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28>
그들은 허망한 눈으로 마교 무사들이 막고 있는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적들의 공격이 그리 거세지 않아 마교 무사들이 손쉽게 그곳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미...우리 세력은 이쪽으로 다 모여든 상황인데...."
백운이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른 수장들도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이때 허운이 또렷한 음성으로 그들의 잃어 가는 이성을 일깨웠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허운은 조금이라도 실기(失期)하지 않기 위해 재빠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제가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어찌 해야만 하겠소? 우리들은 참모의 말을 교주의 명처럼 따르리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자 허운은 제일 먼저 사검귀천에게 물었다.
"소교주는 지금 어디 계시오?"
"아마도 은부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도천당(渡天堂)에 계실 것입니다."
"사검귀천은 소교주를 모시고 약왕문 남쪽 상경각으로 오시오. 상경각이 있는 곳은 약왕문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마지막 항전을 위해 만들어 놓은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곳이라 하오.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곳으로 몸을 피하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알겠습니다!"
사검귀천은 일단의 무사들을 이끌고 급히 도천당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허운은 마음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상경각으로 간다해도 이 난국을 헤쳐날 묘안은 전혀 없음을 말이다.
그저 목숨을 좀 더 부지해보는 격렬한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었다.
"주유천 대협은 사백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가서 약왕문의 다른 입구를 막아내야만 하오. 그 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는 대문을 지나 쭉 가다보면 대나무 숲이 보일 것이오. 그곳에 입구가 은밀히 감춰져 있소. 현재 적들이 얼마나 진입을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주대협이 그쪽의 적들을 격파하고 출구를 봉쇄해야만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주유천이 명을 받고 급히 떠나려하자 허운이 잠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약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목숨을 내놓아야할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일입니다...하지만..."
주유천은 허운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믿음직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곳을 끝까지 사수하여 소교주가 무사히 상경각에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주대협..."
허운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게 서로 마지막으로 보게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유천은 비장한 얼굴로 포권을 한번 한 뒤 무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허운은 연이어 백운에게 명을 하달하였다.
"백대협께서는 주유천대협께서 출구를 봉쇄할 동안 삼백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약왕문 내부에 이미 진입해 있는 적들을 소탕하십시오."
"지금 당장 시행하겠소."
"그리고 유원학대협과 저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백여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상경각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장악하여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여기는 어찌할 생각이시오?"
"여기는 남은 무사들로 하여금 끝까지 막아내도록 할 것입니다."
허운은 미안한 눈으로 입구를 막고 있는 마교 무사들을 주시하였다.
상경각쪽으로 무사히 들어가게 되면 이곳에 남아 있는 무사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방패로 활용하게 되자 그는 한쪽 가슴이 죄책감으로 오므라드는 것을 느꼈다.
유원학도 같은 마음으로 있다가 허운에게 담담히 말했다.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시고 어서 서두르십시다."
** **
허운과 유원학은 상경각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달리는 와중에 저 멀리서 울어대는 비명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제발...모두 큰 손실 없이 상경각까지 도달해야할텐데....)
허운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원학이 우뚝 솟은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참모! 저기 보이는 곳이 상경각이오?"
"맞습니다. 이쪽으로 나 있는 두개의 대문을 지나면 됩니다."
"주위가 조용한 것을 보니 적들이 아직 이곳까지 들이치지는 못한 듯 싶소..."
"그런가 봅니다. 일단 상경각까지 가서 상황을 보고, 다시 돌아와 이 부근을 지키면서 마교 무사들의 퇴로를 도울 것입니다."
그들이 막 상경각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대문을 향해 달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동쪽으로 나있는 문으로 수많은 적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허운과 유원학은 기겁을 하였다.
설마 이렇게 빨리 진입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 많은 적들이 약왕문 내부 깊숙이 위치해 있다는 상경각까지 당도했다면....소교주를 비롯하여 사검귀천과 주유천대협 그리고 백운대협에게 큰 위험이 닥쳤을 것이다...이거 정말 큰일이로구나...)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파고들자 허운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현기증마저 났다.
한편 동쪽문에서 등장한 적들도 뜻밖에 마교 무사들과 맞닥뜨리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책사가 상경각 근처로는 단 한 명의 적도 없을 것이라 장담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들은 오백명이나 되는 자신들에 비해 조우(遭遇)한 마교 무사들의 숫자가 겨우 백여 명에 불과 하자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적들은 신속하게 마교 무사들을 포위하였다.
이에 유원학이 검을 빼들고 소리를 쳤다.
"모두 냉정함을 유지하라!"
그때 적들 속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위세 등등한 마교분들께서 어디를 그리 바삐 가시는 게요?"
대략 사십대 후반에서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긴 옷소매를 가벼이 펄럭이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온화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두 눈에서는 벼락같은 흉폭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또한 입고 있는 녹색제복에는 하얀 수실로 대막천궁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수놓아 있는 것으로 보아 대막천궁의 고수가 분명해 보였다.
허운과 유원학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손일극(孫一克).
대막천궁의 수뇌 중 한사람으로서 새외에서는 꽤나 명성이 높은 자였다.
무학적 재능이 풍부하여 젊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고, 나이 서른이 될 무렵에는 대막천궁으로 들어가 일찍부터 높은 자리를 떠맡은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절기는 모두 장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장법의 심오함과 난해함 때문에 많은 고수들이 그와 맞서기를 꺼려하였다.
허운은 속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손일극은 일처리가 철두철미하여 웬만하면 허점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런 부분 때문에 대막천궁의 수뇌까지 올라설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거기 계신 두 분은 마교 허운 참모와 유원학 대협이 아니시오? 실로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가 먼저 포권을 해왔으므로 허운과 유원학도 마지못해 포권을 하였다.
그러나 겉으로 느껴지는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는 살벌함만이 가득 감돌았다.
오래 전 마교가 새외에서 중원으로 거점을 옮길 당시 적월교와는 적지않은 마찰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교와 적월교는 공식적인 왕래조차 하지 않을 만큼 철저히 다른 길을 걸었으며, 무사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은 적대심을 품고 있었다.
깊은 애증(愛憎)의 관계.
어쩌면 이 말이 두 세력의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말일지도 몰랐다.
"적월교 내 그 누구도 마교가 우리의 계책을 간파하여 상경각을 점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소이다. 역시 허운 참모는 뭐가 달라도 한참 다르구료."
손일극의 말에 허운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적월교나 대막천궁에 이름 있는 책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책사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허허허, 허운 참모의 식견에 이 사람은 매우 놀랐소이다.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적월교 책사를 염두에 두시다니 말이오. 허나 참모의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소이다. 이제 나이가 겨우 열 여덟에 불과한 어린 소년을 새외에서 가장 큰 문파인 적월교의 책사라고 부르기는 뭐하니 말이오."
허운은 상경각까지 달려오는 내내 적월교의 두뇌를 담당하고 있는 책사의 존재를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약관도 채 넘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손일극은 그가 어리다하여 폄하(貶下)하고 있었으나 허운의 생각은 전적으로 달랐다.
만일 그 어린 책사가 더 성장하여 무림이라는 커다란 세상을 경험하고, 광대한 식견을 갖추게 된다면, 장차 무림엔 살벌한 평지풍파(平地風波)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이 무림평정의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는 적월교라면 말이다.
"아무튼...참모께서 서두르긴 하셨소만...아쉽게도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인 모양이오."
손일극의 말이 떨어지자 대막천궁의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니...쓸데없는 저항일랑 관두고 이쯤에서 투항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의 협박에 가까운 권유에 유원학이 크게 호통을 쳤다.
"한때 마교의 뒤를 핥던 적월교 따위에게 항복을 하다니!! 어림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덤비거라!!"
그러나 그 모습이 가소로웠던 손일극은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보아하니 다른 무사들이 더 있는 모양인데....그래도 늦었소이다. 대막천궁 무사들이 이미 약왕문으로 통하는 두 곳을 입구를 모두 점령하였고, 지금은 남아 있는 마교 잔당들을 모조리 척살(刺殺)하는 중이오."
허운과 유원학은 그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였다.
내심 걱정하고 있던 일이 현실화되어 버린 것이다.
상경각까지 오백명이나 되는 대막천궁 무사들을 안전하게 이끌고 들어올 정도라면 그의 말이 허풍일리가 없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만 가는구나...아...정녕 여기서 모든 것이 끝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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