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진실
작은 진실
스케이븐의 전투 철학에 후퇴는 없어 보였다.
특히 상대가 인간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지금 상대하는 인간은 지금까지 듣고 경험했던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버거운 신기한 움직임.
맨몸으로도 막아 낼 수 있었던 기억 속의 인간 무기가 아니었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목이 계속 떨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임을 자각하는 순간 의식이 끊어져 버린다.
동료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바닥에 뒹구는 머리통은 날리는 눈발 때문에 더 처연하게 보였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상대의 손속이 너무나 빨라 비명을 튀어나오기도 전에 목이 잘려 버리니까.
테츠는 검을 거두어들였다. 물꼬를 터주었으니, 엘빈과 제자들이 역량을 발휘할 때다.
남은 스켈레톤의 수는 만만치 않다. 엘빈과 제자들 단 열 명으로 수백 마리의 스케이븐을 상대해야 한다.
살벌하고 긴장감이 극대화된 근접전 잠깐의 실수는 치명타가 된다. 날아오는 데스 드릴은 죽음을 초월하여 덤벼드는 막무가내 공격이다.
우렁찬 고함. 초반 기세는 엘빈 측이 가져갔으나 곧 머릿수에 밀리기 시작했다.
테츠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뛰어든 사지였다. 전투에 몸을 던진 것도 본인 스스로 결심이니 만족할 만한 성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
무공에 집중하고 상대를 잊는 순간 무아지경에 빠진다. 믿는 것은 오직 본인의 무공. 사심과 잡념을 털어 버리면 비로소 무공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다.
눈앞에 상대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러뜨리느냐만 생각한다.
적의 숫자 따위도 의미 없다. 아무리 많아도 직접 자신을 에워싸고 사거리 내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은 많아야 여섯 마리다.
시체가 쌓이면 이동해서 싸우고 또 시체를 쌓고 가장 가까운 적을 베어 넘긴다.
일행의 가장 큰 문제는 적절한 내공의 안배다. 극한의 긴장감 속에 끌어올린 내공은 팽팽한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것과 같이 소모된다.
상대의 강단에 맞춰 적절한 내공의 안배가 있어야 긴 싸움을 이끌어 갈 수 있고 버틸 수 있다.
작은 상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큰 상처를 입더라도 당장 고쳐줄 테츠가 뒤에 버티고 있다.
그런 작은 걱정거리 그 잡념을 털어야 한다. 그 순간 물아일체의 경지로 들어선다. 호흡과 내공이 일체감을 느끼면 무공은 알아서 펼쳐진다.
"네가 넥슨이지. 저놈은 바이슨이고 반사르가의 늙은 도둑고양이구먼."
바이슨은 자기 허리에 꽂힌 롱소드를 뽑는 자세로 굳어있었다. 상대가 무슨 술수를 쓴 것인지 모르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떨어진 동료의 죽음은 공포가 지워 버렸다. 저 가차 없는 손길에 즉시 모가지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아, 말은 해야지."
테츠는 손가락을 튕겨 바이슨과 넥센의 아혈을 풀었다.
"주둥이 풀었으니까 말해도 돼."
"바이슨! 마교 놈들이다. 나약한 짓은 하지 마라."
테츠는 넥센의 뒤에 있던 네크로맨서 세 명을 끌어냈다.
"원래 늙은 생강이 더 맵다고 했는가? 마교인 걸 다 알아보고. 여기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
테츠는 끌려 나온 한 네크로맨서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하냐고 묻고 있잖아."
"···."
넥센은 입을 다물었다. 말할 의지도 이유도 없다는 의사.
테츠는 소울 슬립을 끌어 올렸다.
-펑
사람의 머리통이 이렇게 폭발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박살이 났다.
터진 뇌수가 바이슨의 얼굴에도 넥센의 얼굴에도 다 튀었다.
하지만 테츠의 옷깃에는 단 한방을 피도 묻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머리통이 터지는 순간 저 멀리 스케이븐의 무리 뒤쪽에서 튀어나왔다.
테츠는 성력으로 스케이븐 수십 마리를 휘감아 올리더니 다시 바이슨의 뒤쪽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바이슨도 넥센도 나머지 네크로맨서도 가공할 움직임을 보이는 테츠의 신기에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얼어붙었다.
"놈이 소울 슬립을 사용할 줄 안다. 죽을 각오를 다져라."
넥센의 절규는 절망을 담고 있었다. 괴물 인간 단 열 명이 거의 천 마리에 육박하는 스케이븐을 학살해 대고 있었다.
테츠는 바이슨 앞으로 스케이븐 한 마리를 내리고 성력의 끈을 죄었다. 바이슨의 눈앞으로 스케이븐의 몸뚱이가 반으로 잘린 체 툭 떨어져 내렸다.
쏟아지는 내장이 질펀하게 바닥으로 펼쳐졌다.
"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말해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냐고."
"그분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신의를 잊지 마라."
넥센은 악을 쓰며 고함쳤다.
테츠는 넥센의 머리 바로 위에서 스케이븐 한 마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내장이 넥센의 머리 위로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릿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넥센을 흔들리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테츠는 분위기를 한 컷 올렸다. 각자의 머리 위에서 스케이븐을 산채로 찢어 버렸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핏물이 온몸으로 쏟아지자,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매달고 있던 스케이븐이 모두 죽었다.
"엇, 다 썼네. 그럼, 너부터 가자."
테츠는 성력으로 네크로맨서 한 명을 휘감아 들어 올렸다.
"으악! 살려줘, 살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아, 정말 그러니까! 왜 그걸 잊고 있는 거냐고! 살고 싶으면 질문에 답한다. 그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를까 정말."
"끄아아악."
테츠는 자신이 어느 정도 잔인한지 모두의 뇌리에 깊숙이 박힐 정도로 강단 있게 행동했다.
성력으로 네크로맨서의 양다릴 잡고 반대 방향으로 찢듯이 당긴 것이다.
"비명 지를 시간에 질문에 답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으악···푸···푸레···플레시···헉···앤···본···."
"뭐라고 잘 안 들리네. 넌 탈락."
"우에에에악!!! 크아아악"
-쭈룩, 빠각
살과 뼈가 뜯기고 부러지는 지독한 소리와 함께 네크로맨서는 반으로 찢어져 허공으로 자기 내장을 흩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참한 광경에 바이슨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라니까 참 애들이 뭔 생각인지. 아무리 충성, 충성 그래도 자신이 뒈져 버리면 뭔 의미야? 그지? 일단 살고 봐야지."
테츠는 또 한명의 네크로맨서를 감아올렸다.
"말하겠습니다. 뭐든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숨김 없이 말하겠습니다."
"닥쳐라! 먼저 간 동료에 부끄럽지 않으냐?"
넥센이 고함쳤다.
"자,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은 말하면 넌 자유다. 여기서 놔 주겠다는 말이다."
"정말입니까?"
테츠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 순간 놈을 찢어 버렸다.
"크아아아악! 왜! 우아아악 어···엄마···. 으악."
처참하게 찢겨 나가자, 바이슨과 나머지 한 명 남은 네크로맨서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분명 살려 주겠다고 했는데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다시 한 명의 네크로맨서를 감아올렸다.
"이곳은 야전 8캠프입니다. 저희 목적은 인형의 괴물을 만드는 플레시 앤 본의 스킬을 완성 시키는 것입니다."
"저 조잡한 괴물을 만드는 스킬이 플레시 앤 본이라고 한다? 그건 어디서 나온 기술이니? 누가 가르쳐 주었고?"
"저기 제 스승인 넥센이 몰레이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몰레이그는 그 기술을 사자의 성에서···."
"노이덱 닥쳐! 죽음의 고통은 잠시다. 순간의 고통은 잠깐이다."
"살고 싶으면 저 늙으신네 말 들을 필요 없어. 저 노인은 곧 죽을 것이고 난 네게 살길을 열어 주고 있는 거야. 자 사자의 성은 무엇일까?"
"사, 사자의 성은 몰레이그가 찾아낸 네크로맨서의 본질이 담겨 있는 곳으로 네크로맨서의 원천이 있는 곳입니다." "사자의 성은 어디에 있어?"
"저는 모릅니다. 그곳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철저한 보안을 유지···. 으악!!!"
-촤아아악
바로 찢어 버렸다.
"잔악한 놈."
넥센은 이를 뿌득 갈았다.
"난 살길을 열어 준건데 지가 못 주워 먹은 걸 내 탓으로 돌리면 안 되지."
테츠는 천천히 바이슨 쪽으로 걸어갔다.
"우아악, 오지 마. 오지 마."
바이슨은 미친 듯이 악을 썼다. 결국 그는 지독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바지에 시원하게 오줌을 싸 갈겼다.
"자. 기회의 시간이 너에게 왔다. 살고 싶으면 알고 있는 거 전부 말하자."
바이슨은 대구도 하지 못했다. 혼이 완전히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소울 슬립 디스펠 포션을 마셔도 각성자기 때문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거야. 저번에도 해 봤거든 자 넌 얼마나 버틸까?"
-턱
테츠가 바이슨의 머리에 손을 올리자 그냥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말만 말만 하십쇼. 뭐든 말하겠습니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자일수록 목숨에 집착이 강하다. 바이슨은 이 틈에도 자신이 반사르가를 배신해도 각성자로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덧없는 죽음의 공포보다는 배신의 꿀이 갑절은 달았다.
"그래, 그거지. 야. 네 목소리에 진심이 딱 담겨 있네."
테츠는 바이슨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자 움직여 봐. 어때 괜찮지?"
"네."
"저기 수풀 보이지 저쪽으로 달려가면 넌 자유야."
"부탁드립니다. 거짓 없이 말하겠습니다."
"바이슨!"
"저 영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까짓 거."
바이슨은 가슴의 휘장을 단번에 찢어 버렸다.
하필 반사르가의 문장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그는 찢은 휘장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발로 문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살아 나가야 한다는 신념뿐이었다.
"너 어디 출신이지?"
"아칸 반사르가에서 근무 중 특채로 뽑혀 다른 세상에 있는 성으로 전출 받았습니다. 그 성은 골드워스홀이라고 부릅니다. 그곳에는 오만 정도 되는 병력이 모여 있으며 정예 일만을 제외하고는 각성자 포션에 혹한 뜨내기들로 구성됐습니다. 정예 일만이 그들에게 충성심을 심고 반사르가의 개로서 훈련 시켰습니다."
"골드워스홀의 최고 책임자는 누구지?"
"아이단 골드원 기사단장으로 케이사르 최측근입니다."
테츠는 약간 실망했다.
"혹시 케이사르나 베레트 후작이 어디 있는지 관련 정보 있어?"
순간 바이슨의 얼굴이 폭발 직전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긴장하지 말고 심호흡해 심호흡. 모르면 모르는 거지. 거짓말만 안 하면 네가 승자가 될 수 있어."
그 말에 바이슨은 크게 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 정보를 아는 놈이 이런 외진 곳에서 네크로맨서나 상대하고 있지는 않겠지.
"플레시 앤 본? 사자의 성? 네가 아는 정보는 다 불어 봐. 곧 저기로 뛰어갈 수 있어."
바이슨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숨김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는 걸 보여드렸으니···. 저도 들은 정보라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이 떠돌고 있는 이야기라서 얼추 맞을 겁니다. 몰레이그는 금서를 해독했고 그 정보에 따라 고대 말라키인 네크로맨서가 숨겨 놓은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네크로맨서의 모든 것이 남겨져 있는 사자의 성이란 곳인데 막대한 지식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지식을 발굴한 몰레이그는 네크로맨서를 급성으로 양성 시작했고 제국 곳곳에 숨어 있던 네크로맨서를 찾아내 규합했습니다."
테츠가 궁금해했던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한 정보였다.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몰레이그가 금서에도 없는 지식을 풀고 다니는지.
생각보다 해답은 간단했다.
금서의 마지막 쪽을 해독했고 비밀을 어느 정도 푼 몰레이그는 마지막 네크로맨서가 남긴 유적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습득한 지식으로 새로운 네크로맨서 군단을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오비디언스 샤우트를 방어하는 루시드 엘릭서를 만든 것도 광전사 포션인 페이탈 리퀴드를 만든 지식도 다 사자의 성에서 나온 것이다.
자이언트 스켈레톤은 금서에도 없는 스킬이었다. 이제야 그 원류를 찾았다.
바이슨은 사자의 성 위치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대신 골드워스홀에 대한 정보는 꽤 많이 알아낼 수 있었다.
대략 6만에서 7만 정도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고 모두 각성자다. 그들은 스케이븐의 분란을 틈타 단번에 아칸 왕국을 점거 윌리엄 대공을 폐위시키고 솔라리스에서 팬텀 가드너 가문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데 있다.
스케이븐의 전쟁은 국지전이다. 대규모 병력이 한 지역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닌 전 국토를 대상으로 아주 넓게 대단위 지역으로 점점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대부분 소규모 전투다 보니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잔버크 지대는 치열한 충돌로 연일 많은 수의 사상자가 나오는 중이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5군단의 병력이 빠지면 단숨에 왕궁을 전복할 계획이다.
생각보다 솔라리스 전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바이슨의 입에서 전혀 예상외 뜻밖의 정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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