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화룡점정(畵龍點睛) <17>
당시의 참혹했던 전투가 생생히 떠오르게 되자 적무평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날 이후로...무림과는 인연(因緣)을 끊고 조용히 살아가기로 했것만...)
언제부턴가 적무평은 자신의 동향(動向)이 은밀하게 정탐 당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도 정체를 숨기고 숨어 다녔건만, 어떻게 알아챘는지 마교 교주 허석문의 최측근인 단중이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적무평은 이미 무림과의 단절을 작심한지 오래였다.
단중을 매섭게 물리치고 나자 이번엔 허석문이 직접 방문하였다.
마교 교주 허석문은 자신의 불찰(不察)을 깊이 뉘우치면서 적무평의 마음을 풀기 위해 애썼다.
허석문과 단중이 방문한 날 이후.
적무평은 미련없이 짐을 꾸려 청성산을 떠났다.
위현룡과 원연홍에게 이별의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했을 만큼 급히 몸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번 드러난 행적은 다시 감추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단중은 마교의 정보망을 통해 꾸준히 적무평의 행적을 뒤쫓았고, 그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에 어차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 적무평은 도피를 포기하고 조그만 마을에 정착하여 생업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단중의 심복 하나가 마교내의 변고(變故)를 알려오게 된다.
북마교 출신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교주 허석문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여식인 허혜린마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힘을 보태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적무평은 서신을 다 읽더니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단중의 심복을 냉정하게 내쫓았다.
마교가 위급하건 말건 이젠 자신의 인생에서 씻겨진 얼룩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더는 피비린내 속에 불구가 된 몸을 담그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단중의 심복이 눈물로 호소하다가 돌아간 이후 왠지 마음이 후련하지가 않았다.
인연(因緣)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질긴 끈이라고 했던가.
한참을 괴로워하던 적무평은 끝낸 마교를 위해 검(劒)을 들고야 말았다.
** **
"저기....적대협...결정을 하셨습니까?"
숨죽이고 있던 철혈삼마 철혈귀가 눈치를 살살 보면서 묻고 있었다.
적무평은 범과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탁한 음성을 내뱉었다.
"더 생각해 볼 테니 당신들은 이만 물러가서 기다리시오."
순간 철혈귀의 안색이 난처하게 변해갔다.
"적대협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그게 좀..."
"싫다는 것이오?"
"아...아...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적무평이 내려놓았던 검을 다시 들자 철혈귀가 두 손을 내저으면서 황급히 대답하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시 반월곡 전투를 생생하게 경험했던 철혈삼마로써는 그가 가라면 가야했다.
천여 명의 북마천군 정예 무사들이 뒤에 버티고 있었다면 호기롭게 한번 싸워보겠지만...현재의 지쳐버린 이백 남짓한 무사들로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철혈귀는 전전긍긍하면서 마음의 갈등을 겪었다.
(음...전투 중에 오른팔이 잘린데다가...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보아하니 오랫동안 무공과도 담을 쌓았던 것 같군. 또한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왔던 정기(正氣)도 많이 흐려져 있고...허나...)
허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억지로 과소평가 해 본들 누가 뭐라 해도 적무평은 적무평이었다.
"모두 돌아간다!!"
철혈귀는 어찌 해보려는 마음을 싹 접고는 그대로 퇴각을 명했다.
그들이 깨끗하게 철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적무평은 속으로 단정지었다.
(지금은 물러갔지만 곧 전력을 채워서 다시 추격해 올 것이다...)
북마천군 무사들이 썰물처럼 시야에서 멀어지는 순간 적무평의 신형도 흐릿하게 사라져 버렸다.
** **
유원학의 지시를 받으면서 마교인들이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핏물에라도 빠졌다 나온 것처럼 하나같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자! 곧 삼조곡이오! 조금만 힘내시오!"
앞장서던 유원학이 소리를 치자 지쳐있던 사람들은 안도감에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
쏟아지던 폭우가 주춤하면서 빗방울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더욱 발길을 재촉하였다.
약 한시진 정도 달렸을까...
두 방향에 길이 나타났다.
전진(前進)을 멈추고 지도를 꺼내 든 유원학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길은 우리들이 협철곡으로 들어왔던 길이요. 하지만 도피하기엔 적당하지 않으므로 저기 보이는 암벽들 사이를 헤치고 가야합니다. 저곳만 통과하면 얼마안가 삼조곡이 나올 것이오."
유원학은 문득 지치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무사들을 돌아보다가 가슴아픈 한숨을 내쉬었다.
천여 명 이상 되는 무사들을 다 잃고 남은 전력이라곤 백 명도 채 안되었다.
그의 심정을 간파한 허운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비록 많은 희생이 뒤따랐지만 저희들은 유대협께서 마교를 위해 애쓰신 점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마교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곳곳에 있으며 금방이라도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그때 가서는 마교가 유대협을 도울 것입니다."
진심이 우러나오는 허운의 말을 들으면서 유원학은 복잡하고 어두운 기분을 떨쳐 버렸다.
"허운 참모의 말을 듣고 보니 장래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은 것 같소이다. 그럼 어서 서두릅시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나 있는 좁다란 길목을 지나가자 갑자기 눈앞이 시원하게 트여왔다.
저 멀리 마치 손톱으로 할퀴고 지나간 자국과도 같은 세 갈래의 길도 보였다.
삼조곡이었다.
고대하던 삼조곡이 지척에서 보이므로 그들은 초조하고 불안했던 기분이 모두 걷히는 것만 같았다.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삼조곡.
어쩌면 이하민의 마수에서 벗어날 마지막 관문(關門)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세 갈래로 갈라진 삼조곡의 길목에 도착했다.
유원학이 또 다시 지도를 꺼내들었다.
"음...어디로 간다...."
어느 길을 택해야 대천마교의 추격을 효과적으로 뿌리치면서 안전한 도피를 할 수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소리쳤다.
"연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하얀 연기가 용과 같은 형상으로 승천하고 있었다.
연기의 형태를 보아하니 심마니의 오두막에서나 나오는 그런 연기가 아닌, 뭔가 인위적으로 생성해내는 연기였다.
"대천마교입니다!!"
나직이 외치던 허운은 유원학에게서 지도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연기가 올라오는 지점과 지도의 지형을 세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여기 세 갈래의 길목이 있습니다만...선택은 단 두 갈래뿐입니다. 다른 한쪽은 대천마교가 수월히 추격해 올 수가 있는 방향이므로 제외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여기...두 길목 중에 이쪽에서 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그럼...저 길목에 대천마교가 매복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오?"
유원학의 물음에 듣고 있던 허혜린이 이이를 제기했다.
"하지만 일부러 연기를 피워 매복을 알린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꼭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지도를 뚫어져라 살피던 허운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 지형은 삼조곡을 지나 미로처럼 복잡한 길목들이 사방팔방 깔려있어서 세세하게 매복을 심어놓기는 무리입니다. 더군다나 협철곡에 많은 전력을 쏟아 부운 상태이므로, 이하민이 고심 끝에 삼조곡을 지목하여 그 중 한 곳에 덫을 쳐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기 보이는 연기는 이하민의 지시로 피운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 이면(裏面)에 치밀한 심리적 모략(謀略)이 깔려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참모의 생각엔 어디를 택해야 할 것 같소?"
유원학의 물음에 허운은 즉각 대답했다.
"지도에 표시된 바에 의하면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의 지형은 녹지대가 덜하여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또한 넓고 황량하여 기습하는 자들이 지형적으로 이용할 이점도 매우 적습니다. 즉 매복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아! 그럼 이하민이 일부러 저 곳에 연기를 피워 우리들이 매복이 가능한 길목으로 움직이게 하려 한단 말이군요"
"그런데...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허운의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대답에 유원학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무슨 답이 그러오? 그러니까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이오?"
사실 허운도 장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매복이 불가능한 지형에 연기를 피워놓음으로 해서 매복이 수월한 길목으로 유인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계략을 간파하게 만들어서 연기가 오르는 길목으로 오게 하려는 것이 진심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허운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이하민의 성향을 분석했다.
늘 치밀하고 상대가 알지 못하도록 복합적이고 난해(難解)한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즐기는 자(者).
"그렇다면 어쩌면...."
허운은 이하민이 선택에 기로에 서 있는 자신이 그의 성품까지 되짚어 볼 것을 염두에 두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교는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들 뿐이다...단순하게 바라보자...)
지형적으로 봤을 때, 연기가 오르는 쪽은 매복에 적합하지가 않았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현실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허운은 결단을 내렸다.
"연기가 오르는 길로 가십시다!"
"음....그렇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소이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길로 향합니다!!"
방향이 정해지자 그들은 곧장 그 길로 움직였다.
그런데 달리는 와중에 위현룡의 눈빛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익숙한 지형이었다.
그랬다.
이 지형은 바로 협철곡에서 몸을 쉬고 있을 당시 보게 되었던 예시(豫示)중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위현룡은 똑똑히 기억해냈다.
황량한 지면아래 번뜩이는 무엇인가를....그리고 살기(殺氣)를...
식은땀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잠깐 멈춰들 보십시오!!"
사검귀천의 등에 업혀있던 위현룡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싶은 유원학이 앞장서다 말고 되돌아왔다.
"이 길목으로 가면 매복군에 걸려 큰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매복이라니요?"
유원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고 있자 홍후인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모든 사람이 신법을 멈춰 세우고 위현룡만을 쳐다보았다.
순간 위현룡은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고심했다.
예시(豫示)를 입에 올리는 순간 독(毒)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잠시 머뭇거린 그는 결심한 듯 얼마 전 보게 되었던 환영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그의 말을 들은 군중들은 예상대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중요한 시기에 위현룡의 허무맹랑한 말을 신용하여 무사들의 목숨을 저울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대협의 걱정은 잘 알겠소만...허운 참모도 이 쪽이 좋겠다고 하였으니 그냥 이대로 가는 것이 좋겠소."
이젠 중요한 존재가 된 위현룡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유원학이 조용히 설득하고 있었다.
"저를 한번만 믿어 주십시오! 결코 허풍이 아닙니다."
위현룡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떠나려는 그들의 앞길을 막고 호소했다.
난감한 기색이 모든 이들에게 스쳐갔다.
그때 돌연 허운이 물었다.
"위대협! 지면(地面)아래서 무엇인가를 보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위현룡은 지체하지 않고 즉각 대답하였다.
"음...."
허운은 다시 한번 깊은 생각에 잠기며 갈등을 거듭했다.
이제 결정은 참모인 허운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가 어떤 판단을 하든지 모든 사람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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