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화룡점정(畵龍點睛) <18>
"조만간 적들이 당도할 것이다! 모두 공격태세를 갖춰라!!"
어디선가 이런 음성이 들렸다.
주위에는 어두운 연기가 짙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를 방패삼아 대략 200 여명으로 보이는 무사들이 바닥에 바짝 수그린 채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 놈들....걸려들기만 해봐라...모조리 몰살 시켜주마!"
이렇게 중얼거리는 백의인의 입가에는 음산한 미소가 서려있었다.
백의인의 이름은 요각(饒覺)이라고 했다.
마교에서 제법 한가닥하는 인물인데 지금은 금월단이라는 무사단을 책임지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40대 중반으로, 눈빛이 날카롭고 매서운 인상에 튀어나온 광대뼈는 이 사람의 성정이 꽤나 괴팍스러울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게 만들었다.
지금 요각은 눈앞에 퍼져있는 뿌연 연기를 꿰뚫고 대략 30장(대략 90m) 떨어져 있는 맨 땅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곳을 바라보는 요각의 얼굴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적들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삼조곡에서 기다린 지 여러 날이었다.
그는 참모 이하민의 명에 따라 길목 양측 가장자리에 참호를 파고, 그 속에 금월단 무사 백 여명을 매복시켰다.
그리고 그 위로는 넝쿨이나 나뭇가지 등 위장시킬 수 있는 것들을 덮어놓았으므로 겉으로 보아서는 영락없이 거친 땅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아무 것도 모르는 적들이 길 한가운데로 지나가면, 불시에 참호에서 튀어나와 적들의 퇴로를 봉쇄하고, 연기 속에 숨어있던 이백여 명의 무사들로 기습공격을 펼치는 일뿐이다.
이는 마지막까지 단 한 명도 도망치게 놔두지 않겠다는 이하민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전략이었다.
요각은 금월단의 500여 무사들 중 300여명만 이끌고 왔다.
원래 금월단은 협철곡 전투에서 제외되어 있었는데 이하민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긴급히 개입시킨 무사단이었다.
평소 이하민의 꼼꼼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요각인지라, 막상 명을 받아 매복은 시켜놓았지만 솔직히 마교 잔당이 삼조곡까지 도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이하민의 예언대로 적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쪽 길로 몰려오고 있었다.
(과연...참모로다! 좋다! 이렇게 된 바엔 나도 전공(戰功)을 좀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흐뭇한 생각이 요각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돌아온 척후무사의 보고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오던 적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요각은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전신(全身)을 휘청거렸다.
"한번 잡은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기껏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더니 도로(徒勞)아미타불(阿彌陀佛)이 되어 버렸다.
백 여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숨길 참호를 파기 위해 자신도 몸 사리지 않고 무사들과 같이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손바닥이 얼얼하고 삭신이 다 쑤실 지경이었다.
"젠장....이러려고 미친 듯이 삽질만 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열 받은 요각이 투덜대고 있는데 수하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도대체 협철곡에서 무슨 사단이 났기에 저들이 삼조곡까지 도달했단 말인가! 어쩔 수 없다! 너는 몇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마교인들을 뒤쫓아라. 발각되지 않게 멀리서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최종 목적지가 어디 인지만 따라가면서 계속 보고하라!! 그 동안 나는 무사들을 정비해서 곧바로 뒤쫓아 갈 것이다!"
명을 받은 수하가 십 여명의 무사들을 끌고 급히 떠나자 요각은 다른 수하에게 연달아 명을 내렸다.
"너는 내가 마교를 추격할 동안 참모에게 달려가서 어찌 된 영문인지 소상히 알아보고 별도의 명을 하달하시거든 받아오너라!"
"알겠습니다!!"
요각은 긴급히 금월단 무사들 중 경공에 일가견이 있는 날랜 자들만 100여명 차출하였다.
원래는 300여명을 모조리 이끌고 가야했으나 참호 속에 있는 무사들까지 정비하여 떠나려면 시간이 너무 걸렸다.
그렇기에 믿을 만한 부장으로 하여금 전열을 정비하여 남은 이백여 명을 이끌고 오게 하고는 자신은 100여명만 이끌고 우선적으로 마교 잔당의 뒤를 쫓기 위해 출발했다.
** **
한편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인해 협철곡 출구를 막고 있던 불길이 약해지자 이하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서 추격을 개시하라!!!"
궁벽과 화무룡의 무사들이 앞장서 출발하고 그 뒤를 이하민의 가마가 뒤따랐다.
(어차피 북마천군이 막고 있는 이상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확신이 요동치는 이하민의 불안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북마천군과 마교간에 치열한 교전(交戰)이 벌어진 곳에 도착한 이하민은 경악을 금지 못했다.
사방은 온통 피바다였고, 두 눈이 가는데 마다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때 저쪽에서 몇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누군가에게 업혀서 오는 자가 보였고, 그 뒤로 세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바로 부상당한 고득련과 철혈삼마였다.
"어떻게 된 것이오?"
이하민이 깜짝 놀라며 묻자 고득련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적들에게 당했습니다."
"당하다니요? 어떻게 대천마교 정예 무사군인 북마천군이 지쳐있는 마교 잔당에게 당할 수가 있단 말이오! 더군다나 지금 고대협은 적에게 부상까지 입은 것이오? "
고득련은 이하민의 닦달에 얼굴이 벌개졌다.
어찌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듣도 보도 못한 무명인(無名人)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득련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뒤에 있던 철혈삼마 중 철혈귀가 대신 입을 열었다.
"참모!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뭐란 말입니까?"
"저...적무평이 나타났습니다."
순간 이하민을 비롯하여 뒤에 도열해있던 대천마교 수장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름 석자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뭐가 말이오? 적무평이라니? 아니!! 뭐라고!! 적무평!!!!!!"
소스라치게 놀란 이하민이 비명을 지르자마자 주위에 있던 군중들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적무평 대협이 나타났다니!!!"
"그럼 이젠 우리 어찌 되는 거지?"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이 곳을 벗어나야지!"
대천마교 무사들이 이런 저런 걱정을 토로하는 동안 궁벽을 비롯하여 화무룡, 냉언령 같은 쟁쟁한 수장들도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상대라면 몰라도 적무평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적무평! 그 자가 아직까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었단 말인가!!"
한동안 멍하니 있던 이하민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 계략을 행한 가장 큰 이유는 대천마교의 손실을 최소화시키면서 마교를 일망타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북마천군과 마교의 전면전으로 인해 이런 큰 손실이 발생했다면 이미 협철곡에서의 계략은 실패작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적무평까지 마교측에 가담하다니...
이건 작은 불씨하나 꺼트리려다가 큰 불을 낸 격이었다.
"그럼 고대협을 물리친 자가 적무평이란 말이오?
이하민이 묻자 철혈귀는 고개를 돌려 고득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고득련이 누구에게 부상당했는지 생각 못한 채 있었다.
적무평은 삼조곡 근방에 있었으므로 아닐 것이고...그렇다면 천하고수 고득련을 격파한 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고득련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름은 모르고...마교측에서 내세운 고수인데...실력이 보통이 넘었습니다..."
"마교측이 내세운 고수라고요? 그래봐야 마교측 고수는 뻔하지 않소이까? 고대협이 모르는 고수가 누가 있단 말이오?"
그때 곁에 있던 하후산이 갑자기 생각난 듯 어떤 한 사람의 인상착의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다 듣고 난 고득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 자요!"
"하후대협! 누구요? 그 자가?"
이하민이 궁금하여 재촉하자 하후산이 침중(沈重)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개방 장로 위현룡입니다.
"개방 장로 위현룡이라면....몸담았던 개방을 배신하고 마교측에 가담한 그 자를 말하는 것이오? 그런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하찮은 작자가 어떻게 고대협을 이긴단 말이오?"
위현룡의 정체가 파악되자 고득련은 창피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내심 무림에 은거하는 대단한 고수이기를 바랬는데 겨우 개방 장로 중 한 명이라니...
만약 이 사실이 대천마교에, 아니 무림 전역에 알려진다면 두고두고 망신살이 뻗칠 노릇이었다.
"허나 그 위현룡이라는 사람의 무학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무학이 아닙니다.
고대협께서 당하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절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음...이거야 원...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者)가 내 계략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군. 거기다가 적무평까지 나서다니..."
꽤나 골치가 아파진 이하민은 특유의 신경질적인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저만치에서 두 명의 무사들이 전력으로 달려오더니 앞에서 고개를 수그렸다.
"요각대협께서 지금 마교를 뒤쫓고 계십니다."
"무슨 소리냐!! 뒤쫓다니!! 삼조곡에서 매복기습을 하라 명하지 않았느냐!!!"
"저...그게...매복은 했습니다만....적들이 다른 길로 가는 바람에...."
"뭐라!!"
이거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허운의 심리를 계산해서 분명 연기를 피워놓은 길목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다른 길로 샌단 말인가.
협철곡 출구에서부터 어긋난 계략은 가면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하민은 북받치는 울화통을 억지로 짓누르며 물었다.
"그럼 지금 요각대협은 어디로 가신 것이냐?"
"정확한 위치는 요각대협께서 기별을 하셔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각이 통보를 해올 때까지 전력을 대기시키고 기다리는 수밖에.
허나 이하민은 이미 자포자기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삼조곡을 벗어났다면 뒤늦게 추격한다 하더라도 이미 글러버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맥이 빠져버린 이하민은 힘없이 가마에 올라탔다.
"일단 삼조곡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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