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하는 깡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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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선생
작품등록일 :
2024.08.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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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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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기록

DUMMY

예약 대기 창을 들어가 보니 오늘 날짜로 예약 환자가 한 명 등록되어 있었다.


“분명 근무일은 월요일부터일 텐데 왜 오늘 예약환자가...”


등록된 환자 이름을 확인해보니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58/M 배종득.



“배종득 아저씨?”


배종득 아저씨는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 사이인 이웃이다.

아저씨는 이웃들 중에서도 특히나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나도 아주 어릴 적부터 안면을 트고 지냈었다.


서로의 경조사가 있는 날이면 거의 항상 얼굴을 보는 사이.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이웃사촌의 진료를 내가 직접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오후 5시 40분.

곧 보건소도 문을 닫을 시간.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애시당초 나는 아직 근무 등록도 안 된 상태다.

아마 예약 자체가 오류일 가능성이 컸다.


프로그램만 봐도 오류가 많이 날 것처럼 생겼고.


“그래도 한번 봐둘까.”


오늘이 아니라 다른 날에 올 수도 있다.

그 전에 의무기록을 파악해두면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아저씨의 이름을 더블클릭해서 의무기록을 열었다.


임시저장 상태의 초진기록지가 떴다.



==========

C.C(주호소증상)>

dyspepsia(소화불량)


ROS(문진)>

abd pain (+) (복부 통증 있음)

dyspepsia (+) (소화불량 있음)


P/E(신체검진)>


==========



“음...”


몇 줄 되지도 않는 초진기록지.

그 몇 줄을 천천히 읽어보고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엉망이다.


복부 통증이 있다고 적혀 있는데 정확히 어디인지가 안 적혀 있다.

복부의 통증은 상복부인지 하복부인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위치에 따라서 진단이 매우 크게 달라진다.


게다가 GI(위장관) 증상을 호소하면 구역/구토 같은 다른 위장관 증상들은 있는지 물어봐야 하고 증상이 없으면 없다고 적어놔야 한다.


‘증상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소견이다’


의대 실습을 처음 들어갈 때 배우는 내용이다.

근데 그런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증상 이외의 환자의 말은 아예 적혀 있지도 않다.


이런 초진 기록지는 의대생이 썼어도 박살이 날 법한 내용이다.


임시저장 상태라고는 하지만 내과 수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불만족스러움을 넘어서서 약간 짜증까지 날 법한 초진기록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엉망인 초진기록지를 작성한 건지 궁금해 작성자 기록을 봤더니


<작성자 강태호>


보란 듯이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야 이거?”


나는 당황스러움 속에 내 이름 석자를 마우스로 계속 드래그 해보았다.

그런다고 이름이 바뀌지는 않지만.


내가 이 초진기록지를 작성했을 리는 없다.

그야 나는 이 보건지소에 처음 오는 거고 로그인도 처음 해보는 거니까.


‘혹시 이 프로그램은 계정 구분이 안 되는 건가?’


이전 공보의가 작성하다 임시저장한 의무기록지를, 내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볼 경우 작성자가 로그인한 아이디인 내 이름으로 뜨는 건가?

아무리 낡은 프로그램이라지만 그 정도 구분도 못할 수 있을까.


“하... 모르겠다~”


이것저것 생각해보았지만 답이 안 나온다는 걸 깨달은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임시저장된 거니까 나중에 아저씨가 진료 보러 오면 그때 제대로 채워 넣으면 되니까.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갈 준비를 했다.



***



자동차를 타고 왔던 길로 돌아가 집에 도착했다.

현관 문을 여니 낮에 집에서 나올 때 못 봤던 신발이 있었고 집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의사 선생님 왔습니까~”


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는 안에 있던 손님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나에게 인사를 보냈다.


“종득이 아저씨?”


예약환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던 배종득 아저씨였다.


“형님한테 너가 내려왔다는 얘기 듣고 바로 놀러왔지.”


아저씨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에게 내가 고향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온 모양이다.

며칠 이내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당일 날 바로 볼 줄은 몰랐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빨리 들어와.”


나는 아저씨의 손짓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왔냐.”


아버지가 아저씨와 식탁에 둘러앉은 채 나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짐은 이미 풀어놨던데, 어디 들렀다 온 거냐?”

“앞으로 일할 보건지소에 인사 차 잠깐 다녀왔어요.”

“잘했다. 새 직장에 잘 보여서 나쁠 거 없어. 일단 앉거라.”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는 빈 밥그릇에 밥을 퍼 담았다.


“이제 완전히 여기로 내려온 거야?”


식탁 앞에 앉자마자 배종득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완전히,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3년 동안은 여기 있을 거예요. 군대 대체복무로 보건지소에서 3년 동안 근무해야 하거든요.”


나는 그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저씨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간간히 전화로 근황을 전달 드렸던 아버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크하하, 그러니까 더럽고 치사해서 때려치웠다 그거네?”

“하하, 네 때려쳤습니다!”

“그래, 병원장 얼굴에 사직서 냅다 던졌다 그거구나!”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했는데요...”


아저씨가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거냐?”


아무래도 전문의 과정을 포기하고 내려온 아들의 미래 대한 걱정이었나보다.


“모르겠어요...”


나는 말 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실제로 어떻게 할지 모르기도 했고.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일단 군복무부터 마저 끝내야죠.”

“그렇긴 하지.”


아버지는 군복무란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셨다.


“하하, 먼 미래 일은 천천히 생각하고 한 잔 하십시다!”


배종득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까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을 곁들인 식사 자리.


얼마간 배를 채우며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배종득 아저씨가 문득 나에게 질문했다.


“아이참, 의사 선생님 왔으니까 내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하하, 여기 동네에 병원이 없어서 지금 아니면 물어볼 수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배종득 아저씨는 배를 문질렀다.


“요즘 소화가 잘 안 되는데 이거 생강차 같은 걸로 효과가 있는가?”

“흐음... 생강차요...”


민간요법에 의하면 생강차는 소화기능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약이 아닌 식품.

질병이 있다면 식품이 아닌 제대로 된 약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우선은 질병이 있는지부터 파악해야지.’


소화불량 증상을 통해 감별해낼 질병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C.C(주호소증상) dyspepsia(소화불량)


보건지소에서 나오기 전에 떴던 예약 내용과 초진 기록지.


나는 먼저 병원 예약 내용에 대해서 질문해보기로 했다.


“근데 아저씨 대철면 보건지소에 혹시 진료 예약 한 적 있어요?”

“보건지소?”


아저씨는 예약은커녕 보건지소의 존재 자체를 처음 듣는다는 듯 반응했다.


“너가 일하는 데? 예약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음... 진짜 오류가 맞나?


“혹시 소화 안 되는 거 말고, 배가 아프기도 하나요?”

“음... 가끔씩은.”


dyspepsia(소화불량)

abd pain(복통)


초진 기록지에 적힌 두 가지 증상이 확실히 있었다.


‘틀린 내용은 없단 말이지.’


나는 이어서 문진해보기로 했다.


“배는 주로 언제 아프나요?”

“어... 보통 밥 먹고 나면 아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명치 쪽이 쥐어짜는 것 같은? 쑤시는 거 같은? 그런 거 같아.”


구체적인 질문들에 아저씨는 당황한 듯 했다.


보통 술자리에서 나올 질문들은 아니긴 하지.


“구역질이 나거나 구토한 적 없어요?”

“한 번도 없어.”

“신물이 올라온다는 느낌은 없나요?”

“그것도 없어.”


상복부면 위, 식도, 담낭, 췌장 중 하나.


증상으로 봤을 때 gastritis(위염)이나 GERD(역류식도염)은 아닐 가능성이 큰데 췌장은 과거력이 없고...


그렇게 머릿속으로 감별할 질환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


“어... 의사 선생님 뭐 문제 있습니까...?”


아저씨가 대뜸 존댓말로 되물어왔다.


너무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했나?

환자는 의사가 아무 말도 없이 고민하고 있으면 되려 걱정이 밀려오는 법이다.


‘의사는 질병이 아니라 환자를 먼저 봐야 한다.’


의대 실습 때 외래 진료 참관에서 내과장님께 들었던 말이다.

신참 의사에게는 힘든 요구지만.


나는 웃으며 아저씨에게 말했다.


“문제 있는지는 아저씨 똥배 좀 만져봐야 알겠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저씨의 우상복부, 즉 오른쪽 갈비뼈 아래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어억 소리를 하며 표정을 찡그리는 아저씨.


‘역시...’


이건 단순 소화불량 따위가 아니다.

생강차라니 큰일 날 소리.


“아저씨 잠깐만 누워보실래요? 다리는 굽히시고...”


아저씨를 복부 진찰을 위한 자세로 만들었다.

교과서대로라면 시진 청진 타진 촉진을 모두 하는 게 맞겠지만 청진기도 없고 우선 급한대로 촉진만 해보기로 했다.


나는 통증부위로부터 먼 곳부터 꾹꾹 누르면서 진찰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안 아프죠?”

“거긴 안 아파.”

“여기는요?”

“거기 좀 아픈디...”


아까 눌렀던 우상복부를 누르자 역시나 표정을 찡그리는 아저씨.


여기서 제일 확실한 신체검진은...


“아저씨 숨 후~ 내쉬고요.”


나는 우상복부를 꾹 누른 뒤


“숨 다시 들이쉬세요.”


내 지시에 따라 숨을 다시 들이쉬던 아저씨는 갑자기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호흡을 멈추었다.


Murphy’s sign(머피 징후)


숨을 내쉰 상태에서 담낭이 위치한 우상복부의 갈비뼈 아래를 누른 채 숨을 들이쉬었을 때 복통으로 호흡을 멈추게 되는 것.

급성 담낭염에서만 보이는 특징적인 신체검진 소견이다.


“아저씨 언제부터 아팠어요?”

“한 달 쯤 된 거 같아. 최근에 더 아프더라고”

“열 나는 거 같지는 않아요?”

“열은 최근 한 번도 안 났어.”


다행히도 당장 복통 이외에 큰 증상은 없다.

지금 바로 응급실로 쑤셔 넣을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언제 심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

가능한 빨리 치료 받는 것이 중요하다.


“아저씨 내일 날 밝는 대로 저기 강산병원 외과로 가세요.”

“으잉? 강산병원이면 큰 병원이잖아? 심각한 거야?”

“죽을 병은 아니고요. 담낭염이라고 담낭, 그러니까 쓸개에 염증 생긴 건데 이게 작은 수술을 해야 낫는 병이에요.”


갑작스런 수술 얘기에 눈을 끔뻑거리면서 말을 잃은 아저씨.

내가 대뜸 수술 얘기를 꺼내 또 아저씨를 걱정시킨 것 같아 말을 정정하기로 했다.


“확실한 건 아니고요. 배 조금 눌러보고 확진은 못하니까요. 수술 안할 수도 있어요.”


실제로도 아직 확진이 아니기도 하고.


나는 빈 A4용지를 꺼내 글씨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상환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식후 RUQ pain(우상복부 통증), dyspepsia(소화불량) 증상과 Murphy’s sign(머피 징후) 관찰되어 further evaluation(추가 의학적 평가) 필요하여 의뢰드립니다. 고진선처 바랍니다.


작성자 대철면 보건지소 의사 강태호’



수기로 쓴 진료의뢰서.


당장 병원 전산프로그램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이게 최선이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 나도 가끔 수기로 된 진료의뢰서를 받은 적이 있다.


‘분명 양식만 맞추면 수기든 뭐든 상관 없었다지?’


내가 받았던 것 중엔 그 양식조차 안 맞춘 것도 있었다만...



“이거 가지고 가시면 알아서 해줄 거예요.”


아저씨는 내가 휘갈겨 쓴 진료의뢰서를 받고 여전히 실감이 안 나는 듯한 표정이다.


“수술얘기 꺼내서 당황하신 거 같은데 아직 수술은 생각하지 마시고요. 일단 가서 시키는 검사 받아보세요.”


아저씨는 이해는 못한 표정이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혹시라도 밤 중에 복통이 심해지거나 열이 나거나 아무튼 문제 있을 거 같으면 바로 응급실로 가라는 말을 전하고는 아저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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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자주 오시네요 (1) +1 24.09.02 904 27 11쪽
8 담배 끊으세요 (3) +2 24.09.01 931 29 11쪽
7 담배 끊으세요 (2) +1 24.08.31 968 24 11쪽
6 담배 끊으세요 (1) +1 24.08.30 1,078 35 12쪽
5 오랜만이야 (2) +1 24.08.29 1,099 35 12쪽
4 오랜만이야 (1) +2 24.08.28 1,173 36 12쪽
3 보건지소 +1 24.08.27 1,205 37 12쪽
» 의무기록 +1 24.08.26 1,245 39 12쪽
1 귀향 +2 24.08.26 1,444 4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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