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의 최약체 소드마스터는 나야!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새글

사자훗
작품등록일 :
2024.08.29 17:33
최근연재일 :
2024.09.18 12:35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668
추천수 :
8
글자수 :
147,985

작성
24.08.29 17:42
조회
170
추천
2
글자
19쪽

1. 프롤로그

DUMMY

그날은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구름은 해를 가리는 대신 빛나는 눈발을 마구 흩뿌려대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산 하나가 우뚝 솟아있었다.

단풍에 물든 산인가 착각할 만큼 시뻘건 산이 말이다.



"후우, 너 좀 힘드네? 비천한 도마뱀 새끼치곤 꽤 오래 버티잖아?"


상처 입은 거구의 용 앞에 홀로 우뚝 선 금발의 사내가 특유의 천진난만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조금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끝을 봐야겠지?"


마을 밑에서부터 설산의 정상까지 용을 잡으러 오르는 길.


그는 그곳에서 마물들의 기습으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동료들을 잃어야만 했다.


그의 동료들은 매몰찬 겨울바람 속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며, 삭풍 앞의 나뭇잎처럼 덧없이 스러져만 갔다.


그 처량한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동료를 잃은 슬픔을 참으려 이를 악물지언정,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책임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흑룡을 잡는 것이야말로 차디찬 눈 바닥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들이 간절하게 염원하던 일이었기에.


자신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저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했다.

때문에 적어도 저들의 의지만큼은 지켜줘야만 한다.


그렇기에 그는 위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계속해서 위로 향한다.


설산이라는 새하얀 백지 위에 핏물로 이루어진 붉은 선을 죽죽 그어대며.


제 너른 어깨 위에 동료들의 목숨 값이라는 책임감을 차곡차곡 더해가며.


그렇게 쉬지 않고 나아간 끝.

그곳에는 그들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마지막 살아남은 흑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걸로 먼저 간 녀석들한테 면은 서겠지.'


이 녀석만 잡으면 된다.

이 녀석을 잡아야만 인류는 비로소 '용'이라는 '자연재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자신과 함께 이 설산에 발을 들인 모든 자들의 염원.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그들의 의지를 지켜줘야만 했다.


그러니-


금발머리 사내가 결단을 내린 듯 낯빛을 굳히며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그러자 타오르는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오러가 재빠르게 검신을 타고 올랐다.


일반적인 다른 기사들이 뿜어내는 오러에 비해 유독 짙은 색을 띠는 오러.

심지어 일반적인 오러처럼 빛을 머금는 게 아닌, 자발적으로 빛을 냈다.


흑룡은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당황한 듯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러니 이제 그만 끝내자고!!"


이윽고 그가 붉은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검이 제 주인의 의지와 공명하듯 섬뜩한 이빨을 드러냈고,


그의 강인한 의지는 그의 온몸에 붉은 오러로서 너울너울 피어올랐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쐐애액!!!


'?!'


자신의 등 뒤를 노리며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무언가.


유려함 속에 숨겨진 날카로움.

그 속에 녹아있는 있는 짙은 살기.


사내가 급히 몸을 뒤틀며 두 눈을 부릅떴다.

같이 설산에 올라온 마법사의 지원 공격이라 생각하기엔 궤도가 영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깡!!


회심의 순간을 방해당한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일 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른 궤적을 그리며 기세 좋게 날아든 마력창은 단 일검에 맥없이 눈 바닥에 처박혔다.


퍼석하는 담백한 소리가 설산 위에 울려 퍼졌다.


"아니 왜?!"


금발머리 사내가 마력창이 날아온 쪽을 향해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마력창이 날아드는 순간, 지금껏 잘 걸려있던 방어 축복이 풀려버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콰득!!


비열한 검은 용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쿨럭!!"


돌연 그의 가슴에 이는 화끈한 통증.


"하으."


사내가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선 통증이 이는 제 가슴 쪽을 바라봤다.


기동성을 위해 입은 얇은 가죽 갑옷이 용의 발톱에 뚫려있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근데 뚫린 게 가죽 갑옷만이 아닌 게 문제였다.


"쿨럭!"


뒤이어 막을새도 없이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대량의 검붉은 피.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안 그래도 창백한 그의 얼굴에 붉은 곡선을 덧그렸다.


'용독이 벌써...?'


손끝이 저릿한 감각.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발톱에 묻어있던 용독이 온몸에 내달린 모양이었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검은색 용의 발톱은 '무조건' 피해야만 한다.

거기엔 상시로, 그 이름도 더럽게 긴 '지혈 불가 마비 극독'이 묻어있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용의 발톱에서 제 손톱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선 손끝에 바짝 힘을 줘봤다.

역시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창을 맞는 게 나았을 텐데.'


한 달간 계속된 혹한의 원정에 머릿속이 얼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정말 지독히도 속이 쓰린 판단 미스였다.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때가 늦는 법이고, 방심의 대가는 참혹한 법.


이내, 그의 온몸과 검날을 휘감고 있던 붉은 오러가 빛을 잃으며 스러져버렸다.


용독에 의해 오러길까지 막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작 한 번의 실수일뿐이건만.


그 대가치고는 상황이...


비통함만이 가득 들어차있던 푸른 눈동자에, 이제는 분노와 의문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 하우레스."


빠른 속도로 둔해지기 시작하는 입가와 혀.


그가 필사적으로 성대를 긁으며 자신이 빈틈을 내어주게 만든 원흉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도 '뒤를 부탁한다'라며 쓰러져간 동료들의 얼굴이 망막에 잔류하는 느낌이다.


마물들의 앞을 막아서며 '시간을 벌어줄 테니 먼저 가'라 외치는 목소리가 고막에 선명히 새겨져있는 느낌이다.


한데 이런 식으로?


그것도 용이나 마물도 아닌, 믿고 있던 동료들 중 한 명의 배신으로?


"도대체 왜!!! 난 널 믿었는데!!!!"


눈시울을 붉힌 채 얼굴을 잔뜩 구긴 그가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외침을 토해냈다.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얼룩덜룩한 설산 위를 뒤집어엎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동료들의 죽음에도 이 악물고 버티던 그였는데, 지금은 마치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듯한 기세였다.


"... 그러게 타인을 너무 믿으면 안 되셨죠 황제님. 그동안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자 하우레스라 불린, 긴 제비꽃 색 머리를 가진 사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커흑!!"


금발 사내가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예고 없이 들이닥친 고통이 목구멍을 틀어쥔다.


인간들의 대화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사내의 몸에 제대로 독이 돈 걸 확인한 흑룡이 불시에 그의 가슴께에서 발톱을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사내의 몸이 경련하듯 크게 한번 들썩였다.


뽑혀 나온 발톱과 함께 그의 가슴께에서 쏟아져내리는 한 움큼의 피.


삽시간에 선명한 검붉은빛을 덧칠해가는 눈 바닥.


-콰직!


무너져내리려는 몸을 강제로라도 세워두기 위해, 휘청거리던 그는 들고 있던 검을 눈 바닥에 내리꽂았다.


독과 마비에 저항하며 검 손잡이를 꽉 그러쥔 그의 손끝은 진작에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하우레스, 네가 조금이라도 같이 온 동료들을 생각했더라면..."


어둑한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용과 자신을 배신한 마법사를 번갈아봤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푸른 눈동자 속 깊은 곳엔 분노와 슬픔, 그리고 허망함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조용히 들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우레스가 날이 추운데도 구태여 기동성을 위해 가죽 갑옷을 입자 권유한 것도 다 이러한 결말을 위한 밑그림이었을 것이다.


-으득!


그리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억세게 이를 악문 그의 턱에 흐리게 힘줄이 돋아났다.


내면의 슬픔이 서서히 옅어지며 분노만이 그를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이래선 안되는 거잖아?"


힘겹게 입을 달싹인 그가 옛 친우에게 물었다.


배신자는 대답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그제야 유려하게 생긴 마법사가 대꾸했다.


"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다."


잡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녀석.

상처 입은 마지막 흑룡이 그러한 인간 마법사의 옆으로 절뚝절뚝 거체를 옮겼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둘이 친분을 보란 듯이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그걸 지켜보던 금발 사내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새겨졌다.


손톱으로 마구 긁는 것처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의 속을 잔뜩 헤집어놓는다.


사내의 숨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뻐근한 것이 영 좋지 않다.


용의 발톱에 찔린 물리적 통증 때문일까.

아니면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심리적 통증 때문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냥'이 아닌 '타협'을 하면 충분히 용과도 공생이 가능합니다. 용들한테도 지능은 있기에 대화라는 게 통하거든요."


"...어도."


힘이 빠진 듯 고개를 푹 숙인 사내의 잇새에서 답지 않게 씹어뱉는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


"적어도 기사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아아아아!!!!!!!!!!!!!!"


-후드드득.


천지를 뒤흔들 기세로 울려 퍼진 노호성과 함께, 한때 가장 빛나던 최연소 황제이자, 가장 강력했던 소드마스터의 가슴께에서 한 다발의 피가 쏟아져내렸다.


세상을 집어삼키는 흉포한 해일과도 같은 기세가 푸른 눈동자 속에서 매섭게 일렁거렸다.


맹수 앞에 선 것만 같은 위압감에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마법사는 그저 담 좋게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어차피 그가 용독에 당한 상태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물어가는 소드마스터가 물었다.


"정말로 넌, 저 밑에서 차갑게 식어간 동료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은 거야...?"


"그야 당연히 부끄럽습니다."


"근데 어째서?"


"그야... 대의를 위해서였습니다."


"대의?"


"모든 인간의 '꿈'을 위해서지요. 힘만 써서 칼만 휘두르실 줄 아는 무식한 분에겐, 백날 설명해 봤자 이해받지 못할 것 같지만요."


이제는 분노만으로 점철된 푸른 눈동자 속에, 살포시 미소 짓는 마법사의 모습이 선명히 각인됐다.


"꿈...? 도대체 평화와 안정보다 더 위대한 꿈이 뭔데? 설명해 봐, 하우레스."


고저 없는 목소리에 질문이 담겼다.


질문하는 자의 두 눈동자 속에는 흉흉함이 어려있었다.


마법사 하우레스는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해 준 동반자였다.


지금껏 함께 울고, 웃어주던 소중한 친우이자, 힘을 합쳐 싸워와준 전우였다.


그래서였을까.


너무 맹목적으로 믿어버렸다.


배신의 기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금발 사내의 속에서 더욱더 크게 천불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 소중하고 안락했던 인연의 끝이 이런 당치도 않는 뒤통수라 생각하니 배덕감이 치미는 것이었다.


"이...!!"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하늘에 닿고 싶어 하는 자들은 많았다.


그렇게 그들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내는 좀 달랐다.


그는 별이 아니라 태양이 되고 싶어 했다.


별은 밤의 어둠 속에서나 겨우 빛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태양은 백주대낮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그 누구보다도 더 밝게 빛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심지어 다른 존재들까지도 비춰줄 수 있으니, 태양이야말로 '빛' 그 자체이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당연히 자그마한 별이 아닌 태양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난...!"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냈다.


현시대 통틀어 가장 강력한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2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라의 가장 높은 곳인 황제의 자리를 꿰차는 것도.


여태껏 분열되어 있던 5개국을 통일시키는 것도.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힘으로 일궈낼 수 있었다.


마지막 살아남은 흑룡을 잡아 용이란 존재를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도.


그로 인해 모두가 용이라는 재앙에 마음이 꺾이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도.


그 자신의 힘으로.


아니.


그와 함께해 준 동료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우와 함께 이뤄낼 수도 있었다.


바로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다!


"하우레스!! 기사단의 이름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란 말이야!!!!!"


그가 마지막 힘을 다 짜내는 심정으로 '옛 친우'를 향해 소리쳤다.


목소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갈라졌다.


"황제님. 저는 기사가 아닌 마법사입니다. 기사가 명예와 정의를 쫓는다면, 마법사는 탐구와 호기심에 눈이 머는 존재. 그러니 그 차이점을 인정하시고 좀 더 머리를 쓰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래도... 적어도 저놈은... 용은..."


사내가 힘겹게 입을 열었으나, 그 이상의 뒷말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그의 입안에서만 맴돌다 이내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가 느리게 눈을 꿈뻑거렸다.


자꾸만 시야가, 아니 온 세상이 뒤틀리며 어그러진다.

사내는 이제 슬슬 본인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


그리고 마침내.


거센 해일이 몰아치는 것만 같던 푸른 눈동자에서 빛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게 가장 빛나던 황제이자, 가장 강력했던 소드마스터의 유언이신가요? 정말 별것 없네요."


마법사의 말에 반응하듯 용이 천천히 아가리를 벌렸다.


보기 싫다는 듯 마법사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자, 콰득! 하는 소리가 시리도록 차가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어서 들려오는 뭔가가 어그러지는 소리.

뼈가 분질러지는 소리.

내장이 터지는 소리.


섬뜩하고 꺼림칙한 기분에 사로잡힌 마법사는 고개를 돌린 채 조용히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겐 옛 친우의 시신을 거두어줄 의리 따윈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가 용을 잡는 게 아닌, 용과 손을 잡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

욕심에 눈을 떠버린 그는, 다른 소중한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감겨버렸다.


내리깐 하우레스의 망막에 담기는 건, 한때 친우였던 이의 피로 온통 검붉게 물든 눈 바닥.


일견 붉은 카펫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우레스가 슬쩍 쓰게 웃었다.


"참으로 저자에게 어울리는 마지막이군요."


그가 정식으로 기사가 됐던 날.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올랐던 날.

폭군의 목을 따버리고 무력으로 왕관을 강탈했던 날.


그가 빛날 때는, 항상 어딘가의 붉은 카펫 위에 서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빛을 잃고 스러지는 그 순간까지도 붉은 카펫 위에 서 있었다.


힘의 적색을 상징하던 그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비상과 추락이자, 시작과 끝.


"저는... 강인한 당신은 좋아했으나, 멍청하리만치 순진한 구석이 있던 당신은 싫어했습니다. 이제 인류를 위한 대업은 제가 이어받을 테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고 부디 편히 쉬시길."


인류의 희망이 됐던 그는 위풍당당하게 붉은 카펫 위를 걸었었고,

인류의 구원자가 될 자신은 차가운 붉은 설산 위를 거닌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일 터였다.


-커륵!!


"?!"


상념에 잠겨있던 하우레스가 이질적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다시 용 쪽으로 돌렸다.


"잘못 삼킨 건가요? 으..."


흑룡이 대답 대신 씹다만 소드마스터의 시신을 뱉어냈다.


한때는 서로에게 정을 붙이고 등을 맡겼던 옛 친우의 시신이 짓이겨진 채로 눈 바닥을 뒹굴었다.


차게 식은 눈으로 흉측하게 뭉개진 옛 친우를 일별한 하우레스가 다시금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돌연 시신에서 터져 나오는 강렬한 빛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으, 이게 대체 무슨...!!"


처음 접하는 현상이었다.


제대로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든, 콧잔등이 찡해질 정도로 눈부신 찬란한 빛.


호기심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하우레스가, 결국 빛의 산란을 견디지 못하고 두 눈을 꽉 감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마치 생눈으로 태양을 바라본 것처럼 시야가 한동안 온통 백색으로 물들었는데,


마치 모든 걸 다시 그려 넣을 수 있는 거대한 백지장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이도 느껴졌다.


그야말로 순백(純白).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가 서있던 주변은 온통 순홍(純紅)이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좀 지나자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도 흑룡도 눈을 떴다.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미지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이 섞인 두 쌍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찬란한 빛을 내뿜었던 시신을 향해있었다.


"시체에서 빛이라... 영혼 같은 거려나요?"


하우레스가 애매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띤 채, 이젠 더 이상 빛나지 않는 옛 친우의 시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것도 연구해 보고 싶네요. 영혼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오러가 빠져나간 거라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저런 건 봐본 적이 없어서..."


"그나저나 다시 드실 건가요? 또 체하실지도 모르는데?"


마법사가 은근한 투로 묻자 용이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그냥 내려가죠. 시신 위치를 가지고 그를 따르던 자들과 거래를 할 수도 있을 테니..."


살포시 미소 지은 마법사는 끝까지 제 옛 친우를 이용해먹으려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겼다.


이제부터 그의 계산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된다.


인류의 위협을 잡지 않고 살려둔다.


그 위협으로부터 더 큰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하나, 그 과정에서 언제라도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아니 그게 가능한 유일무이한 수단을 잃어버렸다.


말이 통했다면 살려뒀겠으나, 그는 극단적인 용혐오자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지금의 하우레스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외통수.


그러니 이제부터 자신의 계획은 절대로 실패해선 안됐다.


속으로 결의를 다진 하우레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둑하게 물들었다.


여전히 구름은 해를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적일색의 설산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마리의 흑룡과, 한 명의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층 더 거세진 눈발이 광대하게 펼쳐진 붉은 카펫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가장 강력했던 소드마스터이자, 가장 빛났던 황제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리도록 차가운 눈발에 뒤덮이며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그날은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구름은 해를 가리는 대신 빛나는 눈발을 마구 흩뿌려대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겨울에 어울리는 순백의 산 하나가 우뚝 솟아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착각할 만큼 새하얀 산이 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이 구역의 최약체 소드마스터는 나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이 [이 구역의 최약체 소드마스터는 나야!] 로 변경될 예정입니다. 24.09.05 9 0 -
23 23 NEW 5시간 전 3 0 13쪽
22 22 24.09.17 6 0 13쪽
21 21 24.09.16 8 0 12쪽
20 20 24.09.15 10 0 11쪽
19 19 24.09.14 11 0 17쪽
18 18 24.09.13 9 0 14쪽
17 17 24.09.12 16 0 18쪽
16 16 24.09.11 15 0 12쪽
15 15 24.09.10 15 0 12쪽
14 14 24.09.09 14 0 14쪽
13 13 24.09.08 15 0 16쪽
12 12 24.09.07 15 0 17쪽
11 11 24.09.06 16 0 12쪽
10 10 24.09.05 17 0 15쪽
9 9 24.09.04 18 0 16쪽
8 8 24.09.03 23 0 11쪽
7 7 +1 24.09.02 30 0 13쪽
6 6 24.09.01 31 0 15쪽
5 5 24.08.31 35 1 14쪽
4 4 24.08.30 46 1 14쪽
3 3 24.08.29 54 2 12쪽
2 2 24.08.29 91 2 15쪽
» 1. 프롤로그 24.08.29 171 2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