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하는 깡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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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선생
작품등록일 :
2024.08.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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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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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는 것 (4)

DUMMY

나는 남자의 오른쪽 dorsalis pedis artery(발등동맥)을 촉지해봤다.

그리고는 내가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안에 있는 물건을 뒤적였다.


portable X-ray(이동형 엑스레이)와 디텍터.

나는 엑스레이를 꺼내 요리조리 돌려보며 전원 버튼을 찾았다.


하윤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와서 전원 버튼을 켜주었다.

그리고는


“여기 이거 누르면 촬영 버튼이고 노출시간 조절은...”


작동법에 대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핵심만 짚어주는 하윤이의 설명을 듣고 쉽게 작동방법을 이해했다.


하윤이가 디텍터 판을 남자의 오른쪽 허벅지 아래에 깔았다.

나는 엑스레이 기계를 아래를 향하도록 해서 수직으로 세워 들었다.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하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직감적으로 촬영이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촬영된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에는 새하얀 색의 대퇴골이 두 동강이 나 있었고 그 뼈의 뾰족한 부분 옆으로 희미한 회색 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윤이가 영상을 보더니 말했다.


“여기 회색 선이 femoral artery(대퇴동맥) 맞지? 동물이랑 위치가 비슷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femoral artery injury(대퇴동맥 손상)’


대퇴동맥은 우리 몸을 지나다니는 주요한 대혈관 중 하나이다.

그런 대퇴동맥이, 대퇴골이 골절되면서 생긴 뾰족한 면에 의해서 절단된 것이다.

피부가 찢겨져 있기 않기 때문에 겉에서 보면 혈관이 손상됐는지는 물론이고 출혈이 있다는 것조차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출혈.

그런 출혈에 의해 저혈압 증상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하윤이에게 물어봤다.


“지혈대...는 없지?”

“아무래도 그런 것까지는...”


하윤이가 말을 흐렸다.


‘지혈대 정도는 아무거나 주워서 만들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남자가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다른 사람의 가방을 뒤지는 것은 꺼림칙했지만 응급처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가방 안에는 전문 산악 용품으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꽤나 전문가인가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뒤지던 도중.

손수건을 찾았다.


나는 곧바로 남자의 대퇴부에 손수건을 감은 뒤 나뭇가지를 주워와 손수건 아래에 넣었다.

그리곤 나뭇가지를 돌려 손수건을 강하게 조였다.


“으아악...”


눈을 감으려했던 남자는 격통에 소리쳤다.

나는 아랑곳 않고 출혈이 멈출 수 있도록 세게 조였다.


‘원래 골절부위는 혈관 손상 위험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는 거 아니지만...’


이미 손상되어버렸는데 어쩌겠나.


그렇게 지혈대 처치가 끝낸 뒤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응급처치는 끝났어요. 이제 119가 오기만 기다리면 돼요.”

“하하... 나도 참 목숨이 질긴 놈인가봅니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나 같은 놈 살려주지 않아도 됐는데...”


순간 나는 남자의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산에서 실족해서 죽다 살아난 사람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저기... 나는 흩어진 등산장비들 좀 모아올게.”


하윤이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남자가 떨어지며 거쳐온 듯한 높다란 바위를 향해 갔다.


절뚝절뚝


하윤이는 왼다리를 약간 절뚝거리고 있었다.


‘쯧, 그러게 왜 그렇게 무리해서...’


나는 그런 하윤이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남자는 하윤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친구죠? 저 여자분.”

“그건 왜 궁금하신데요?”

“하핫... 여자친구분한테 잘하세요.”


남자가 초점이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당신처럼 행복한 시절이 있었거든요. 내가 장담할게요. 저 사람이랑 평생 같이 하면 행복할 거예요.”


남자가 중얼거렸다.


“제 아내랑 닮았어요. 본인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도 항상 다른 사람을 챙겨주죠. 그런 사람이랑 살아서 행복했어요. 뭐, 지금은 이혼당했지만.”


나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계속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아마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혼 당한 건 다 제 잘못이거든요. 당신은 안 그랬으면 좋겠네요. 뭐, 저 같은 놈 말은...”


나는 남자의 말을 끊고 말했다.


“당신, 죽을 작정이었지?”


나의 어림짐작일 수도 있지만, 남자의 말과 행동에는 삶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의식이 있는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그것도 전문 등산용품을 들고 다니는 베테랑 등산가가.


무엇보다 가방을 뒤질 때 발견했다.

남자는 휴대폰이 있음에도 그걸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이는 자기비난, 죄책감.


옛날부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치료를 해줘도 뿌듯하지 않았다.

이번에 느낀 부정적인 감정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내 말을 듣고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변명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죽으려고 온 건 아니예요. 뭐, 살아갈 의지가 없었던 건 맞지만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저런 말도 안 되는 데서 떨어진 걸지도 모르고요.”

“한심하네요.”


나는 남자를 쏘아붙였다.


남자는 울컥한 듯 말하기 시작했다.


“한심하다니, 당신은 의사라서 행복하게만 지내왔겠지만...”

“아 예, 의사라서 행복하니까 절대로 모르겠네요.”


나는 다시 남자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의사라서 너무 행복하게 지내왔습니다. 고향에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한테 먹을 것도 잔뜩 받고 애완견한테 애교도 잔뜩 받고 여자... 친한 친구하고 같이 등산도 하고 행복하네요. 근데요,”


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의사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남자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하윤이를 바라봤다.

하윤이는 등산 용품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우울증으로 병원 상담 받아보세요.”


남자는 다시 잠깐 침묵을 이어갔다.

그리고는 이내 대답했다.


“...선생님이 봐도 그렇습니까?”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지금 남자의 상황에서는 눈에 보이는 골절보다 더 위험한 것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 우울증일 것이다.

조그만 위험에도 금방 삶을 포기하려는 자세가 지속된다면 언제든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병원에서 상담을 받아보고 치료를 받으면 분명 괜찮아질 겁니다.”

“하하... 치료를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이제 저에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병원 간다고 바뀔 문제가 아니라고요.”

“바뀔 겁니다.”

“예?”


남자가 되물었다.


“문제를 마주할 수만 있다면 바뀔 겁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며 대답했다.


“마주할 용기를 얻기 위해 치료를 받는 거고요.”


남자는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있으니 하윤이가 등산 장비들을 챙겨 다시 돌아왔다.

손에 들려있는 장비들은 대부분 박살이 나 있었다.


“히히, 일단 보이는 대로 주워오긴 했는데 아마 다시 못 쓰는 게 대부분일지도?”


하윤이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그런 하윤이를 보며 질문했다.


“야 너는 힘든 일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응?”


하윤이는 뜬금없는 질문에 잠깐 되묻고는


“뭐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하지 않을까?”

“그래도 해결 안 되면?”

“그럼 다 부셔버리면 해결은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는 풀릴 듯?”

“다리 부러진 사람 앞에서 다 부셔버린다니 너무하네.”

“음, 일단 네가 나를 힘들게 하니까 너부터 부셔버리면 되겠다.”


그렇게 말하며 하윤이가 나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아 좀 놔!”


내가 하윤이 팔을 마구 탭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킥킥 웃었다.


“다 부셔버린다...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하하...”


“다 부셔!”


하윤이가 소리쳤다.


“다 부셔!”


남자가 소리쳤다.


“좀 놔!”


내가 소리쳤다.


남자는 한동안 웃었다.


그리고는 으윽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냥 누워있어요. 얼마나 다친지도 모르는데.”

“아뇨, 다리 말고는 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요.”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성덕이라고 합니다. 화물차 운전기사 하고 있습니다. 뭐 당분간은 백수일 거 같지만요.”


남자가 다리를 힐끔 쳐다봤다.


“저는 대철면 보건지소 의사 강태호입니다.”

“저는! 대동물 수의사 김하윤입니다! 여기 명함~”


하윤이는 명함까지 건네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이쿠 저도 그럼 명함을...”


윤성덕 씨가 그렇게 말하며 배낭을 뒤져 명함을 꺼냈다.


나와 하윤이가 명함을 건네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산악 구급대가 도착했다.


등산용품으로 무장한 구급대원의 모습은 조금 색달랐다.

아무래도 구급차가 직접 올 수도 없고 특수한 장소다 보니 그에 맞는 장비를 착용하고 온 것이겠지.


나는 구급대원들에게 윤성덕 씨에 대해 내가 파악한 것들과, 취한 조치들을 설명해주었다.


윤성덕 씨는 큰 병원에 가서 응급수술을 받는다면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분간 다리는 제대로 못 쓰겠지만.


들것에 실려 가는 윤성덕 씨를 바라봤다.


잠시 뒤 시야에서 윤성덕 씨가 사라졌다.


나는 하윤이에게 말했다.


“그럼 일하러 갈까?”


나는 내가 메던 배낭과 하윤이가 멨던 배낭을 모두 들었다.


“야, 둘 다 들면 허리 나가.”


하윤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 다리 다쳤잖아.”


그렇게 말하며 나는 가방 두 개를 든 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나 방금 좀 멋있었을지도.’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나는 열 발자국도 못 걸어가서 직감했다.


‘이거 절대 못 들고 간다.’


나는 뒤를 돌아 하윤이에게 선고했다.


“그... 정상에는 안 간다?”


하윤이가 피식 웃었다.



***



다음 날.


출근시간에 맞추어 보건지소에 도착한 나는 진료 준비를 위해 EMR(전자의무기록) 프로그램을 열었다.


예약환자 목록에 이름이 하나 있었다.


51/M 윤성덕


‘아 맞다 이거 있었지.’


대충 보고 넘어갔던 터라 까먹고 있었다.


“근데 이름이 윤성덕이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제 받은 명함을 꺼내봤다.


역시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환자 이름을 더블클릭했다.


==========

C.C(주호소증상)>

pain(femur, Rt)

통증(대퇴골, 오른쪽)


ROS(문진)>


P/E(신체검진)>


==========


이전에 봤던 의무기록이 다시 그대로 떴다.


‘음, 역시 C.C만 가지고는 볼 수 없는 게 있지.’


C.C(주호소증상)는 환자가 주로 호소하는 증상.

즉, 의무기록의 처음은 환자가 호소하는 것을 적을 뿐, 실제로는 환자가 호소하지 않더라도 환자에겐 더 중요한 질병 상태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


나는 ROS(문진) 항목에 다음 단어를 적어 넣었다.


depressive episode(우울삽화).


그리고 impression(추정진단)으로 다음 단어를 적어 넣었다.


MDD(major depressive disorder, 주요우울장애. 흔히 말하는 우울증을 말함.)


저장 버튼.


‘하... 어제는 다이나믹했지.’


나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벽지의 점 개수를 셌었지. 몇 개였더라?’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 세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천장 벽지의 작은 네모 한 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 2, 3...”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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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안 보이는 것 (1) +1 24.09.05 817 25 12쪽
11 자주 오시네요 (3) +1 24.09.04 832 27 11쪽
10 자주 오시네요 (2) +2 24.09.03 846 27 11쪽
9 자주 오시네요 (1) +1 24.09.02 904 27 11쪽
8 담배 끊으세요 (3) +2 24.09.01 930 29 11쪽
7 담배 끊으세요 (2) +1 24.08.31 967 24 11쪽
6 담배 끊으세요 (1) +1 24.08.30 1,077 35 12쪽
5 오랜만이야 (2) +1 24.08.29 1,099 35 12쪽
4 오랜만이야 (1) +2 24.08.28 1,172 36 12쪽
3 보건지소 +1 24.08.27 1,205 37 12쪽
2 의무기록 +1 24.08.26 1,244 39 12쪽
1 귀향 +2 24.08.26 1,443 4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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