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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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내기
작품등록일 :
2016.03.1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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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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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20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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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DUMMY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녀는 자신이 밤 시중을 든 마인의 힘으로 일부분의 자유를 얻었다.

그래봤자 그 마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공간과 하인 몇을 얻고,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그 때가 그녀의 악명이 쌓이기 시작할 때였다. 그녀는 마교에서 위험한 인무를 떠맡았다. 그녀의 미모가 물이 올랐기에 주로 남자를 홀리는 일이었다. 자신이 늙은 마인에게 해왔던 밤 기술 그대로 상대를 이용하고 파멸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악행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돌렸다. 그 대부분이 마교의 방침이기도 했고, 그럴수록 마교에서의 지위가 높아져 갔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복수 이후의 삶은 의미가 없다 생각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루는 천화가 간신히 도성 밖으로 나갈 여유를 얻었을 때였다.

부분적인 자유를 얻었다 해도 그 외출은 늙은 마인을 온종일 시중든 후에야 주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혐오감을 농축시켜가는 미약은 너무 자주 먹어서 중독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도 약기운에 조금 취해있었다.

“예, 노니모야.”

“예, 마님.”

금발머리 아이가 대답했다. 마교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이한 창조 종교를 몰래 믿고 있는, 그리고 천화가 가장 불신하는 시종이자 감시자였다.

“이 저택이.......맞겠지?”

“맞습니다. 마님.”

벌써 다섯 번 째. 올 때마다 확인하는 집이었다.

“너는 잠시 여기서 기다리거라.”

“예.”

천화는 은신술로 빠르게 집에 침입했다. 그 집이 태공가의 장원, 그녀가 이를 갈던 저택이었다. 아직 혼자서 태공가의 모든 일원을 상대하기는 부족했으나 때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공가의 문주 공소아는 예천가를 멸문시킨 후에도 야심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은밀하게 정파의 세력을 잠식하고 있다는 정보가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거기까지라면 좋았겠지만 욕심이 지나쳐 마교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 문제였다. 천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장 적극적으로 태공가의 정보를 내주고 태공가를 멸문시키자 청한 것이 천화였다.

마교도 천화의 의도를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도 예전부터 태공가의 야심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이제 곧.......’

안락하게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천화는 지붕에서, 으슥한 모퉁이에서 그들을 엿보았다. 그리고 집안에 조심스럽게 침입했다.

“거기 누구시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밑을 보니 소년이 있었다. 완벽한 은신이었고, 조금의 살기도 내뿜지 않았기에 그녀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지붕에 계신 분, 누구요?”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녀는 갈팡질팡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태공가의 적손인, 공랑이었다. 태공가의 문주 공소아가 금지옥엽으로 기른다는 아들. 그녀도 몇 번 그의 얼굴을 보았었다.

“내려오시오. 이쪽은 검도 없고 달리 다른 암기도 없소. 곱게 돌려보내줄 테니 걱정 마시오.”

주위를 보니 그 넓은 방에 그 공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공랑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없이 많은 거짓과 위선을 보아온 천화의 감각이 공랑의 말에 한 점 거짓도 없다고 일러주고 있었다. 오히려 기이할 만큼 공랑은 느긋했다. 기회를 보아선 그를 해치우고 달아날 수도 있는, 유리한 쪽은 천화였지만 그녀는 공랑의 말에 끌리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녀는 공랑의 앞에 내려오고 말았다.

몇 년 만에 처음 보인 실수였다. 공랑은 복면으로 몸을 감춘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자객이오? 우리 가문이라면 원한 살 인물도 없을 텐데.......귀한 재보를 노리러 온 것이겠군.”

천화는 기가 찼다. 이 도련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태공가가 얼마나 위험한 가문인지조차. 그렇게 말하는 공랑의 눈은 지나치리만큼 순수해 보였고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하나도 겪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위험했소. 이곳은 그대에게 위험한 실력자들이 많소이다. 재보들이라면 조금 내어줄 터이니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시오.......”

그 때였다.

“도련님! 준비하라 하신 물감과 먹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인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인의 손에는 붓질하는 도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 수고했다. 이만 물러 가거라.”

“헌데 이분은.......누구십니까?”

하인의 눈에 경계하는 눈초리가 역력했다. 천화는 바짝 긴장했지만 공랑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요전에 은혜를 입은 무인이시다. 내가 찾아뵙고 싶었는데 워낙 신출귀몰한 분이시라 초대만 하는 것이 고작이었지.”

“앗? 그러십니까? 그럼 지금 당장 다과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아서라. 이번에도 중책이 있으신데 아주 잠깐의 시간을 내서 찾아오셨다고 하셨다. 잠깐이면 되니 이 방에 사람을 들이지 말라 해라.”

“아, 알겠습니다!”

하인이 붓질도구를 놓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 공랑이 겸연쩍은 미소로 말했다.

“일전에 새로 들어온 아이인데 아주 착실합니다.”

“.......”

“그건 그렇고, 날도 더운데 복면은 벗으시는 게 어떻겠소? 손님 대접을 하고 싶은데.......”

공랑의 손이 천화의 얼굴로 다가오자 천화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

“.......뭐 경우가 경우이니만큼 안 벗으셔도.......”

오히려 그가 더 무안해하는 것 같았다. 천화는 아연한 기분을 느끼며 스스로 복면을 벗었다.

복면 아래로 은은한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드러나자 공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찌.......이런 소저가.......”

그건 공랑이 자신을 정말 모를지 시험을 해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반응을 보니 공랑은 그녀가 여자라는 것과 그녀의 미색에 놀랐을 뿐 그녀가 그에게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여진이라 하옵니다.”

그녀는 시종이 일러준 가명을 댔다. 그러자 공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태공가의 공랑이오. 소저.”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공랑의 모습은 그녀가 보아온 남자들과 무척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부터 자객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지만 지금 공랑은 아름다운 여체 앞에 걸려든 소년에 불과해 보였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저가 어찌 천장에 있음을 아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살며시 웃으며 말하자 공랑은 정신을 차린 듯 했다.

“요 전부터 느끼고 있는 감각이 있소. 살기와는 또 다른.......”

그 말을 듣자 그녀의 마음이 예민해졌다.

“아직 아버지께도 말하지 않은 것이지만 사람들의 의중이라고나 할까. 그 어떤 혼탁한 것이 느껴지오. 그저 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검술을 익힐수록 그것이 더 잘 느껴지게 되오.......머리 위에서 그런 것이 느껴지니 의아했지.”

그녀는 그의 인물됨을 재평가했다. 그 자신조차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공랑은 정말로 그녀의 살의를 느낀 것이다. 그건 그녀의 아버지 유천명조차 부러워했던 엄청난 재능이었다. 무술의 힘과는 또 다른 무형의 경지. 그것은 오히려 무공 수행을 방해할 때가 많았지만 갈고 닦을수록 예리해져 만물의 기운을 읽을 수도 있게 된다고 했다.

그건 그만큼 저 공자가 초유의 감각을 가졌다는 뜻도 되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녀는 애써 공랑에게서 시선을 돌리려했다. 전날의 약기운 때문이었을까, 공랑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것들이 자꾸 떠올랐다. 공소아와 너무 닮아, 얼굴을 볼수록 화가 나기도 했고 그 당찬 태도를 생각하면 살며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아, 이건 취미삼아 그리는 것이오. 한 번 보겠소?”

공랑이 천화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례하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행태였지만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의 손은 무척 뜨거웠다.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공랑의 그림솜씨는 굉장했다. 주로 풍경화와 인물화였는데, 그의 그림은 자신의 것을 담아낸다기보다는 그려지는 사물을 완벽하게 담아냈다. 오히려 원래의 사람이나 풍경보다 그 특징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의 그림이었다. 천화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림을 보고 있자니 공랑이 넌지시 말했다.

“요즘 손님들께 그림 하나 선물해주는 것이 버릇이오.”

그렇게 말하는 공랑이 꺼낸 것은 작은 그림이었다. 공랑이 그것을 펼치자 멋스럽게 그려진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릇 그림에는 제 짝이 있다고 생각하오. 소저에게는 이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떻소?”

건성으로 그 그림을 살펴보던 그녀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건 단순한 폭포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들이했던 폭포. 자주 멱을 감기도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이, 이것. 어디서 그리셨습니까?”

천화의 목소리가 다급해지자 공랑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퍽 인상 깊게 남았던 폭포였소. 너무 웅장하지도 않고, 소담한 멋이 있는.......그래서 그려 보았는데 이상하게 그 그림은 소저를 주고 싶어졌소. 그림이 소저를 부르는 것 같달까. 가끔 그림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어서.”

마교의 눈치를 보면서 간신히 시간을 내어 찾아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울음이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았다.

“마음에 드시오?”

“정말 절 주시는 겁니까.”

“방금 말했잖소.”

천화는 그 그림을 조심스럽게 싸서 품에 안았다. 좀처럼 느끼지 못하던 행복감이 찾아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태공가에 대한 원망도 커져갔다.

“소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벌써 가시오? 좋은 재화가 있는데.......”

“소저가 무엇이라고 이런 친절을 베푸십니까.”

원망조가 담긴, 간신히 눈물을 참는 듯한 쏘아붙이는 말이어서 공랑은 당황했다.

“내 집에 찾아온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의도는 아니지만, 소저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소.”

“고작 그것뿐입니까.”

천화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말했다.

“한 가지.......소저가 어떤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다면, 그것을 풀어버렸으면 좋겠소. 그것이 혼란스러운 정세이든, 가혹한 세상의 탓이든.......잊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소.”

“사람의 마음은 그리 쉽게 단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미안하오.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천화는 순간 화가 났다.

“그토록 사람을 믿으십니까. 제가 불쌍한 소녀처럼 보이셨습니까? 느낌? 공자님은 그것 때문에 분명 크게 후회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계집인지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조금이라도 알면 죽어도 저를 믿지 않으실 겁니다. 공자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소저는 무엇을 알고 있소?”

천화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렇게 폭발한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친절히 대해주신 것,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 그림도.”

천화는 비술을 사용해 순식간에 저택을 빠져 나왔다. 발각당할 위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토록 서두른 것은 그 공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 탓이었다. 몇 년을 갈고 닦은 증오가 공랑을 생각하니 일순간 무뎌졌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심지어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천화는 마교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밀명의 요지는, 태공가의 멸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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