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드루이드의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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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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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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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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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DUMMY

17화. 겨우살이나무의 가장 여린 가지



‘잘해주는 것과 별개로 날 언제든 죽일 수도 있어.’


순전히 미하엘이 원인이다.

무심하고 무정한 주제에 최선을 다해 돌보니까.

제게 필요한 것이면 멀리해야 할 불조차 거리낌 없이 사용하니까.

혹여 미하엘이 위험에 처하면, 그 원인이 제가 된다면 슈메테르링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제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지.

냉정한 분석에 섭섭함이나 서운함은 끼어들지 않았다.

누구나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해질 수 있다. 대단치 않을 것을 짓밟을 수도 있고.


‘날 이곳에 버린 그 여자도······.’


바라마지 않는 것을 쥐기 위해 제가 방해된다며 증오했다.

언제나 살의를 불태웠고, 마력이 흐르는 제 몸뚱이를 망가트리려 했으며 기어이 죽음의 숲에 처박았다.


‘한창 축배를 들고 있겠네.’


눈엣가시를 제거했으니 오죽할까.

비소가 절로 나왔다. 잔뜩 비틀린 니콜라이의 입가로 고운 손이 얹어졌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슐라의 것이었다.


“나중에 하렴.”

“······예?”

“‘지금’은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지만 생각하렴.”

“······.”


슐라가 니콜라이의 삐뚠 입가를 정리해 주었다. 나긋하기만 하던 은색 동공에 현기가 어린 채였다.

운명을 굽어보는 예언자 같다고 해야 하나.

문장들이 상당히 묘한 구석이 있었다.

저에 대해 혹 슈메테르링이 편지로 휘갈긴 건 아닐까 싶었지만, 의심은 잠깐에 그쳤다. 남의 사연을 함부로 떠들 성격은 아니다.

세심함이나 배려 때문이 아니라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굳이 시간을 내서, 주인이 거둔 아이에 관해 서술할 정성을 쏟을 필요성을.


“어멋. 주제가 멀어져 버렸네.”


슐라는 살살 니콜라이의 뺨을 문질렀다.

연약한 것을 만지듯 조심해도 아이는 한껏 움츠러든 채 참아내었다. 흉악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흩어져버렸다.

아이가 손길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아서 그녀는 천천히 손을 뗐다.


“이곳에선, 널 해칠 수 있는 아둔한 자는 없어.”

“······미하엘 님 때문에요?”

“그분이 계신 한. 대드루이드는 어머니 나무의 총애를 받거든.”


슐라는 고개를 들어 정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끝없이 쏟아지는 햇발이 그녀의 온몸을 적시며 찰랑거렸다. 어떤 비단보다 보드랍고, 어떤 털보다 따스한 숲의 은총.

어머니 나무에 맹종하는 한 제 일족에게 숲은 영원한 호의를 베풀 것이다.

하니 가장 정결한 총애를 받는 대드루이드, 그분을 염려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는 꼴일 뿐이다.

잘 알지만······ 경애가 깊어질수록 미하엘을 염려하는 마음 또한 깊어져만 간다.


“그분의 비호를 받는 이상 넌 언제나 안전할 거야.”

“······.”

“그리고 이 숲에서 무언가를 얻어 나갈 테고.”


기연이다.

누구나 탐낼 것을 얻었으니 아이가 쥘 것은 결단코 작지 않다. 원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으리라.

귀한 인연의 값으로 부디.


“그러니 부디, 미하엘 님을 있는 그대로만 봐줘.”

“······.”

“무뚝뚝하고 직설적이라고 괜한 오해 하지 말란 거야.”

“저 그렇게 염치없지 않아요.”

“아유, 똑똑해서 귀엽다.”


고개를 내려트린 슐라는 싱긋 미소 지었다.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음에도 뜻은 확실히 전해졌다. 흡족한 그녀는 플로가의 씨앗을 아이에게 쥐여주었다.

영악해서 그런지 아이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잘 알아들었다는 신호로 주억거리고는 씨앗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미하엘 님에게 크게 서운해져도 이 씨앗을 떠올릴게요.”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


차림뿐 아니라 화법마저 인간적이었다.

별난 숲지기 슐라의 사과에 니콜라이는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 말했듯 누구나 소중한 것을 우선한다. 그 마음만은 나쁜 것이 아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말해줘서 고마운걸요.”

“예쁜 아이구나.”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여태 눈깔을 장식으로 단 것들만 만났구나? 네가 얼마나 예쁜데.”

“히히.”


니콜라이는 티 없이 웃으며 왼쪽 눈가를 긁었다.

밝은 모습이었지만 자연스럽지 않았다. 평생 웃어본 적 없는 이가 호감을 사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깊숙이 할퀴어진 내면을 조심히 헤아려본 슐라는 무언가를 더 바라게 됐다.

부디, 아이의 상흔이 잘 아물기를.

영영 평행선이었을 두 인연이 하나로 겹쳤으니, 아이와 그분 모두 행복해지기를.



***



“······집이다!”


감옥이라도 탈출한 모양새였다.

감격에 젖은 니콜라이가 만세를 부르다 풀썩 쓰러졌다.

살펴볼 법도 한 건만, 그냥 지나친 미하엘은 넝쿨 의자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털 외투를 말아 웅크리고선 눈을 감았다.

아이의 옷을 맞췄으니 제 할 도리는 다했다. 한숨 자도 잔소리는 안 듣겠지.


“보름 넘게 걸릴 줄은······.”


어려서 피곤하지 않은지, 흙바닥의 꼬질이가 하찮게 꿈틀거리며 투덜거렸다.


“힘들어서 다신 가고 싶지 않아요.”

“고생했어.”

“누나아, 미하엘 님이 말이에요······.”


니콜라이가 주절대는 동안 슈메테르링이 약차를 건넸다.

마시고 얼른 기운을 회복하라는 손짓에 씩 웃은 아이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뭐가 그리 좋다고 쓴 차를 꿀떡꿀떡 잘도 넘긴다.


“내가 죽자 살자 쫓아가는 거 알면서! 한번을 봐주질 않고 미하엘 님이 막 혼자 앞서갔어요!”

“오구, 그랬어? 주인님 못됐다.”

“엄청 못됐어요. 어른이 되어선.”

“그러게. 능력도 있으신 분이 쪼잔하다.”


잔소리쟁이가 증식했다.

인간계와 유리된 이 숲이 아이의 나쁜 기억과 두려움을 빠르게 희석하는 듯했다. 그 때문인지 아이는 눈에 띄게 활달해져 갔다.

어쩌면 천성이었을, 열악한 환경에 억눌려있던 것들이 풀려나고 있는 것일지도.

그럴수록 미하엘의 심중은 잘못 주웠다는 확신만 깊어졌다.


“다음 참엔 슈메링 네가 가련.”

“······.”

“어른인데다 능력까지 있으니 마침맞지 않누.”


미하엘은 두 배가 된 잔소리를 노련하게 받아쳤다.

전혀 긁히지 않는 무딘 신경줄에 ‘아차’ 싶은가 보다. 슈메테르링의 타격 대상이 니콜라이로 바뀌었다.


“라이, 마조를 길들여 봐.”

“마조를요? 제가요?”

“아무 새나 탔다면 여기서 슐라 님의 영역까지 반나절도 안 걸려. 하루면 왔다 갔다 했을 텐데.”

“하루······.”


니콜라이가 배신감에 찌든 표정으로 미하엘을 흘겨보았다.

보름간의 고생이 헛고생임을 알아버려서였다. 그 좋은 수단을 놔두고 왜?

원망까지 섞이자 미하엘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아이도 숲의 율법을 지켜야 할 테니까.


“이곳에 있는 것들은 저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

“너를 태우려면 내가 강제로 명해야 했을 터. 설령 부탁이라 포장한들, 나의 부탁이 부탁일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어떤 이보다 대드루이드의 언어는 무겁고 또 무겁다. 잘못 놓은 말 한마디가 생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정 편해지고 싶다면 네 능력을 길러라.”

“······그럴 거예요.”

“퍽이나. 꼬질한 하룻강아지 주제에 멀리 뛰어봤자 얼마나 갈꼬.”

“씨잉.”


미하엘의 코웃음에 니콜라이는 씨근덕거렸다.

차라리 무시하는 거면 덜 억울할 텐데, 진실을 나열하는 메마름이 다량의 화증만 생성해냈다.

콧등이 찡해졌다.


“두고 봐요. 언젠가 미하엘 님의 코를 납작 눌러줄 테니까!”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이잇!”

“500년이면 되려나? 아니면 800년?”

“무슨 빚이에요? 손주에 손주까지 대대손손 물려주게?”

“그건 두고 보자 한 네가 알겠지.”


미하엘의 말발을 이기지 못한 니콜라이가 양발을 동동 굴렸다.

얼마나 분한지 흙먼지가 폴폴 일었다. 다량으로 생성된 먼지 구덩이가 마치 먹구름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미하엘은 고고하게 잠을 청했다. 아니, 가능케 해버렸다.

무엇으로?

민들레, 그러니까 바람 정령들이 살살 부채질했다. 주인에게만 해를 끼치지 않으면 된다는 주의라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여파는 고스란히 니콜라이가 뒤집어썼고, 먹장구름의 흙먼지가 되돌아왔다.


“콜록, 콜록.”


망할 것들!

서러워서 강해지고 만다!



***



여독을 풀며 한가로이 보낸 며칠 후, 삭(朔)이었다.

월광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그날 밤.


“우와!”


뒤뜰에 선 니콜라이가 한 가지 언어만 아는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했다.

탄복하는 아이 곁에서 미하엘은 유일무이한 빛인 유백색의 나무를 가만히 보았다. 어머니 나무와 흡사하면서도 약간은 달랐다.

유백색의 나무는 오로지 굵고 고른 나뭇가지만 있었다. 이파리나 꽃이 피지 않는 데다, 오직 겨울 마냥 서늘한 남쪽과 성역에만 뿌리내렸다.


“이게 겨우살이나무에요?”

“끌리는 나뭇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잡으면 된다.”

“끌리는 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니콜라이가 신중히 팔을 뻗었다.

아이의 새끼손가락에서 희미한 빛이 점멸했다. 그건 꽃송이들로만 이루어진 띠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날처럼 술식을 새긴 것.

언제나 그렇듯 띠를 촘촘히 완성한 것은 사파이어였다. 그레이 스타 사파이어에 박힌 건 트리폴리움 씨앗이었고.

흔히 행운초라고들 하지만 숲지기에게는 ‘인연’이었다.


“상성이 좋으면 반응한댔지요?”


마력의 상성이 높을수록 나뭇가지와 아이 간의 공명이 커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끌린다’라는 표현의 참된 의미였다.

본래 이 의식을 통해 숲지기들은 씨앗을 얻는다.


“우음.”


니콜라이는 여기저기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신이 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여기에만 있는 거 보면 특별한 것 같은데, 진짜 이 나무는 뭐예요?”

“······.”

“막 비밀이 있고 그런 거예요?”

“비밀은 무슨. 그냥 입 열기 귀찮으신 거야.”


슈메테르링이 미하엘의 상태를 아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오직 삭에만 겨우살이나무와 공명할 수 있다. 그래서 걸음을 했지만 미하엘은 보름 넘게 쌓아놓은 잠이 고팠다.

늙은이는 원래 다 그렇다.

부끄럼 없는 미하엘은 어이없어하는 니콜라이 눈빛을 콧등으로 흘렸다.


“겨우살이는 숲지기의 성인식에만 쓰이는 나무지.”

“성인식요?”

“200년을 살면 성역에서 독립하는데, 그게 성인식이다.”

“200년이나······.”


독립하기 전, 성역에 있는 겨우살이나무와 공명하여 씨앗을 얻는다. 그 씨앗은 숲지기의 집이 된다.

슈메테르링이 드레스를 팔락거리며 거들먹댔다.


“주인님께선 겨우살이나무의 씨앗을 얻으셨어.”

“아! 그게 저 집이 된 거예요? 어쩐지 색깔이 똑같다고 했어.”

“라이 널 위해 눈높이 설명해주자면, 주인님이 최초야. 겨우살이나무의 씨앗을 얻은 건.”

“우와. 정말요?”

“대단하지? 막 주인님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에이. 그 정도까진.”

“왜 아니야? 내 주인님이 얼마나 위대한데!”


결정적인 부분에서 슈메테르링과 니콜라이의 의견이 갈렸다.

신자를 늘리려 광신도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귀가 따가웠지만, 그 와중에도 니콜라이는 저에게 맞는 나뭇가지를 고르려 애썼다.

각자 요란한 가운데, 조용하기 짝이 없는 누군가가 있었다.

미하엘이었다. 그는 슈메테르링에게 설명을 맡기고는 꾸벅꾸벅 졸았다. 서서 자는 재주가 참 용했다.


“······그것이더냐?”


그런 주제에 누구보다 기감(氣感)이 뛰어났다.

왼쪽에 치우쳐진 나뭇가지와 니콜라이의 새끼손가락에서 정전기가 튀자마자였다. 미하엘이 제일 먼저 감지해냈다.

고양되는 찌릿함에 니콜라이가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 즉시, 길쭉하고 창백한 미하엘의 손가락이 살짝 까닥거렸다.

인도에 따라 사파이어 안의 트리폴리움들이 네 송이로 만개하며 공명한 나뭇가지를 틈 없이 에워샀다.

그때부터 가지는 세월을 역행하다가 종내 씨앗이 되었다.

이것을, 겨우살이나무의 가장 여린 가지라고 부른다.

유백색 씨앗을 손에 쥔 미하엘은 잠시 골몰했다. 잠만 자는 게으른 백수처럼 보여도 그는 대드루이드였다.

하나의 현상에 수십, 수백 갈래로 뻗은 줄기들을 헤아릴 수 있음이니.


‘씨앗을 정해주는 건 어머니 나무께서 행하시는 일.’


우연이나 요행은 없다.

그가 겨우살이나무의 씨앗을 얻은 것은 어머니 나무의 의지였다.

성역에서 가지고 나와 자라난 나무는 현재······.

미하엘은 달뜬 니콜라이의 옆태를 물끄러미 직시했다. 숲이 적대하지 않는 인간 아이를 한참 동안.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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