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재생으로 아포칼립스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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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밤
작품등록일 :
2024.08.26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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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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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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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DUMMY

멸망기에 접어든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나는 살아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은 믿지 않았다.


운 나쁘게 살아남은 나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도시인 서초의 반지하에 살고 있다.


인터넷도, TV도, 하다못해 책 한 권 없는 방.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색밖에 없었다.


그 사색의 주된 주체는 내게 주어진 축복이자 저주, 무통이었다.


멸망 전에야 심각한 병으로 치료하기 위해 온갖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세상 자체가 고통인 지금, 몸의 통증이라도 못 느끼는 건 내게 얼마 없는 이점이었다.


그래도 축복이자 저주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는 언제 다쳤지?”


팔 밑에 긁힌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자칫했으면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간단하게 치료할 만한 상처도 통증을 못 느끼기 때문에 상처가 크게 번진다.


덕분에 전신을 거울로 살피는 버릇이 생겼을 정도.


그래도 이번에는 형편이 나았다.


한 달 전에는 허벅지 쪽에 가볍게 베였던 상처가 번져서 살을 잘라내야 했던 적도 있으니까.


미리 사둔 재생 연고를 대충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멸망기에서도 나아진 것 중 하나가 약이었다.


연금술 계열 각성자들이 만들어낸 약이 외상에는 꽤 쓸만했으니.


어디가 잘려 나가는 게 아닌 이상 웬만한 건 전부 치료됐다.


약을 바르고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본 결과.


다행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는 하루라도 일을 못 한다면 꽤 치명적이었으니까.


웨에에엥-


경보음과 함께 기계음이 도시에 울렸다.


-괴물 침입. 괴물 침입. 전투 지원자들은 모두 성벽 위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멸망기의 도시에서 사는 게 당연히 공짜는 아니었다.


나 같은 일반인에겐 두 가지가 주어졌다.


성벽을 지킬지,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을 할지.


쉽게 말해서 짧고 굵게 살지, 가늘고 길게 살지 선택할 수 있었고, 나는 전자를 택했다.


“오늘은 적게 왔으면 좋겠네.”


취미 생활은 잠시 접어두고 성벽으로 향했다.



*



성벽은 서초가 도시 역할을 하게 해 주는 최후의 방벽이자 멸망기의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런 중요한 곳을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가서 막는 이유야 많지만, 한 단어로 대답할 수 있었다.


돈.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괴물들은 돈이 안 된다.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했다.


그나마 성벽 안에서 가장 돈을 잘 쳐주는 게 성벽 방어였고, 자연스럽게 일반인들의 차지가 됐다.


일반인이라 해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


어느 정도는 싸울 줄 안다.


검 상태를 확인하던 중, 옆에 있던 사람들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들었어? 세종에서 내전이 한참이라 하더라고.”


”기회가 많겠군.“


”살아남는 놈들이 전부 가지겠지.“


도시는 서초만 있는 게 아니다.


몇 개의 살아남은 도시가 존재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고 있었다.


“자네 왔는가.”


백발에 근육질 노인이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허 노인.


성벽에서 꽤 이름을 날리는 사람 중 한 명이자 나보다 이 성벽에 오래 붙어 있는 사람.


실력도 괜찮았지만, 그가 유명한 이유는 인망과 멸망기에서 흔치 않은 친절함을 볼 수 있어서였다.


쓰러진 아이를 위해 수비 비용의 절반을 내서 도와준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 되고 있을 정도.


“여기도 꽤 됐는데, 왜 이렇게 표정이 굳어 있어?”


“긴장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렇게 하면 피곤하지 않나? 차라리 노동이 나을 것 같은데.”


“노동은 못 하겠더라고요.”


노동은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때려치웠다.


죽었으면 죽었지, 괴물을 통조림으로 만드는 일은 맨정신으로는 오래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 대신 매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되었지만, 딱히 후회는 없었다.


“그거 아는가? 어제부터 자네랑 내가 이 성벽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베테랑이라네.”


“그러니 괴물이 가장 많이 올라오는 성벽 외곽에 있겠죠.”


“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허 노인이 몰려오는 괴물을 보며 검을 빼 들었다.


“오늘도 살아남는다면, 내가 한턱내지.”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때마침 괴물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키메라.


서초 근처에서 가장 많이 사는 종으로 신체 부위가 제멋대로 달린 게 특징이다.


다리가 있어야 할 것 같은 곳에 다섯 개의 팔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 있었다.


끼아아아!


단검을 뽑아 단숨에 놈을 찔렀다.


비명을 지르던 키메라의 혀에 검이 박혔고, 그대로 비틀었다.


살이 짓이기는 소리가 들리며 키메라의 손이 경련을 일으키며 힘없이 쓰러졌다.


”버틸 만합니까.“


”아직 한창이다. 이놈아!“


내 옆에서 허 노인이 키메라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고 있었다.


”이 순간이 가장 스트레스가 풀린단 말이지!“


정면으로 상대한다면 우리 같은 일반인이 싸울 수 있을 리 없지만, 위에서 아래를 공격하는 건 할만했다.


그나마 나랑 허 노인 정도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정도.


해가 중천일 때 시작한 싸움은 노을이 질 때쯤 마무리되어 갔다.


허 노인이 지친 기색으로 올라오는 키메라의 팔을 잘랐다.


”좀 쉬세요, 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술 마시면 다 나아.“


허 노인이 팔이 잘려 비명을 지르는 키메라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끼아아아아!


성대를 손톱으로 긁는듯한 비명이 밑에서 울렸다.


키메라를 잡은 지 3년이 지났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비명을 내는 놈은 없었다.


”...설마?“


허 노인도 나랑 같은 걸 느꼈는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돌연변이다!“


”모두 도망쳐!“


외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피부가 재에 타버린 듯 새카만 키메라가 성벽 위를 뛰어올랐다.


등 뒤에 있는 수십 쌍의 팔은 신화 속 파괴의 신을 떠올리게 했다.


”다들 도망쳐! 여긴 내가 막겠다!“


평소 허 노인다웠다.


싸울 때는 늘 앞에 있었고 후퇴할 때는 늘 마지막까지 있던.


”안 됩니다! 우리 상대가 아니에요!“


”길고 짧은 건 끝까지 대봐야...“


그렇기에 허 노인은 이 멸망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쫘악-


돌연변이가 수십 쌍의 손으로 허 노인을 찢어발겼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팔이, 머리가, 내장이, 온 성에 흩뿌려졌다.


어떤 젊은이보다 용감하고 강했던 그 노인은 내가 봤던 그 누구보다 비참하게 죽었다.


”으...으아아악!“


”도망쳐!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돌연변이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사람들이 말 그대로 ‘찢어졌다.’


심장이 메스꺼울 정도로 쿵쾅거렸다.


아직 놈의 시야에 들지 않았고, 성벽 밑의 출구와 가까웠다.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그래요.”


끓어오르는 심장을 다스리며 검을 들었다.


“그냥은 못 가.”


“끼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촉수처럼 뻗어 나오는 손아귀.

저거에 닿으면 내 사지는 찢어지겠지.


‘살 생각 같은 건 없다.’


놈이 가슴팍에 달린 눈으로 날 바라봤을 때는 다섯 걸음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놈의 손아귀가 잠깐 내 눈을 스쳐 지나갔다.


내 눈앞에 다리가 보이며 중심을 잃었지만, 내 단검은 가운데에 있는 놈의 눈을 노리고 있었다.


내가 계속 달려들 줄 몰랐는지, 놈의 눈이 커다래졌다.


푹.


“끼에에에에에에!”


놈이 눈을 부여잡으며 소리 질렀다.


분노한 듯 놈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손이 지나갈 때마다. 내 신체 부위가 하나씩 보였다.


의식이 흐려져 갔다.


아무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


“이 미친 새끼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누군가 돌연변이의 팔을 잘라냈다.


“끼아아아!”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른 놈이 찢어진 시체 몇 구를 들고 성벽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씨발...힐러! 빨리 힐러 오라고 해!”


소름 끼치는 비명이 안 들리자 들려오는 건, 사람들의 고통에 젖은 비명이었다.


그때 돌연변이를 내쫓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시야가 흐려져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머리가 긴 걸 보니 여자가 아닐까.


“살아있어? 이봐! 지금 눈을 감으면 안 돼!”


고통이 없다고 해서 안 죽는 건 아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띠링


[각성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스킬: 완전 재생을 획득합니다.]


뭐가 지나갔던 것 같은데.


알아보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곧 온 세상이 시커메졌다.



*



낯선 천장...은 아니고.


몇 번 봤던 천장이었다.


“...병원?”


안도감보다는 겁이 났다.


분명히 사지가 다 잘린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병원에서 일반인에게 붙여줄 의수나 약 같은 건 없었다.


사지가 잘린 체 천천히 말라 죽는 게 그 자리에서 죽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병원 커튼이 열리며 피곤한 눈의 의사가 일어났다.


“깨셨군요.”


“제가...어떻게 된 거죠?”


정말 물어보기 싫은 말이지만, 피할 수 없었다.


정말로 사지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잘린 거라면, 안락사라도 부탁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 차리셨으니 퇴원하시면 됩니다.”


“...네?”


“멀쩡하시니까 퇴원하시면 된다고요.”


그제야 눈을 돌려서 내 팔다리를 확인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붙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환자들이 많아서 빨리 나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병원 밖을 나갔다.


그래도 도시가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성벽 수비를 나간 사람에게는 병원비를 받지 않았다.


멍한 정신으로 아무것도 없는 방에 다시 도착.


‘왜 있지?’


분명히 내 사지는 떨어졌다.


그날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스킬 확인.”


[완전 재생: 신체가 어떤 상태가 되었든 재생할 수 있습니다.]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각성에 성공했다.


정말 좋은 일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 보다 보니 더 중요한 게 떠올랐다.


“허 노인.”


아직 허 노인의 시체를 정리하지 못했다.



*



성벽에서 오래 활동한 만큼 경비병과 나름 친분을 갖고 있었다.


“뭐야, 너 분명...”


경비병이 커다래진 눈으로 내 팔다리를 바라봤다.


“각성했습니다.”


“정말?”


경비병이 놀란 눈으로 내 팔을 이리저리 만졌다.


“다행이다...정말 다행이야...”


“허 노인의 시체를 수습하러 왔는데요.”


“안 그래도 내가 해놨어.”


유재욱이 경비실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허 노인의 시체를 최대한 주워 담아서 태웠어.“

”...고맙다.“


유재욱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영감이 말했잖아. 자기 죽으면 태워서 성벽에 뿌려달라고.“


”그랬었죠.“


그것 때문에 나도 성벽에 왔으니.


”죽은 지 며칠은 됐을 텐데 왜 아직 안 뿌렸어요?“


”네가 죽으면 같이 뿌려주려고 했지.“


하긴, 사지가 다 잘린 모습을 봤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아무튼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시간 있습니까?“


나랑 경비병은 아무도 없는 성벽 위로 올라왔다.


한동안 말없이 성벽 밖의 폐허를 바라봤다.


”시작하자.“


상자 안의 가루를 흩뿌렸다.


바람을 탄 잿가루가 폐허를 넘어 멀리 날아갔다.


”윤호.“


”네.“


”넌 적당히 사려가면서 해.“


”그럴 겁니다.“


난 허 노인처럼은 살지 않을 것이다.


”좋네, 너는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아.“


가을의 바람이 오늘 따라 거세게 불었다.


뼛가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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