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드루이드의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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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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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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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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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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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DUMMY

16화. 동쪽의 영역주, 슐라(2)



“후훗. 내 소개를 안 했네?”


슐라가 호의를 넘치게 담아 눈꼬리를 접었다.


“어머니 나무께서 부여한 이름은 슐라. 미하엘 님의 후대이며 엘브로아 일족의 재단사이자 동쪽의 영역주야.”


때늦은 소개에도 니콜라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미하엘에게 익숙해지고 있어선지 그런가 보다 하는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친절하기까지 해서 저 역시 똑같이 대했다.


“저는 니콜라이에요.”

“알아. 미하엘 님이 부여한 이름이라는 것도. 정말 그분다우셔.”

“······.”

“꽃의 정령에게 ‘나비’라 명명하셨거든. 대지에 뿌리박힌 본래의 속성에 얽매이지 말라며.”

“슈메링 누나 말하는 거죠?”

“터지기를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처음에 ‘슈메테르링 님’이라고 했더니 질색하면서······.”


니콜라이가 말꼬리를 흐리자 슐라는 손사래를 쳤다.


“질책하는 거 아냐. 재밌어서 물은 거지.”


끊기지 않는 대화처럼 치수 재기도 순조롭게 이어졌다. 바지의 안기장까지 재고 나서 슐라는 의자에 대강 앉았다.

의자는 세공이 정교하고 황금까지 사용되어 호화로웠다.

가구뿐 아니라 전반적인 느낌이 유서 깊은 귀족가를 연상시켰다. 번쩍번쩍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고풍스러웠다.

그녀가 쥐고 있는 보석이 치장된 깃펜도 그랬다.

이런 분위기는 치수를 적은 양피지에 뭔가를 끼적거리며 몰두하는 슐라에게서 기인했다.

멋있었다.

그래선지 더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결국, 니콜라이는 방해하지 않으려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육포를 조용조용 씹으며 얼마를 흘려보냈을까.

슐라가 탁자 한편으로 양피지를 치우며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



“널 깜빡했네. 미안. 여기 앉아 봐.”


고개를 끄덕인 니콜라이는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아이가 자리를 잡기도 전, 슐라는 황급히 수다를 재개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본인 입으론 들을 일 없는 미하엘의 하루하루. 정말 알고 싶던 그분의 일상을 캐물을 상대가 생겨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자세히 말해줄래? 그분을 처음 만나게 됐을 때부터.”

“음. 미하엘 님과는······.”


니콜라이의 입이 막 열린 그때였다. 머리카락이 삼색인 여자가 트롤리를 끌고 와 찻잔을 놓고 빠르게 물러났다.

화려한 찻잔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게 방금 우린 모양이다.

따뜻하겠다.

니콜라이는 충동적으로 찻잔을 손에 쥐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적당히 미지근했다. 기억에 박힌 냉혹한 목소리들과 달리.



“내년이면 저놈이 일곱이라······.”

“와병을 핑계로 만남을 거절하는 것도 한계예요.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수를 써야지. 솔레는 하나뿐이니!”



흐트러짐 없이 귀한 차림의 남녀.

악귀의 표면이 흉측하지 않고 번드르르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킨 그들.

그들의 속닥거림이 있고 나서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기절했다 잠깐 깨어났다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자작나무 밑이었어요.”

“그래? 그들은 일종의 문지기 같은 거라 얌전할 리 없는데······.”

“모르겠어요.”

“일단 계속 얘기해 봐.”

“그러니까, 숲 밖으로 나가려고 막 헤매고 있는데 덩치 큰 마물이 갑자기 나타나선······.”


키벨론이 뒷덜미의 셔츠를 물었을 땐 정말 질겁했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그르륵 대는 숨소리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저를 때리고 굶긴 악귀들에 비할까.

여태 재수가 없었음에도 솟아날 구멍은 알아서 찾았다. 어설픈 반항보다 때를 기다리자 싶어 달랑달랑 매달려 이동했다.

그 결과의 종착지가 남쪽 영역주의 집이었다.


······미하엘.

첫 만남에서는 그의 발끝도 못 봤다.

키벨론 따위는 피라미도 못 된다는 양 거대하고 거대한 무엇.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려 반쯤 혼이 나가버렸다.

와중에도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내 얄팍한 속셈을 모조리 꿰뚫어 봤더랬지.’


니콜라이는 쓴 꽃차로 목구멍을 적신 뒤 얼른 말을 이어 나갔다. 슐라가 알고 싶은 건 저의 구구절절이 아니라 미하엘에 관한 것일 테니까.


“진짜 못돼 먹고 인정머리도 없었어요. ‘갖다 버려라.’라고 했다니까요.”

“그분이 좀 무심하시지.”

“좀이 아니라 ‘많이’ 그래요.”

“후후. 아까도 너한테서 들은 말이네?”

“······어쨌든 몇 번을 갖다 버리다가, 갑자기 1년만 데리고 있겠다 한 뒤론······.”

“그 뒤론?”

“뭐 비슷비슷해요.”


니콜라이가 멋쩍게 눈알을 굴리자 슐라의 미소가 진해졌다.


“무심한 듯 잘해주시지? 네게 꼭 필요한 것은 뭐든 다 해 주시고?”


끄덕끄덕.

고갯짓으로 응답을 대신하는 니콜라이였다. 제법 살집이 오른 젖살이 함께 흔들거렸다. 잡티 없이 깨끗한 피부와 정갈한 손톱은 목욕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아이의 몸 곳곳에 새겨진 흉터들, 화상이나 채찍 자국 같은 것들이 제법 흐려져 있었다.


‘약초 몇 가지를 배합한 약탕을 꼬박꼬박 사용했다는 건데······.’


보통 정성이 드는 게 아니다.

사용자의 상태에 맞춰 배합을 덜거나 추가해야 하고, 그 비율을 세심히 맞추기 위해선 관찰을 하루도 빼놓지 않아야 한다.

이만하면 충분히 생색낼 법하건만 정작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슐라의 시선이 니콜라이의 손아귀에 있는 육포에 가 닿았다. 저것도 마찬가지.


‘그런 분이시지. 그러니 그분의 알맹이를 아는 이들은 모두······.’


슐라는 가장 아끼는 머리꽂이를 매만졌다.

어느 날 미하엘이 준, 푸른 장미가 세공된 머리꽂이를.



“돌연변이는 무슨. 네 뛰어난 재주를 진창에 처박지 말아라. 난 그 귀한 재주가 필요하니 말이다.”



그분에게 있어 제가 쓰임이 있기 전까지, 그녀의 나날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제 이름에 회의를 느껴서였다.

짙고 짙은 회의와 결코 가져선 안 되는 어머니 나무에 관한 의문이 휘몰아쳤다.

마력으로 옷이라는 형태를 짜는 일족에게 재단사는 필요치 않다. 한데도 그녀가 어머니 나무에게서 받은 것은 ‘재단사’였다.

허름한 자투리 천으로도 질 좋은 옷을 짤 재주가 있은들. 일족에게는 필요치 않아서 항상 외로움에 시달렸다.

같은 열매에서 난 동기들이 위로해줘도 고독은 깊어져만 갔다.

해소될 길 없는 심마(心魔)만 쌓여갔는데······.

제 마음의 그늘이 걷히도록 해준 것이 미하엘이었다. 일생을 모조리 바쳐도 모자랄 구원자였으니.


“아이야.”

“예?”

“이것 좀 보렴.”


슐라는 제 목덜미 부근을 니콜라이가 잘 볼 수 있게 자세를 취했다.

호기심이 이는지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기척이 잡혔다. 무언가를 본 아이가 이게 뭐냐고 물어왔다.


“어머니 나무께서 내게 주신 사명.”

“사명이요?”


슐라의 왼쪽 귀 뒤 뼈 아래부터 날개뼈 윗부분까지 나 있는 문신.

고아한 베틀은 흡사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생생함은 거기 적힌 언어의 휘어짐에서조차 느껴졌지만, 니콜라이로선 읽을 수 없는 글자였다.


“내 일족은 태어날 때 부여받은 이름이 새겨져. 기꺼이 순응해야 하는 운명을 잊지 말라는 듯.”

“······슐라는 무슨 뜻이에요?”

“재단사.”


슐라는 고른 치열이 드러날 정도로 벙긋 웃었다. 자부심과 우쭐거림을 잔뜩 묻힌 채였다.


“내 재주는 일족의 디딤돌이야. 간혹 인간계로 나가는 일족의 생활비 일부분이 내 재주에서 나오는 거거든.”

“나온다는 게?”

“옷을 지어 인간들에게 팔고 있어. 너도 봤을 거야.”

“뭐를······?”


니콜라이는 금방 답을 도출해냈다.


“아아. 설마 오는 길에 봤던 그것들요? 동물들이랑 나방 같은 거?”

“응. 하나하나 내 손을 거쳐 가공돼. 주먹구구도 아냐. ‘슐라 부티크’라는 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어.”

“상점을요?”

“미하엘 님이 마련해 주셨어. 그분께서 내 부티크는······ 아냐, 이것까진 말할 필요 없겠다.”


슐라는 화창함, 그 자체였다.

기분 좋은 그녀를 얼마간 바라보기만 하던 니콜라이. 아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슬쩍 운을 뗐다.



***



“그럼 미하엘 님은요?”

“그분의 이름에 얽힌 뜻은 비밀.”


이럴 줄 알았다.

알면서 찔러본 거라 니콜라이는 다음 질문을 바로 이었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어요, 슐라 님.”

“응? 뭔데?”

“영역주라는 건 뭐예요?”

“아아. 귀찮은 거.”

“귀찮은 거요?”

“응. 일단 기눙가프는 넓어. 무척 넓지. 그래서 수장님이 계시는 중앙을 기준으로 4방향으로 쪼개 관리하고 있어.”

“······.”

“그 관리 책임자가 바로 영역주야.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야 하고, 사달이 나면 책임져야 하고······ 하여튼 골치 아픈 자리야.”


의무만 잔뜩이지, 이득 같은 건 애벌레 똥만큼도 없다.

전혀 즐겁지 않은 자리를 그녀가 떠맡은 건 순전히 마력 탓이 컸다. 혹여 틸테인, 그중에서도 열사의 사막으로 떠나지 않는 자를 처단해야 하기에.


“그분도 떠맡지 않으려 하셨어.”

“알 것 같아요.”


니콜라이의 빠른 수긍에 슐라는 즐거운 기억이 떠오른 듯 키득거렸다.


“선대, 그러니까 그분의 선대가 좀 그랬대.”

“그래요? 뭐가요?”

“오래 산 노인 특유의 잔소리 말이야. 먼저 살아봤으니 다 안다는 식의.”

“숲지기들도 그런 게 있어요?”

“드물긴 한데, 그 시대를 살아낸 분들은 성정이 좀······. 이것까진 알 필요 없고 암튼.”


슐라가 황금으로 세공된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집중력을 높이려는 건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찻물만 봉변당했다. 거의 다 마셔서 넘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독립하려면 영역을 정해야 하는데, 율법상 영역주의 명령은 거스르면 안 되거든.”

“······.”

“수장님께서 그 꼴은 못 보겠다며 ‘남쪽 영역주 할래? 성역에서 쭉 살래?’라고 협박하셨대.”

“그래서 영역주를 선택하신 거네요.”

“듣기론 하루속히 성역을 나가길 원하셨다니까.”


슐라의 표정에 찰나의 씁쓸함이 맴돌다 가라앉았다.

일족을 사랑하기에 고독했던 그녀와 ‘오롯한 자’인 대드루이드 미하엘의 고독은 성질 자체가 달랐다.

완전무결한 고독.

영원히 어디에도 섞이지 않을.

비록 그분의 본바탕이 그러할지라도······.

슐라는 치수가 적힌 양피지를 닳도록 문질렀다.


“내가 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벌린 줄 줄 알아?”

“······아직은 모르겠어요.”

“너만은 그분의 알맹이를 알아주었으면 해서.”

“······.”

“음. 기나긴 세월, 내 일족에게 부여되지 않는 이름이 있어. 너에게 암시를 주자면 어떤 성질에 관한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슐라는 세월의 결이 묻어나는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한쪽 벽면을 다 가릴 정도였다. 그곳의 서랍 밑단에서 어떤 씨앗을 꺼냈다. 불꽃놀이 하는 것 같은 모양. 니콜라이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거.”


니콜라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살아남으려면 상황 파악과 더불어 저를 만나러 오는 자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지긋지긋하게 눈치를 본 터라 쉽사리 알아챘다.


“불······, 불인가요?”

“맞아. 평범한 불은 아무 해를 입히지 못하지만.”


슐라는 손바닥을 그어 피를 낸 후 플로가의 씨앗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느 때보다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매캐하고 역한 냄새가 진해졌다. 생살이 익어가는 냄새였다.


“!!”

“마력이 덧입혀진 플로가의 불은 해가 될 수 있어.”


슐라는 제가 낸 화염을 끈 후 치유 마법을 읊조렸다. 벌겋게 수포가 일던 피부는 금방 아물었다.


“물론 어중이떠중이 것들의 마력이야 우습지도 않지.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지만 내 일족의 본질은 나무. 조심할 필요가 있어.”

“······.”


니콜라이는 자해에 가까운 슐라의 예시로 맥락을 확실히 짚을 수 있었다.

아연한 채로 손안의 것을 직시했다.

불 그리고 육포.

언제였더라?

첫새벽이 유난히 어둡던, 그날의 아침은 눈부셨다. 태양이 두 개 뜬 것처럼 어찌나 밝던지.



“무쇠 뿔 아마딜로의 갈빗살이잖아요. 라이 먹이시려고요?”

“생것을 먹일 수 없으니 화덕을 만들어야겠다.”

“······봉행하겠나이다.”



그것만큼 슈메테르링의 안광도 희번덕거렸었다.

미하엘이 죽으라고 하면 이유도 묻지 않을 그녀의 대꾸가 한참 뒤에야 나오더라니. 다정하기만 하던 눈빛에 시뻘겋디시뻘겋게 묻어난 살의를 지금에야 이해하게 됐다.

물론 그 순간뿐이었고, 그 뒤로 슈메테르링은 언제나 좋은 누이였다.

섣부른 단정일지 모르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제가 이 숲을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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