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26>
"녹대협! 원사저까지..."
청성파 일대 제자들에게 협공을 받아 위태로울 지경에 놓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현룡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맙게도 여기 소저께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위현룡은 녹무군의 말을 따라 원연홍을 고마운 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길을 담담히 받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오히려 저분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요. 생사가 오고가는 격렬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저 대협께서 청성파 일대제자들을 단 한 명도 살상(殺傷)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녀의 설명은 위현룡의 마음에 뜨거운 충격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녹무군의 팔뚝에 붉게 물든 천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상처를 입은 녹무군을 원연홍이 치료해준 모양이었다.
[저 녀석의 속이 매우 깊구나. 녹무군은 네가 청성파와 깊은 연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청성파 제자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던 게다. 잘못하면 도리어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그가 청성파 제자들을 여럿 살상이라도 했다면 청성파 제자들은 네가 원기종 장문의 원흉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게다. 이런 점에서 녹무군은 상당히 사려 깊고 신중한 행동을 취한 셈이지.]
위현룡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홍후인의 말대로 만일 녹무군이 몇 명의 청성파 제자들의 목숨을 해하였다면 청성파와 자신과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위현룡은 녹무군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음성으로 이같이 말했다.
"훗날 제가 녹대협의 은혜를 갚을 날이 꼭 있을 것입니다."
녹무군은 적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결초보은(結草報恩)을 운운하는 상대가 주군(主君)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이라는 수직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현룡은 녹무군에게 깎듯이 존칭을 쓰고 있었다.
과거 청성파에서 위현룡은 하찮은 속가제자들에게까지도 무례한 언행을 하지 않았고, 일대제자가 된 후에도 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원연홍은 위현룡의 저런 성정(性情) 때문에 녹무군이 앞으로 많이 당혹스러워할 것 같아 슬그머니 웃음이 터져 나오려했다.
아무튼 어떤 인연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녹무군 같은 충직한 사람이 위현룡을 보필하고 있다는 게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원연홍은 피를 토한 채 자리에 쓰러져 있는 염청석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았던 것일까. 의외로 그녀는 차분하였다.
"대사형이 또 발작을 일으키셨군요."
"그가 종종 이랬습니까?"
위현룡이 궁금하여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번... 연무관에서 폐관을 한 채 무공을 연마하다가도 이랬죠. 그리고 위사제가 청성파에서 도피하던 날에도 대사형이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었다고 사제들에게 들었어요."
위현룡은 그 날 염청석이 광분하여 날뛰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해냈다.
그때 그는 심하게 흥분하는 것도 모자라 이성까지 잃어버려 사제들까지 공격하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 모습이 방금 전 일어났던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좀 이상한 걸...]
갑자기 홍후인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염청석이 이리 된 건 천지일기공이라는 지하밀성의 무공을 익혀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도피한 시기에 염청석이 이미 천지일기공을 연마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당시 원기종은 그 무공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지 않고 있었지 않느냐? 도대체 어떻게 그 무공을 미리 배웠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위현룡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염청석이 장문인을 해한 가장 큰 이유가 지하밀성의 무공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였다.
이때 염청석을 살펴보던 원연홍이 입을 열었다.
"대사형을 여각으로 옮겨야겠군요. 조금 있으면 사제들이 이리로 올 거예요. 제가 반시진 정도 기다렸다가 오라고 했거든요."
혹시나 위현룡과 청성파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날 분란을 걱정하여 그렇게 일러둔 모양이었다.
"대사형이 발작을 일으킨 나머지 위사제와 크게 싸우지 않은 게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잖아요."
그녀의 말에 위현룡은 애써 부인하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별 다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그녀의 번민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그녀가 염청석이 입은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그녀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이때 녹무군이 말고삐를 잡은 채 다가왔다.
"주군! 저기..."
위현룡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녹무군을 보면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소교주를 구해야 한다는 중차대한 일을 깜빡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저 대협께서 급한 용무로 인해 말 두 필을 구해야만 한다고 해서 제가 도와주었지요. 위사제, 긴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가보도록 해요."
원연홍이 그의 심정을 읽고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위현룡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교차되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잡고 이내 말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원사저...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조만간 청성파로 돌아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히 지내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돌린 채 저 멀리 마을에서 새어나오는 흐릿한 불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위현룡은 속으로 장탄식을 한 번 한 후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흘러가는 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설(寒雪)에 홀로 피어 난 꽃,
찾는 이 없으니 향기(香氣)만 외롭구나.
따뜻한 봄날 기다리다 거세진 삭풍(朔風),
허공(虛空)에 기대어 내 마음만 시들어가네."
위현룡의 모습이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초연히 사라졌지만 원연홍은 아직 떠나지 못한 그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을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微動)이라도 하면 아련하게 더듬고 있는 추억이 산산이 조각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위사제...정말 우리가 예전처럼 지낼 수가 있을까요....정말 희망이 있는 걸까요...."
쓸쓸한 별빛이 흰 눈처럼 내려앉을 때 위현룡이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원연홍의 눈에서도 어느덧 하얀 별빛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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