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하는 깡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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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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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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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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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지소

DUMMY

본격적인 첫 출근날이 왔다.


보건지소에서의 근무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지켜보는 선배 레지던트나 교수님은 없지만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새 직장에 익숙해져야 할 시기이기도 하고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보건지소에는 이영화 주무관님이 미리 도착해 문을 열어두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이미 인사를 나눈 사이였기에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곧바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는 EMR(전자의무기록) 프로그램에 로그인해서 예약 환자 목록을 불러왔다.


58/M 배종득.


‘역시 아직 남아있네.’


특별히 예약 내역을 취소하거나 전산으로 뭔가를 수정한 적은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어떤 종류의 오류인지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진료도 봤으니...


나는 아저씨의 이름을 더블클릭해서 임시저장된 초진기록지를 열었다.

그리고는 어제 집에서 진료 봤던 내용들을 기록했다.


최대한 상세하고 자세하게.


필요한 내용들을 얼추 전부 작성한 뒤 수정하거나 추가할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던 중


띠리링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태호야. 아침에 종득이한테 연락이 왔더라.”

“예. 아침 일찍 가셨으니 이미 진료 다 봤겠네요?”

“그래. 어제 네가 말한 대로더라. 담낭염인가 하는 거라던데 내일 바로 수술한다고 하더라.”


좋은강산병원은 2차병원이니 수술 일정도 금방 잡을 수 있다.

담낭염 정도면 2차병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고.


“다행이네요. 별 거 없는 수술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어제 걱정하시는 거 같던데.”

“그래그래. 나중에 너도 전화로 한마디 해줘라. 의사가 말해주는 게 낫지 않겠냐.”

“예, 나중에 전화해볼게요.”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담낭염이 맞았구나.’


사실 긴가민가했다.


대학병원이었으면 혈액검사는 기본이요 복부 CT촬영까지는 해봐야 비로소 진단이 가능했을 터.


그러나 이곳은 엑스레이 장비조차 없는 깡촌 중의 깡촌.

첨단 의료장비를 쓸 수 없는 곳에 왔으니 신체감각만으로 진단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직감을 믿고 진단을 내려 본 결과, 보기 좋게 정답을 맞추었던 것이다!


‘나 혹시 첨단장비 따위 필요 없는 천재 의사가 아닐까?’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올라왔다.


그렇게 실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띠리링


또 한 번 전화벨이 울려왔다.


이번에는 배종득 아저씨였다.


“네, 아저씨. 얘기 들었어요.”

“오 그러냐? 덕분에 제때 진료 받을 수 있었어. 고맙다.”

“다행이에요. 수술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큰 수술 아니니까요.”

“그래. 안 그래도 뭐 그냥 구멍 몇 개 뚫어서 하는 수술이라더라고. 별로 걱정은 안 돼. 그나저나...”


아저씨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여기 의사 선생님이 보건소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발견했냐고 그러시더라.”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친구네 아들내미가 의산데 배 한 번 눌러보고선 병원 가라 했다고 말했지.”


흠... 약간 과장된 거 같은데.


“그랬더니 실력 있는 의사 지인 두셨다고 칭찬하셨어.”


2차병원에서 담낭염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라면 외과 전문의일 것이다.


그런 전문의에게 인정받다니, 왠지 쑥스러웠다.


“뭐, 아무튼 수술 잘 받으시고요. 별 일 없으면 금방 퇴원하실 테니 조만간 다시 봐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통화를 종료했다.



‘슬슬 시간 되지 않았나?’


시계를 봤다.


오전 9시 정각.


진료 시작 시간이다.


‘근데 보건지소에 분명 간호직 주무관님도 있다고 했는데... 이미 도착하셨나?’


그렇게 생각하며 진료실 문 쪽으로 가는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세로 문이 열렸다.


“세이프!”


열린 문 앞에는 밤색 단발머리의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옅은 화장기가 감도는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순간 환자인가 싶었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공무원증을 보고서는 그 생각이 틀렸단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흠흠... 안녕하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으니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부터 일하게 된 한시임기제 간호직 공무원 유한아라고 합니다. 공보의 선생님이신가요?”

“네 공중보건의사 강태호입니다. 참고로 저도 오늘부터 근무입니다.”

“반갑습니다.”


약간 무뚝뚝하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넨 유한아 씨는 그렇게 말하며 진료실 문을 지나 진찰대 위에 털썩 앉았다.


“후...”


유한아 주무관님은 작게 한숨을 쉬고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어제 과음을 해서요...”


그리고는 창문 밖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수액 좀 놔주시겠어요?”

“아 네, 수액이요...”


순간 당황해 뭐라고 대응해야 할까 잠깐 고민 하던 중.


“우욱, 토할 거 같아...”


주무관님이 입을 틀어막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서랍에서 수액과 간단한 약물을 가져오기로 했다.


5DS(5% 포도당 생리식염액) 1L에 thiamine(비타민B1), metoclopramide(구토억제제), ketorolac(두통약)을 섞은 뒤 수액 주입용 라인을 준비했다.


‘오랜만의 정맥 주사인데 잘 될까.’


정맥을 통한 주사나 수액 투여는 위험하지 않고 하기도 쉽기 때문에 의사가 직접 시행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의외로 의사가 능숙하게 하기 어려운 술기 중 하나다.


나는 유한아 주무관님의 팔뚝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술기인데 팔뚝이 가늘어서 그런지 혈관까지 잘 안 보였다.

원망을 가득 담아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니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혈관.

겨우겨우 바늘을 꽂아 수액을 연결했다.


‘눈알 빠지는 줄 알았네.’


주무관님은 그런 내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으어... 살 것 같다. 선생님 수액을 참 맛있게 말아주시네.” 라고 말했다.


그 후 주무관님은 이동형 수액걸이에 수액을 걸고는 접수용 책상 가서 업무 시작을 위한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여기가 첫 근무지예요?”


주무관님이 말했다.


“네, 처음입니다.”

“흐음~ 혹시 열심히 하려는 거 아니죠~?”


주무관님이 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기대어 앉았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보건소 일이 뭐 할 거 없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요~ 쉬엄쉬엄~ 알죠? 네?”


주무관님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그대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는 “쯧, 여기 지소는 지금이 언젠데 윈도XP를 쓰는 거야?” 따위의 말을 하면서 능숙하게 EMR(전자의무기록) 프로그램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보건소 근무경력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유한아 주무관님은 몇 년 간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이후로는 계속 보건소나 보건지소에서 기간제 공무원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했다고 한다.


대철면 보건지소에는 이번에 새로 기간제 공무원으로 입사했지만 보건소 근무 경력 자체는 꽤 많은 것이다.


‘나중에 보건소 업무로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야겠다.’


큰 조력자를 얻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첫 대면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여기 지소가 오랜만에 진료 여는 거라 오늘은 환자가 좀 올 거예요~”


주무관님이 컴퓨터를 바라본 채 느긋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도 진료 준비 슬슬 하시고~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 인원이면 30분만에 끝내고 멍때리며 쉬다가 점심 먹으면 되겠다.’


나는 환자들의 상태와 인원수를 보고는 호기롭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내가 박정희 때! 고속도로 건설을 하다가~ 다리가 이렇게 됐다~ 이거야. 여기 조끼에 달린 게 그거 때문에 받은 건데~”


30분 째.


할아버지의 기나긴 무릎 통증의 역사를 30분 째 듣고 있다.


자그마치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병력청취.

이걸 어떻게 적어야 하나.


혹시 몰라 이전 근무자가 작성한 의무기록을 살펴봤다.


그러자 상세하게 작성된 의무기록이 이미 있었다.


‘이거다.’


나는 오늘 날짜의 의무기록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ditto(이전과 같음)


그리고 저장 버튼.


‘후후... 진료 다 끝났네.’


나는 개운해진 마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무릎이 제일 아프신 거죠?”

“아니~! 허리도 아푸지!”


할아버지가 윗옷을 들춰 허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허리가 언제부터 아팠냐~ 하면 말이야~”


아이고.



***



이후의 진료도 비슷한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진료라기보다는 어르신들 말동무 해주는 느낌이 강했지만...


시계를 쳐다봤다.


어느덧 현재시각 5시 45분.


조금만 있으면 집으로 갈 수 있다.


‘정시퇴근 얼마만이냐.’


나는 유한아 주무관님을 쳐다봤다.


주무관님은 의자를 뒤로 최대한 눕혀놓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를 흘깃 바라보더니


“쉬엄쉬엄~ 쉬엄쉬엄~”


느릿느릿한 말투로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야말로 ‘이렇게 해야 보건소다 이 자식아!’ 하는 느낌이다.


‘역시 대학병원이랑은 다르구나.’


아성병원에서는 5분만에 환자를 봐야 오늘 치 환자를 다 볼 수가 있었다.

그에 반해 여기 보건지소는 한 사람 당 30분씩 봐도 시간이 남는 곳.

치열했던 의료의 최전선에서 물러나 잠시 쉬어가는 시간인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익숙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게 뭐야’


프로그램에 예약 환자가 등록되어 있었다.


29/F 김하윤.


익숙한 이름이었다.


초중고 학교를 같이 나온 20년지기 친구.

그 친구의 이름이 예약환자로 올라가 있다.


‘얘 이름이 왜 예약환자로...’


예상치 못한 익숙한 이름에 어떻게 접수가 된 건지 궁금해 유한아 주무관님께 물어보았다.


“주무관님 방금 예약 환자 접수한 적 있어요?”

“아뇨 방금 접수한 건 이번에 신상으로 나온 화장품 배송뿐인데요~”


주무관님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거 전산에 접수 안한 예약환자가 가끔씩 등록되던데 오류 아니에요? 다른 보건지소에서 근무할 때 이런 적 없었어요?”

“엥, 접수를 안했는데 예약환자가 왜 떠요~”


반응을 보니 다른 지소에서는 생기지 않는 오류인가보다.


‘프로그램 오류는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뭐 예약 떠 있어도 환자 안 오면 그냥 이력 없어지니까 놔둬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며 천장을 바라본 채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유 주무관님을 무시하며 예약 환자 이름을 더블클릭해서 의무기록지를 확인했다.


==========

C.C(주호소증상)>

palpitation(두근거림)


ROS(문진)>

fatigue (+) (피로감 있음)

palpitation (+) (두근거림 있음)


P/E(신체검진)>


==========


컴퓨터 화면에 익숙한 느낌의 임시저장된 의무기록지가 펼쳐졌다.


여전히 엉망진창이구만.


두근거림으로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상황과 양상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서 두근거림이 발생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두근거림이 생기는지를 자세히 알아야 진단에 대한 가닥을 잡을 수가 있다.

두근거림, 피로감이라는 증상만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작성자를 봤다.


‘작성자 강태호’


이번에도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전의 의무기록은 무언가의 오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내 눈앞에서 갑자기 의무기록이 생겼다.


나는 확신했다.

이건 오류가 아니라고.


“뭔지 모르겠지만 해보자는 거지.”


조용히 혼잣말을 하는 나에겐 관심도 없는지 유 주무관님은 번개 같이 가방을 싸들고는 “낼 봐요!”라며 단말마를 외치며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정각.


보건지소 진료 업무가 끝날 시간이다.


“나도 가볼까...”


하윤이가 직접 진료 예약한 게 아니라면 보건지소로 찾아올 일은 없겠지.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 간다.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보건지소를 나와 자동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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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주 오시네요 (3) +1 24.09.04 834 28 11쪽
10 자주 오시네요 (2) +2 24.09.03 848 27 11쪽
9 자주 오시네요 (1) +1 24.09.02 908 27 11쪽
8 담배 끊으세요 (3) +2 24.09.01 935 29 11쪽
7 담배 끊으세요 (2) +1 24.08.31 970 24 11쪽
6 담배 끊으세요 (1) +1 24.08.30 1,081 35 12쪽
5 오랜만이야 (2) +1 24.08.29 1,101 36 12쪽
4 오랜만이야 (1) +2 24.08.28 1,174 36 12쪽
» 보건지소 +1 24.08.27 1,210 37 12쪽
2 의무기록 +1 24.08.26 1,250 40 12쪽
1 귀향 +2 24.08.26 1,449 4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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