 뿐이다. 수장의 신체를 함부로 만질 수 없어 그녀의 약만 바싹 올랐다. 악조건에 처하자 ‘별호도 못 받으실 분이.’라고 약을 올렸다.

한 살배기도 안 넘어갈 도발.

거기에 홀랑 넘어간 노른이 ‘포도밭은 날 위해 심었는데? 내가 포도주를 즐겨 마셔서.’라고 맞불을 놓았다.

으스대다가, 미하엘이 덮은 외투가 벌어지면 즉각 여며준 뒤 또 으스대고를 반복했다.

질세라 슈메테르링 역시 다른 쪽 외투를 신경 쓰며 ‘이런 수발은 영원히 저의 몫이에요. 주인님이 그러라 하셨으니까요.’라고 2차 도발을 넣었다.


유치한 난장.

이 와중에 꾸벅꾸벅 조는 미하엘이야말로 위대하다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서 빵으로 탑을 쌓든 토막살인하든 잔다. 시늉이 아니라 진짜로 새근새근 잔다.


‘아이고.’


어른들의 작태에 니콜라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수장이래서 진중하고 멋질 줄 알았는데 예상을 깨다 못해 이건 뭐······.

어른의 견본이 왜 다 이 모양인지.


“하아.”


니콜라이는 한숨을 길게 내빼며 포도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주스가 오늘따라 쓰다.

인생이 쓰다는 것을 다시금 알아버려서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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